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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898년 4월 21일 ~ 8월 13일 | ||
장소 | ||
카리브 해, 스페인령 필리핀 전역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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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틀:깃발| - 2,446명 전사[10] - 1,662명 부상 - 11명 포로 - 수송선 1척 격침 - 순양함 1척 중파 - 전함 1척 손상 | ]][[틀:깃발| ]][[미군| ]][[스페인군|]] - 15,700 ~ 15,800명 전사[11] - 700 ~ 800명 부상 - 40,000명 이상 포로 - 소형 선박 6척 격침 - 순양함 11척 격침 - 구축함 2척 격침 | |
결과 | ||
미국의 승리 | ||
영향 | ||
파리 조약 체결 스페인의 쿠바 독립 인정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 필리핀을 미국에게 2,000만 달러에 매각. 스페인 식민제국의 몰락과 미국의 태평양 패권 장악 |
[clearfix]
1. 개요
1898년 4월 21일부터 8월 13일까지 미국과 스페인 간에 벌어진 전쟁.대항해시대를 열고, 한때 중남미 일대를 장악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본좌로 자리잡았던 스페인이 미국에게 참패한 전쟁으로, 스페인 식민제국의 몰락과 미국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도 한다.[12]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마인드를 드러낸 역사적인 사건으로, 먼로 독트린에 반대하는 의견을 실질적으로 내비친 사건이자 열강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서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필리핀의 식민지화를 통해 팽창주의적인 외교전략을 실행하게 되었다.
2. 배경
2.1. 쿠바를 사이에 둔 미국과 스페인 간의 대립
쿠바는 16세기 이사벨 1세 당시 스페인이 정복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쿠바 섬을 차지함에 따라 스페인은 플로리다 해협을 통제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스페인령 식민지들로 들어가는 항로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카리브 해에서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으며, 스페인 자본에 의한 플랜테이션 농업도 성행했다. 얼마나 부유한 섬이었는지, 7년 전쟁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스페인 총독부를 점령한 영국은 총독부에서 노획한 재화로 막대한 전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스페인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나폴레옹 전쟁 중에 일어난 이베리아반도 전쟁과 뒤이은 내전(카를리스타 전쟁)으로 스페인 본국이 식민지 관리를 못하게 된 사이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령 식민지들은 일제히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 세력을 대륙에서 축출했다.(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 그리고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개입하지 말라"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개입 반대를 천명했다. 유럽 세력을 견제한 미국과 독립에 성공한 다른 식민지들의 영향을 받은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하지만 국력의 한계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은 사실상 포기한 스페인도 쿠바의 독립만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10년 전쟁(1868~1878)에서 쿠바 독립군을 격파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미국은 독립 이후 국가적 확장이 시작되면서 일찌감치 쿠바 섬을 노리게 되었다. 1803년에 있었던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미국의 영토를 2배로 늘린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절부터 쿠바의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쿠바에 대한 관심을 표한 것이었다. 더욱이 1848년 '미주리 타협'으로 북위 36도 30분 이남에 위치해 노예주가 세워졌어야 할 캘리포니아에 자유주가 세워진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남부 노예주들은 우리도 새로운 노예주를 추가해 세력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남부 확장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미국의 쿠바 합병 시도가 시작되었다.
1854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 윌리엄 마시의 지시로 벨기에의 오스텐더에서 주스페인 미국대사 피에르 술레와 주영국 미국대사 제임스 뷰캐넌, 주프랑스 미국대사 존 메이슨이 비밀리에 만나 쿠바 합병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을 보고서를 작성한 후 백악관에 제출했는데 보고서의 내용은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쿠바를 구매하는 것이 국익에 유익하며, 매입 금액은 1.5억 달러 정도로 추산 중"
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가격은 루이지애나나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구입한 서부 지역(1500만 달러)의 10배나 되는 가격이었으며, 720만 달러에 구매한 알래스카의 20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또 미국은 1819년 스페인과 협상을 통해 플로리다를 양도받은 적이 있어서 스페인이 이번 제안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 기대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가는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뒤의 내용이었다. "이 제안을 스페인이 거절할 경우, 힘으로 빼앗아도 정당하다."
라는 문장이었는데, 다시 말해서 미국의 쿠바 매각 제안을 스페인이 거절할 경우 몇 년 전 멕시코한테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과 전쟁을 해서 강제로 빼앗자는 것이었다.이 오스텐더 성명은 얼마 후 피에르 술레의 실수로 내용이 유출되었는데 이걸 본 스페인의 반응은 "너 미쳤나?!"였다.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는 쿠바의 경우, 그 다음 세기 프랑스의 알제리 같이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꾸준히 투자하면서, 이민을 보내고, 현지 사회를 육성한 자국의 정당한 고유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매각 제안을 거절하면 힘으로 빼앗아도 정당하다니, "안 팔면 전쟁이다?"라고 협박하는 거랑 다름없는 것으로, 대놓고 스페인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이에 경악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은 물론, 무력으로 노예제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에 분노한 북부 자유주들까지 거세게 항의하면서 미국의 쿠바 합병 시도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오스텐더 성명과는 별개로 쿠바 섬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쿠바의 플랜테이션 자본은 스페인 자본에서 대부분 미국 자본으로 교체되었고, 쿠바 거류 미국인도 늘어만 갔으며 쿠바 경제의 미국 예속이 심화되었다. 전쟁 직전인 1894년에는 쿠바의 수출품 중 무려 90%가 미국으로 향했으며, 반대로 쿠바의 수입품 중 40%가 미국산 물품이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쿠바는 스페인보다 미국에 밀접했다. 스페인으로서는 대서양 건너 쿠바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미국보다 열세인 건 당연했으나 결코 쿠바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쿠바와는 별개로 미국은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나 필리핀, 괌 등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당시에는 쿠바만큼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2.2. 쿠바 독립전쟁
1868년부터 1878년까지의 10년 독립전쟁에서 완전 독립의 쟁취에 실패하고 1879년~1880년의 무장 봉기마저 실패로 돌아간 이래 잠잠했던 쿠바 독립 세력은 1895년 다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계 자본의 자금 및 군수품 지원을 등에 업은 쿠바 독립주의자들은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싸웠으며 스페인 역시 독립을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총력전을 펼쳤다.
스페인은 쿠바 독립군이 쿠바 민중 속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쿠바에서 근대 최초의 강제 수용소까지 운영하며 당시 160만 명의 쿠바인 중 최대 40만 명을 강제 수용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메인 함 사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미국이 쿠바에 개입하려는 큰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이 쿠바를 접수한 이후 엄청난 인골 더미를 쌓아둔 사진까지 찍으며 스페인의 대학살로부터 미국이 쿠바를 구원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스페인 정부는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탈취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쿠바에 있는 성당들의 카타콤 묘지에 있는 인골들을 싹 쓸어다가 쌓아둬서 학살인것처럼 연출한 것일뿐이라면서 마치 스페인의 학살인양 선동했다고 항변했다. 스페인 정부는 현재도 수용소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며 모두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기 위해 스페인이 학살을 했다고 거짓 조작을 했을 뿐이며 이것은 근대판 흑색전설(black legend)일뿐이라며 쿠바인들에 대한 강제 수용소 사건에 대해서 아직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서양 건너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에게 불리했던 데다가 당시 스페인의 국력이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엔 마땅하지 않을 정도로 군사력이나 경제력 모두 엉망이었으며, 군대의 질적 수준 또한 유럽의 2류 내지 3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약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쿠바 독립군은 쿠바 섬의 상당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승리는 하지 못한 상태였다.
2.3. 메인 함 침몰 사건
1898년 1월 25일, 미합중국 해군은 윌리엄 매킨리 미합중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쿠바 주재 자국 거류민의 안전 확보 및 보호를 위해 함포 24문을 장착한 배수량 6,682t의 2등전함 ACR[13]-1 USS 메인[14] 함을 아바나에 급파했다. 그런데 2월 15일 밤 9시 40분, 메인 함은 아바나 항만에서 동시에 일어난 원인 불명의 2회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총 351명의 승조원[15] 중 261명이 사망[16]했다. 승조원 침실 밑에서 폭발이 발생한 탓에 사상자가 많았다. 폭발 당시 함장실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가 넘어져 가벼운 부상을 입고, 퇴함 작업 지휘 후 마지막으로 퇴함한 최선임 생존자인 함장 찰스 드와이트 식스비(Charles Dwight Sigsbee) 대령 등 생존자들은 근처에 있던 스페인 해군이 구조했다.미국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진상조사에 나섰다. 스페인은 공동조사를 제의했으나 미국이 거부해[17] 단독조사하여 2월 20일에 석탄저장고의 자연발화에 의한 탄약유폭[18]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미국 조사단은 "조사 결과 기뢰 폭발로 인해 침몰했다"는 발표를 3월 말에 내놓았다. 다만 누가 의도적으로 공격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결국 양국의 입장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고 미국의 여론은 복수를 외치고 있었다. 이때 나온 구호가
"메인 함을 기억하라!"
(Remember the Maine!)
로, 훗날 나온 (Remember the Maine!)
"진주만을 기억하라!"
(Remember the Pearl Harbor!)
의 원조였다.(Remember the Pearl Harbor!)
사실 메인 함의 침몰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미국과 스페인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기뢰설, 어뢰설, 석탄창고 자연발화설, 보일러 폭발설, 의도적인 폭파설, 포장 실수로 인한 탄약 유폭설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시대와 조사 주체 등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당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스페인이 의도적으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며, 생존한 함장 식스비 대령부터가 스페인 해군 장교들이 침몰하는 전함에서 탄약이 터져 계속 폭발이 일어나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이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생존 승조원들을 구조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부정하면서, 본국발 첫 보고서에 범인을 스페인 해군으로 속단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게 정말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 미국 내 반스페인 감정이 팽배한 상황에서 스페인 편을 조금이라도 들었다간 미국인들에게 완전히 매장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당시 미국인들은 이런 대령의 입장을 그냥 대령 개인의 의견 표명 정도로 받아들였는지 식스비 대령은 딱히 매장당하는 일 없이 전쟁 발발 후 다시 일선에 복귀한 뒤 소장으로 진급해 제독으로 영전하고,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공원과 해역[19]도 생기는 등 말년을 비교적 영광스럽게 보냈으며,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단 1971년에는 보일러실의 폭발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1998년에 메인호 폭발 100주기 기념으로 이루어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서는 선체가 안쪽으로 휜 것이 확인되고, 여러 면에서 기뢰로 추정되는 외부 충격에 의한 침몰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2002년에는 과거 스페인 측의 결론과 같은 자연발화로 인한 석탄창고의 화재가 원인이 되어 폭발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가설은 항만방어용 기뢰가 우연히 유실되어 흘러가다가 하필이면 메인 함 근처로 다가가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에서 철판이 안쪽으로 휘었다는 점과 스페인이 메인 함을 의도적으로 격침시킬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으나 확증할 증거는 없다.
그 외에 이 사건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쪽도 근거는 부족하다. 인명피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메인 함은 1895년에 취역해서 3년 밖에 안된 전함이었고, 당시 미국이 보유한 전함은 메인을 포함해서 6척뿐이었다. 전함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소형 보조함이라면 모를까, 해군의 주력인 전함을 자폭시키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어쨌든 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황색언론들은 전쟁을 부르짖었고 여론은 폭발했다. 4월 11일에 대통령이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자 미 의회는 19일자로 쿠바 독립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해 쿠바의 독립을 도울 것임을 의결하고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이를 전달받은 스페인 역시 4월 23일에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신흥 강국과 전통 강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메인 함의 선체는 미 당국이 1911년에 인양했다. 외부적인 원인이 사고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으나 배 바닥은 자세히 검사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1912년에 바깥 바다로 끌고 가서 그냥 가라앉혀 버렸다.
실제 메인 함 침몰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현재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미국인들에게도 당시 상황이 꽤나 수상했는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국무장관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국무회의 도중
"관타나모 만이던 어디던, 메인 함같이 배 좀 다시 침몰시켜보자."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 경과
이 전쟁의 승패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당시 미국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보다는 전쟁 경험이 부족했지만 산업혁명을 빨리 이룩하여 선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였고, 인구와 자원이 풍부하여 발전의 가능성이 높은 나라였던 데 반해 스페인은 이미 19세기 초에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에 있었던 거대한 해외 식민지들을 대부분 잃어 몰락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미국이 이제 막 신체의 폼이 절정으로 향해 가는 성장기 청소년기였다면 스페인은 노쇠할 대로 노쇠한 노년기였던 셈이다. 청년과 노년의 싸움이었으니 승패는 이미 거기서부터 갈린 것이었다.[20]3.1. 카리브 해 전역
미국의 전쟁 목표는 최우선적으로 카리브 해, 특히 쿠바에 있었다. 6월 6일 미 해군은 우선 플로리다에서 가장 가까운 관타나모만에 진입하여, 지상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같은 달 22일, 미 육군 5군단은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의 동부에 무저항 상륙했다. 진격하던 미 육군은 7월 1일 엘 카네이 전투(El Caney order of battle)와 산 후안 언덕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에서 요격에 나선 스페인 육군을 완파했으며 쿠바 독립군과 합류한 후 7월 17일 요충지인 산티아고를 함락시키고 스페인 육군 11,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쿠바 섬의 스페인 군사력은 사실상 소멸했다.스페인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황급히 함대를 쿠바로 급파했으나 본토 방위를 위해 주력함은 다 빼 놓아야 했고, 결국 이들 함대는 산티아고 함락 직전에 도주하다가 미 해군에 의해 포착되어 궤멸당했다. 이로써 카리브 해의 제해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쿠바 섬을 점령하고 카리브 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은 만족하지 않고 보다 동쪽으로 나아갔다. 카리브 해의 동쪽 끝에 있는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새로운 타겟이었다.
7월 25일 미군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푸에르토리코의 과니카에 지상군을 상륙시켰다. 여기서도 反스페인 게릴라 세력의 도움을 받은 미 육군은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스페인 육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순식간에 섬을 점령했다. 이로서 스페인 세력은 아메리카에서 축출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바하마 상륙 이후 406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카리브 해에 만족하지 않았다.
3.2. 필리핀 전역
사실 미국은 카리브해 이외에도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Manifest Destiny
(명백한 운명)
이라는 신념에 따른 일련의 확장 정책 때문이었다.(명백한 운명)
애초에 미국은 동부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줄기차게 뻗어나간 나라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축출하고 북아메리카의 서부마저 미국의 손에 떨어진 이상 이제 바다 말고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미국은 끊임없이 서쪽 바다인 태평양으로 함대를 파견해 영역을 확장하려 했으며 이에 하와이를 속령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동양 국가들에도 함대를 보냈는데, 일본의 쿠로후네 사건과 조선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및 신미양요 또한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남북 전쟁의 수습이 더 중요했는지라 본격적인 세력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시점인 1895년쯤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 아시아에서도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이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점찍어둔 곳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도 이미 마젤란의 발견 이후 16세기 스페인의 카를 5세가 포르투갈로부터 사라고사 조약을 거쳐 획득했고,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총독을 보내 수세기 동안 꾸준히 통치해 온 땅이었다.
필리핀은 아시아 대륙 최동부에 위치한 군도이면서 중국과도 가깝고, 기후와 자원도 풍요로우며 골골대는 스페인도 통치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 세력도 변변찮았다. 원래는 남부의 민다나오 섬과 서부의 술루 제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2개의 이슬람 왕국이 브루나이와 연계해 마닐라를 일시 점령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여 스페인도 통치에 애를 먹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2개의 이슬람 왕조도 국력이 매우 약해져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제하기 쉬워졌다. 한편 미국 입장에서는 스페인이라는 압제자로부터 필리핀을 해방시켜준다는 명분이 그럴싸했기 때문에 잡아먹기 딱 알맞았다.
개전 뒤 불과 1주일 만인 5월 1일 영국령 홍콩에 모여 있었던 미 아시아함대가 필리핀의 마닐라 만에 출현했다. 4척의 장갑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미 함대는 스페인 함대를 급습하여 장갑순양함 2척과 일반순양함 5척, 수송선 1척을 격침시키고,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내어 서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했다.(마닐라 만 해전)
필리핀 역시 쿠바와 마찬가지로 反스페인 독립투쟁이 한창이었으나 스페인의 우선순위는 쿠바였기에 필리핀의 스페인군은 상대적으로 병력도 적고, 패배의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미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침공해 오자 항복했다. 이후 마닐라 만에는 홍콩에서 발진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4개국 함대가 전개하여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했다.
6월 20일에는 미 해군 순양함 USS 찰스턴 함이 해병대와 승조원들로 구성된 해군 육전대를 괌에 상륙시켜 무혈 점령했다.
수백년 동안 통치해온 필리핀을 순식간에 잃어버리자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본토 방위를 위해 대기시키던 주력함대를 필리핀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이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직후 미국의 주력함대가 스페인 본토로 기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주요 열강이 미국 지지를 확고히 하여 국제적으로 스페인이 고립되자 결국 함대를 회항시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우리는 메인 함 침몰의 불분명한 원인, 전쟁 수행 과정, 전후 쿠바와 필리핀에 대한 처우와 미국의 속내를 상세히 알고 있지만 당시 스페인은 미국 언론의 어마어마한 황색언론 경쟁으로 정말 전세계 악역 포지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가뜩이나 쿠바 독립군을 10년 동안 과격하게 진압 중이었는데 선제공격까지 가해 군함을 침몰시킨 것으로 전세계에 방방곡곡 알려졌으니... 특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이끌던 <모닝 통신>은 하루가 멀다하고 메인 함 침몰을 1면에 실어 타락하고 잔인한 문명국 스페인을 강조하며 복수를 부르짖었고, 개전 이후에도 메인 함 침몰 지점에 잠수부까지 파견해 특집 기사를 계속 실었다.
4. 결과
미 육군(좌)에 항복하는 스페인 육군(우)
카리브 해와 필리핀에서 모두 참패한 스페인은 결국 종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했으며 필리핀도 2,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야 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로써 화려한 스페인 제국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팔라우와 캐롤라인 제도, 북마리아나 제도가 여전히 스페인령이었으나 이것만으로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으며 그나마 패전으로 인해 유지할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은 1899년 식민지 확대를 꿈꾸는 독일 제국에게 2500만 페세타(1700만 마르크)에 매각하면서 포기해야 했다. 독일 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인 태평양 제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 포함시켰다.[21] 이 전쟁의 패전으로 스페인은 500년 가까이 유지하던 쿠바를 잃었으며, 미국이 대서양의 패권국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쿠바의 경우 스페인의 또 다른 본토로 여겨지기도 했기에 여파가 컸다.
이 시점에 스페인에 남은 식민지는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모로코-스페인령 사하라와 중앙아프리카의 스페인령 기니 정도였다. 그나마 스페인령 기니도 이후 파리 조약의 결과로 인해 기존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나이저 강 ~ 가봉의 오고웨 강(Ogooué) 영역에서 북쪽과 남쪽을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 넘겨주고 영역이 축소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결국 이들을 독립시키거나, 1956년에 독립한 신생국가인 모로코에게 영유권을 넘겼고 현대에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만을 자치 도시(Autonomous cities)와 자치 지방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나마 이게 가능했던 것도 현지 주민들이 대부분 스페인 본토 출신 이주민인 데다가 본토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동질성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 남은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섬들[22]은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중앙정부의 통치하에 있다.
미국은 카리브 해의 패권을 차지하여 먼로 독트린을 무력으로 실현시켰다. 또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써 서태평양과 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걸친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이 이 시점에서 몰락하고 그 왕관을 미국이 넘겨받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미국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쿠바인 및 필리핀인과의 전투가 아닌 철저하게 식민제국인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약속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스페인군만을 상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실제로 쿠바 상륙 초반부터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가 이끄는 쿠바 독립군이 합류했고, 미국 국내에서도 마크 트웨인같이 본질을 꿰뚫어 본 인물도 있었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같이 배달의 기수 미국에 대한 환상으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다. 미국 국내의 흑인 공동체도 쿠바 독립군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전쟁 수행을 지원했으며 부커 T. 워싱턴 같은 흑인 지도자도 전쟁 수행을 독려했다. 침몰한 메인 함에서 사망한 33명의 흑인 승조원들도 주요 선동 수단으로 쓰였다.
어쨌건 명분은 쿠바의 독립이었으니 4년 동안 군정을 실시한 후 1902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독립시켰다. 그러나 관타나모를 미국에 헐값으로 임대해야 했으며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무늬만 독립국인 사실상 속국이었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관타나모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국이 이용 중이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쿠바 독립을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23] 참고로 노예주-자유주 대립이 심화될 때 '쿠바를 점령해 노예주로 삼자!'는 운동이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쿠바를 합병하지 않는다'는 법률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해서는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식민지로 간주하여 독립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에도 저항했는데, 결국 미국과 필리핀 독립세력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끝에 필리핀 독립세력은 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미국-필리핀 전쟁) 미국이 오기 전에 이미 필리핀은 독립 상태였고, 정부와 대통령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미국은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뿐만 아니라 당시 필리핀 영토에 속해있지 않았던 민다나오 섬과 술루 제도 등을 1912년까지 무력 점령하여 미국령 필리핀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필리핀 통치를 어디까지나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선전했고 이 때문에 다른 식민지에 비하면 많은 자치권을 보장해 준 편이었지만 친미 지주 계급인 필리피노스들에게만 이권을 보장해 주고, 그들을 잘 대해 주었을 뿐 일반 필리핀인들은 여느 식민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착취의 대상이었다.
대서양-태평양 두 대양에 걸친 국가를 건설하다 보니 해군력의 분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직 열강에 비하면 허약했던 미국의 해군력을 괜히 분산시키다간 참패할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전력을 집중시키면 나머지 한 쪽의 대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결국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게 되었다.
일본도 엉뚱하게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부족한 해군 전력으로 독자적인 필리핀 방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미국[24]이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것이다.
5. 여담
- 초전부터 고전한 스페인 해군에 비해 스페인 육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쿠바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산 후안 언덕 요새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에서는 스페인군 보다 10배의 수적 우위를 가진 미군이 오히려 사상자는 3배[25]나 많이 내고 승리하는 추태를 보였는데 이후 벌어진 엘 카네이(Al Caney) 전투와 7월 13일 산티아고 전투에서도 수적 우위에 비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아래에 서술했다시피 양 군의 주력 제식 개인화기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후 미군은 크라그-에르겐센에서 스프링필드 M1903로 제식 화기를 교체했다.
-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비난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처음 이 전쟁을 지지했다가 조국도 학살과 식민지배를 되풀이하는 것에 경악했다. 미국도 당시 유럽과 별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미국과 상층부를 격렬하게 깠다가 무려 24년이나 출판금지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평가받는 당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개인 성향 탓도 컸다.[26]
- 참고로 당시 미국 저널리즘계에서는 신문왕이었던 조셉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사이의 경쟁이 한창이었는데 매출을 올리기 위해 메인호 폭발 사건 보도시 자극적인 삽화나 허위 기사로 미국의 여론을 고무시켰고 벌거벗은 세계사 미국-스페인 전쟁 편에도 이 내용을 다룬다. 이처럼 언론의 부추김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가짜 뉴스,허위사실 보도 등 여러 일이 벌어졌기에 황색언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전쟁이다. [27]
- 이원복은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이 전쟁을 대충 벌어진 충돌로 그렸으며, 미국이 울면서 필리핀에 돈을 투자하는 그림과 같이 우린 제국주의와 다르다느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필리핀의 노른자위 땅이나 사업권을 챙겼으며, 결코 손해 보는 지배를 하지 않았다.
- 나비 효과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주의파 군대 지휘관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가문은 원래 대대로 해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미국-스페인 전쟁의 패배로 식민지를 거의 다 상실한 스페인이 해군을 대폭 축소하면서 해군 장교 양성도 중단되어 버렸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프랑코는 꿩 대신 닭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육군 장교로 커리어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모로코와 적도 기니뿐이었는데, 적도 기니보다 모로코가 훨씬 중요했기에 스페인은 정말 모로코를 사수하는 데 목숨을 걸다시피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로코에 주둔하는 스페인군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 버렸고 그 주둔군 사령관의 입김도 거세지게 되었다. 모로코 주둔 병력의 규모와 질 역시 스페인 군부 내에서 상당히 뛰어났다.[28] 그리고 프랑코가 바로 모로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 사령관 출신이었다. 다만 프랑코의 형은 가문의 전통대로 해군이 되어서 내전 중 동생을 지지했다.
-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패전은 스페인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중남미 식민지의 상당수를 잃게 되었는데 미국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끝장난 셈이었다.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녔고 가톨릭을 믿는 모국이 벼락출세한 개신교 신생국가에게 처절하게 패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히 컸고, 이로 인해 기존의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반발심이 점점 더 커져갔다. 17세기부터 정치적 상황이 혼란했던 스페인은 당시 어린 알폰소 13세가 모후의 섭정을 받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되는 혼란스러운 정치-사회적 상황이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98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적• 문학적 사조가 등장하여 전후 스페인 사회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와 외상에 대해 분석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뒤집어보면 스페인 인문학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 이 전쟁에서 미군은 개틀링으로 스페인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개인화기에서는 후장식 스프링필드 M1873이나 크라그-에르겐센을 사용했고[29] 이 때문에 스페인군의 개인화기였던 M1893 스패니시 마우저에 호되게 당했다. 스트리퍼 클립을 통해 빠르게 장전이 가능하고, 5연발 내장식 탄창을 가진 스패니시 마우저에 비해 미군의 크라그-에르겐센 소총은 클립장전이 안 돼 한 발씩 장전해야 했다. 이에 미군은 새로운 개인화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1903년에 마우저 계열 소총을 참고하여 스프링필드 M1903을 개발했다.
- 이 전쟁의 연장선상인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미군은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을 상대로 뜻밖의 피해를 입었다.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은 금속 갑옷인 경번갑을 입었는데 이 경번갑의 방호력이 상당히 좋았는지 1899년 필리핀을 침공한 미군이 모로족과 싸웠을 무렵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출처 그리고 이 사례는 이후 M1911를 도입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사례로 인해 미군은 기존의 권총에 쓰인 38 롱 콜트 탄의 위력을 문제삼고, 더 강한 탄인 45구경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45구경을 사용하는 자동권총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자동권총 도입 심사에 출품한 물건 중의 하나가 바로 M1911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M1911 문서 참고.
- 이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스페인은 본국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괌에 알리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도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가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미 해군 군함이 산타크루스 요새에 13발의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괌의 스페인 고위대표들은 작은 배를 저어서 군함에 승선해 이렇게 말했다."예포를 후하게 쏘아준 것에 감사해하며 우리도 그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예포를 꺼내 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리니 양해를 부탁한다."
이에 난처해하던 미국측은 이내 미국과 스페인은 전쟁 중이고, 자기들은 인사가 아닌 전투를 개시하려고 한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괌은 2개월 넘게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가 적군에 의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다 못해 제대로 피해를 줬다면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고 해도 괌 측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느냐?'라며 정식 항의할 여지라도 있었는데 당시 미군의 포격도 요새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런 착각이 가능했던 것이다. 저항의지를 상실한 괌은 며칠 후 항복했고 아직까지도 미국령으로 남아있다.
- 쿠바를 잃은 스페인의 자본은 국내 투자에 집중되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의 경제가 활성화되기도 했다.[30]
- 쿠바 전역에서 발생한 미군의 사망자들 중 대다수는 전사가 아닌 상한 식량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망자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이 쇠고기 통조림이었는데 당시 참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이걸 먹느니 차라리 모자를 씹어 먹는 게 더 낫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이 불량 통조림 생산은 여전해서 업튼 싱클레어가 육류 업체의 실상을 폭로한 소설인 《정글》이 결정타를 날려 식품관리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6. 대중매체
- 존 밀리어스 감독, 톰 베린저 주연의 TV 영화 <Rough Riders>(1997년)가 이 전쟁에 참전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그의 의용군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용은 '미국 만세!' 국뽕 영화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사실 루즈벨트의 전공 자체가 뻥튀기이기도 하다.
- <007 네버 다이>에서 엘리엇 카버(조너선 프라이스)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는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에게 전쟁의 원인이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 2016년 스페인에서 제작된 영화 <1898. Los últimos de Filipinas> 에서는 이 시기 필리핀의 오지에서 전쟁이 끝나버린줄도 모르고 현지의 독립세력과 싸우는 스페인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발레르 전투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는 스페인에서도 꽤나 유명한 일화이다.
-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연 중 한 명인 유진 초이가 미군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으로 등장한다.[31] 특히 2화의 엘 카네이 전투에서 스페인군과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32]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일본도 필리핀 해방을 목표로 참여해 미서일 전쟁이 된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베를린 회의로 인해 식민지의 문명화 조건이 까다로워져 식민지가 잡아먹는 비용이 급등함에 따라 미국이 대외 팽창정책를 재고하는 중 한양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필리핀이 해방된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예로운 후퇴'를 제의했는데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여 매각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력을 동원해서 쿠바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허스트의 공격에 기를 못 쓰고 있다.
- <엠파이어 어스 2>에서 미국 캠페인의 시작 시점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1] 엘 카네이 전투(Batalla de El Caney)라고도 한다. 사실 엘 카네이 전투는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의 전투들 중 하나지만 대명사로 쓰인다.[2] 필리핀 제1공화국으로 계승.[3] 쿠바 제1공화국으로 계승.[4] 미국 대통령.[5] 미국 해군차관. 훗날 부통령이 되어 매킨리 암살 후 미국 대통령.[6] 필리핀 대통령.[7] 스페인 국왕.[8] 스페인 국왕 대비 및 섭정. 알폰소 13세가 태어나자마자 왕이 되어서 당시 알폰소 13세는 아직 10대 소년이었기 때문이다.[9] 스페인 총리.[10] 이중 2,061명이 병사했다.[11] 이중 15,000명이 병사했다.[12] '서'는 청나라 시절 에스파냐(Espana)를 음차한 서반아(西班牙)에서 따온 것이었다.[13] 장갑순양함(Armored Cruiser)이라는 뜻이나, 2등전함(2nd Class Battleship)으로도 분류된다.[14] 이 이름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BB-10 메인과 몬태나급 전함 3번함이 계승했다.[15] 장교 26명, 부사관 및 수병 290명, 해병 39명으로 총 355명이 승선했으나 이 중 4명이 하선 중이었다.[16] 장교 2명과 사병 250명이 현장에서, 나머지 9명은 구조된 후 사망했다.[17] 스페인이 조사하는 척하면서 증거를 조작할지도 모른다고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다.[18] 이미 사건 당시 많은 미 해군 관계자들도 이 설을 지지했다. 다른 미국 군함에서도 유사 사례가 발생한 바 있었다.[19] 플로리다 주 드레드거스 케이(Dredgers Key)에 위치한 식스비 공원(Sigsbee Park) 및 멕시코 만 내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해역인 Sigsbee Deep.[20] 애초에 전쟁의 원인이 된 메인함 침몰 사고를 당한 측은 미국이었는데, 정작 그 사고를 적극적으로 밝히려고 하지 않은 것 또한 미국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단 우연치 않게 발생한 사고였을 테지만, 전쟁에 대한 명분을 도저히 주지 않는 스페인을 상대로 트집잡아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명분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스페인의 편을 들 수 있는 유럽에까지 황색언론을 퍼트리는 것을 주도 내지 방치한 것이었다.[21] 그런 독일 제국도 뉴기니, 태평양 제도, 탄자니아, 나미비아, 카메룬, 토고, 칭다오 등 갖고 있었던 식민지들 대부분을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전부 잃었다.[22] 영구 정착 거주민이 없고, 군사기지만 있다.[23] 다만 애초에 전쟁 명분이 "쿠바 독립을 돕는다" 였는지라 쿠바 귀속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가능은 했겠지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을 것이다.[24] 심지어 영일동맹까지 고려해야 했다.[25] 미군 8,412명 중 사상자 1,240명. 스페인군은 800명 중 사상자 482명이었다.[26] 헌데 매킨리는 오히려 재선 선거 운동에서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던 수많은 식민지인들을 자신이 구했다"고 뻥카를 쳤고, 이게 먹혀들어 무난하게 당선되었지만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27] 참고로 황색 언론이 벌인 사건은 메인호 사건 뿐만 아니며 올리벳 호 사건도 있다. 당시 쿠바 여성이었던 클레멘시아 아란고가 반란군의 편지를 지니고 있다는 혐의로 미국 국적의 선박인 올리벳 호에서 적절한 절차에 따라 여경이 행한 수색이었지만 허스트의 언론은 삽화와 기사에 남성 경찰들이 여성을 알몸 수색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를 실어 미국인들을 선동했다. 지방 언론도 예외는 아니어서 7개월 동안 《LA 타임스》나 《시카고 트리뷴》 같은 지방지 독자들도 매일 평균 10개 이상의 쿠바 관련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28] 이들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Cuerpo de Ejército Marroquí)과 모로코인 외인부대가 스페인 내전 당시 극우파 국민군의 주력이 되었다.[29] 미 육군 기준. 미 해병대는 M1895 리 네이비 소총이 제식이었다.[30] 사실 식민지를 갖고 있었던 국가들 중에는 대부분의 역량이 식민지 경영에 쏠리게 되는 바람에 정작 자국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반면 식민지가 별로 없었던 독일 제국은 자국의 역량이 강해졌고 이로 인해 제1, 2차 세계대전을 벌일 정도로 체급이 올라갔다.[31] 일부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재필이 미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바 있다.[32] 서양 열강들 사이의 전투를 찍은 최초의 한국 드라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