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호칭에 따른 국가 분류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제국 | 왕국 | 대공국 | 공국 | 백국 |
카간국 | 칸국 | 선제후국 | 후국 | 기사단국 | |
칼리파국 | 술탄국 | 아미르국 | 변경백국 | (분류) |
성전 기사단 | 구호기사단 |
산티아고 기사단 | 튜튼 기사단 |
1. 개요
기사단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다.실제 역사적 기사단 중 중세 전투집단의 심상을 지닌 집단은 기사수도회였으므로 사실상 기사수도회의 줄임말이 기사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 기사수도회는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탄생한 특수한 형태의 가톨릭 수도회로, 일반적인 수도회와 달리 이교도(무슬림)로부터 그리스도교 왕국을 수호할 군사적 임무와 수도자로서의 의무를 함께 서약했다.
영어로는 결사, 집단 등을 뜻하는 'Order'나 기사 무리를 뜻하는 'Knights'라 한다. 흔히 'Ord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결사나 집단 등을 뜻하는 일반 명사지만, 기사수도회는 기본적으로 수도회(Religious order)이므로 자연스레 단순히 'order'라고 칭하더라도 기사단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반면 기사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knights'라고 쓰기도 했다.[2]
대중문화에서 기사단은 '가톨릭 수도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기사'로서의 심상이 더 강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사이기 이전에 수도자이다.[3] 그렇기에 기사단 내에서 기사들이 연애놀음 등을 하는 일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당연히 없었다. 이들도 여느 가톨릭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서원하였다. 심지어 이들 덕목 중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하는 가르침으로,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를 벗어난 혼외 성행위, 자위행위, 음란물 이용 등의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 물론 실제 역사상의 기사수도회들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당연히 온갖 인간군상이 있었겠지만, 대중문화에서 묘사하는 식으로 보라는 듯이 대놓고 세속적 쾌락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대놓고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기사들은 기사수도회 소속이 아닌 일반 세속 기사들이었다.
여기까지 읽어 보면 알겠지만 동아시아에서 기사단과 제일 비슷한 단체는 다름아닌 승병이다.
2. 역사
2.1. 중세 초기
상당수 사람들이 중세 시대 내내 각국에 국가 기사단이 실존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경제적 구조상 불가능했다. 기사의 대부분은 봉건제에 기초하여 군주(황제, 국왕 등)나 제후 및 그 하위 봉신을 섬기는 대가로 자기 영지(장원 및 하위 토지)를 보유하여 평시에는 자기 장원에 매인 농노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사냥 등으로 소일하며 살았으며, 주군의 필요시 소집되어 싸웠으므로, 이들 지방영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했다.물론 귀족이나 왕의 궁정에 거주하면서 직접 호위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특별히 이들을 기사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호위하는 기사들도 일부는 40일 간의 봉건 의무를 수행하고자 궁성으로 와서 일하다가 자기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기사, 일부는 하우스홀드 기사(House-hold knight)라 부르는 반영구적 가신이 되는 대신 기사위를 수여받아 왕실/영주 직영지에서 숙식하거나 직영지 근교 장원을 받은 기사, 또는 아직 장원을 못 받았으나 장차 수여 예정인 기사로 구성된 느슨한 경호대였다. 주군들도 평시 이러한 기사대를 유지하기보다는 실력있는 용병을 장기 고용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물론 특정 국가에 소속된 기사를 묶어서 그 나라의 기사단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상비군 개념의 기사단은 없었다. 그래서 배넉번 전투 등 그 시대에 관한 문서에서도 표기하듯, 전투에서 봉건기사를 모아 부대로 운용할 때는 “기사단”이 아니라 “기사대”로 표기한다. 의미상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당연한데, 기사단은 평소에도 체계·조직 하에서 함께 활동하는 하나의 집단을 의미하지만, 기사대는 보병대나 궁병대처럼 평소에는 따로 지내던 여러 지역의 봉건기사를 모아서 임시로 부대를 편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원래부터 하나의 조직이라 자신들만의 명령체계가 있지만, 기사단이 아닌 봉건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대는 (대우는 달라도) 각지의 일반 농민들을 모아 보병대를 꾸리는 것처럼, 각지의 붕건기사들을 모아 부대를 꾸린 것이기에 그때마다 지휘체계를 만들어야해서, 기사단과 기사대의 운용법이 상당히 다르다.[4]
2.2. 십자군 전쟁 시기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면서 장기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동시에 조직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기사들의 단체'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기사들은 본래 개별적인 봉신이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수도자들을 무장시키자'는 발상을 떠올렸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이었다.[5] 왜냐하면 수도회는 여러 명이 동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므로, 기사단으로 쓰기에 너무나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거나[6] 아예 군사교육을 받았던 인원이 수도원에 있었기도 했고[7],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했으며, 사유재산을 포기하였거나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만 인정받았으므로 세속적인 이해관계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심지어 종교적 계율로 무장했기에, 기존의 무력집단과 비교하면 도덕성도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수도회'이므로 당연히 종교적 전쟁에서의 사기도 높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 등 많은 기사수도회가 조직되었다. 사실상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 없었다면, 기사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역설적이지만, 특히 가장 활약한 것은 가장 유명한 3대 기사단이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 즉 에스파냐의 기사수도회들이다. 북부 일부를 제외하면 무슬림에 정복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 관점에서는, 무슬림이 저기 멀리 중동에 있는 적들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존재하는 강력하고 현실적인 침략자들이었기 때문이다.[8] 또한 본거지가 전장이랑 가까우니 전투에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훨씬 쉽고 빠르게 충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일찍이 기사수도회가 발달하였다. 칼라트라바(Calatrava) 기사수도회를 비롯한 레온(León)의 알칸타라(Alcántara) 기사수도회, 포르투갈의 오비스(Oviz) 수도회, 아라곤(Aragón)의 몬테사(Montesa) 수도회 등 수많은 기사수도회가 발달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도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구심점으로 적(무슬림)과 자신들을 구분하기는 했으나, 이미 그때부터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에 대한 민족적·국가적 충성심으로 결속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수도회는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탈환'이라는 목적을 완수하였으므로,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다른 기사수도회와 달리 넘사벽으로 큰 실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십자군 시기 기사단 중 일부는 나중에 성지 탈환을 위한 전비 확충을 빌미로 무역을 독점했으며, 성전기사단은 그렇게 모은 부가 화근이 되어 교황과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협공으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개박살이 났다. 물론 그들이 모았던 재화는 프랑스 왕실과 교황이 나눠 먹었어야 했는데, 다 나눠 먹지는 못하고 상당수의 재산이 생존자들에 의해 빼돌려졌다고 하며, 이런 재산과 성전기사단의 생존자들이 나중에 온갖 비밀결사처럼 관련성 있는 떡밥이 되었다.
2.3. 그 이후
중세 후반에서 르네상스 초엽,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들이 이런 종교적인 기사단을 모델로 삼아 영국의 가터 기사단 등 여러 왕립 기사단을 창설했지만, 이전의 기사수도회와는 성격이 상이했다. 물론 이들 기사단 중에서도 상당한 용맹을 보인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목적이 비군사적이었다.[9] 왕립 기사단의 구성원은 그에 걸맞은 훌륭한 태생이 요구되고, 귀족이 만든 기사단도 친구들끼리 만든 친목회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서, 항상 그 머릿수가 십수 명에서 수십 명 이내로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기존 기사수도회도 중세 말기에 이르면, 상당수가 옛 기능을 상실하고 차츰 봉사활동을 하는 수도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내 기사수도회처럼 이미 목적을 달성했거나, 북방십자군의 독일기사단이나 예루살렘 십자군의 기사수도회들처럼 종교적·정치적·사회적 환경 변화로 목적이 소멸하거나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이렇게 중앙집권제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고 교회가 아닌 각지의 세속 군주에게 충성하는 왕립 기사단이나 귀족들이 사적으로 만든 친목 목적의 기사단의 창립이 이루어지는 한편, 일반 기사도 군사적 개념을 상실하고 사회적 계급 개념으로 변모하고 중앙귀족화하면서, 과거에는 엄밀했던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별 자체도 점차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기사수도회들도 상기하였듯 평범한 수도회로 변하면서, 마침내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별은 완전히 무의미해졌다.[10] 여러 창작물에서 나오는 기사단들이 기사들을 모아다 편성한 상비군처럼 그려지면서 실제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기사대를 한데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탄생 이후에도 기사단이 출범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개는 '기사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무력집단보다는 NGO에 가깝다. 19세기 말 아프리카 등에서 개척민과 선교자 보호, 노예 무역 근절, 그리스도교 국가 건립 등을 목표로 몇몇 성직자와 모험가가 기존의 용병을 대체할 종교기사단을 건립하려는 시도를 하기는 했다. # 그러나 국가 외의 무력 집단을 용인할 수 없는 각 세속 정부들, 30년 전쟁의 재래를 걱정한 종교계의 냉담함 등으로 실패했다. 가톨릭 언론을 비롯한 수많은 언론들이 이 새로운 기사단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했는데, 그때까지도 존속하던 구호기사단마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1]
21세기에도 수많은 무장단체와 준군사조직들이 그리스도교, 십자군, 기사단의 이름과 심상을 빌렸다. 주님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이나 러시아 정교회군(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армия: Russian Orthodox Army)[12] 등등... 물론 실제 기사단과는 거리가 멀고, 전범행위나 안 저지르면 다행이다. 냉전 직후 무기상인을 주제로 한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도 이런 무장단체들 보고 '이름들은 기가 막히게 짓는다.'고 디스할 지경.
교황청 국무원
기사단의 지위에 관한 공지
성인이나 거룩한 장소의 이름을 딴 기사단들에 대한 성좌의 인정에 관한 문의가 많기에, 교황청 국무원은 과거에 이미 공표한 다음과 같은 성좌의 입장을 거듭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성좌는 성좌 고유 기사단들(그리스도 최고 기사단, 황금 박차 기사단, 비오 기사단, 성 대 그레고리오 기사단, 성 실베스테르 교황 기사단) 외에는, '몰타 기사단', 곧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성 요한 구호 기사단'과 '예루살렘 성묘 기사단'만을 인정하고 지원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추가인정이나 개혁도 없을 예정이다.
설립시기가 중세이든 최근이든 그 밖의 모든 기사단들은 성좌의 인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성좌는 그들의 역사적 또는 법률적 정당성, 그 목적이나 조직 구조를 보증하지 않는다.
문서들을 불법으로 발행하거나 거룩한 장소들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될 수 있는 모든 의혹을 피하고자, 또 선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남용의 재발을 예방하고자, 성좌는 이러한 단체들이 발행하는 것은 회원증이든 훈장이든 모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이른바 '수여식'을 위하여 성당이나 경당을 사용하는 것도 부적절하게 여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바티칸 통신(Vatican Information Service), 2012년 10월 16일자
기사단의 지위에 관한 공지
성인이나 거룩한 장소의 이름을 딴 기사단들에 대한 성좌의 인정에 관한 문의가 많기에, 교황청 국무원은 과거에 이미 공표한 다음과 같은 성좌의 입장을 거듭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성좌는 성좌 고유 기사단들(그리스도 최고 기사단, 황금 박차 기사단, 비오 기사단, 성 대 그레고리오 기사단, 성 실베스테르 교황 기사단) 외에는, '몰타 기사단', 곧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성 요한 구호 기사단'과 '예루살렘 성묘 기사단'만을 인정하고 지원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추가인정이나 개혁도 없을 예정이다.
설립시기가 중세이든 최근이든 그 밖의 모든 기사단들은 성좌의 인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성좌는 그들의 역사적 또는 법률적 정당성, 그 목적이나 조직 구조를 보증하지 않는다.
문서들을 불법으로 발행하거나 거룩한 장소들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될 수 있는 모든 의혹을 피하고자, 또 선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남용의 재발을 예방하고자, 성좌는 이러한 단체들이 발행하는 것은 회원증이든 훈장이든 모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이른바 '수여식'을 위하여 성당이나 경당을 사용하는 것도 부적절하게 여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바티칸 통신(Vatican Information Service), 2012년 10월 16일자
교황청은 2012년 자신들이 인정하고 공인하는 기사단을 재확인하는 공지를 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교황청이 인정하는 기사단은 성좌 고유 기사단들과 몰타기사단(구호 기사단), 그리고 성묘기사단뿐이므로 이들만 인정하고 지원한다고 한다. 교황 기사단 참조.
3. 기사단장
자세한 내용은 기사단장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사단 목록
- 이하의 목록은 분류에 맞춰 가나다 순으로 정리 바랍니다.
4.1. 신화, 전설
4.2. 실존 기사단
- 구호기사단(몰타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 그리스도 기사단
1318년에 포르투갈 왕국의 성전기사단원들이 국왕 디니스 1세의 중재로 교황의 허가를 받아 만들었다. 포르투갈 지부장이 초대 기사단장이 되는 등, 성전기사단의 포르투갈 지부가 재산과 조직을 유지한 채 이름만 바꿔서 재창단한 것으로, 성전기사단의 후예답게 대항해시대에 놀라운 활약을 했다. 기사단 영지에서 나오는 돈으로 아프리카 해안의 탐험비를 충당하고, 항해왕자 엔히크 같은 왕족들이 기사단장을 맡으며, 바스코 다 가마 같은 항해자들이 기사단원으로 있는 등 포르투갈의 황금 시대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기사단. 1910년 혁명으로 해산되었으나 1917년 재창단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포르투갈 대통령이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다.
- 검은 새 기사단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1350년에 만들었다. 아메데 6세는 1353년 부르캉브레스에서 열린 기마 무술 대회에서 12명의 수행 귀족들과 함께 온 몸을 녹색으로 휘감고 등장하여, 사람들로부터 '녹색의 백작(il Conte Verde)'[13]이라고 불렸다. 또한 아메데오 6세는 용맹함과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도 유명했다.[14]
- 자귀 기사단
실존하던 여기사들로 구성된 기사단. 1149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도시인 토르토사를 공격한 무어인들을 도시의 여자들이 갑옷을 입고 무기 외에도 손도끼 등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가져와 무장하여 도시를 지킨 공로로 기사단이 창설되었으며 도시를 지킨 여성들은 기사 작위를 받고 면세와 발언권 등 각종 특혜를 그 여성 후손들까지 누리게 되었다. '자귀'란 도끼의 일종이다.
- 몬테사 기사단
- 성묘 기사단
- 성 라자로 기사단
1130년경 당시 예루살렘 왕국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병원으로 시작하여, 13세기 초에는 군사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모로 구호기사단과 비슷한 성격의 기사단이었지만, 예루살렘을 잃고 난 후에는 기사단으로써의 성격을 잃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비군사조직만 남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구호기사단과 합병시키려는 교황의 시도를 막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왕실의 호의에 기대는 명예직으로 전락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되면서 그마저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사보이 왕가의 후손들에 의해 '성 마우리시오와 성 라자로 수도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성 라자로 기사단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탈리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조직은 아니다.
- 생미셸 기사단
1469년 8월 1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성 미카엘 대천사를 기념하여 조직했다. 현재 프랑스의 관광 명소인 몽생미셸 수도원의 홀 안에서 이 생미셸 기사단의 창설 기념 행사가 벌어졌는데, 총 36명의 대공들과 귀족들이 참석하였고 수도원에 들른 성지 순례자들의 조개들로 장식된 황금 목걸이를 나눠받았다. 생미셸 기사단의 표어는 이멘시 오세아니 트레모르(Immensi Oceani Tremor)였는데, '거대한 대양(바다)의 공포'라는 뜻이었다. 다만 이 생미셸 기사단에 입단하려면 그 전에 입단했던 모든 기사단의 회원 자격을 포기해야만 했다.[15]
- 성 스테파노 기사단
피렌체 공화국의 후신인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만든 기사단.이라고 쓰고 해적단으로 읽는다구호기사단과 더불어 이슬람 상선들의 악몽이었던 기사단. 레판토 해전 이후에 창설된 기사단으로 구호기사단과 달리 성직자들이 중심으로 세운 기사단은 아니었지만,[16] 구호기사단 못지않게 그리스도인 노예 구출을 명목으로 이슬람 선박을 약탈하고 심지어 레반트 지역에 상륙하여 약탈까지 하였다. 오죽 심했으면 콧대 높은 오스만 제국 술탄이 직접 성 스테파노 기사단의 후원자였던 토스카나 대공에게 자제를 부탁하고 이를 대가로 통상 수교를 요청했을까. 하지만 상공업이 중심이었던 공화국 시절과 달리 농업 중심이었던 토스카나 공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럼 왜 해적질 하는지?덕분에 성 스테파노 기사단의 기항이었던 리보르노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승리와 이슬람교도 노예들을 묘사한 부조가 대놓고 있다. 만화 헬싱에도 동명의 기사단이 나오는데 이를 참조한 듯.(아예 토스카나 군단이라고 대놓고 오마쥬하고 있다.)
- 알칸타라 기사단
- 아비스 기사단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가 이 기사단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비스 왕조의 창시자 주앙 1세가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비스 기사단장 직은 1551년 아비스 왕가의 통치가 막을 내릴때까지 포르투갈 왕위에 영구적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 콜럼버스 기사단
1882년 미국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 발족하였으며, 현존하는 기사단 중 가장 회원이 많고(약 180만 명) 활동이 활발하다. 한국 지부도 2014년 창립되었고 2018년 아시아지부로 승격되었다.# 다만 진짜 기사단은 아니고 대이민시기 가톨릭계 이주민들의 친목, 봉사 단체이다.
- 황금양모 기사단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가 포르투갈의 이자벨 공주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1430년 초에 만든 기사단. 잔 다르크가 그해 5월에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포로로 잡혔기에 잔 다르크와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결혼으로 흡수된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사단이 되었다. 당시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황금양모라는 이교도적 이름을 기사단 이름에 붙여서 논란이 되었는데, 필리프는 이름에서의 '양모'는 구약에서 기드온의 일화에 나온 그 양모라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 황금 태양 기사단
정식 명칭은 '황금 태양의 국왕 기사단'. 이름처럼 프랑스 국왕인 샤를 6세가 1410년에 만들었다. 다만 이 기사단의 존속 기간은 매우 짧았다. 왜냐하면 창설자인 샤를 6세가 매우 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데다가,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하는 백년전쟁의 와중이라서 기사단 운영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17]
4.3. 가공의 기사단
[1] 근대 이후 여러 단체가 중세의 기사수도회가 지닌 심상을 모방하여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이미 기사가 군사적 병과 개념이 아닌 사회적 계급 개념으로 변모하거나 아예 독립적인 관념이 아닌 귀족 계급의 일종으로 흡수되었으므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사 및 기사단과는 달랐다.[2] 전자가 어떠한 단체나 조직으로서의 기사단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구성원의 성격을 강조한다. 사실 후자는 말그대로 '기사들'이라는 의미여서, 맥락이나 다른 부연 설명이 없다면 반드시 구체적 조직을 가리키지는 않는다.[3] 일반적인 기사는 설령 자기 주군이 주교 및 주교후더라도 세속적 계약관계로서 섬기는 것이었고 속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지녔다. 반면 기사단의 기사는 속인이 아닌 수사로서 가톨릭 교회의 위계를 따랐다. 수도자가 수도원장을 따르듯, 기사나 종사(sergeant) 개개인은 기사단장이나 평의회 등 기사단 지도부를 따르고, 기사단 지도부는 자기 소속 교구장을 따랐다. 교황청에 직접 소속된 기사단은 교황이 주군이고, 일반 교구에 속한 기사단은 일반 주교가 주군이었다. 대중매체 속 심상과 비교하면, 현실의 기사단은 매체의 성기사와 비슷하다.[4] 오늘날로 치면, 기사단은 여단, 사단, 군단 등 정규적이고 상설적인 조직이고, 기사대는 전투단(combat team; combat group)이나 임무부대(taskforce)처럼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편성했다가 해체할 수 있는 집단이다.[5] 우리가 아는 기사의 개념과 먼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세 말~근대 초 이전의 기사는 그냥 말과 장비, 무술만 갖추었다면 그게 바로 기사다. 적어도 초기의 기사 개념은 군사적 병과였을뿐 사회적 계급은 아니었다.[6] 일반적인 수도원은 성에서 떨어져 있어 상시 병력을 보낼 수 없는데다 수도자들은 도시에서 떨어져 자급자족하거나 성금이나 기부를 받거나 수도원에서 만든 특산품을 거래하는 것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떠나 살아갈 수준의 재산은 있었다. 이는 수도원을 노리는 도적들의 좋은 타겟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수준의 무력은 갖춰야 했다.[7] 은퇴한 군인이나 귀족 출신 성직자가 대표적인 예[8] 사실 무어인들의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는 표현이고 무어인들의 후손인 현대 모로코인들에게는 조상 모독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이지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9] 이 시기 메달 수여 관행과 세속기사단 계급장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이 훈장이다.[10] 마찬가지로 중세 중후반기 들어 전장을 담당하는 것은 기사에 버금가는 무장을 했던 맨앳암즈와 다양한 용병들로 변화해갔으며, 기사라는 단어는 봉건영주라는 계급적 지위 대신 중장갑 무장을 갖춘 일종의 병과의 의미로 바뀌어갔다.[11] 애초에 구호기사단은 구호단체가 군사화가 된 것뿐이고 이 당시에는 탈군사화를 이루어 다시 구호단체가 된 시점이다. 다만 구호기사단군이라는 군대를 따로 보유 중이긴 하지만 사실상 경비대에 가깝다.[12] 돈바스 전쟁의 친러 의용군. 그 정체는 러시아군이라는 게 정설.[13] 프랑스어로는 le comte vert. 사보이아 가문은 1563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토리노 천도 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14] 출처: 중세의 기사들/ 에마누엘 부라생 지음/ 임호경 옮김/ 동문선/ 99~100쪽[15] 출처: 중세의 기사들/ 에마누엘 부라생 지음/ 임호경 옮김/ 동문선/ 240~241쪽[16] 구호기사단의 단원들은 일단 수도자들이었다. 하지만 성 스테파노 기사단은 결혼한 평신도도 참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귀족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다.[17] 출처: 중세의 기사들/ 에마누엘 부라생 지음/ 임호경 옮김/ 동문선/ 139쪽[18] 이밖의 기사단을 포함한 자세한 것은 제국의 기사단 문서를 참고할 것.[19] 스페이스 마린들을 특별히 기사단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의 기사단(기사수도회)에서 따온 요소가 많다. 부대 집단을 챕터(Chapter)라 하는 점, 기지를 요새 수도원(Fortress-Monastery)라고 부르는 점, Battle Brother, Brother-Sergeant, Brother-Captain 등 계급명에 수사(修士)를 뜻하는 Brother를 붙여 부르는 점 등이 그렇다. 참고로 제국에서 기사라 불리는 이들은 따로 있다. 다만 이들은 기사단이 아니라 가문단위로 움직이므로, 실제 중세로 치면 기사단 기사가 아니라 봉건 세속기사들에 해당한다.[20] 주신과 퍼블릭만을 맹종하는 광신도들.[21] 로열블러드 기사단이라고도 불리며, 소울아머유저가 아니면 입단할 수 없는 특수부대 역할의 기사단. 전단단위를 운용하며, 단독플레이로 왕국하나를 점령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프라임 론 아가드가 창설, 교육등 형성에 힘썻다.[22] 이유는 기사단장이 악마라서...[23] 델피니아 왕국의 기사단은 델피니아의 각 요지에 위치하고, 일단은 각 영주로부터 독립된 집단이다. 다만, 완전히 독립된 집단은 아니고, 유사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역할을 맡는다. 항상 수도에서 수비를 맡는 근위병단과 비교하면 규율이 좀 더 자유로운 편이지만, 각 기사단이 위치한 지역과 지휘관에 따라 특성이 다르다.[24] 생긴건 기사 같지않은 성기사형 디지몬들이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 가장 기사에 가깝게 생긴건 듀크몬[25] 일개 용병단에서 미들랜드 국왕에 의해 백의 칭호를 받지만 단장 그리피스가 샬로트 공주와 동침한 것이 들통나서 하루 만에 반역자로 몰린다.[26] 기사단이란 호칭을 쓰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인 계급을 의미한다.[27] 칼라이의 기사단과 달리 이쪽은 전형적인 기사단과 비슷한 면모가 많다.[28] 이쪽은 프로토스가 아닌 테란이다. 다만 앞의 두 프로토스 단체와 달리 이쪽은 이름만 기사단인 행성 방위군에 가깝다.[29] 전부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수도회에 가까운 집단이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기사수도회 구성원 중에는 귀족이나 기사가 아닌 인원도 있었다. 이를테면 서전트가 그러하다.[30] 본작 제목의 유래이기도 하다. 참고로 작중 기사단은 역사적 기사단의 군사적 기능에 관한 심상도 있지만, 사회적 시대배경은 근대에 가까워서 연대 상위의 제대 단위 개념도 겸하므로, 기사단으로 불리는 부대가 많다. 여기서는 각국을 대표하는 친위대격 기사단을 위주로 서술한다.[31] 본래 유서 깊은 기사단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구성원 거의 전원이 파문당하여 해체됐다.[32] 겉보기엔 기사이지만 메카니멀이기 때문에 군대가 없다.[33] 헬싱을 제외하고 쿠를란트부터 몰타까지는 모두 현실에 존재한 기사단이다. 다만, 이미 비무장화된 현실의 그것과 달리 헬싱의 세계관에서는 제9차 공중기동 십자군을 결성, 대놓고 런던 침공을 실행할 정도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