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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22 20:20:06

조총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삼국지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조총(삼국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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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72101594_1.jpg
(일반적인 형태의 조총)

1. 개요2. 이름의 유래3. 일본에서의 조총4. 사용법5. 성능
5.1. 위력5.2. 단점론과 반박
5.2.1. 조총이 활보다 열등한 점5.2.2. 조총이 활보다 우월한 점5.2.3. 조선은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는가?
6. 역사
6.1.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몰랐을까?6.2. 조선의 조총 운용사6.3. 중국의 조총사
7. 논란
7.1. 조총은 아퀘버스인가? 머스킷인가?7.2. "삼단 철포 혁명"에 대한 논란
8. 무대뽀, "무텟포(無鉄砲)"9.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9.1. 한국 사극9.2. 외국 사극9.3. 게임
10. 기타

1. 개요

"군대 무기에서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숙종 조에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 허적[1]

16세기 ~ 19세기까지 사용된 동아시아의 전장식 화승총이다. 근세 유럽에서 전래 되어 중국, 일본,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넓게 퍼졌다.

(일본에서는 '철포'(鐵砲)라고 불렀으며 무모한 행동을 뜻하는 無鉄砲(무텟포, 한국으로 넘어와 은어가 된 '무대뽀'는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잘 오해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2. 이름의 유래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은 하늘을 나는 (새 조(鳥)) 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붙인 이름이다. 다만 뒤이은 청나라 시대에는 조창(鳥鎗)이라고 했다. 현대 중국에서도 총기 전반을 창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1591년에 일본 사신이 처음 바친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 조총으로 조선에 소개하여 이 이름이 쓰이게 되었다. 동북아에서 명나라 다음으로 조총을 두번째로 도입한 일본에서는 주로 '철포'라고 불렀다.

3. 일본에서의 조총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 모습)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 모습 2, 중간에 대조총을 안고 발사하는 모습과 지지대에 올려 쏘는 모습이 보인다.)

1543년 9월 23일 일본 타네가시마 섬에 표류한 중국 상선에 승선했던 포르투갈 상인한테 타네가시마 영주가 시가 2억 엔 정도의 은을 지불하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한 것이 조총(철포)의 기원이다. 타네가시마 영주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대장장이에게 이것을 복제하도록 명령했고 그 대장장이가 노력 끝에 화승총을 복제해내는데 성공하면서 철포가 일본에 퍼지게 되었다. 다른 설로는 그 일본인 대장장이가 복제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자 자기 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바치면서까지 제작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카사 충효비가 바로 그 딸들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도 있지만 일단은 앞의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어찌됐든 이로 인해 이 거래가 진행된 섬인 종자도(타네가시마)는 그대로 철포를 일컫는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철포를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다. 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철포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였다. 사무라이의 전통과 동떨어진 무기인데다가 조총의 작동 방식의 한계 때문에 이것이 실전에서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국시대였던 만큼 철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도입하는 다이묘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 중 오다 노부나가는 적극적으로 철포를 받아들여 전술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센고쿠 다이묘였다. 가장 강성한 다이묘 중 한명이었던 노부나가는 대규모의 철포 부대를 운용할 수 있었는데 철포의 특성상 이러한 대규모 부대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1575년 전국 시대 일본의 판세를 바꿔 놓은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가 활약하며 승리를 거두면서 조총은 일본 군대의 주요 전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다만 이 전쟁에서 노부나가 부대가 "삼단 철포" 전술을 운용했다는 과거의 통설은 후술된 바와 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국 시대 철포 부대의 일반적인 전술은 방패수가 철포 아시가루들 앞에서 적의 활이나 철포탄을 방어해주고 그 뒤에서 철포 아시가루들이 엄호받으며 발사하는 식이었다. 좀 더 조직적인 유격 부대는 방패수는 물론 탄약을 장전해주는 부사수까지 있었다.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중세 시절에 갑옷을 무력화하는 용도로 쓰이던 화약 무기가 마침내 동아시아의 강력한 활이나 석궁에 버금가는 편의성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또한 조총이 아시아에 도입된 이후 다양한 개량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의 대조총, 한국의 천보총 등이 있다. 대조총이 무지막지하게 굵다면 천보총은 총열이 무지막지하게 길다.

파일:external/www.xn--u9j370humdba539qcybpym.jp/image0073-e1348019385256.jpg
일본에서 토막파와 좌막파가 충돌할 당시의 대조총의 모습이다. 아예 서양식 포대에 얹어버렸다.[2] 여담으로 앉아서도 쏘는 하다. (맨 위의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손으로 들고 쏠 때는 온몸으로 껴안고 쏘고 나서 검도에서 기검체일치 지키는 것 마냥 기합까지 지른다.

4. 사용법

조총을 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세총(洗銃) : 조총의 총신 내부를 깨끗이 닦아낸다.
  2. 화약(火藥) : 총신에 화약을 넣는다.
  3. 삭장(槊杖) : 나무 꽂을대인 삭장으로 화약을 잘 다진다.
  4. 연자(鉛子) : 납탄을 넣는다.
  5. 삭장(槊杖) : 삭장으로 탄환을 꼭꼭 밀어넣는다.
  6. 하지(下紙) : 종이를 총구에 넣는다.
  7. 송지(送紙) : 발사시 가스가 새지 않도록 삭장으로 종이를 밀어넣는다.
  8. 개화문(開火門) : 방아쇠 위에 있는 점화약을 담는 화문을 연다.
  9. 선약(線藥) : 선약, 즉 점화약을 화문에 넣는다. 드라마 추노에서 생략된 과정이 바로 이 선약 과정이다.
  10. 요화문(搖火門) : 화문을 살짝 흔들어서 화문 속의 선약이 총열 안으로 약간 흘러 들어가게 한다. 이때 선약이 제대로 흐르지 않으면 제대로 발사가 되지 않는다.
  11. 폐화문(閉火門) : 화문을 닫는다.
  12. 안화승(安火繩) : 화문에 불을 붙여주는 금속 부분인 용두에 불이 붙은 심지인 화승을 제대로 끼운다.
  13. 개화문(開火門) : 명령에 따라서 점화약이 담긴 화문의 덮개를 연다.
  14. 거발(擧發) : 적을 겨냥하여 발사한다.

일반적인 이미지는 심지에 불을 붙여 다 타들어가면 발사되는 무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불이 붙은 화승을 공이인 용두(龍頭)에 끼운 후, 방아쇠를 당겨 용두의 화승이 화약 접시(火皿)에 담긴 점화용 화약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것이 다시 추진용 화약에 불을 붙여 총알이 발사되는 방식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느린 화승이 타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타이밍 맞게 조준을 유지하고 있기란 어렵기 때문이다(불씨를 화문에 직접 대어서 발화하는 것은 화승총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소형 화기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선약과 요화문, 폐화문 과정을 화약 과정 이전에 하는 경우도 꽤 자주 보이는데, 특히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하는경우 이러한 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3번과 5번에 해당하는 삭장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으며, 빠른 사격을 위해서서는 송지와 하지 과정조차 총알을 총구에 뱉고, 바닥에 총을 몇 번 내리치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다만 이 개념은 오리지널인 화승총의 후계인 플린트록 머스킷 한정으로,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해서 본격 보급이 된 개념이다.

(일본의 조총 발사 과정 동영상이다. 22초경부터 대조총 장전 모습이 나온다.)

파일:external/www.grandhistorian.com/gun-latemingbreechload.png

다만 불랑기포의 구조를 도입한 이런 자모총(子母銃)같은 경우 불랑기포처럼 후장식으로 장전 / 발사하면 된다. 위 그림은 명나라의 병서 <병록>(兵錄)에 실린 자모총이다.

5. 성능

5.1. 위력

파일:external/oktoshi2004.blog.so-net.ne.jp/3339866.jpg

대조총을 발사하다 실수한 모습.# 크기와 들어가는 화약의 양만큼 반동도 강해 일어난 일이다. 대조총은 말이 총이지 실제로는 대포에 가까운 무기이다.
열넷째는 조총(鳥銃)을 주조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장기는 오직 조총 한 가지뿐입니다. 가장 만전을 기할 수 있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하니 전구(戰具) 중에 웅맹한 것으로서 적을 물리치는 묘용이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십오(什伍)로 하여금 모두 나아오게 하여 천만 개를 일제히 발사하도록 하면 연기가 적의 보루에 가득 차고 소리는 적의 담을 흔들 것이며 범하는 자는 즉시 부딪치고 부딪친 것은 곧 부서져 버립니다. 지혜는 교묘함을 믿지 않고 용맹은 힘을 믿지 않고 강함은 무리를 믿지 않고 악은 사나움을 믿지 않는 것이니 실로 만 번 승리할 기구요 한 사람을 대적할 것이 아니므로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고 우리가 의지할 것도 이것입니다.
-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25일(기미) 장단 생원 최욱의 상소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또 기계(器械)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면,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는 본디 조총(鳥銃)에 대적하기 어렵거니와, 야전(野戰)에서 그러할 뿐만이 아니라 적의 보루를 쳐부술 때에도 궁시로는 하기 어려운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에서 이르신 바와 같습니다. 오직 화기(火器)를 많이 갖춘 뒤에야 견고한 보루를 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 선조 26년 계사(1593) 윤 11월 28일(무신)
“우리 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ㆍ간척(干戚)ㆍ창검(鎗劍)ㆍ총포(銃砲) 중 어떤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開闢)한 후에 곧 궁시(弓矢)가 있었으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호시(弧矢)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음습(陰濕)할 때 조화를 운용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명중시키는 것이 2, 3백 보(步)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 가까워진 후에야 비로소 편전(片箭)을 쏘게 되는데, 재빠르고 굳세고 멀리 쏘아야만 가장 군중(軍中)의 정교한 기술로 여겼으나 모두 조총(鳥銃)에 뒤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포의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옷을 뚫고 뼈를 꿰뚫어 사람이 확실하게 죽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총포가 나오면서 명장(名將)이 없었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하다.”
- 순조 8년 무진(1808) 8월 1일(갑오)
일반 조총 기준으로 유효 사거리가 약 50m, 최대 사거리는 500m ~ 700m. 살상력을 기대할수 있는 거리는 200m. 하지만 조총은 동아시아에서 100년 ~ 200여년에 걸친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므로, 사거리와 위력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는 점을 알아두자. 가령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살상거리가 40m ~ 50m, 유효 타격거리가 70m ~ 80m 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승자총통에 비하면 2배 ~ 3배 이상 긴 사거리였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자체적인 신형 조총을 만들면서 살상 거리와 비거리가 본 항목에 기재된 성능, 혹은 그 이상으로 점점 늘어난다.

내부에 강선이 없는것은 그렇다고 쳐도 일단 탄자의 형태부터가 동그란 구형이라 애초에 공기 역학적으로 좋은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어서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건 활이 미친듯이 발전한 동아시아에서 단점이라고 하는 정도지, 장궁같은 걸 집단으로 운용해서 화망을 만들어 적을 사살하던 유럽에서는 오히려 엄청난 장점이었다. 활은 능숙하게 다루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지만 총은 장전할 줄만 알면 쏠 수 있는 덕분에 활에 비해 숙달되는 기간이 매우 짧아 빠른 병력 양성이 가능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높은 운동 에너지를 가지므로 살상력과 갑옷 관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점이 있다. 조총은 쏘면 갑옷 자체를 뭉개버리면서 상대를 죽이는데 반해, 활로 갑옷 뚫으려면 110파운드 급 장궁을 사용하던 영국 정도는 되어야 했다.[3]
위력은 화기답게 매우 강하여 석궁 계열보다 강력했다. 특히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덕분에 2000J이 넘는 운동 에너지를 이용하여, 납탄으로도 50미터 가까운 거리에서도 갑옷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4]

다만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위력이 아니라, 기존에 갑주를 관통하는데 사용되었던 화약 무기들이 마침내 개인 화기로서 운용이 가능해졌다는 데 있다. 서양에서 화승총이 전래되기 이전에도 동아시아에는 충분히 갑주를 관통할만한 개인화기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불편한 중화기 형태이거나 집단으로 운용하여 파편 충격을 주는 형식의 원시적인 소형 화기 밖에 없었다. 조총의 위력은 단순히 화력이 강력한 점이 아니라, 중거리 보병끼리의 교전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널리 보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일본 전국 시대 시기의 활로 일본 갑주인 당세구족을 입은 적병을 쏘면 관통력 부족으로 적을 일격에 죽이기 쉽지 않았다. 창이나 일본도를 사용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골절만 일으킬 뿐, 갑옷을 입은 무사를 무력화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5] 비단 일본 활만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부심을 가지는 국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정사에서 우리 활로도 갑옷을 뚫을 수 없어 투구끈을 쏘아맞혀 간신히 죽였다고 기록된 아기발도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게 센고쿠시대로부터 무려 200년 전의 일이었다. 임란 이후 1605년 북방에서 발발한 건퇴전투의 경우를 봐도 여진족이 중국 갑옷을 입고 오자 궁시로 뚫지 못해 총통밖에 답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조총의 경우 50m 거리에서 바로 관통이 가능하니, 가히 위력에 있어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총을 든 일개 병사가 비싼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 장수들 대부분은 두정갑을 입고 있었지만,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관통력 뿐만이 아니라 화살의 속도 또한 활이 가진 약점이었는데, 편전에는 무력화 되었으나 주력 전투용 화살인 장전을 여진족이 날아 오는것을 보고 피해버리는것도 모자라 칼로 받아 쳐 버리는 무협지스러운 사례도 실록에 나와있다. '#' 조총의 전래 전인 14-15세기의 당시 조정은 보다 효과적인 편전을 생산해 배급하는것으로 대응했으나, 곧이어 승자총통과 같은 화기인 핸드캐논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고 조총의 전래 이후엔 편전마저 도태시킬 정도로 중용했다.[6] 이는 화기인 조총의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탄자의 속도는 화살이 비교할바가 아니었다. 조준한 뒤 격발하게 되면 격발한 바로 그 순간 조준한 표적에 명중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총의 도입은 아무래도 개발 주체인 서구권이 조금 더 유연했던건 사실이었다. 동양도 갑주를 입은 상대에 대한 활의 저지력이 불분명했기에 조총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서양에서는 더 나아가 판갑의 발전으로 활이 아예 무력화되어 도태 단계였고, 그나마 타격을 줄수있는 투사병기는 심지 꽂고 쏘는 핸드캐논이나 무식한 장력의 활을 달아 장전이 오래 걸리는 쇠뇌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갑옷의 발달로 관통을 기대해 저지력을 발휘할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2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상 그런 무장을 한 기병 상대로는 영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총이 다른 개인용 투사병기의 유예를 줄 이유가 애당초 없었기에, 의문의 여지없이 주력병기의 위치를 장악할수 있었다.

5.2. 단점론과 반박

5.2.1. 조총이 활보다 열등한 점

상이 이르기를,
“조총(鳥銃)만 한 병기가 없는데, 그대는 활과 화살을 좋은 병기라고 여기는가?” 하니,
유만증이 아뢰기를,
“총이란 것은 일단 실수할 경우에는 신속히 탄약을 장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내에 사용하는 것으로는 활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영조 4년 무신(1728) 3월 23일(계유) 맑음

5.2.2. 조총이 활보다 우월한 점

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친림하여 시재(試才)할 때에 편전(片箭)이 조총만 못한 것이 수배나 되었으니, 옛사람이 ‘조총은 활보다 5배나 낫다.’고 한 말이 믿을 만하다. 이제 사복시(司僕寺)에 남은 말 30필이 있으니 순차적으로 도감 포수(都監砲手)에게 나누어 주라. 외방의 포수 및 살수와 무사 중에서 그들이 포를 쏘기를 자원할 경우 모두 3병(柄)을 한 차례 시방(試放)하고 서계(書啓)하도록 훈련 도감에 이르라.”
- 선조 28년 을미(1595) 10월 8일(정미)
무기 가운데는 조총이 가장 정교한데, 습기가 차면 느슨해지는 궁노(弓弩)와는 달라서 불만 붙이면 반드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전적으로 조총을 쏘는 법을 익혀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게 된다면 어떤 적인들 꺾지 못하며 어떤 도적인들 막지 못하겠습니까.
- 영조 1년 을사(1725) 4월 17일(갑신)

5.2.3. 조선은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는가?

군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장기는 궁전(弓箭)이 최고인데, 편전(片箭)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妙法)은 조총(鳥銃)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단 조총을 사용하면서 편전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새것만 좋아하고 옛것은 염증을 낸 나머지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과거를 보일 때마다 특별히 편전에 대한 시험도 보여 따로 상을 주기도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편전을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 인조 6년 무진(1628) 9월 29일(병술)
적을 방어하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장기(長技)는 원거리에서는 궁시(弓矢)이고 근거리에서는 도창(刀鎗)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종조에는 각 고을에서 월과(月課)로 군기(軍器), 궁시, 도창 (원문 빠짐) 임진란 후에는 단지 조총(鳥銃)만을 숭상하여 평상시 월과에서 도창을 완전히 폐지해 버리고 또 (원문 빠짐) 그 과목을 회감(會減)하였으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 그런데 조총이 개설된 후로는 (원문빠짐) 포수(砲手)라 호칭하고 모두 편안히 앉아만 있으면서 편전을 익히게 하지 않으니 또한 매우 타당치 않은 일입니다. 역시 해조로 하여금 조종조의 옛 규례에 따라 각별히 편전을 장려하여 급한 상황에 대비하는 계책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인조 4년 병인(1626) 4월 8일(경진)

6. 역사

6.1.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몰랐을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쏴대는 조총을 보고 이 '처음 보는' 무기의 위력과 폭음에 조선이 크게 놀랐다는 묘사가 많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 정부는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사신으로 와서 통신사 황윤길, 김성일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면서 선조에게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의 해도로 날려보내게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侍)에 두게 했다고 하면서 이것이 조선에 조총이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를 시연한 기록이 있는데 시연 당일날 대신들이 이미 조총의 장단점을 알고 그에 대해 거론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이전부터 이미 중국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조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과 파괴력의 대포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조총과 비슷한 무기인 승자총통을 만들어낸 바 있기에 조총을 보고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이 사실 자체가 뒤늦게 밝혀지거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병사'들이 조총의 소리와 위력에 놀라서 전의를 상실했다고 하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조총의 존재를 접하고 분석한 건 일본과 교류가 있던 소수, 그리고 그들 및 외교 채널을 통해 정보와 실물을 입수한 정부에 한정되는 것이지, 임진왜란 때의 징집병 및 의병들은 조총에 대한 정보는 커녕 일본에 대한 지식도 희박한 상태인 것이 정상이다. 게다가 어찌어찌 전쟁 중에 조총의 존재에 대해 전해들은 이후라고 해도 충격효과는 타당성이 있다. 총의 일제 사격이 가져오는 쇼크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따라서 훈련도가 낮고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총소리나 일제 사격에 놀라서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심지어 30년 전쟁 당시에 신교도 측 부대가 일제 사격을 한 후 자기들이 쏜 총소리에 놀라서 스스로 붕괴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시험 사격을 한 후 군기시에 보관된 조총을 일반 병사들이 접했을 가능성도 작은데다가, 훈련을 충분히 받지 않은 병사들이 전장의 혼란과 공포에 전염되어서 놀라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이 아닌 '조선 병사'들이 조총 소리에 놀랐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조총을 모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꾸 위력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임란 초반에는 위력 문제가 오히려 소리나 섬광보다 더 심각했다. 당시 조선 원거리 개인무기의 대명사였던 활은 그래도 나무방패 정도면 거의 확실한 방호가 가능하고 갑옷 정도로도 그럭저럭 버텨볼 수 있지만, 화약으로 추진되는 조총은 갑옷은 물론이고 나무방패조차 뚫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안그래도 훈련도가 낮은 지방군 병사들의 전투의욕을 감퇴시키기에 충분했다. 위에 인용된 실록 기록에서도 활과 조총의 위력차이가 심각해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서 조총 확보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당대에 이미 위력차이를 절감하고 인정한 것을 지금에 와서 자꾸만 위력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강변해봐야 별 설득력은 없다. 특히나 비숙련 지방군이 곡사화기인 활을 쏘는 것과 숙련된 왜군 선발대가 직사화기인 조총을 발사하는 것은 명중률과 살상률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낳을수밖에 없었고[24], 지휘관 입장에서도 당초 활에 의한 피해 정도를 예상했다가 전투가 진행되고 상정했던 규모를 월등히 상회하는 피해가 누적된다면 병사들의 동요는 차치하고라도 작전계획 자체가 엉망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란체스터 법칙 따위 간단히 씹어먹는 살상률 앞에서 아무리 천하의 명장인들 전투를 지속할 도리가 없다.

조선 정부나 군 수뇌부가 조총을 아는 것과 별개로 일선 병사들이나 지휘관들 입장에서 조총은 명백히 처음 보는 물건이 맞다. 조선이 조총을 모르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전쟁은 고위지휘관 한둘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 행동일 뿐이다.[25] 수뇌부도 조총이란 물건을 단편적으로 시험사격해본 정도가 지식의 전부이지 정규군이 집단적으로 운용하는 모습과 여기에서 나오는 위력은 임진왜란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부터가 그거 제대로 맞긴 하냐?라면서 삽질이나 해대는 판이었니 오죽하겠는가? 심지어 조선군이 기존에 운용하던 총통류조차도 대부분은 최전방인 북방이나 수군 위주로 보급되어 후방인 남부의 지상군들에게는 생소한 물건이었다. 남부 지상군이 총통을 대규모로 운용해 본 마지막 경험은 을묘왜변으로 임진왜란으로부터 무려 40년 전의 일인데다가 주 전장이 서남해안으로 임진왜란 초반의 주 전장이었던 경상도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사태였다. 애초에 조선은 만성적인 금속부족으로 인해 평시에도 절의 종까지 떼어다가 쓸 정도로[26] 총통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나라라 후방 병력들에게까지 총통을 들려주며 훈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특히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명백히 한세대 전의 핸드캐논 무기로 위력, 명중률, 사거리, 운용전술 등에서 조총과는 영 딴판인 물건인데다가 남부 지방군들이 실제로 운용해 볼 일은 없었으니 조총 대응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대인들이 총과 대포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훈련 없이 이들과 마주쳤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조선은 당시 조총에 장점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단점 역시 명확했기에 당장 양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군기시에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총은 사용법이 쉽긴 했지만 장전과 조준이 활에 비해 몇 배로 느렸고[27] 사거리나 명중률에서 낫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전 조선군의 주력은 여진족을 상대하는 북방군이었고, 그것도 농민병을 대거 징집하기보다는 갑사로 대표되는 전문 군인 집단 중심의 체제였다. 자연히 마상에서도 이동 표적을 상대로 쉽게 운용할 수 있고 지형적인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활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조총의 대량 운용 능력은 그다지 크게 각광받지 못했다. 뒤에도 서술하겠지만 조선군에는 구한말까지 궁병이 남아 있었다.[28] 실록에 나온 대화를 보면 한쪽은 양산이 빠르고 쉽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같은 조건이면 활이 유리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은 효율적으로 조총을 운용한 일본군의 전술에 그 위력을 실감하고 양산에 들어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이전의 여진족 토벌이나 왜변과 달리 그야말로 총력전 수준의 혈전이었고 자연히 징집된 농민병들을 빠르게 무장시킬 수단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군의 높은 조총 보급률은 속오군으로 대표되는 동원 체제의 정비와도 크게 연관이 있다.


(승자총통과 조총의 비교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 때문에 장전 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29]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하는 것에 실패해서 명중률에서 패배했다.

6.2. 조선의 조총 운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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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조총병)[30][31]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은 조선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에 조선군은 바로 조총을 모방하는데 들어갔다. 그 결과 1593년 9월 이순신의 부대가 처음 조총을 모방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이름하야 정철총통. 이순신은 이 뿐만 아니라 일본 상인들로부터 조총을 직접 구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충선항왜들이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해주면서 조총은 조선군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조총 다루는 것이 활 쏘는 것보다 훨씬 배우기 쉽다는 이점 때문에 이미 인조 대부터 사수 중에서 실력이 떨어지거나 힘이 약한 군인들을 조총수로 전환하는 풍조가 지속되어 나중에 가면 보병에 비해 재력이 좋아[32] 상대적으로 활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기병(한량 계급의 비중이 높았다.) 정도만 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17세기에 들어서 보병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숙종충청도 군적부를 보면 개인 무기가 명시된 1,300여 명의 속오군 보병 중 76.5퍼센트가 조총수였다.

다만 서양 국가나 일본군의 전술과는 다르게 수성전을 주로 해 원거리 보병의 비율이 압도적이였던[33] 조선군의 특성상 창병 비율이 매우 낮고 총검도 발명되기 전이라 기병에 대응할 수단이 다소 부실하였고 때문에 쌍령 전투에서 훨씬 다수의 총병을 보유했던 조선군이 청의 기마대에 모조리 털려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약점은 18세기 말까지 쌍수도를 소지하게 한다든가 근접 보병의 비율을 늘리자든가의 식으로 개선 방안이 계속해서 논의되었을 정도로 조선군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도 청군은 병자호란 때 고위 지휘관 일부가 저격당했던 경험 때문에, 효종나선정벌 당시 조선에게 조선의 조총수를 파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파견된 조선군 조총수들은 러시아군에 맞서 두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둔다.

이를 통해 조선 조총수가 러시아에서도 꽤 알려졌다. 그 당시의 머스킷으로는 전열보병 문서에서 보듯 대형을 갖추고 일정한 화망을 구성하여 적을 살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조선 조총수들은 머스킷으로 조준 사격을 통해 적을 살상했다. 당시 파병했던 조총수들은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특등 사수들로서 일정거리 이내에서 목표를 향해 3발을 쏴서 2번 이상 표적에 맞추어야 파병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다른 국가의 조총수들과 비교해서 2배 이상 높은 명중율이었다. 유럽에서 강선을 비롯한 결정적인 화승총의 개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오히려 유목 민족이나 궁술에 뛰어난 민족들이 비범한 개조 조총들을 만들어서 운용한 예도 많았다.[34]

18세기까지는 조선군 조총도 유럽식 화승총에 비해서도 일장일단이 있는 정도로 크게는 꿀리지 않았다. 조선군은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화승총을 개발해 화력과 경량성을 확보하여 18세기까지는 전혀 주류에 뒤쳐지지 않았다. 이는 다른 활을 운용한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화승총들은 유럽식 화승총에 비해서 매우 가볍고 이용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오히려 원판보다도 사거리, 경량화 면에서 뛰어난 경우도 많았던 편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슈툰 족의 저격용 화승총인 제자일 같은 무기들이다.

그러나 오랜 평화로 인해 그 이상의 발전된 무기를 만들 필요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선정벌 이후 박연에 의해 플린트락 기술이 들어왔지만 당시엔 조총보다 불발율만 높은데다[35] 비용도 비쌌다.[36][37]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선은 플린트락을 양산해야 할 정도로 위기 상황이 없었다.[38] 현재 미합중국 육군기갑기계화보병 전력이 러시아군중국 인민해방군의 기갑 전력보다 우위라는 이유만으로 냉전 시기의 산물인 M1 에이브럼스를 아직도 개량하며 운용중이며 저강도 분쟁 신속 개입을 위해 군 전력을 개편한 에서 보듯이 언제나 수요는 필요에 따라 좌우되는 법이다.

훈련도감의 삼수병이 그렇듯이 조선군은 조총을 받아들인 후에도 활을 포기하지 못했으며 구한말까지도 그랬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화약 무기 도입 이전부터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던 유럽에서 가장 빨리 머스켓이 만들어지고 강선과 미니에탄이 개발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39]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17세기 이상으로 가면 조선군의 주력은 이미 조총이었고 활은 궁기병 부대에서나 사용했다. 기병은 편곤이나 장창 등을 들여와 충격력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총기병 도입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리고 양란 이후 조선에서 화기발전이 없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영조시기에 천보총을 개발하는 등 사거리를 늘려보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존재했었다.

또한 민간에서도 적지 않은 조총이 풀려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있다. 청나라 사람이 백두산과 영고탑에서 본 조선인들이 조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40] 조선과 청의 국경 근처에서는 이전부터 산삼 등을 노리고 월경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숙종 시기에는 조선인들이 조총으로 청의 관리를 쏴서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청에서 사람을 보내서 경고하는 일도 있었다.[41] 심지어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및 동학교도들도 죽창을 휘둘렀다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실제론는 조총을 주로 사용했다. 우금치 전투에서는 단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에게 화력에서 밀렸을 뿐이다.[42]

6.3. 중국의 조총사

중국에는 정확히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16세기 전중반에 일본보다도 먼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상륙 시 홍이포와 함께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왜구 대응용으로 주로 남방인 광둥성, 푸젠성, 저장성에 보급했다.

물론 중국의 총기류 자체는 서양보다 오래되었다. 금나라송나라 당시부터 이미 총의 선조뻘들이 나왔고, 원나라남송에서 투항한 한족들을 이용해 대규모 총포 부대를 운용해 일본 원정 및 남송과의 결전에서 써 먹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 조총은 유럽에서 발전시켰다.

참고로 중국은 총을 창(槍)이라고 부르는데 총의 원조가 불화살을 화약으로 추진해 발사하는 송나라 시대의 화창(火槍)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중국어로 창은 총을 뜻하며 개창(開槍)이 발포를 뜻한다. 송나라 초기 화창이 금나라원나라에서 삼안총 등으로 발전했고,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 원정에 화기를 동원하면서 유럽에도 총기 등 화약무기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화승총으로 발전하였다.
파일:Ming dynasty Musketeer 41.jpg
명나라 조총병

중국에서도 조총을 제식 무기로 도입했으며, 명나라 척계광왜구를 무리치기 위해 생각해 낸 남병 부대 편성 방식에서는 전차 부대의 16.5%, 기병 부대의 14.5%, 보병 부대의 40%를 조총으로 무장하게 하였다.

분명 강력하긴 했지만, 산악 지방이며 섬나라인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중장기병이 발달한 나라였고, 유럽의 테르시오와 같은 방식의 전법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대까지는 기병의 전투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실 높은 전투력을 가진 첨단 총포와 총포술을 익힌 부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넓은 영토에 배치된 거대한 규모의 군대 특성상 전부에 무기를 보급하고 신식 훈련을 도입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꽤 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그래도 조총부대가 꽤 많았다. 특히 왜구 침입을 막아야 했던 남병은 거의 조총으로 무장하다시피 했으며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도 북병은 내몽골 출신의 기병인 반면 남병은 화포 및 조총부대로 남병이 왜군을 더 잘 상대했다. 특히 남병이 보유한 화포는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적진을 날려버려서 평양성 탈환에도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에서도 명군은 조총 및 화포부대가 주력이고 후금군은 궁기병 위주였으나 기후가 따라주지 않고 명군 지휘관 간에 내분(...)이 벌어지는 등 이런저런 악재로 조총을 든 명군이 활로 무장한 비교적 원시적인 수준인 후금군에 썰려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명나라 말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삶이 어려워지자 많은 한족 장수들이 청군의 꼬드김에 넘어가 화약무기를 넘겨주는 통에 역으로 명군을 썰어 버리는데 크게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 대에 이르면 대규모로 화포의 사용이 이루어지면서, 준가르 토벌에서는 조총병과 포병이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명나라때는 화포의 활발한 개량과 도입이 이루어졌는데, 조사정이 1603년 작성한 조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등의 명나라 화약 병기 서적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이나 포르투갈의 화승총은 물론이고, 차륜식 머스킷 또한 운용하였다. 특기할 점은 명나라의 화약 무기 서적 중 하나인 하여빈의 <병록(兵錄)>에는 후장식 조총인 자모총과 착탈식 총검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총의 개량과 개발은 왕조가 교체된 후 이어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청나라는 초반에 만주몽골 기병팔기군이 주력이었다가 요동을 손에 넣은 후 한족들을 받아 들이면서 팔기 한군이라고 해군화포 담당 병과를 신설했다. 특히 모문룡이 처형당한 이후 홍이포 및 조총을 다루는 그의 부하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 청나라도 조총 및 홍이포를 손에 넣고 병자호란남한산성에 대규모 총격, 포격을 퍼붓는다. 특히 산봉우리 위에서 성벽 아래로 조총과 홍이포를 대규모로 퍼부어 성벽 일부를 부수고 다수 조선군을 전사시켜 버렸으며 이는 인조가 결국 항복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43] 입관 이후 강희제부터는 한족 용병인 녹영을 두었는데 이 녹영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런 조총병의 활약은 마지막 유목 제국이었던 준가르를 지도상에서 지워지게 만들었다. 물론 준가르 정복의 주연은 기병팔기군이었다. 문제는 건륭제 사후 팔기군은 오랜 평화에 젖어버려 군마를 팔아 치우고 몰래 장사를 하는 등 전투력 저하 행위를 했고 그 자체가 특권층화되어 무력 집단으로서 기능을 잃었다는 거. 그래서 나중에 군마 부족으로 기병이어야 할 팔기군 대부분이 몽골 팔기만 남고 나머진 보병으로 전락했고 그 땜빵은 총포를 운용하는 녹영이 해야했다.

물론 이후 총기 발전이 없었던 것은 조선과 다를 게 없어서 여전히 창병과 궁병이 편제에 남아 있을 정도였고 아편전쟁 당시에는 수석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일방적으로 갈려나갔다. 물론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44]

7. 논란

7.1. 조총은 아퀘버스인가? 머스킷인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조총이 머스킷이니 아퀘버스니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쉽게 단정하기가 힘든 것이, 일본 내에서도 16세기 초 유럽의 화승총 같이 비교적 작은 것부터 더 무겁고 구경도 큰 머스킷 이상으로 큰 것까지 다양한 구경의 소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머스킷이라는 단어 자체가 세월이 지나면서 16세기 유럽에서 창안한 대형 소총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구경이 작은 다른 전장식 소총(스네펀스식, 휠 락, 수석식, 뇌관식, 스냅 락 등 포함)이나 경우에 따라선 리볼버식이나 후장식 개조품을 포함한 전장식 스타일의 일부 초기 후장식 소총까지 말 그대로 머스킷=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화기의 위력이 세지면서 갑옷의 두께를 늘리는 것이 비효율적이게 되자 점차 갑옷을 경량화하거나 없애고, 그에 따라 큰 구경의 머스킷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머스킷도 구경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Bert S. Hall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처럼 경량화된 17세기 중반의 '머스킷'은 16세기 초의 '화승총'과 그 크기나 무게, 구경이 비슷해졌다.

하지만 아퀘버스와 머스킷을 구분할 때는 기본적으로 아퀘버스와 머스킷이 공존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정의에 따라서는 분명히 구분이 된다. 구분의 기준은 총 전체의 무게보다는 총의 위력과 구경이 중심이다. 문제는 아퀘버스와 머스킷이 공존한 시기가 아주 짧고 지역 군대 사람들 마다 머스킷을 큰 아퀘버스라 부른 경우나 반대로 작은 머스킷이라며 아퀘버스라 부르는 경우 그냥 싸잡아 머스킷이라 부른 경우등등 딱히 정확한 기준 없이 표기하는 사람이나 집단 기준에서 '작은것=아퀘버스, 큰것=머스킷'이라고 한거라 두개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다.

분명히 동아시아의 조총은 아퀘버스가 맞다. 일본의 조총은 평균적으로 4몬메 ~ 5몬메의 탄환을 사용하였는데, 그당시 유럽의 평균적인 아퀘버스 탄환 무게와 거의 동일하였다. 1몬메는 3.75그램이며, 일반적으로 아퀘버스의 탄환 무게는 19그램(5몬메)로 환산된다. 일본에서 조총을 도입한 조선은 탄환의 무게가 평균적으로 19그램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는데 이 역시 대강 아퀘버스의 범주로 들어간다. 표준적인 머스킷의 화력과 거의 일치하는 쥬몬메쓰쓰도 있었지만 "사무라이쓰쓰"라는 별칭대로 사무라이가 쓰던 것이라 일반화를 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기준은 총의 구경이다. 17세기 이후 머스킷이 경량화되어서 예전의 아퀘버스를 대체하긴 하였으나 구경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아퀘버스, 머스킷의 구분은 유효했고, 머스킷이 전장식 총 전체의 의미를 가지게 된 18세기 영국의 표준 머스킷이던 브라운 베스의 경우조차 무게는 예전 아퀘버스 정도인 4.5 킬로그램이지만 구경은 19mm로 이전 일반적인 머스킷의 구경과 일치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조총은 동시기 유럽의 총과 비교하면 같은 구경에 무게가 절반 정도였으며, 기계 장치(스냅 매치락 구조)는 훨신 단순했다. 이 점에서 머스킷보다는 아퀘버스라고 보는 측면이 타당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스펙을 놓고 까지 않아도, 아퀘버스라는 단어 자체가 굽은 총이라는 뜻이다. 둥글게 깎은 나무를 총신에 덧대어 만든 동아시아의 화승총은, 모양만 봐도 아퀘버스를 개조한 무기 체계이다. 애초에 그 기반이 된 화승총부터가 아퀘버스이기도 했고.

하지만 애초에 아퀘버스든 머스킷이든 간에, 화승총 혹은 전장식 총기라는 더 큰 분류에서 보면 기술적인 차이점은 크게 없다. 간단히 말해서, 서양에서 화승총의 체급에 따라서 나눈 분류일 뿐이며, 그나마도 두 용어를 혼용할 정도로 그리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서도 아퀘버스급으로 경량화된 패턴으로 회귀하며, 심지어 18세기 조선군의 조총 같은 경우에는 아퀘버스와 머스킷의 중간급 화력을 지닌 무기였다. 이런 기준만으로 무기의 성능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명심하자. 간단히 말해서, 동아시아에서는 머스킷 정도의 운동량을 지닌 화기가 별로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동아시아에서는 유럽처럼 중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화력을 올리기보다는 경량성을 추구한 면이 컸다. 차라리 머스킷 - 아퀘버스 시대의 중기형 화승총들이 라이플로 발전해가는 단계의 기계적인 구분을 보고 평가하는게 생산적인 비평이다.[45]

다만 서양의 머스킷은 아퀘버스와는 달리 개머리판까지 갖춘 경우가 많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머스킷은 구경도 더 크고 반동도 더 강했기 때문에 개머리판이 일찌감치 발달했다. 조총에는 개머리판이 없다는 점에서 아퀘버스 설에 무게가 더 실린다.

7.2. "삼단 철포 혁명"에 대한 논란

대표적 사례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 부대를 유력하게 활용하며 전장의 승기를 잡은 기록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셋으로 나눈 후 그 중 한 부대가 조준하고 발사하는 동안 다른 부대는 장전을 하여 전체적인 공격 중단 시간을 크게 줄임으로써 적 부대를 격파하였다는 것이 널리 퍼진 주장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삼단 철포 혁명으로 나가시노 전투를 이겼다는 것은 허구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더해 노부나가는 실제로는 이런 3열 교대식 사격 전술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전투 문서 참조.

게다가 삼단 철포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혁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조총 이전에 재장전이라는게 필요한 무기가 없는 게 아니다보니 궁병도 유사한 방법으로 이미 운용하고 있었는데, 중국 송나라 때의 병서에 보면 쇠뇌로 3열 교대식 진을 치고 연달아 쏘는 형태의 진형이 등장했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교대 사격 전술은 나가시노 전투 훨씬 이전에도 사용된 바 있다. 1525년 프랑스군스페인군이 맞붙은 파비아 전투에서 스페인 소총수들이 이런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는 오스만 제국예니체리 소총수들이 9열로 서서 교대 사격하여 헝가리 기사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조총보다 점화 체제가 뒤떨어진 승자총통을 주력 개인 화기로 사용한 조선에서도 승자총통 창제자인 김지가 승자총통수를 3열로 배치해 교대 사격하는 전술을 생각해냈다.

또한 조총 자체가 근본적으로 유럽에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교대 사격의 개념 또한 유럽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유럽에서의 교대 사격과는 양상이 다르고 유럽에서의 전투 양식으로 그대로 들여오려면 교관이 와서 훈련이라도 시키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장전 시간이 길다는 문제 때문에 여러 명이 한 조를 이루고 교대로 사격한다"는 정도의 개념은 몇 마디의 말로도 쉽게 전해지는 만큼, 총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군에서의 사용법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8. 무대뽀, "무텟포(無鉄砲)"

한국어에서 무대뽀라는 단어는 1997년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란 영화에서 '무대뽀 정신'을 강조하던 송강호의 인상깊은 연기 덕분에 유명세를 탔다. 물론 이 때 처음 쓰인 건 아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은 일본어의 잔재로 "일본 말 잔재를 없애자"는 순화운동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되는 단어였다.
MBC TV 일일연속극 「어머니」 대사 중 「무뎃뽀」 「삐까삐까」란 일본 말이 버젓이 방영되고 있으니 방송작가나 PD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무뎃뽀」란 일본인들이 한문으로 「無鐵砲」라 쓰고 「방향을 안보다」의 명사로 쓰는 말이다. 구태여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鐵砲」는 일어의 「小銃」을 말함이니 총없이 무턱대고 「돈키호테」와 같이 싸우러 나가는 어리석은 행동을 말한다. 일어를 외국어로 알고 쓴다면 무엇을 탓하랴마는 자칫 우리 말인줄 알고 쓰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생활 속의 일어 잔재를 씻자' 中 (동아일보, 1982년 9월 2일자)
그러나 무텟포의 어원은 철포가 없다는 뜻[46]의 무철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無手法 또는 無点法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테지 참고.

9.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9.1. 한국 사극

제작비 부족과 고증무시 때문에 소품용 조총의 퀄리티가 저질스러운 심지총 수준의 물건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만, 고증을 신경쓴 작품들도 등장하는 추세지만, 제작 노하우를 전혀 공유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준다.실제로 추노에서 준수한 고증을 했지만, 후속작인 조선총잡이에서는 허접한 소품이 등장한 사례가 있다.

일반적인 편견(심지에 불 붙여 다 타면 발사) 때문에 과거 임진왜란을 다룬 대부분의 사극에서 조총에 다들 심지를 끼우고 있었으나 시청자들의 오류 지적이 심해서인지 그런 모습은 줄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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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보기[47]

'추노'에서는 기존의 드라마들을 능가할 정도로 정확하게 나와 호평을 받았다. 다만 여기서는 화승에 연결되는 화문에 화약을 넣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하지만 고증 무시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 정도 고증이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물론 재미를 위해 일부러 생략한 것일 수 있는데 고증을 하나도 무시하지 않고 다 지킬 경우, 너무 오래 걸리는 장전시간 때문에 시청자들이 지루해서 채널을 돌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사극에 나오는 들이 전부 서러브레드인 이유가 위엄 넘치는 크기와 멋 때문이지 고증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 역시 고증대로 덩치가 작은 조랑말을 사용하면 뭔가 심하게 없어보인다.

과거 베스트셀러였던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안토니오 꼬레아30년 전쟁에 임해 전쟁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타네가시마[48]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리는데, 머스킷보다 구조상으로나 위력으로나 그다지 우월하지도 않은 일본 조총을 역수입할 이유가 전무하다. 대표적인 고증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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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방영된 '조선 총잡이'에서 또다시 심지총이 등장했다. 자칭 '총잡이 액션'이라면서, 추노에서 제대로 고증한데 비해 수년전 사라졌어야 할 심각한 고증오류가 다시 등장한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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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아예 용두가 사라져 버린, 정말 옛날 사극에나 볼 법한 소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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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회상씬에서는 매우 부족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 발전된 소품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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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방영된 왕의 얼굴에서는 영화 명량의 소품을 이용해 비교적 고증이 된 조총이 등장하여, 조선 총잡이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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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제작된 징비록(드라마)에서도 고증이 잘 된 조총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15화에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화승이 점화 화약에 불을 붙이는, 앞뒤가 바뀐 모습을 보여주는 미스를 선보였다. 화약 접시를 개폐하는 화문도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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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해에 나온 화정에서 또다시 심지총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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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르후 전투 장면에서는 제대로된 격발 방식의 조총을 구현해냈다...고 하지만 생김새를 보면 장식용 플린트락 머스킷에 부싯돌 대신 심지만 끼운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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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에서는 징비록에서 사용했던 소품을 재활용하였다. 재장전하는 장면에서 화약이 흰색으로 나오거나, 화승 심지가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발사되는 장면이 나오는 오류를 범하고 위력도 명량에서와 같이 상당히 큰 것처럼 나온다. 그래도 흑색화약이 연소되면서 발생하는 연기를 CG로 재연하였고, 총성도 화승총에 근접하게 나오는 등 징비록보다 더욱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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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명량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고증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바, 자세한건 명량/고증 문서에서 '전술 관련' 목차 참조.



남한산성(영화)에서 최고의 고증으로 조총을 묘사했다.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 끌여들여서 교대 사격으로 예봉을 꺾는 모습과, 지나치게 먼 거리에서 사격하여 운용 실패로 순식간에 패주하는 장면이 동시에 등장하여, 조총의 장단점을 조총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가 가능하도록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기 조선군 특유의 삼수병의 운용방식까지 고증되었으니 거의 완벽한 셈. 다만 어째서인지 활을 쏘는 사수는 등장하지 않았는데, 상기한 인조 실록에서 보이듯 조총 도래 이후 사실상 활이 퇴출되다 시피했다는 기록을 차용했을 수도 있다.

9.2. 외국 사극


일본 사극에서 전국시대를 다룰경우 자주 등장한다. 고증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2~3개 조로 나누어 사격과 재장전을 교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사수는 사격만 하고 부사수가 총을 건내받아 재장전해주는 방식으로 계속 사격하는 모습등도 등장한다.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본토결전을 앞두고 병기고를 시찰하는 내각 인사들 앞에 결전병기 중 하나로 전시되어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노보우의 성에서는 기마철포대도 등장한다.

9.3. 게임

황당하게도 야쿠자 액션 게임 용과 같이 2에서 사용 가능한 총기로 등장한다. 센고쿠파 본부(마개조 오사카 성)에서 등장하는 조총병들이 들고 나오는 일반 조총("화승총")과 투기장에서 코마키 소타로 할배를 쓰러뜨리면 입수 가능한 유니크 버전인 "코마키 가문 비전 화승총(古牧家伝統火縄銃)" 두 가지가 등장한다.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선 드레빈 샵에서 구입 가능한 무기로 등장하는데 가격도 비싸거니와 리로드 타임이 무지 길고, 총알도 드레빈 샵에서만 구입 가능하다. 하지만 야외에서 사용시 일정 확률로 카미카제가 발동, 맞은 적은 대량의 아이템을 뿌리고 사망한다. 하지만 노킬 노얼럿 플레이시엔 의미가 없으니 결국 취미&칭호 습득용 무기. 하지만 이 카미카제는 시체에도 적용된다. 즉 이벤트로 어쩔수 없이 죽어서 널부러진 시체를 쏴주면 대량의 탄약과 레이션을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주변에 적이 있는지 확인은 필수. 해볼려면 ACT.1의 B&B 부대에 학살당하는 민병들 시점이 적당.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어설트 라이플류로[49] 등장. 설계도는 EXTRA OPS 121번 혹은 122번을 클리어시 랜덤 확률로 등장. 성능은 랜덤 확률로 카미가제 발생 이후 적을 풀톤 회수. 그런데 MSG4에서 보여줬던 카미카제보다는 뭔가 좀 시원찮다. 그리고 적이 끌려올라갈 때 모습이 안습. 만약 이총을 공격용으로 사용하려면 포기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한 발 쏠때마다 재장전에 이동도 못한다. 단, 조총 특유의 리로드 모션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써도 좋다.

혹시 FPS 게임에서 조총을 쏴 보고 싶다면 배틀필드 1942전국시대 모드를 설치하여 플레이 해볼 것. 참고로 최대 휴행 탄수는 7발이며(진지 내의 무기 상자 찾아가면 충전 가능하다), 한발 쏘고 장전할 때 마다 매우 훌륭한 리로드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RTS 게임 중에서는 HQ Team의 임진록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게임 자체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지라 일본 진영에서 조총병이 등장하는데, 사거리는 조선 진영의 궁수에 못미치지만 데미지는 원거리 공격형 보병 유닛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다만 RTS의 한계상 길고 아름다운 장전은 나오지 못하고 결국 반자동 소총급이 되어버린 문제는 있지만, 활에 비해 사거리가 짧지만 파괴력이 높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는 성공한 편...이려나? 참고로 어째서인지 일본 진영에 조총병이 있고, 명나라 진영에 화승총병이라는 유닛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 조선만 활이다. 그러나 구버전인 임진록1 때는 화승총병은 조선 유닛이었고, 조총은 활이나 화승총보다 사거리와 위력이 더 뛰어났다. 다만 지대공 능력이 활에 비해 많이 약했고, 이 상성은 조선의 반격까지 이어졌다.

또다른 국산 RTS 충무공전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충무공전2에서는 일본의 조총수(총병)이 조선의 기마 유닛과 함께 게임의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유닛이다. 초반부터 거의 중반 유닛에 필적하는 데미지로 조선군 유닛들을 섬멸하는 성능을 보여준다. 마이크로 컨트롤식 RTS치고는 조총의 미칠듯한 장전 속도도 매우 잘 반영되어 있는데, 얼마나 느리냐면 업그레이드를 하기 이전에는 조선군 궁수가 2발 ~ 3발쯤 쏠 때도 재장전을 하고 있다. 재장전 중에서는 무빙샷도 안 돼서 총신을 청소하다가 활이나 칼에 난자당해서 죽는다. 장전 속도 업그레이드를 하면 궁수가 1.5발 ~ 2발 쏠 때 한발 쏘는 정도로 변하지만 그래도 느리다.

토탈 워 시리즈의 작품 중 하나인 토탈 워: 쇼군2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난반[50]과의 무역을 통해 얻는 방법과, 철포 국산화(Gunpowder Mastery) 기예를 습득함에 따라 얻는 경우가 있다. 철포 계열 유닛들은 전국 시대 유닛들 중에서는 사거리 내 화력만은 최강이지만 문제는 그놈의 사거리와 앞의 아군을 넘겨 쏠 수 없다는 점, 결정적으로 그 길고 아름다운 장전 속도. 제대로 운용하면 파괴력으로 기병이고 보병이고 다 썰어먹을 수 있지만 운용에 미숙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사용하기 힘들다. 우리가 아는 조총의 위상과는 달리, 쓰기에 따라 확 달라지는 병과. 그래도 무지 강력하다. 자세한 정보는 여기서 확인하자.

코에이의 전국 시대와 관련된 게임에서는 당연히 무조건 나온다. 다만, 이쪽은 조총이 아닌 철포로 언급되는데다가 철포가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는 태합입지전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조총의 시작은 신장의 야망11 천하창세부터 나온다. 다만 폭설이나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으며, 우철포로 양산이 가능한 군주의 규모는 패자부터이다. 더군다나 접근전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방어 수단이 없는데다가, 방어력은 검병이나 창병에 비하면 엄청나게 허접해서 근접용 부대가 몸빵 정도는 해야 된다. 남만 문화가 많이 올라간 상태에서 수성전으로 몰리면 화살탑이 조총탑으로 강화되면서 점령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공격 측은 사기가 많이 올라가지만 그 만큼 점령도 어렵다. 문으로 통하는 입구가 하나인데 조총탑이 2개 이상이면 어지간한 군대는 뚫어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독자 가문 고유기인 삼단구 / 원당 / 원규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신장의 야망12 혁신부터 등장하며, 이 독자 고유기는 타 가문에도 공유되지 않는 가문 전용 최종 병기다. 이는 이후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계승이 되며, 철포를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 가문이 대부분 우위를 점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최종 테크인 왕정 시대에 대학에서 연금술을 업그레이드하면 궁사양성소에서 생산할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조총이 아니라 핸드 캐논이다. 실제로 영문판에서는 'Hand Cannoneer'라고 나오지만 한글판에서 오역하여 조총수가 된 것. 오히려 스페인 특수 유닛인 정복자(콘키스타도르)가 조총수에 더 가깝다.

10. 기타

대한민국에서 '옛날 총' 하면 가장 먼저 '조총'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 시대사에 임진왜란이 하나의 분기점으로 나뉠정도로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대중들 사이에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조선군이 무력화당했다고 알려져 있다보니[51]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총과 친숙해 지는 것이다.

세기 중 막장 집단인 일본군이 활개치고 다니던 2차 대전 말기 일본에서는[52] 본토 결전용 병기랍시고 학교 책걸상을 분해한 다음 다른 재료들과 함께 대충 만든 해괴하게 생겨먹은 본토 결전용 조총이 등장한 바 있다. 이 정신나간 인간들은 조총 외에도 알루미늄에 화약을 넣고 위에 성냥을 꽂은 수류탄과 활, 죽창, 대공 투석기를 만들어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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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중에서도 총기 발전에 가장 답없었던[53] 에도 막부 시기 등장한 일본의 6연발 조총. 페리 제독의 철갑선과 함께 일본에 알려진 발전된 총기 형태들을 조총으로 대충 이리저리 맞추어본 것이다. 서양의 머스킷이 그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저런짓을 한 반면에 동아시아의 경우엔 유럽의 발전된 총기 형태에 놀라서 조총으로 따라 만들어 본 것이라 그 둘을 비교하기엔 좀 그렇다. 일단 저런 방식으로 된 조총의 사용법은 총신 6개를 모두 장전한 뒤, 손으로 총신을 돌려가며 한발씩 쏘는것이다. 페퍼박스 리볼버 초기형과 동일한 구조.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오뢰신기'라는 5연발 조총과 3연발 조총을 개발했으나, 어느 것이든 나중에 다 하나하나 수동으로 장전해야 한다는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이런 조총들은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거기다 무겁고 다루기도 불편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 3연발 조총은 서북 지역에서 조금 쓰였는데, 지역 특유의 거친 강풍 속에서 조금이라도 맞출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BB-GUN 메이커인 KTW[54]에서 타네가시마(タネガシマ)[55]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가격은 11만엔(대략 110만원)이며, 실총의 까다로운 장전방법을 간소화 해서 볼트액션 소총처럼 작동한다.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에서는 플라즈마 조총등장한다는 드립이 있다.[56]

그리고 가면라이더 가이무에서는 진짜 조총이 모티브인 화승대등 DJ 총이 나왔다. 그 다다음 해 작품인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도 조총이 모티브인 간 건 핸드간 건 캐처가 나왔다.


[1] 숙종 조는 효종 조에 이은 조선 조총 전성기였는데, 반대당인 서인 노론송시열여군(!) 창설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 조총의 배우기 쉬운 특성 때문이다. 특히 '어린아이도 항우를 대적할 수 있게 한다'는 발언은 단지 조총만이 아니라 이라는 무기 자체가 전쟁사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발언이기도 하다. 이슬람권에서도 어린아이나 여자도 전사를 죽일 수 있게 만드는 흉악한 무기라는 인식을 하였다.[2] 링크[3] 또한 그 갑옷이 14세기, 15세기의 플레이트 아머 정도가 되면, 100파운드 대의 장력을 가진 장궁도 뚫을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4] 다만 조선에서의 경우에는 다른 국가에 비해 활에다가 화약 뭉치를 붙여서 발사해 화살이 박히는 순간 폭발하게 하거나, 화살에 독을 발라 놓는 등 화살 자체의 살상력을 높이는 노력을 조선 초부터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랫동안 활과 총이 병용 가능했다.[5] 당장 삼포왜란 당시 장전과 편전을 10여발 맞고 버티던 적병이나 화살 수십발을 버티고 버티다 겨우 죽는 왜장에 대한 보고가 실록에 등장한다. '5번째 줄', '10번째 줄'[6] 아래에 기술된 인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아예 조총의 도래 이후 편전이 잊혀진 무기가 되었다는 언급까지 있다.[7]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조총을 대단치 않게 여긴 원인 중 하나다. 조총의 느린 연사 속도는 다수를 운용하며 전술을 활용하면 보완되긴 하는데, 가난한 농업국가인데다가 국세 비율이 낮았던 조선은 일단 그 다수의 총병을 운영할 여력이 없었고 이후에 조총의 위력에 매료되어 포수를 육성했을 때에도 밀집화망이 아니라 개인의 조준사격을 중시했다. 실제로 전투에서도 러시아가 극동에 진출했을 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고 파병된 조선군 포병들이 유럽에서 보편적이던 화망 형성이 아닌 단일 사격을 했다는 것을 러시아 측에서 기록한 바가 있다.[8] 대표적으로 모노노케 히메의 초반부 장면을 보면 조총과 핸드 캐논으로 무장한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전부 우산을 쓰고 다니고 한술 더 떠서 총구까지 종이로 막아버려서 화승과 화약이 젖지 않게 하였다.[9] 날씨가 궃은 날은 활이든 조총이든 가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총수가 화약을 총구에 넣는게 힘들정도로 바람이 심한 날이라면 활을 쏘는 사수입장에선 바람의 방향이 맞바람이 되는 순간 활을 쏘면 자기 발밑에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조총수가 화약이 비에 흠뻑 젖어 조총이 몽둥이만도 못하다고 한탄할 수준이면 사수 입장에서도 몇발 쏘니 활아교가 풀려서 활이 분해되어 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각오해야한다. 날씨가 안좋을때 근접무기비율이 높은 군대가 과감하게 돌진하여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를 이기는 경우는 제법 있지만,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끼리는 활이든 총이든 서로 악천후하에 전투자체를 꺼려하기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투사무기의 종류에 따라 날씨로 큰 이득을 보는 경우가 은근 찾기 힘들다.[10] 살상 거리 자체는 이것보다 길었지만 50미터를 벗어나면 탄도가 일정치 않아 명중률이 뚝 떨어졌다.[11] 속도 뿐만 아니라 활의 특성상 사거리와 관통력 까지 떨어지게 된다.[12] 지난번에는 더러 육량전을 시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사군관들이 궁시를 가지고 갔는데, 저들이 그 장대함을 보고, 인가를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만두기를 간곡히 청하였다. 그런데 개중에 한 건장한 왜인이 허세로 용력을 과시하며 대궁 당기기를 청하였는데 들으니, 이는 그들 중에서 장사라고 일컫는 자라고 하였다. 조 비장이 시험 삼아 쉬운 듯이 가볍게 한 번 당겨보이고는 그 왜인으로 하여금 당기가 하였더니, 그 왜인은 이를 악물고 팔뚝을 뽐내어 힘을 다해 당기었으나 오히려 활 시위를 벌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활을 팽개치고 달아나면서 혀를 빼물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휘저었다 한다. 아무리 용력이 있더라도 이미 쏘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당길 수 있었겠는가! - 조엄, 해차일기 영조 39년. 출처[13] 매치락인 조총보다 지발 가능성이 낮았으며 일반적으로 총신이 더 긴 머스킷이 명중률이 우월하다. 아예 불발이 될 확률은 플린트락이 더 높았으나 플린트락은 부싯돌로 직접 불꽃을 터뜨리는 방식이라 화승에 관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연사 속도는 플린트락이 우위.[14] 본래는 창병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후기로 가면 창병으로 통일되어 간다.[15] '16세기 ~ 17세기 鳥銃의 도입과 조선의 軍事的 변화' 참고.[16] 2차 대전기에는 3,000J의 에너지를 가진 소총탄도 위력이 약한 축이었고 강한건 4,000J까지도 갔었다.[17] 후한 말기는 조총은 고사하고, 화약조차도 없던 시대다.[18] 민어 부레로 만든 것으로, 소의 힘줄 등에서 뽑은 아교보다 접착력과 탄력성이 뛰어났다.[19] 종특인 활을 쓰기 불리한데 그렇다고 근접전으로 붙자니 왜군 종특이 단병 접전이라...[20] 승정원일기의 영조 1년 김시성(金始聲)의 상소에도 총이 활과 비교해 가지는 장점으로 습기가 찬 날에도 불만 붙이면 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21] 다만 화약 무기 다음으로는 활이었다. 지형상 성에서 싸우든 산과 숲에 의지해 싸우는 방식을 많이 취했는데 (적어도 방어전에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칼보다는 활이 낫고 포는 성에서는 모를까 산이나 숲에서는 무리였다.[22] 원래 1/3 살수(창병) 1/3 사수(궁수) 1/3포수(조총수)였지만 5,000명의 포수가 더해지면서 포수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15,000명 중 8000명 이상이 조총수였던 셈이다.[23] 속오군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전시에 징집되는 농민들이었는데 현재 예비군과 비슷하다. 하지만 훈련도도 형편없고 농사가 끝난 뒤 주기적으로 훈련하는 부대였지만 돈이나 곡물을 바쳐 훈련을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숙련도는 낮았다. 게다가 장비나 식량 지급도 잘 안 해주어서 자기 사비로 훈련받는 경우가 많을만큼 조정의 지원이나 병사들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진 부대였다.[24] 상주 전투에서도 훈련도가 낮았던 조선군의 궁시는 왜군에게 제대로 맞지도 않았을 정도였다.[25] 임란을 통틀어 경장이 전투를 지휘한 것은 이일상주 전투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신립탄금대 전투다. 그 이전까지는 정발, 송상현, 박홍, 박진 등등 현지 지휘관들이 전투를 이끌었으니 지휘관들조차 조총을 처음 봤을 가능성이 높다.[26] 해당 기사는 정확히는 을묘왜변 당시의 기사로 완전한 평시는 아니다. 다만 평소에 총통류를 거의 보유하지 않고 있다가 국지전 상황에서 급하게 총통을 현지조달해야 했던 후방의 준비상황은 확인할 수 있다.[27] 이건 사실 전술로 커버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과거 쇠뇌를 다루듯 순차 사격을 실시하면 거의 해결된다. 문제는 이걸 하려면 대규모의 병력을 집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대 조선군의 교리나 훈련도로는 구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쓸만한 병력은 소수 정예로 운영되고 대규모 병력은 훈련도가 상당히 낮은 상태였다. 게다가 고려 말부터 이미 쇠뇌가 도태된 상황이라 쇠뇌 운용 경험을 조총 운용에 접목시킬 기반도 부재했다.[28] 다만 조총에 밀려 소수였다.[29] 단 동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 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30]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그림으로 나선 정벌 당시 조총병을 묘사한 것이다.[31] 다만 저 모습은 장비가 완벽히 갖춰젔을 때의 모습으로 다수의 조총병이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32] 말을 구하고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든다.[33] 위의 군적부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군 보병의 70% ~ 80% 가까이가 조총이나 활을 사용하는 사수였고 근접전을 담당하는 보병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조선 시대 중후반기에 접어들어 팽배수를 비롯한 근접 보병들의 비중이 적어지면서 심해지게 된다.[34] 그러나 월 건(wall gun) 같은 대구경 머스킷을 수성전에서 저격용으로 쓰거나 짧고 가벼워 다루기 편한 카빈형 머스킷을 쓰는 등 서양쪽도 많은 바리에이션을 만들어낸건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보병용 머스킷이 기본 150cm길이에 총검 장착시 2m가까이 되었던 이유는 당시 야전에서 아직 위협적이었던 기병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대기병 방진을 만드는걸 고려해서였다.[35] 유럽에 비해 습도가 높기도 했거니와 원래 플린트락이 매치락보다 불발율이 높았다. 방아쇠를 당기면 직접 불붙은 화승을 약접에 갖다 대는 화승총과는 달리 플린트락은 부싯돌이 마찰해 일으킨 불꽃이 약접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습도보다 이것이 문제라서 플린트락의 경우 10발 중 1발 정도는 불발이 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화약 폭발 사고 위험이 매우 높은 화승도 버릴 수 있었고 속사 성능은 플린트락 쪽이 훨씬 나았다고 평가된다.[36] 부싯돌이 소모품이라 자주 교체해야 했다. 플린트락의 유지비용의 대부분이 부싯돌 비용인데다 발사장치의 스프링을 생산하는것도 조선으로선 만만한것이 아니었다.[37] 사실 습도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이 플린트락을 양산할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습도야 유럽도 만만치 않은데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남미나 동남아시아 같은 더 습한 지역에서 플린트락을 무리없이 운용했다. 특히 대량으로 플린트락을 운용한 영국은 우리나라보다 습하다. 플린트락의 개발을 주도한 것이 회중시계를 만들던 직공들이라고도 하니 그 정도로 정밀한 기계공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으로서는 대량 양산이 힘들 수 밖에 없었다.[38] 병자호란은 워낙 순식간에 털리고 항복을 선언해서 플린트락 소총을 만들고 말고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39] 전쟁만 오래 지속되었다면 당연히 경제 붕괴로 무기 개발이고 뭐고 없다. 서구, 아시아의 결정적 차이는 그렇게 전쟁을 벌이면서도 신대륙에서 뜯어온 귀금속과 초석 등 자원을 계속해서 쏟아부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40]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10월 10일 정유 1번째 기사.[41]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12월 1일 정해 1번째 기사.[42] 우금치 전투의 주력은 엄연히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이었고 일본군은 소수였다. 게틀링 등의 기관총이나 스나이더 소총 등 갑오개혁 이후 서양에서 도입한 무기들이 관군에서 대거 쓰였다.[43] 사실 결정적인 항복 원인은 강화도 함락으로 왕족들이 죄다 잡혔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조선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청군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고 심지어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대포병 사격하여 청군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더군더나 근왕병이 산성 주변에서 깔짝 거려서 시간이 부족한 청군은 더욱 조바심을 냈다.[44] 단 일본은 다이묘들이 개별적으로 총기를 사서 무장하는 정도는 막부 측이 문제삼지 않았기에 슬금슬금 들여와 나중에 자체 양산을 하거나 여러 차례 여러 방법으로 들여와 군대를 구성하는 일도 많았다. 물론 그래봐야 조직적인 군대 양성이 이뤄진 게 아니라 다를 건 없었지만.[45] 사실 조총의 분류에 대한 논란은 그리 큰 의미가 없는데, 냉병기에 대응해 생각해보면 일본도가 시미터냐 세이버냐와 같은 논쟁과 같은 소리다. 당연히 일본도는 시미터도 세이버도 아닌 일본도인것처럼 조총도 동아시아 화승총 중 조총을 가리키는 분류일 뿐이다.[46] 이쪽은 센고쿠시기에 다케다 카츠요리가 조총병 사단도 없이 무모하게 오다-도쿠가와 동맹과 전투하다가 졌다는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47] PC에서만 볼 수 있다.[48] 작중에서는 일본산 머스킷으로 등장.[49] 혹시라고 모르는 위키러를 위해 설명하자면 이 조총이 돌격소총으로 나왔단 소리다.[50] 남만.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서양 세력을 지칭한다.[51] 물론 조선군이 단지 조총 하나 때문에 패한 것은 아니다. 오랜 평화기를 보낸 조선군과 달리 일본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상당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고 여기에 제승방략이 가진 근본적 한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런 것이다.[52] 물론 이때는 처절하게 캐발리고 다니던 시절.[53] 본격적인 일본의 총기 발전사는 사실상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54] 동산모형과 업무협약을 맺은 회사이다.[55] 일본에서 조총을 최초로 만든 지역이라 일본에서는 조총을 타고시마라고 부른다.[56] 카라스마 소장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블레이드 특유의 온두루어 때문에 플라즈마 조총이라고 말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