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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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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ttoman_Sipahi2.jpg
파일:rumeli_sipahi.jpg
중세의 시파히 제2차 빈 공방전 당시의 시파히. 사슬갑옷에 기병창 무장으로 말해주듯 충격 중기병 역할을 수행했던 루멜리아 시파히다.
언어표기
오스만어سپاهی
영어sipahi

1. 개요2. 티마를르 시파히3. 카프쿨루 시파히4. 예니체리와의 대립과 소멸5. 각종 매체에서

1. 개요

무라트 1세 때 창설된 오스만 제국군의 정규 기병대로, 오스만 제국의 정예 보병 군단인 예니체리와 비교할만한 오스만 제국의 주력 기병 군단. 오스만 제국의 기병대는 크게 '아큰즈'(Akıncı)[1] 나 '델릴레르'(Deliler) 라고 하는 일부 비정규 기병대[2]와 이들 시파히, 그 밖에 크림 칸국 등 신하국이 파견한 군사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시파히가 주력이다 보니 '시파히' 라는 말 자체에 '기병' 이라는 뜻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 민족인 투르크 민족은 오스만 제국 건국 이전부터 기마 전사 전통이 매우 강했으며, 오스만 제국 역시 건국 초부터 강력한 기병대를 군의 주력으로 삼고 팽창했다. 오스만 제국 초기 시절 이들은 예니체리로 대표되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과 국가 권력을 주도하는 엘리트계급으로서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야당 세력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유목민들은 제국이 되기 이전고작 룸 술탄국의 여러 제후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오스만 공국 (beylik)시절 제국의 근간이 되었던 계층이었으며, 군사적 측면에서 이런 생활자체가 훈련인 고급 기병의 존재는 말할 필요도 없는 소중한 자산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군사에 있어서 시파히들은 항상 예니체리 다음 가는 중요한 전력으로 존중 받았다. 게다가 훗날 오스만 제국의 국가 기강 자체가 약화되면서 예니체리가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거듭나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시파히들은 오히려 술탄의 푸시를 받았다.

시파히는 크게 '티마를르 시파히' 와 '카프쿨루 시파히' 로 나뉜다. 티마를르 시파히는 각 주의 군대에 영지를 배분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지내다가 전시에 모집하는 봉건 영주들을 뜻하고, 카프쿨루 시파히는 오스만 제국 술탄이 상시적으로 모집, 유지하고 있는 근위 기병군단을 뜻한다. 광의적으로는 이 둘을 같이 묶어서 '시파히' 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파히'는 티마를르 시파히만을 뜻한다.

참고로 Spahi라는 기병도 있는데, 이들은 프랑스 및 이탈리아 식민지군이 운용하던 경기병대로, Sipahi 에서 유래했다. 스펠링이 i 하나 차이라 그런지, 아니면 모음 표기를 대체로 하지 않는 아랍 문자 때문인건지, 어쨋든, 서양측에서도 이걸 헷갈려 한다. 예를 들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이라든가…. 애초에 헷갈릴수 밖에 없는게 둘 다 어원은 똑같은 단어, 페르시아어로 군대, 군인을 뜻하는 세퍼(sepāh), 세퍼히(sepāhī)이다. 세포이 항쟁으로 유명한 인도세포이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2. 티마를르 시파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alamb_Sipahi.jpg

티마를르 시파히(Timarlı Sipahi). 해석하면 영지를 가진(티마를르) 시파히라는 뜻으로 한국 내에서 시파히 하면 보통 이 쪽을 가리킨다. 무라트 1세 시기에 창설되었고 군복무와 공적에 따라 보답받는 '티마르 제도'[3]에 기초하여 구성된 정예'기병'집단.

흔히 대충 중세 후기, 근세 이슬람 오스만 버전 유럽 봉건 기사들이라 설명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자세하게 따지고 보면 정치적 목적이나 운영 시스템 자체가 확연하게 다르다. 서유럽을 기준으로 특정 영지에서 상속 가능한 봉토를 가지고 현지에선 소군주로 군림하는 유럽의 봉건 기사들처럼 땅을 완전히 받은 게 아닌, 현대로 따지자면 상가에 상점을 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자세히는 범죄자들을 붙잡을 경찰권과 영주로서 세금을 수거할 권리[4]등 기본적인 권리는 있으며 관리자가 나라에 세금낼 의무는 면제받았지만 죄인을 재판할 권리는 없고[5] 땅을 개간시키면 보상을 받는다던가 영지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반대로 벌 받는 것 등등 '지주'보다는 '왕의 대리인'자격으로 일시적으로 눌러앉은 것에 가깝다. 애초에 기초가 된 티마르 제도부터가 점령한 영토를 빠르게 다스려 본국에 융화시킨다는 걸 중심으로 한지라 원래부터 그랬던 셈이다. 따라서 지방 분권적 중세 구조의 군사적 상징이었던 유럽의 기사계급과 달리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는 이슬람-튀르크-몽골 세계에 원래 존재하던 족장이 수직적으로 가신들에게 전공을 분배하던 게 동로마 제국의 프로니아 제도 영향을 받아 봉토 분배 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이고, 따라서 적어도 이론적으론 오히려 코스탄티니예 술탄-한의 권력을 더 강화해 주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6]

위의 제약들 외에도 기본적으로 티마르를 배분받은 시파히는, 상술한 각주에서 설명한 영지 크기에 따라 '제벨루(jebelu)'라 칭해지는 추가징병을 스스로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종기사 또는 스콰이어에 해당하는 위치로 주로 혈육 중에서 뽑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하위 영토인 티마르의 경우 5명 지아멧의 경우 최대 20명 하스의 경우 상황에 따라 최소 20명 이상은 제벨루를 들여야만 했고 7년 이상이나 군에 들어가지 않고 쉬기만 하면 토지를 박탈했다가 다시 공을 세우면 복권시켜 주었다.

전시에 시파히와 제벨루는 크게는 '루멜리(발칸) 시파히'와 '아나돌루(아나톨리아) 시파히'로 분류되어 지휘를 받았다. 유럽에서 싸울 때는 '루멜리 시파히'가 우익[7]에, '아나톨리아 시파히'가 좌익에 섰고 아시아에서 싸울 때는 그 반대로 서서 싸웠다. 이들의 무장 또한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루멜리아 시파히들이 둥근 방패와 랜스, 검, 투창과 체인 메일 등 유럽 기사에 가까운 무장을 한데 반해, 아나돌루 시파히들은 둥근 방패와 킬트, 터키식 복합궁과 검 등 전통적인 궁기병의 무장을 갖추었다. 또한 무장이 다르다 보니 전술도 달랐는데, 먼저 루멜리 시파히는 투창을 이용해 적군의 기병대를 유인한 다음 기병대와 보병대가 따로 떨어진 틈을 타 기병대를 포위, 섬멸하는 전법을 즐겨 썼다. 또한 아나돌루 시파히는 보통 궁기병이 그렇듯 활과 화살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 가 기본. 하지만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갑옷의 중요성이 낮아진 17세기부터는 열병식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갑옷을 입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거나, 갑옷을 일부만 입었다.

이들은 한창 팽창하던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자 제벨루까지 포함해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토지를 배분받는 장교'라는 특성에 화약무기의 발달, 예니체리의 적폐화까지 겹쳐 나날이 규모가 축소되는 와중에 결국 1600년 당시 티마를르 시파히만 해도 5만에 제벨루를 넣으면 14만에 육박하던 대규모 집단이 19세기엔 제벨루를 포함해도 수천 대일 정도로 폭락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영지의 정예군으로 남았고 예니체리가 나라안에서 세력싸움으로 소멸해 갈 때 이들은 배당받은 티마르를 사유재산으로 인정받는 대신 조용히 은퇴하여 신식군대와 세대교체를 했다.

3. 카프쿨루 시파히

파일:Kapıkulu_Sipahi.jpg

'카프쿨루 시파히'(Kapıkulu Sipahi, 문지기 시파히) 는 '카프쿨루 부대' 의 일원인 근위 기병대이다. 창설자는 무라트 1세.

초기 모집 방식은 예니체리와 동일했다. 즉,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점령지의 기독교 가정에서 남자 아이들을 징집해 25세까지 훈련시키고, 개중 가장 성적이 좋은 자는 제국의 고위 관료로, 그 다음은 이 '카프쿨루 시파히'로, 나머지는 예니체리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니체리처럼 전원이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모집된 것이 아니었으며 공적을 세운 병사들 또는 투르크 귀족층에게서도 모집했고, 메흐메트 2세 시대에 이르면 아예 '제국 내에 영토를 가진 튀르크인들 가운데' 에서만 선발하게 되었다.

카프쿨루 시파히는 총 6개 부대로 나누어 편성되어 있다.(Sipahi(ler[8]), Silahtar(lar), Sağ Ulûfeci(ler), Sol Ulûfeci(ler), Sağ Gârip(ler), Sol Gârip(ler)) 이 가운데 실라흐타르는 레인저 같은 특공대로, 오스만 제국군 중 가장 뛰어난 전사만이 이 부대에 속할 수 있었고, 다른 시파히들과는 달리 일반 병사들도 뛰어난 무술을 가지고 전공을 세웠다면 이 부대에 포함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실적만 있으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인 것. 단 이 부대에 속하려면 어지간한 전공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또한 예니체리를 비롯한 보병들도 이 부대로 전입이 가능했는데, 그를 위해서는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남으라는 무시무시한(?)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예니체리 뿐만 아니라 다른 카프쿨루 시파히들에게도 '이런 동료를 저버린 배신자 취급 받았다. 하지만 일단 전입하면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게 되기에, 자살 임무 지원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 부대의 지휘관인 실라흐타르 아아(Silahtar Ağa)는 황제의 개인 무술 스승 겸 보좌관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시파히 부대는 처음부터 오스만 제국의 귀족 엘리트들에게서 모집했는데, 이들은 술탄의 경호대 및 의장대로 활동했으며, 카프쿨루 시파히 6개 부대 중 가장 대규모였다.

그 외의 부대들은 대부분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모집한 실전 부대였다. 이들도 출신 및 사회적 위치로 인해 분류되었는데, 일반적으로 Ulufeci는 중산층, Garip은 가난한 하류층 출신이였다. 하류층 출신 부대인 Gâripler는 다른 부대에 비해 경무장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무장은 판금 방어부분이 종래보다 크게 강화된 경번갑 또는 체인메일, 둥근 방패와 검, 합성궁, 메이스도끼였으며 티마를르 시파히 중 '루멜리 시파히' 와 비슷한 무장과 복장을 했다. 티마를르 시파히들과 마찬가지로 17세기부터는 갑옷을 입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거나, 갑옷을 일부만 입었다. 전장에서 이들은 술탄 및 총독의 근접 호위와 예비대 역할을 했다.

술탄은 이들을 예니체리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적극 양성하여 한때 2만여에 달했으나 예니체리의 발호를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예니체리들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동했으며, 예니체리가 사라진 이후 이들도 군제의 서유럽화에 의해 해체, 소멸했다.

4. 예니체리와의 대립과 소멸

이들 시파히들은 '티마를르 시파히' 와 '카프쿨루 시파히' 할 것 없이 예니체리들과는 서로 반목하는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스스로 정예부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예니체리들은 같은 교육과정을 걸쳤음에도 입장상 아무리봐도 자신보다 상위자가 된 재산권을 소유한'카프쿨루 시파히'들을 질투했고 이후 예니체리가 세습 - 적폐의 단계를 거치며 타락하자 티마를르 시파히의 영지들까지 위협받으면서 이들과 대립하게 된 것. 결국 튀르크 토착 귀족들을 뒷배로 뒨 예니체리와 술탄을 뒷배로 두고 그대로 술탄에게 충성했던 시파히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졌고 대립 초중반엔 예니체리가 득세하나 신식군대의 등장으로 판도가 일변한 끝에 술탄측은 예니체리 세력을 일소했다. 이로 인해 "Atlı er başkaldırmaz."(기병들은 반역하지 않는다)라는 터키 금언이 생겼다.

1826년 당시 상술한대로 마흐무트 2세는 대대적으로 예니체리의 숙청을 지시했고 시파히 또한 벅벅 갈고 있던 칼을 그대로 예니체리에게 들이밀어 이들을 일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대폭 정리된 이후에도 남은 잔당들을 추격, 소탕하는 것 또한 적극적으로 나섰다.

숙청 시작으로 부터 2년이 지난 1828년엔 시파히도 결국 해체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예니체리처럼 반발을 일으킨게 아닌 원하는 사람들은 시험을 친 끝에 신식군대에 그대로 편입하도록 해주었고 지주로 남고 싶은 티마를르 시파히들은 그대로 영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주어 스스로 물러가게 했으며 이와 동시에 시파히의 병력 동원 의무또한 소멸시켜줬다. 시대변화에 발맞춰 평화로운 무혈 세대교체를 이룬 셈.

5. 각종 매체에서



[1] 경무장 기병대로 옛날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튀르크족들처럼 정찰과 약탈 및 적의 유인과 추격 같은 임무를 맡았다.[2]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병대로, 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대이다 보니 예니체리나 시파히와는 대조적으로 봉급을 받지 않아 이웃나라의 마을이나 방어가 취약한 도시를 공격한 뒤 약탈한 전리품을 봉급이다 생각하고 나누어가져야 했는데, 그 이웃나라가 항의해 와도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미처 몰랐네? 미안.' 으로 일관하기 일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잘 나가던 시기, 즉 아큰즈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의 오스만 제국에게 '이웃나라' 는 '잠정적인 정복 대상' 에 불과했으며 아큰즈들의 약탈로 평상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은 물론이요 어디의 방어가 취약한지도 알 수 있었다.[3] 티마르는 제도 상에서 영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데, 넓이로는 약 2만 에이커(약 800 헥타르) 미만이었다. 그 위로는 중간 장교급들에게 배당되는 '지아멧'으로 2만 ~ 10만 에이커 사이였고 최고위 장교들이 배당받는 영지는 '하스'로 10만에 가깝거나 10만 에이커 이상이면 하스로 통한다.[4] 다만 이는 순전히 좋은 권리는 아니었는데 영지를 발급받은 만큼 자기 군비를 자기가 직접 충원해야 했다. 거기에 세금은 면제해 줬지만 그렇다고 지원금을 주거나 한 것도 아니라 자기 영지에서 돈을 못 뽑아내면 그대로 파산이다.[5] 죄인을 벌하려면 지방에 있는 법정에 이들을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해야 했다.[6] 물론 당연히 이건 이상적인 상황에서 이론적으로나 그런 거고, 실제로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이나 현대 이라크 사파비 국경 지대, 카프카스, 현대 북마케도니아 일대처럼 중앙 행정력이 잘 닫지 않는 지방에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는 어느 순간 목이 댕겅 잘려 있고 실제론 현지 티마를르 소유자들이 주로 정복 이전 토착 귀족, 부족장, 성직세력 등과 결탁해서 실질적인 왕을 해먹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7] 전통적으로 우익이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8] 이하 'lar/ler'는 복수형.[9] 이름은 보병인데 궁병이다. 이름도 거짓은 아니라 보병급 스탯을 가진 궁병이다. 즉 궁보병[10] 단 적 기병의 돌격을 잘 막을 자신이 있다면 하마 시파히 랜서 대신 오스만 보병으로만 채워도 된다. 웬만한 보병 정도는 이겨버린다. 조금 높은 스탯의 유닛이 부담되나 궁병이나 오는 도중 상당수를 잡고 이 조합에는 기병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11] 그 전에도 궁기병이 있으니 확장이 용이하지만 공성전이 조금 난감하다. 아자비같은 저급 유닛으로 백병전은 우울하다.[12] 다만 공성전 부분은 게임 시스템을 탓할 게 아니라, 역사를 탓하자.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역사가 깨알같이 고증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니체리 항목 가운데 '창설 배경' 문단 참고.[13] 시작하면 바로 뽑을 수 있는 쇄갑 기사들과는 달리 조금 늦게 나오는게 유일한 단점이다.[14] 그래도 꽤 강하다. 어디까지나 최상위급 기병들 중에서 '비교적.[15] 예니체리 중장보병, 사라센 민병대, 하시신이 있지만 예니체리 중장보병은 최강급 유닛이지만 빨리 죽기에 모루로 적합하지는 않고 사라센 민병대는 울트라 기준 30명이 더 많지만 스탯이 더 낮고 민병대라 사기가 낮아 하마 시파히 랜서만 못하다. 하사신은 다 좋은데 수가 반이다.[16] 즉 투르크는 오직 이 카푸쿨루만을 위해 마굿간 테크를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17] 사실상 "생산 비용" 을 의미한다.[18] 사실 오스만이 3편에서 첫 등장을 하다 보니 이래저래 시험작 같은 느낌이 나는데, 가령 지도자도 메메드 2세쉴레이만 1세 같은 쟁쟁한 군주들은 어딘가에 밀어놓고 제국의 창건자라는 이유로 오스만 1세가 선정되었다.[19] 4편 오리지널에서는 문명별로 고유 유닛이 하나씩 주어졌고, 첫번째 확장팩인 워로드부터는 고유 건물이 하나씩 추가되었다.[20] 예니체리를 뽑으려면 화약을 연구해야 하고, 창기병을 뽑으려면 금속학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금속학을 연구하려면 먼저 화약을 연구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시파히는 예니체리보다 테크가 늦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