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야세노바츠 추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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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41년 8월에 설립됐다. 3개의 수용소가 여기 있었는데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는 1941년 사바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고 제3수용소는 1945년까지 존속했다. 1945년 4월 폐쇄될 때까지 약 75,159명의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1942년 6월 집시 수천 명을 야세노바츠 수용소로 강제 송환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었다.명목상 강제 노동 수용소로, 절멸 수용소는 아니어서 비록 가스실과 같은 곳은 없었지만[1] '발칸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이곳을 방문한 그 악명높은 조직 모체인 일반친위대 간부들과 무장친위대 하급 군인들조차 모조리 두 눈 뜨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하면 말 다 한 셈.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 강제수용소, 민주 캄푸치아 지방 강제수용소[2]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수용소라 할 만하며, 현존하는 수용소 중 가장 악명높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마저도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다.
여기서 만행을 저지른 것은 크로아티아인들로 구성된 우스타샤인데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사제들이 우스타샤에 의해 수용소장이나 교도관으로 선출되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수용소 바깥에서도 우스타샤와 가톨릭 세력들이 영합해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들에게 학살과 함께 공동체 파괴, 약탈, 강제 개종을 실행했다.
뿐만 아니라 야세노바츠의 부속 수용소인 스타라 그라디슈카(Stara Gradiška) 강제수용소는 세르비아/유대인/보스니아인 여성과 어린이 수감자들, 정권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을 수감하며 확인된 수치로만 도합 12,790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었는데 이 곳도 '모든 것이 야세노바츠와 동일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으며 당시 우스타샤들은 특히 어린이들을 유난히 잔인하게 죽였고 심지어 1942년 8월 29일 밤에는 교도관들이 누가 가장 많은 수감자를 '청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3] 참고로 2차 대전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어린이를 위한 강제수용소를 운용한 곳은 오직 크로아티아 독립국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타라 그라디슈카의 실상을 다룬 글(열람 주의)[4]
실제로 우스타샤는 총살 따위는 기피한 대신 참수[5]와 생매장은 기본에 도끼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거나, 눈알을 뽑거나, 귀와 코를 잘라내거나, 단검[6]으로 목을 그은 후 과다출혈로 죽게 냅두거나, 성기를 잘라내거나, 배를 칼로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거나[7], 가슴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거나, 산 채로 화장터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지하 감옥에 가두고 음식과 물을 전혀 주지 않은 채 서서히 굶겨 죽이거나, 수감자 2명을 철사로 묶은 후 산 채로 강에 던져 죽이거나, 갓난아기들을 '야구 배트처럼' 휘둘러 벽에 부딪혀 죽이거나, 공중으로 던져올린 갓난아기를 칼로 찌르거나, 방안에 치클론 B 가스를 서서히 들여보내거나, 희생자들의 베어진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거나, 희생자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당연히 강간도 성행했는데, 남성 간수들은 미성년자를 부모 앞에서 강간하거나, 여성 간수들은 남성 죄수들을 강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실 야세노바츠에서 수감자들을 저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한 이유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같은 '산업적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잔인한 만행들은 이 글에 나온다.[8]
내부 환경 역시 끔찍했다. 수감자들에게는 물과 전분으로 만든 묽은 수프 정도만 제공되어[9] 풀과 잎사귀, 개의 시체, 배설물에서 꺼낸 옥수수알, 심지어 인육까지 먹어야 했으며, 식수 역시 부족했고[10], 11시간의 강제노동 중 채찍질과 충동적인 살해는 일상이었다. 3단 침대가 있는 수용소 막사는 지붕이 엉성하여 우기에는 빗물이 흘러들어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였으며, 야외의 공개 변소는 일부러 빠져 죽도록 구멍을 넓게 설계했으며, 피, 오물, 시체, 한 달에 한 번만 씻을 수 있는 수용자들[11], 거의 세탁되지 않은 옷 등 온갖 끔찍한 악취로 범벅된 수용소는 수용자들의 건강 악화를 유도함과 동시에 오만 해충과 전염병들의 천국이었다. 옷도 얇은 비옷 수준의 옷만 제공되었다.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1915–1946)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1898–1960) |
전쟁이 끝난 후 학살을 저지른 우스타샤의 전범들은 나치 전범들과 달리 대부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13] 그뿐만 아니라 만행에 가담한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 갈취한 금품과 재산을 챙겨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로 탈출했다. 특히 야세노바츠의 간수 중 가장 핵심적이고 잔혹한 인물이던 딘코 사키치[14] & 나다 사키치[15] 부부는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1998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악행이 발각된 후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어 남편은 1999년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2008년 옥사했으며 아내는 파킨슨병을 이유로 자그레브의 1급 요양원에서 생활하다가 2011년에 사망했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글. 혐오감을 유발할 정도로 잔혹한 사진들과 내용들이 많으니 주의 바람. 다른 글[16]
3. 기타
- 제4대 UN 사무총장이자 오스트리아의 전 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 독일의 육군 장교로 복무할 때 근무지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로부터 3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발트하임의 나치 부역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위해 축구 같은 스포츠, 연극 등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 사실 나치도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들에 악단을 꾸렸던 데다[17]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도 수감자들에게 쥐꼬리만 하게 월급을 주거나 보여주기식 상점을 만드는 등의 기만 전술을 보이기도 하므로 그렇게까지 특이한 모습은 아니다.
- 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체역사물 액션게임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의 스테이지 중 크로아티아에 있는 벨리카 노동수용소의 모티브가 이 수용소로 추정된다.
[1] 아우슈비츠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로 치면 완전통제구역 같은 곳이라면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혁명화구역 같은 곳인 셈이다. 물론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대우는 완전통제구역 이상으로 극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2] 뚜올쓸라엥이 유명한 것도 그나마 12명이라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라 그런 거다.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지방 강제수용소 중에는 뚜올쓸라엥이 가장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악한 곳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3] '우승자'인 페타르 브르지차(Petar Brzica, 1917~?) 중위는 단 하루 만에 단도로 1,360명(670~1,100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수감자의 목을 자르고 금시계, 실버 서비스, 새끼 돼지 통구이 및 포도주를 보상으로 받았다.[4]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아이들과 참수된 얼굴 부분 사진이 흑백으로 존재한다.[5] 톱으로 목을 썰기도 했다.[6] 스르보제크(Srbosjek)라는 농업용 칼을 썼다. 원래 이삭을 베는 데 쓰는 평범한 칼이었지만 우스타샤는 거기에 '세르비아인 절단기'라는 기괴한 이름을 붙여 살인 도구로 애용했다. 이렇게 생겼다.[7] 참고로 이게 우스타샤의 신고식이었다. 심지어 임산부의 경우에는 태아를 끄집어낸 후 발로 짓밟아 죽였다.[8] 읽는 것만으로도 보기 역할 수준의 고문들이 묘사되어 있다.[9]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묽은 순무 수프 한 끼만 먹는 경우도 있었다.[10] 때문에 수감자들은 강물을 마셔야 했다.[11] 게다가 겨울에는 인근 호수가 얼어붙어 이조차 불가능했다.[12] 본인이 직접 죽였다고 재판에서 인정한 사람만 100명에 달할 정도.[13] 그나마 초대 소장이었던 베코슬라브 루부리치(Vjekoslav Luburić, 1914–1969)처럼 해외에서 암살당해 죗값을 제대로 치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14] 1944년 4월부터 동년 12월 1일까지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이었다.[15] 심지어 나다 사키치는 생존자들에게는 남편보다 더 잔인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극악무도했으며, 소름끼치게도 모든 악행을 미성년자 시절에 저질렀다. 실제로 그녀는 야세노바츠 근무 시작 당시 만 16세였고, 패전 당시 만 18세였다. 하다못해 이르마 그레제조차 아우슈비츠에서 일하기 시작할 당시 만 19세의 성인이었다. 다만 독일, 크로아티아 기준으로는 만 18세부터 성인이다.[16] 사진도 올라왔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17] 아우슈비츠에는 4개의 밴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