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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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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ខ្មែរក្រហម
Khmers rouges
활동 지역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제1왕국
파일:크메르 공화국 국기.svg 크메르 공화국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1]
결성 목적 캄보디아공산화
결성일 1951년 6월
해산일 1999년
이념 크메르 민족주의
공산주의[2]
농본주의
참전 승전 베트남 전쟁
승전 캄보디아 내전
패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승전 베트남의 태국 국경 습격
관계
동맹국 및 동맹 세력 적대국 및 적대 세력
~19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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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기.svg 베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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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파일: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파일:라오스 국기.svg 파테트라오
파일:소련 국기.svg 소비에트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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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제1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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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베트남 공화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1978~19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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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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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오스 국기.svg 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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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좌익 무장 단체 시절3.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4. 게릴라 투쟁에서 해체까지5. 과거사 청산과 전범 재판6. 출처

[clearfix]

1. 개요

1951년에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 무장 단체. 80년대에 대한민국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인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로 유명하다. 이는 프랑스어 표기이며 현지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 Khmêr Krâhâm)'[5]이라고 하는데 두 명칭 모두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지닌다.[6]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민주 캄푸치아라는 국가를 세워 지배하였으나 국가를 지배하면서 비인간적인 수뇌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나라를 초토화시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인들에게 이어지는 막대한 심리적 상처와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매우 극단적이었던 데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며 아예 공산주의, 사회주의지능적 안티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 미국의 키신저정치현실주의 외교 정책을 비판할 때 크메르 루주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원복 교수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해당 이름은 원래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 공산당이나 공산당 지지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 호칭이라고 한다. 도올 김용옥의 <<앙코르와트 월남 가다>>에 따르면, 시아누크 국왕은 자신의 신민들을 다섯 정치세력으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그 중 '붉은 크메르'가 바로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다.[7]

2. 좌익 무장 단체 시절

북베트남의 지원으로 탄생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 세력을 확대하여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사실 붉은 크메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크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군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가했으며 친미 우익 세력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군은 캄보디아에 베트콩이 다수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23만 발의 폭탄을 떨어트렸다. 캄보디아는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발발 후 미국과 단교하였고 1966년에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내에 기지를 설치하고 시아누크빌로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친북베트남 외교 정책을 펼쳤다. 베트콩 게릴라는 보급이나 기습 용도로 구찌 땅굴을 이용했는데, 이 땅굴은 베트남은 물론 인접한 캄보디아라오스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 폭격이 베트콩의 땅굴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고, 되레 그 폭격에 죽은 민간인만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의회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 성장이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늘어나며 이념 대립도 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우익 쿠데타가 벌어져 론 놀에 의한 친미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론 놀 정권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못 본 체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특히 당시 군부도 학살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인 막장이었기에 캄보디아에서 반미 정서가 팽배해졌다. 결국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와 손을 잡으며 지지 기반을 급속히 늘릴 수 있었고, 1975년에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1975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성립되었다.

3.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

처음에는 시아누크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각종 괴상한 정책으로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러한 반발을 킬링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극으로 억눌렀다. 이들의 통치 시기에 관해서는 민주 캄푸치아 문서를 참고 바람.

이후 베트남에게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겠다며 베트남과 국경 분쟁을 벌이며 충돌하다가 베트남군과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정권이 붕괴한다.

4. 게릴라 투쟁에서 해체까지

1979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베트남군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었지만 폴 포트와 키우삼판 등 권력을 잃고 몰락한 크메르 루주 세력은 국제 사회와 서방 세계로부터 합법 정권의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세운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과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테러를 벌이며 전쟁을 이어갔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구 프랑스인도차이나의 권역을 베트남이 지배하려는 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더 나아가 태국까지 병합하여 베트남 제국을 건설하려는 베트남 팽창주의의 야욕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된 당사자 태국은 물론 베트남에게 원한이 있는 중국과 미국이 모두 반발하였으며 싱가포르, 호주 등 공산주의 확산에 경계심을 곧추세우고 있던 동남아-오세아니아 국가들이 가세하였다.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은 크메르 루주 지원을 주장하였고, 크메르 루주의 깽판을 인지하고 있던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아닌 제3의 세력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ASEAN은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고 1981년에 ASEAN은 크메르 루주 무장 해제 요구를 포기하였다.

결국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여 망명 중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를 데려와 국가 주석으로 옹립하고 민족주의자 손 산을 수상으로, 크메르 루주의 키우 삼판을 외교부장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가 1982년 6월 22일에 수립되어 반 베트남의 기치 아래 모인 미국, 중국, 태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반면 소련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하며 매년 무려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는데 이는 미국이 태국에 제공하는 연간 3천만 달러의 지원을 아득히 상회하는 규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군을 무장 시킬 각종 장비와 MiG-23을 비롯한 전투기와 해군 함정,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주둔 비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이웃나라라오스는 아예 원칙적으로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력에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이것뿐만 아니라 쑤파누웡과 까이쏜 폼위한 같은 라오스의 집권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의 고위층 인사들이 보기에도 크메르 루주가 외치는 주장들은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오스는 공산 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내전을 치르며 정권을 장악한 캄보디아처럼 내전에서 구 정권이 패망하고 공산당 반정 게릴라 세력인 파테트 라오(현 라오 인민혁명당)가 정권을 잡긴 했지만 왕정에서 공산주의 정권으로의 이양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된 사례였던 데다 왕당파, 공화주의 우파, 공산주의 좌파 등 주요 세력의 수장 모두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들인 걸 넘어 아버지가 같은 이복 형제 관계였다. 인류 역사를 보면 형제라고 숙청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라오스에서는 왕자 출신의 좌파 지도자이자 집권 여당인 파테트라오의 최고 수장이던 쑤파누웡이 1975년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 초대 국가 주석이 되어 정권을 잡고도 다른 정파를 주도하던 이복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나 사형 없이 온건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라오스 국민들 사이에는 킬링필드 등 잔혹한 대학살을 벌이며 공산화가 이루어지던 당시 캄보디아의 모습을 상당히 무시하거나 살인과 보복에 미친 야만인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베트남 철수 후 '캄보디아국' 창설 때 손 산의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시아누크 전 국왕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과 같이 참여해 새 정권 구성을 논의했고 1991년 UN의 중재로 내전[8]은 종식되었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평화 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속속 캄보디아에 귀순하고 1999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과거사 청산과 전범 재판

그러던 가운데 21세기 들어 UN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 전범재판소가 설립되고 근 30년 만에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때는 크메르 루주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죽은 뒤였다. 물론 단순히 크메르 루주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묻지마 처벌을 벌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연좌제가 배제되고 일반 가담자가 아닌 대형 범죄에 책임이 있는 고위 지도자 위주로 기소가 이루어졌다.

사실 크메르 루주에 속했다가 회개한 이들은 많다. 크메르 루주가 지배할 때 살기 위하여 크메르 루주에 가입하여 학살에 앞장서거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으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받은 뒤 머리카락을 밀고 승려가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도 많은데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 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내가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이자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이다.

가장 첫 번째로 재판이 이루어진 것은 주된 학살이 이루어졌던 S-21 교도소 소장이며 1급 고문자였던 깡 겍 이우(Kaing Guek eav<កាំង ហ្គេកអ៊ាវ> 또는 lew. 1942~2020)으로 일명 둑 / 두치(Duch) 동무(영어 위키백과)였다.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와 고문 당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는 1만 7천 명이지만 정황 증거와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 집권 시절 교도소 소장이 직접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했다고 한다. 정신무장이란 이름으로 대변을 먹게 하거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든지 아주 충격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깡 겍 이우 소장은 2020년 9월 2일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수 년간 폐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부가 무너지자 신분을 숨기고 달아나 한적한 곳에서 숨어 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 받아 아내가 죽고 또 달아났으며 개신교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차리고 선교에 앞장섰다가 그를 알아본 현직 형사에게 잡혔다. 형사는 바로 두크에게 잡혀서 고문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악마 놈이 웃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잊혀지지도 않는다고 치를 떨며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1999년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재판 당시 캄보디아의 여론을 격분 시켰다. 지난 10년간 회개했다며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듯한 모습을 취하다가 정작 재판에선 "난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를 원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왜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냐"며 교회들을 원망하는 말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더욱이 명령을 따랐을 뿐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즉,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먼저 처벌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주장했다.

재판과 관련한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현장을 보던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 목사(두크를 모르고 목사로 추천하던 인물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깡 겍 이우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 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 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를 용서했을 지 모를 테지만 깡 겍 이우가 홀로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깡 겍 이우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호되게 고문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서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그 형사도 어머니가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한다고 했지만 이런 거랑 대조적인 두크의 저런 발언을 보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이를 갈았다. 이와 관련한 서적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프랑스 언론인 티에르 크루벨리에가 쓴 『자백의 대가』(2012)가 있는데 다소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있긴 하다. 프랑스였다면 달랐다는 식의 뉘앙스라든지,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라든지. 그래도 꽤나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겸 인민대표회의 상설회의 의장, 이엥 사리 전 외교부장, 키우 삼판 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 이엥 티릿 전 사회문제부장 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킬링필드에 전혀 관련이 없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키우 삼판은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느니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재판소가 자신을 공정하게 재판할 능력이 없다고 발언했다. # 그러나 민주 캄푸치아의 정책은 키우 삼판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할 시절에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사회 혁명을 이룩하려면 나라 전체를 교육, 산업, 도시, 화폐가 없는 완전한 농업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킬링필드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게다가 훈 센이 이끌던 캄보디아 정부도 이 재판이 마지막 전범 재판이라는 태도로 비협조적으로 나왔고 2022년에야 재판이 끝났다. 실제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70~80세를 넘은 고령이라[9] 이엥 사리처럼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노환으로 사망한 경우, 이엥 티릿처럼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누온 체아와 깡 겍 이우는 이미 옥사했으며 2022년 9월 22일에 종신형이 확정된 키우 삼판만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 중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훈 센이 장기독재의 길로 들어가며 2023년까지 무려 38년간 정권을 잡고 아들 훈 마넷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강하기 때문이다. 캄보디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해도[10] 여전히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이들이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대우를 크게 개선 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시간이 지나며 세대가 바뀜에 따라 그런 여론은 줄어들고 있다.

6. 출처



[1]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때 추격하는 베트남군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했다.[2] 결성 초기에는 공산주의 성향이기는 했지만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이후부터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으로 변했으며 서방 세계와 동맹을 맺었다.[3]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내전이 진행 중이었던 시기다.[4] 캄보디아와 베트남 간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시기이다.[5] [kʰmae krɑːhɑːm\][6] 붉은색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루주'는 한국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립스틱을 루주라고 부르는 일이 잦았고, 우리가 아는 물랑 루즈의 루즈도 이 루주이다.[7] 크메르 루주 외에도 하얀 크메르(Khmers Blancs)라는 왕당파, 파란 크메르(Khmers Bleus), 분홍 크메르(Khmers Roses) 등이 있었다고 한다. 각 세력의 구체적인 정치성향은 추가 바람.[8] 이 내전의 양상이 조금 복잡하다.[9] 당장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중 가장 어렸던 깡 겍 이우도 첫 재판을 받을 때 67세의 노인이었고 같은 시기에 이엥 사리는 무려 84세였다.[10] 2024년 기준 최빈국은 사실상 벗어났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