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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추모 공간이 된 뚜올쓸라엥 수용소의 외형 | |
언어별 명칭 | |
크메르어 | ទួលស្លែង[1] |
영어 | Tuol Sleng |
한국어 | 투올 슬렝, 뚜올 슬렝, 뚜얼 쓸렝, 뚜올쓸라엥, 뚤슬렝[2] |
중국어 | 吐斯廉 |
일본어 | トゥール・スレン |
1. 개요
이곳보다 폴 포트 정권의 끔찍함을 더 잘 보여주는 곳은 없다. 이 시설이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한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몰살 정책을 가장 순전한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략) 뚜올쓸라엥은 탈선이 아니었다. 뚜올쓸라엥은 폴이 만들어낸 노예 국가를 응축된 형태로 보여주는 결정체였다.[평전]
뚜올쓸라엥은 툴 스바이 프레이 고등학교(Toul Svay Prey High School)[4]를 개조한 민주 캄푸치아의 정치범수용소로 4개의 3층 목조 건물과 1개의 단층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제21 보안대 본부'를 의미하는 '21호 보안감옥(S-21, មន្ទីរស-២១)'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민주 캄푸치아의 건국 직후인 1975년 8월 15일 개장되었고 4년 동안 약 2만 명 이상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9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 시킨 후 해방 시켰을 때 발견된 생존자가 겨우 12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가혹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그야말로 킬링필드 시기의 수용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자 캄보디아의 아우슈비츠라고 할 수 있다.
2. 특징
누군가를 실수로 체포할 수 있으니 실수로 그를 놓아주지 마라.
실수로 적을 살리는 것보다 실수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낫다.
한 명의 유죄를 석방하는 것보다 실수로 10명의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이 낫다.
당시 크메르 루주의 슬로건. 이를 반대로 하면 무죄추정의 원칙과 100% 일치한다. 한 마디로 유죄추정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크메르 루주는 반혁명 사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이나 외국과 관련이 있는 이들, 스파이로 의심되는 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재교육이란 명목 하에 의심되는 자들을 전부 수용소에 가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세워진 수용소가 이 S-21 말고도 캄보디아에 무려 120~196곳이나 있었는데 한 마디로 노예 국가도 모자라 감옥 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실수로 적을 살리는 것보다 실수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낫다.
한 명의 유죄를 석방하는 것보다 실수로 10명의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는 것이 낫다.
당시 크메르 루주의 슬로건. 이를 반대로 하면 무죄추정의 원칙과 100% 일치한다. 한 마디로 유죄추정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크메르 루주는 먼저 정치범이나 경범죄자들에게는 처음에는 경고장을 보냈지만 경고장이 2번 이상 나오면 '재교육'을 위해 호출했는데 이게 말이 좋아 재교육이지 사실상 고문 끝에 죽인다는 의미였다. 이때 혁명 이전의 삶과 그때 저지른 '범죄'를 자백하도록 장려했는데 이 '범죄'에는 자유시장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과 접촉한 것, 심지어는 단순히 외국인과 만난 것도 포함되었다. 당시 그들은 겉으로는 '범죄'를 자백하면 이를 용서해 주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비밀경찰 '산테바르[5]'가 전국에 있던 196곳의 정치범수용소 중 하나에 끌고 가서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허위자백할 때까지 고문할 것이며, 이를 죽음으로 용서해 줄 테니 저승에 가서 새 출발을 하라는 의미였다. 즉, 죄를 밝히면 바로 처형되고 설사 죄가 없다고 말해도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교화소'의 환경이 어느 정도로 극악했냐면 고문을 당하는 죄수들의 비명이 수용소 밖에서도 들려서 후술할 나무에 스피커를 달아 선전가요를 요란하게 틀어 비명소리를 가려야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뚜올쓸라엥 수용소 소장이었던 깡 겍 이우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은 물론이고 크메르 루주 수뇌부조차 그들의 자백이 고문을 통해 얻어진 허위자백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으며 그저 '장애물'로 간주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게 전부였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이렇게 얻어낸 '자백' 중에는 폴 포트의 아내인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 1920~2003)가 CIA 요원이라는 황당한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S-21 감옥은 죄수들이 도착하면 이름을 확인하고 부여된 번호를 목에 걸고 사진을 찍은 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일들에 대한 짧은 전기를 쓰게 한 후 보안 규정인 '규율 십계명'을 인지토록 했다. '규율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하라, 질문을 회피하려고 애쓰지 말라.
2. 핑계를 만들거나 반항하지 말라.
3. 혁명에 위배되는 인간이 되는 바보 같은 자가 되지 말라.
4.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라. 시간을 끌지 말라.
5. 격식에 어긋나서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라. 또 혁명의 본질에 대해 나에게 말하려고 하지 말라.
6. 몽둥이질이나 전기고문을 할 때 비명을 지르지 말라.
7. 항상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명령을 기다려라. 명령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어라. 명령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8. 반역을 꾀한 후, 캄푸치아 끄럼(Kampuchea Krom)[6]을 핑계로 대지 말라.
9. 위의 모든 명령들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구타 당하고 전기 충격을 받을 각오를 하라. 얼마나 맞을지 셀 수 없을 것이다.
10. 규율에 복종하지 않을 때마다 그 벌로 채찍질 10번, 전기 충격 5번을 받을 것이다.
출처
2. 핑계를 만들거나 반항하지 말라.
3. 혁명에 위배되는 인간이 되는 바보 같은 자가 되지 말라.
4.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라. 시간을 끌지 말라.
5. 격식에 어긋나서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라. 또 혁명의 본질에 대해 나에게 말하려고 하지 말라.
6. 몽둥이질이나 전기고문을 할 때 비명을 지르지 말라.
7. 항상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명령을 기다려라. 명령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어라. 명령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8. 반역을 꾀한 후, 캄푸치아 끄럼(Kampuchea Krom)[6]을 핑계로 대지 말라.
9. 위의 모든 명령들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구타 당하고 전기 충격을 받을 각오를 하라. 얼마나 맞을지 셀 수 없을 것이다.
10. 규율에 복종하지 않을 때마다 그 벌로 채찍질 10번, 전기 충격 5번을 받을 것이다.
출처
2.1. 참상
지식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뚜올슬라엥에 붙잡혀 온 아이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발과 발이 서로 연결되어 묶여 있다. |
자백을 하지 않으면 고문하라!
얼굴을 때려라!
반드시 죄수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죽을 지경까지 심하게 때려라.
그래서 죄수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구타하라.
S-21 보안감옥 소장 깡 겍 이우가 고문을 담당한 교도관들에게 빨간색 잉크로 적어 보냈다는 글
크메르 루주는 외딴 시골과 정글에서 살아와 글을 전혀 접하지 못한데다 인격이 온전히 형성되지도 않았던 15세 전후의 청소년들에게 세뇌만 집중적으로 시키며 교도소에서 고문과 처형을 일삼는 살인 기계로 만들었는데, 교도소의 교도관 중에는 숫자 7 이상을 세는 방법조차 모르던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뭔가를 물었을 때 1초도 생각하지 말고 즉각 대답해야 한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동이다."라는 말대로 맹목적인 복종밖에 할 수 없게 되어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전무했다. 실제로 뚜올쓸라엥의 교도관들 중 무려 80%가 21세 미만에 일반적인 나이는 16~18세였으며, 심지어 당시 수용소의 간수들 중에는 만으로 쳐도 초등학교 6학년 나이밖에 안 되는 겨우 12살밖에 안 된 아이들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이 수용소에서 심문을 받은 사람들은 자술서에 3명의 동조자 이름을 써야 했으며, 이런 식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는데 이렇게 무려 2만 명 이상이 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얼굴을 때려라!
반드시 죄수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죽을 지경까지 심하게 때려라.
그래서 죄수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구타하라.
S-21 보안감옥 소장 깡 겍 이우가 고문을 담당한 교도관들에게 빨간색 잉크로 적어 보냈다는 글
이들은 비위생적인 수감 환경에 놓였다. 수감자들은 덥고 습한 열대 기후 속에서 샤워를 하는 것도 4일에 1번, 심한 경우에는 1개월에 한두 번 정도밖에 하지 못했는데 한 방에 모인 죄수들에게 호스로 대충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한 명씩 물을 뿌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아놓은 채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허락 없이 물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회초리로 200번이나 맞은 죄수도 있었고, 개나 의자, 벽, 테이블, 심지어는 전선과 채찍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등의 정서적 가혹행위도 이루어졌으며 수감자들 간의 대화 역시 금지되었다. 하루에 2번 식사가 주어지기는 했는데 그마저도 맹물만도 못한 조잡한 쌀죽 2~3숟가락과 물 한 컵이 전부였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도 유별나다 싶었을 정도로 엽기적인 고문, 생체실험[열람주의][8]까지 벌어져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2~4개월 정도밖에 생존하지 못했으며 길어야 6~7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뚜올쓸라엥의 생활 환경에 대해 다룬 글을 읽어보면 인간이란 생명체의 끝없는 악랄함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 후술할 파 탄찬이 이곳에서 무려 3년이나 생존했다는 것을 천운의 영역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심문이 완료된 수감자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수용소 소장 깡 겍 이우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실제로 겍 이우의 권한에 대해 영어 위키백과에서 발췌한 예시들을 들면 두치는 수감자 17명(10대 8명+어린이 9명)의 이름이 포함된 목록에 그들을 산산조각 내라는 명령을 적었으며[9] 더 많은 수감자 명단이 포함된 목록에는 '부수기: 115명, 유지: 44명'이라고 적어놨다. 이 목록과 심문 내용들은 두치가 엉까(Angkar)라고 불리던 크메르 루주 수뇌부에 보냈고 엉까는 이에 동의하며 수감자들의 운명을 확정지었다. 실제로 2009년 4월 7일에 두치는 자신이 뚜올쓸라엥 수용소와 서부의 정글에 있던 캄퐁 스페우(Kampong Speu) 수용소에 있던 수감자들을 처형하라는 모든 명령이 자기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했으며(참고 자료), 두치가 한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수감자들의 자백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면 상관인 누온 찌어 부서기가 두치에게 조언하며 지시를 내렸다고 하고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찌어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 겍 이우는 비록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행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수감자들에 대한 심문과 고문 행위들을 감독했다.
고위 고문관 폰(Pon, Tang Sin Hean)은 부하들의 지나친 폭력을 꾸짖으면서도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피고인을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고, 피고인의 팔과 등, 성기를 찢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평전]
특히 폴 포트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리고 자식들이 커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동분자들의 자식들까지 모조리 없애는 것을 공식 정책으로 삼게 했는데, 이에 따라 뚜올쓸라엥에 세뇌된 청소년 간수들은 잔악하게도 처형될 수감자들의 젖먹이 자식들까지 나무에 내리쳐 죽였다. 다양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감추기 위해 '매직 트리(magic tree)' 또는 '킬링 트리(killing tree)'라는 나무에 매단 확성기로 크메르 루주의 선전가를 틀었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뚜올쓸라엥의 악행들을 총괄하고 후에 재판에 회부될 때에도 극도의 뻔뻔함을 보였던 겍 이우마저 2008년 2월 26일에 수많은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된 킬링 트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 나무에서 희생된 아이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죽어간 사망자들은 죽은 후에도 편안하지 못했는데 장례식은 고사하고 수용소 내 뜰에 무더기로 암매장 당했으며 시신을 묻을 자리가 없자 프놈펜 남쪽에 있는 쯔응 아익(ជើងឯក)[11]이라는 곳에 수용자를 옮겨 죽인 후 묻었다고 한다. 처음엔 여기에 시체를 묻기만 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살아있는 수감자들을 여기에 옮겨와서 가건물에 가뒀다가 차례가 되면 집단 학살하고 묻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쯔응 아익을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enter)[12]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13] 크메르 루주의 몰락 직후 한 농부에 의해 쯔응 아익의 암매장된 시신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고, 이후 베트남군이 이곳을 발굴하면서 총 8,895구의 인골이 나왔다. 현재까지 약 15,000명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총 129개의 무덤 중 80개가 발굴되었고, 지금도 비가 와서 흙이 씻겨 내려가면 백골화된 시신이나 당시 희생자의 옷가지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더 끔찍한 것은 뚜올쓸라엥은 전국에 있던 196곳의 수용소 중 한 곳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생존자도 전무하던 지방의 수용소 중에는 뚜올쓸라엥이 양호해 보일 정도로 잔혹한 강제수용소/절멸수용소가 적지 않았다는 증언까지 있다. 숲에서 먹을거리를 찾다가 북서부 지방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행 S. 응고르가 이런 곳 중 한 곳에 대해 진술한 적이 있다.[평전] 하술할 내용을 읽어보면 지방 수용소 중에는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의 강제수용소, 아니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나 ISIS,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점령지보다 더 잔인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진 곳들이 수두룩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이쯤 되면 지방 수용소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여겨야 할 수준이다.
{{{#!folding [ 행 응고르의 증언 펼치기 · 접기 ]
"숲 속 깊이 끌려들어간 우리는 전에 본 적 없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그 건물 처마에 우글쭈글한 검은색 물체 몇 개가 걸려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에 교도관들이 임신한 여인을 끌고 왔다. 고문관이 여인의 옷을 찢더니 여인의 복부를 가르고 뱃속에서 태아를 꺼냈다.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어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한참 뒤 그 흐느낌은 자비로운 죽음의 침묵으로 바뀌었다. 살인마는 태아의 목을 쥐고 태연하게 내 옆을 지나갔다. 그러고는 태아를 동여매 처마에 걸었다. 처음에 보았던 우글쭈글한 검은색 물체는 다름 아닌 말라 오그라든 태아들이었다."}}}3. 수감자들
상술한 것처럼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는데 이들 중 어린아이들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다. 게다가 뚜올쓸라엥에는 캄보디아 국민 말고도 해상에서 나포된 호주 출신의 외국인들도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죽었다. 관련 글 79명의 외국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수용소에서 일한 전직 사진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더 있었다고 한다. 2012년 8월 무명의 기부자가 캄보디아 문서 관리소에 기부한 S-21 감옥 수감자들의 사진 1,427장 중 서양인의 사진이 2장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장은 1978년에 싱가포르에서 하와이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캄보디아 해상으로 진입하는 바람에 나포되어 끌려왔던 미국인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디랜스(Christopher Edward DeLance)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15], 또 나머지 한 장은 프놈펜의 프랑스 대사관 직원으로 일했던 앙드레 가스통 쿠티뉴(Andre Gaston Courtigne)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참고로 그 르완다 학살에서도 외국인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외국인이 뚜올쓸라엥에서 죽는 경우는 그 외에도 많았다. 요트를 타고 가다가 캄보디아 해안 근처로 떠내려와 붙잡힌 영국인들도 여기서 죽었고, 어느 미국인 수감자는 고문 끝에 "12세부터 CIA에서 일했다"는 거짓 증언까지 하기도 했다. 뚜올쓸라엥에서 죽은 서양인들은 폐타이어에 넣어진 채 소각되어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16]
이 수용소에는 정부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회부되었는데 1976년 9월 20일에는 '베트남의 사주를 받아 캄푸치아 노동당을 만들고 하노이와 손을 잡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존재하지도 않는 당의 당원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S-21에 끌려갔으며 당연히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이 수용소의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보파나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원래 교사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라나서 고등 교육을 받았고 같은 또래인 시타와 약혼까지 하는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고 론 놀 정부가 세워지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두 사람은 헤어졌고, 심지어 보파나는 론 놀 수하의 군인에게 강간을 당해 원하지 않는 임신까지 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세워진 후 그녀는 집단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크메르 루주의 조직원인 시타와 재회했다. 겨우 만난 둘은 가명을 쓴 비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키우는 조그만 행복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보파나의 유산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시타는 바로 공개처형되었고, 보파나는 S-21 수용소로 끌려가고 오랜 고문을 견디지 못해 CIA 요원이란 거짓 자백을 한 뒤 바로 처형되었다. 이후 이 둘의 사연과 편지는 당시 킬링필드를 연구하던 서양 역사학자에게 발견되어 S-21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심지어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 중에는 민주 캄푸치아의 최고 권력자였던 폴 포트의 남동생도 있었으며 뚜올쓸라엥의 간수가 후에 다른 수용소에 수감되는 일도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이유는 죄수를 너무 일찍 죽이는 바람에(고문 중에 죽는 경우도 포함) '죄수들을 침묵 시켜 죄를 자백하지 않게 하고 공모자들을 자유롭게 해줬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임자들이 후임자들의 손에 고문을 당했고 후임자들은 그 뒤의 후임자들에게 고문을 당해 죽었다. 뚜올쓸라엥 운영 초기에는 뚜올쓸라엥에 몇 주마다 2~3대의 트럭을 보내 그 트럭에 수감자들을 태워 옮긴 후 처형하게 했는데 1978년에는 트럭이 매일 도착했다고 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 말기에는 하루에 300명씩 죽어나갔고, 심지어 수용소의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 27일에는 정확히 582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는 24시간 동안 처형을 전혀 멈추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1시간마다 약 24명, 2.5분마다 1명씩 처형당한 꼴이다!
사실 이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70%는 전직 크메르 루주 출신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코이 툰이나 후 님처럼 크메르 루주의 지방 파벌간, 계파간 갈등 속에서 반역자로 몰려 수감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뚜올쓸라엥의 몇 안 되는 수용자 춤 메이는 "크메르는 내 가족을 내 인생을 모두 빼앗아갔다. 나는 매일 밤 울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크메르 루주)을 모두 용서했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분노도 없다. 그저 측은할 뿐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들(뚜올쓸라엥에서 사망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의 이름이 비문을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런 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 그리고 희생된 모든 이들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
3.1. 생존자들
상술한 것처럼 이 수용소의 생존자는 겨우 12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5명은 1~8세 정도의 어린이들이었고 성인은 단 7명밖에 없었는데[17] 이들도 모두 선전용 예술작품 제작이나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 살려둔 것이었다.뚜올쓸라엥의 성인 생존자들. 왼쪽부터 다음과 같다.
- 첨 메이(Chum Mey, 1930[18]~) - 수리공. 1978년 10월 28일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지만 타자기나 재봉틀 같은 기계들을 수리할 수 있어서 크메르 루주가 살려놨다고 한다. 귀에 전기 충격을 받아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뚜올쓸라엥에서 판매 중인 자서전에는 1931년 11월 토요일 생으로 표기되어 있다. 구매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2023년 2월 기준).
- 루이 니 콩(Ruy Nea kong, 194?~1986) - 예술가. 뚜올쓸라엥에서 생존한 성인 수감자 중 가장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 이엠 찬(Iem Chan, 1940~2000) - 조각가. 1978년 2월 18일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기 위해 살려뒀으며 뚜올쓸라엥에서 풀려난 이후 문체부에서 조각을 가르쳤다. 이후 프놈펜에서 조각 교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 반 나트(Vann Nath, 1946~2011) - 화가. 1978년 1월 14일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이 수용소의 생존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기도 한데 수감 당시에는 폴 포트의 반신상을 만들어야 했으며 크메르 루주의 몰락 직후인 1980년에 이 감옥을 추모 박물관으로 만드는 작업에도 협력했고, 이후 킬링필드의 끔찍한 참상을 회고록과 그림으로 남겨 후대에 알렸다.
- 보우 멩(Bou Meng, 1941~) - 화가. 1977년 8월 16일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폴 포트의 초상화[19]와 선전용 그림들을 그리게 하기 위해 살려뒀으며 이 사람도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멀었고, 아내는 뚜올쓸라엥으로 끌려온 직후 살해되었으며 아동 센터로 보내진 아이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
- 파 탄찬(Pha Thanchan, 1936~2001). 번역가 겸 타이피스트. 1976년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베트남인들에 대한 심문에 사용하기 위해 살려뒀으며 7명의 생존자 중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생존했기 때문에 동료 생존자들이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 잉 피치(Ing Pich, 194?~1996) - 기계공. 1977년에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다. 감옥의 전기 발전 장비를 관리하는 기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고문을 해야 하는 참극을 겪었다. 공공사업교통부에서 여러 해 동안 일했다고 하며 이후 뚜올쓸라엥이 박물관으로 변환된 후인 1980년 7월 13일부터 초대 관장을 역임했고, 1990년대 초까지 뚜올쓸라엥 기념관의 이사를 역임했다.
4. 크메르 루주의 실각 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한 뒤 뚜올쓸라엥을 포함한 여러 수용소가 해방되었고 크메르 루주 하에서 폐쇄되었던 대부분의 학교들은 제 기능을 되찾았다. 당시 베트남군은 이곳의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전 세계에 크메르 루주의 만행을 알려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는 동시에 자신들의 명분[20]을 얻기 위해 이곳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존한 박물관으로 재개장했다. 지금도 이 건물은 뚜올쓸라엥 제노사이드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을 받고 있다. 뚜올쓸라엥 제노사이드 박물관에는 희생자들의 사진들과 당시 고문에 쓰인 도구들이 전시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고 있으며 '킬링 트리'도 보존되어 전세계에서 오는 추모객들이 폴 포트에게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는 팔찌를 걸어두고 있다.여담으로 뚜올쓸라엥은 원래 프놈펜 한복판에 있던 학교라 비교적 최근에 들어선 주택지 사이에서 그 시절의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데 해 질 무렵엔 폐관해서 조명이 없기 때문에 밤에 뚜올쓸라엥 근처를 지나거나 높은 건물에서 학교 부지를 내려다보면 이런 공포가 또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5. 소장 깡 겍 이우
뚜올쓸라엥 소장 시절의 모습 | 2009년 11월 26일의 모습 |
뚜올쓸라엥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깡 겍 이우는 1942년 11월 17일에 캄보디아 캄퐁톰 지방 출신에서 5남매 중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는데 중국인이 경영하는 어업회사의 사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캄보디아로 이주한 중국인이었으며, 노점상이던 어머니도 중국인과의 혼혈이었다. 생후 2~3개월 무렵에 한 점쟁이가 '겍 이우'라는 이름이 '그의 삶에 불행을 가져올 것이며 몸을 약하게 만들어 심각한 질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해 어릴 적의 이름은 임 치우(Yim Cheav)가 되었다.
어릴 적에는 좀처럼 웃지 않는 조용한 소년이었지만 밝은 성격에 공부를 잘 했다는 임 치우는 이름의 뜻이 '행동이 느리고 볼품없고 유행에 뒤진 낙오자'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15살 때 이름을 원래대로 바꿨고 1961년에 시험에 합격해 전기 중등 교육 수료 증서를 받은 후 1962년에 씨엠립에 있는 학교에서 학사학위 전반부를 마친 후 같은 해에 프놈펜에 있는 시소와스 고등학교에서 자리를 제안받았다. 프놈펜으로 간 겍 이우는 바칼로레아에서 전국 2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여 학사학위를 마쳤다.
그러나 겍 이우는 1964년부터 수학 교사 자격증을 얻고자 공부하기 시작했고, 1965년 8월 28일에 수학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여 캄퐁 참 지방의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 교사 업무를 맡다가 1967년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에 빠진 후 그 해 10월 29일에 학교를 퇴직하였다.
그의 제자 3명이 체포된 후 참카르 레우 지역의 크메르 루주 지역으로 도망치며 공산당의 정회원이 된 겍 이우는 몇 달 후에 공산당 활동을 이유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프레이 사르 감옥에 재판도 없이 2년간 구금되었는데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1970년에 사면된 겍 이우는 태국 접경의 카르다몸 산맥으로 도피해 크메르 루주 반군(Maquis)에 가담했고 '두치'[21]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하며 특별 보안 책임자이자 최소 2곳의 교도소 소장이 되었다. 이 교도소에서도 겍 이우는 의도적인 굶주림과 고문으로 수감자들의 자백을 받아냈으며 심지어 이곳에서 자신이 직접 고문에 가담하거나 아예 수감자를 총살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열람주의3] 물론 겍 이우는 이 주장들을 "다른 곳에서 들은 소문에 거짓말을 보탠 완전한 날조"라며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자 겍 이우와 그의 부하들은 프놈펜 전역에 감옥을 세웠고 동년 8월 15일에 뚜올쓸라엥 교도소가 세워지자 두크는 부소장에 올랐다. 1976년 5월에 프놈펜에 존재하던 기존 교도소들은 모두 뚜올쓸라엥 한 곳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크메르 루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79년 1월 6일에 겍 이우는 남아있는 수감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지만, 바로 다음 날에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수감자 일부를 처형하긴 해도 상술한 수감자들은 불행 중 다행히도 처형하지 못했고 20만 쪽에 달하는 자백 문서를 포함한 감옥에 있는 문서들은 양이 너무 많아서 파기하지 못했다.
1979년 5월에 태국 국경으로 도망친 겍 이우는 태국어와 영어를 새로 배웠고 태국의 뜨랏주에 있는 난민 캠프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다가 1986년 6월에는 북경외국어대학교에 크메르어 교수로 파견되었고, 1년 뒤에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으로 돌아가 다시 폴 포트의 부하로 일했으며 1991년 10월에 있던 파리협정 직후에는 태국 국경 인근의 작은 마을로 도망쳐 지방 학교에서 '훌륭하지만 성질이 불 같은 선생님' 행세를 했다.
그러다가 1995년 11월 11일에 갑자기 아내 침 소팔(Chhim Sophal, 193?~1995)이 AK-47의 총검에 찔려 살해 당하자[23] 겍 이우는 전 재산을 판 후 재빨리 교회로 도망쳐서 크메르계 미국인 목사의 세례를 받은 후 회개한다며 목사가 되어 버렸다.[24] 졸지에 학살자를 봐주는 종교라며 비난이 쏟아졌고, 두치는 1997년에 내전의 여파에 휘말려 피신한 후 태국에 있는 난민 수용소의 보건 관리자로 일했으나 1998년 후반에 캄보디아로 이주했고 1999년에 아일랜드 출신 사진 작가 닉 던롭(Nic Dunlop, 1969~)이 그를 알아보면서 캄보디아 정부에 투항한 후 1999년 5월 8일부터 군에 구금되었다.
두치는 2007년 7월 31일에 전쟁범죄와 반인륜 범죄로 기소된 후 2009년 2월 16일에 재판이 시작되었고 2010년 7월 26일에 3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2012년 2월 3일에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2018년 10월 20일에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2020년 9월 2일에 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병사했다. 그의 시신은 캄보디아의 코로나 19 상황이 악화되면서 장례식도 없이 급하게 화장되었다고 한다.
재판 당시 그는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부하들의 잘못이지만 어쨌든 이 일들은 내 책임 하에 있다'고 말하며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크메르 루주 수뇌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2009년 4월 7일에는 "나는 (수감자들을) 스스로 죽이지 않았고,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다."고 했으며 자신은 2명의 수감자를 직접 '학대'한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직접적으로 수감자 학대에 참여한 것만큼은 인정한 셈이다.
게다가 동년 11월 27일에는 석방해 달라는 탄원을 한 것도 모자라 재판부가 자신의 혐의를 읽어나가도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1] '독나무 언덕'을 의미한다. 뚜올쓸라엥으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맹독성 알칼로이드인 스트리크닌(strychnine)을 함유하고 있는 호미카(Strychnos nux-vomica, 마전자(馬錢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2] 크메르어 한글 표기법이 아직 명백히 확립되지 않아 다양한 표기가 존재한다. 폴 포트의 본명 'សាឡុត ស(Saloth Sar)'만 해도 '살로트 소르', '썰롯 써', '썰로 써', '살로스 사르', '살롯 사' 등 다양하게 표기된다.[평전]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4]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5] សន្តិបាល, 크메르어로 '평화의 수호자'를 의미한다.[6] '캄푸치아 끄럼'은 크메르어로 하부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단어로 호찌민시를 위시한 오늘날 베트남 남부 일대를 가리킨다. 이 일대는 본래 캄보디아의 영토였으나 17~18세기에 응우옌 가문의 남진으로 베트남 영토가 되었다. 베트남 당국은 이 일대에 살고 있던 크메르인들을 열심히 베트남인으로 동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크메르인이 상당수 살고 있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들이 베트남군을 돕는 스파이라고 의심했다. 즉, 친베트남 성향 핑계를 대지 말라는 의미다.[열람주의]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코코넛 주스를 주입하기도 했고, 어느 17살 소녀는 마취제 없이 복부가 절개된 후 물 속에서 생존하는 기간을 알아보는 실험의 피해자가 됐다. 심지어 겨우 4살밖에 안 된 아이마저 생체실험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런 생체실험은 수용소장 깡 겍 이우의 지시 하에 이루어졌다.[8] 프놈펜 병원에서 사용할 혈액 수집을 위해 수감자들의 혈액을 뽑기도 했다. 이 광경에 대해 어느 교도관은 "고문관들이 펌프를 이용하여 죄수들에게서 피를 빼냈어요. 몸에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피를 빼내는 바람에 죄수들은 거의 숨을 쉬지 못했어요. 죄수들은 숨을 헐떡였고, 눈동자가 돌아가 눈에 흰자위가 드러났어요. 사망한 죄수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이 피들은 크메르 루주 고위 간부들에게 수혈되었다. #[9] '산산조각 내다'는 크메르어로 '콤테크(komtech)'로 표기하며, 원래는 농사와 관련된 용어였으나 크메르 루주는 이를 살해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했다. 이와 유사하게 사이비 종교 옴진리교에서는 티베트 밀교에서 유래된 포아(ポア)라는 단어를 원래 뜻과 다르게 살해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평전] [11] 이전에는 과수원이었으며 화교들의 공동묘지로도 쓰였다.[12] 노동력 착취나 정치범의 재교육을 위해 운영되는 대신 오로지 학살만을 위해 운영되는 시설. 보통 희생자를 죽이기 전에 잠깐 억류하는 용도인 수용 시설은 부실하고 대부분이 학살 및 사체 처리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다만 타 절멸수용소와는 학살 방식이 다르다)이 대표적인 사례다.[13] 애초에 민주 캄푸치아 자체가 전국민을 북한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가둬놓은 수준이었다.[평전] [15] 디랜스는 태국산 마리화나 밀수업자로, 공급책인 Ron Jackson과 접선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태국으로 이동하는 중에 캄보디아 해상에 진입하여 동료인 Michael Deeds와 함께 나포되었고, 뚜올쓸라엥에서 고문 끝에 CIA를 위해 어부들을 포섭하고 캄보디아군의 활동을 정탐하는 중이었다는 진술서를 남기고 처형되었다. 이 때가 11월 말인데 한 달 뒤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는 축출됐다. 출처: Thai Stick: Surfers, Scammers, and the Untold Story of the Marijuana Trade. by Peter Maguire.[16] 공교롭게도(?) 폴 포트도 죽은 뒤 부하들에 의해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되었다. 이때 민주 캄푸치아 시기 공산당 제2부비서이자 민주 캄푸치아 서열 3위였고 후에 폴 포트를 가택연금 시킨 따 목(Ta Mok, 1926~2006)은 "지금은 폴 포트가 거름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는 취지의 말까지 남겼다.[17] 정말 안타깝게도 뚜올쓸라엥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어린이 1명은 해방 직후에 사망했다고 하며 1978년 12월 말 시점에도 뚜올쓸라엥에는 20명 정도만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18] 193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19] 폴 포트 문서 최상단에 있는 그림으로, 사진이 아니라 3개월에 걸쳐서 그려진 초상화다. 참고 자료[20] 당시 베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의 여론몰이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강제 점령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서방 세계는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21] Duch, 이 사람이 피고인으로 선 재판인 '케이스 001'을 다룬 책 《자백의 대가》의 한국 번역본에서는 '두크'라고 번역했다. '두치'라는 가명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겍 이우는 그 외에도 'Hang Pin'과 같은 여러 가명들을 사용했다.[열람주의3] 당시 수용소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들에 따르면 겍 이우는 수감자들을 일상적으로 구타한 것은 물론 수갑을 채운 채 구덩이에 넣은 뒤 열대성 호우 속에서 익사하게 했으며 심지어 여성 수감자의 가슴을 기름에 적신 횃불로 지지는(!!!) 악행도 저질렀다고 한다.[23] 두치는 폴 포트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생각했다.[24] 참고로 그의 상관이었던 누온 체아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도 1998년에 투항한 후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승려에게 가르침을 주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