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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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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두 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새다.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 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 병과 인원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1. 개요2. 역사3. 역사상 기병의 장점 및 단점
3.1. 장점3.2. 단점
4. 유명한 기병대5.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혹은 기병 출신인 유명 인물들6. 여담7. 미디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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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기병4.jpg
설리번 윌리엄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 육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1]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군기를 빼앗고 있다.
언어별 명칭
한국어 기병
마병[2]
말탄이[3]
한문 [4]
영어 Caval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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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탄 병사, 군인, 무사를 뜻한다. 또 군대에서 기병으로 이루어진 병종을 뜻하는 단어이며 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기병대, 기마대라고 한다. 기마병이라고도 하지만 '기'자가 말을 탄다는 뜻이므로 겹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기동성과 강력한 위력으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상대적으로 무장이 가볍고 빠른 경기병과 중무장한 중기병으로 구분할 때가 많은데, 경기병과 중기병 사이의 구분이 엄밀하지는 않은 편이다. 화약 무기들의 위력이 충분치 않고 냉병기가 효과적이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의장대기마경찰, 혹은 티베트 고원 같은 특수한 지역 등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으나, 이들의 역할은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등장한 기갑 병과와 육군 항공대, 일부 수색대가 인계받아서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여러 기갑부대나 육군 항공대는 과거의 기병 병과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타는 것이 말에서 기갑차량이나 항공기가 되었을 뿐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기마보병의 경우에도 군대에서는 기계화보병차량화보병이, 경찰에서는 싸이카가 그 역할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말을 타더라도 이동을 위해서만 말을 사용하는 보병 병과 장교,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 병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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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상 기병의 장점 및 단점

3.1. 장점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나는 기병들이 보병 대열의 중앙에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창을 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보병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전선 곳곳에서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다. 한 부대는 우익, 다른 부대는 좌익,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중앙으로 돌격해 나갔다. 우리 군사들은 그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앙에 있었는데,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사단인 좌익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좌익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우익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좌익과 중앙보다 더 비참하게 도주한 것을 보았다.
바하 앗딘,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7]
왜적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기병의 전성기였던 전근대시기, 기병은 아래와 같은 강점으로 인해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졌다. 크게 분류하자면 하나는 충격력,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

이렇듯 기병은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갖기에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핵심전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통 농경왕조처럼 기병전력이 부족한 경우에나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망치 역할로는 기동력과 충격력이 있는 기병을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심지어 한니발 같은 전쟁사상 최고의 명장조차 기병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인 경우에는 자마 전투처럼 패배하기도 했으며,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헝가리 독립군에게 무참히 찢겨나가 러시아 제국군의 도움을 받은 것도 헝가리 특유의 후사르 기병연대 때문이었다.

3.2. 단점

이토록 강력한 기병이지만, 많은 단점도 있다. 결국 이러한 단점들은 무기가 발달할수록 전장에서 기병의 입지가 좁아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끝내는 전장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4. 유명한 기병대

5.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혹은 기병 출신인 유명 인물들

6. 여담

기창(騎槍)이나 기보(騎步) 등의 단어들이나 기병(騎兵)과 마병(馬兵)이 서로 바꿔 쓰는 것에서 보듯, "기(騎)"라는 말은 대체로 '말'을 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별다른 설명이나 수식어 없이 기병(騎兵)이라고만 하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기마(騎馬)와 승마(乘馬)가 상통하는 것처럼, 기(騎)를 말이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타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을 태울 수 있는 동물이고 훈련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기병의 탈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

7.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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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스코틀랜드산 회색 군마로 무장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만 이들은 이 돌격 이후 프랑스 창기병대의 반격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이 전투에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을 이끌던 폰슨비 소장도 이때 전사했다.[2] 조선 후기에 많이 쓰였는데, 주로 훈련도감 소속 기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3] 순우리말이다. 다만, 실제로는 거의 "기병"을 쓴다. #우리말샘[4] 한국어와 일본어 등. 중국어에서는 간체자인 "骑"를 쓴다.[5] 전투 전에는 척후병으로서 주변 정찰 및 진격로 확보를, 전투 중에는 상대방 기병에 대한 견제와 요격, 진격해오는 적 전열 보병들에게 방진을 강요하여 아군 포병 화력 밀집도 극대화, 또 상대 포대 습격이나 빈약한 적 보병 전열에 대한 직접적 강습 및 돌파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으며 전투 후에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다. 물론 패전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병 예비대가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을 교란시킬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는 이전에 비하면 보조적이지만 여전히 기병이 다양한 상황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기병 병과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장의 상황에 맞게 많은 활약들을 할 수 있었다.[6]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조아킴 뮈라라는 뛰어난 기병지휘관이 있었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대 1만 1천 기의 돌격은 제2차 빈 포위전에서의 윙드 후사르들의 1만 8천 기의 돌격 다음가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남았다.[7]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이다. 해당 장면은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한 것.[8] 군마의 몸무게는 약 380~500kg이다. 여기에 사람 무게와 각종 보호 장구류, 말에도 씌워지는 마갑과 안장 등의 무게까지 합치면 충분히 넘고도 남았다.[9] 흔히 "지축이 울린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현대 보병 훈련 과정 중에 대인수류탄을 터뜨려 땅이 잠깐 흔들려도 병사들이 전율을 느끼는 걸 생각해 보자. 수천의 군마가 떼지어 오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땅은 보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과장되었지만 최종병기 활에서 이런 묘사를 상세히 보여주었다.[10] 요한 반 나사우가 훈련시키면서 파이크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양민이라고 모욕한 스웨덴군도 그 근방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창병대였는데 장비 면에서는 서유럽 기병에게 밀리던 윙드 후사르에게 처참하게 털렸다. 물론 기병들이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정면돌파로 이긴 기록은 희귀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도 희귀했다는 게 함정이다. 5~6m에 이르는 길고 무거운 장창을 지휘관의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다루는건 그 자체로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고 병종 특성상 주로 하는 임무가 기병돌격을 저지하는 것이므로 깡다구도 대단해야 했다. 즉 파이크병은 기병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자원과 훈련시간을 필요로 하는 정예병들이었고 때문에 필요할때마다 제깍제깍 마음놓고 펑펑 투입할 수 있는 흔한 병종이 아니었다. 초창기 고구려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위나라 장창병의 대승도 중국 기록에 의하면 보병과 기병의 합동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1] 이 중 기병 돌격으로 죽은 자는 6천 명 가량이며 나머지는 겁에 질려 도망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12]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실제 군마들은 창칼이나 화살에 한 두대 맞는다고 해서 픽픽 쓰러져 죽는 약골들이 아니었다. 예시로, 조조의 말은 화살을 여러 발 맞고 심지어 한 발은 눈에 맞았는데도 조조를 적진에서 무사히 탈출시켰다.[13] 꼭 기병이 아니라도 전장에서 지휘관들이 말을 탔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14] 현대 경마에서도 유명한 경주마들이 분쇄, 복합 골절을 당해 안락사 처분되어 관중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말의 다리가 순환계 또한 겸한다는 구조적인 약점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21세기의 발달된 의학으로 수의사 여럿을 동원해도 절대 완치를 보장하지 못하며, 치료에 성공해도 예전처럼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여 대부분 종마 등의 진로로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말 하나에 수의사 여럿을 동원하는 것은 마주가 부자거나 말이 유명해야만 베풀 수 있는 사치이다.[15] 예외적인 사례겠지만 기병이 성벽을 돌파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성벽 앞에 흙주머니를 잔뜩 던져 언덕을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거나, 말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사다리차를 만들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16]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17] 사람이라고 과연 손 안 쓰고 얼굴과 가슴팍부터 뾰족한 곳에 들이대고 싶을까 생각하면 쉽다.[18] 정확히는 총구에 삽입하는 플러그식 총검이 아닌 장착한 상태에서도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탈부착식 총검의 등장 이후[19] squadron[20] 사각형 대열을 짜면 정면 화력은 ¼로 줄어드는 셈인 데다 포탄을 피하기도 어려웠기에 자칫하면 기병을 보낼 필요도 없이 포병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이 매우 컸다.[21] How many miles per day a horse can travel depends on the gait at which it is traveling, as well as the terrain that they are covering the distance over. At a steady walking pace, a horse can travel 25 to 35 miles per day. When traveling at a trot, a horse can go about twenty miles. A cantering horse moves at about 10-17 miles per hour, which means a very fit horse can travel about seven miles; however, the more average horse will not be able to travel nearly as far. Finally, when galloping, the average horse cannot travel more than two miles before becoming fatigued.[22] 황성철,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제1·2차 공세 전역에 관한 재조명>, <<군사연구>제122호, 130쪽 링크[23] 경주마들의 경우 한번 경주를 하고 나면 10일 가량 휴식 기간을 가지고 나서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24] 한국사 인간흉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태조 이성계의 경우에도 전투마가 총 8마리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고려 말 최유력 군벌 수장이다 보니 일반 기병과 비교하기 어려운 것은 맞으며 실제로 저 8마리를 다 끌고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병이라면 예비마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는 할 수 있다.[25] 사실 보병도 이러한 특성이 있기는 하다. 한 번 시작한 전면공격을 갑자기 취소하면 왕성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자칫 한순간에 최악(아군에 무슨 큰 일이 생긴 것으로 오인→공포심이 급속도로 전염)으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수대전 항목 참조. 동서고금의 병서들이 "한 번 내려진 군령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취소하지 말 것"이라는 금언을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26] A cavalryman on average cost 87,000 cash, not including rations, while a regular soldier only 10,000 cash. The total expenditure of a 300,000 strong cavalry force would therefore have been around 2.18 times the entire government's annual revenue. 위키피디아, Chang, Chun-shu (2007), The Rise of the Chinese Empire 1,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창춘슈 교수의 원책 내용에 의하면 식량과 사료값, 의복비를 다 포함한 비용이 8.7배에 달한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은 오독으로 보인다.[27] 가령 메이지유신 때 일본은 외국으로부터 전투용 2살 망아지를 사들여 3년간의 훈련을 시켜서 기병부대에 배속한 후 1-2년의 훈련을 추가로 거쳤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훈련을 거듭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28] 개마무사를 고구려만의 고유한 병종이었다고 보는 오해가 많은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운용한 게 고구려인 건 맞지만 백제 외에도 신라, 가야등 삼한계 남방 국가들 역시 적지 않은 수의 개마무사를 운용했다. 카타프락토이 참조.[29] 별무반의 하나[30] 장용영, 총위영 소속.[31]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소속.[32] 훈련도감 소속.[33] 국왕을 호위하던 정예 기병들로, 신분보다는 무재(武才)가 더 중시되었다.[34] 마지막 기병대장으로 알려진 장철부 중령이 지휘했던 부대다.[35] '오랑캐의 복식과 마상궁술(胡服騎射)'이란 뜻의 궁기병 부대로 당시 조나라가 마상궁술을 제일 먼저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36] 무제 치세때는 30만을 넘었다.[37]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만든 친위 부대로 약 1천~3500명의 중무장 기병들로 이루어졌다#[38] 여진족, 몽골족 등 명나라 치하의 북방 유목민족 및 이들에게 동화된 한족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엄청난 약탈을 저질러서 조선에서는 순수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 위주로 파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39] 명나라 말기의 명장인 원숭환이 요동 출신 중국인들로 모집하여 훈련시킨 중무장 기병 부대로 그 수는 대략 9천 명에서 1만 명 사이였다. 후금(청)의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싸워 이길 만큼 강력한 부대였다. #[40] 민족의 이름이지만, 러시아가 이들로 구성된 경기병 부대를 양성하여 병과의 이름과 같이 쓰였다. 물론 이 이름은 괜히 쓰인 건 아니고 당연히 카자크 족이 기마에 능숙한 전투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 바로 대장 부리바다.[41] 스페인어로 '기병'이란 뜻으로 중세 스페인에서 이베리아 무어인을 막기 위해 창설된 경기병 부대이다.[42] 인도 북부의 시크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시크 왕국의 기병 부대로 사람과 말이 모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채로 긴 을 쥐고 돌격하는 창기병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르다르 부대와 맞서 싸운 영국군조차 그들을 가리켜 "세계 최고의 기병대"라고 칭송할 만큼 용맹스러운 부대였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2쪽.[43] 중세 유럽에서 독일인들은 유럽 각지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중무장을 한 기병으로 싸웠다. 아래에서 언급한 세르비아 기사단 대부분도 독일인 용병들이었고, 이들은 매우 사납고 난폭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전통적인 중기병 강국인 프랑스에서조차 16세기에 독일인 용병 기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할 정도였다. 그밖에도 16세기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페인에서도 기병들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들이었다.[44] 노르만 기사들이 워낙 다양한 곳에 진출하였고 따지고 보면 프랑스와도 봉신관계이긴 해서 마냥 잉글랜드만을 대표하는 기병대라 보긴 힘들 수 있으나 결국 이들이 최후까지 가장 네임드 메인 지배계층으로서 정착한 국가가 잉글랜드이다. 현세엔 이들의 후손들이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왕가에는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이들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자면 앵글로-노르만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은 영국 본토의 노르만계 후손들과 달리 현재까지도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45]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망디를 상실한 이후로도 계속 노르망디에 잔류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과 달리 현재까지도 나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백년전쟁 종전 이후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족과 달리 메인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46] 프랑스 헌병대의 기원으로 프랑스 왕이 지휘하던 중기병대였다.[47] 후사르라는 이름의 병종은 근세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원조는 헝가리 후사르이다.[48] 1402년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참전한 세르비아 기사단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다녀 적수인 티무르 제국 군대가 쏘아대는 화살을 막아내며 전장을 해집고 다녔고, 그들의 용맹함을 본 티무르조차 사자처럼 용감하다고 칭찬했다. 오히려 다른 오스만 제국 군대의 부대들이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와중에서도 이 세르비아 기사단은 최후까지 주군인 바예지드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웠다. 다만 세르비아 기사단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 출신들이었다.[49] 신속한 기동전으로 서라벌 기습을 성공하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패시켰다.[50] 이 양반도 1차 대전때 러시아 제국군 제 10 기병사단 예하 제 10 노브고로드 드라군 연대 소속 기병으로 참전한 전적이 있었고, 볼셰비키 공산당 가입 후 아래 부됸늬와 스탈린처럼 적백내전때도 적군파 기병으로 참전했었다.[51] 이쪽은 사실 1차대전 당시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황실 제1기병대의 육군 기병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기병 출신 인물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기병이란 병과 자체가 쇠퇴하던 시대에 난지라 식료품만 나르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에 병과전환을 신청, 항공장교로 전과했으며 이는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계기가 된다.[52] 일본 기병의 아버지라 불리며 제병협동체계를 확립했다.[53] 출신이 흉노의 영토와 가까운 병주 출신이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하며,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도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된다고 꼬드겨 조조가 일순간 고민하게 했을 정도다. 참고로 조조 역시 기병으로 유명했는데 그런 조조를 고민시킬 정도면 기병대장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을 가능성이 높다.[54] 이 양반의 어록 중에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 라는 말 때문에 포병 출신이라고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적백내전 당시 볼고그라드 부근에서 기병대 정치위원, 즉 기병대 정치장교로 처음 참전했다. 이 때 지휘를 해보기도 했는데, 안톤 데니킨 휘하 부대의 단독 공격을 격퇴하는 등 2차대전때 실책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군사적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55] 북관 대첩 당시 소수의 기병대로 기습전을 펼치며 가토 기요마사를 농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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