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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10 18:54:04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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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야세노바-기념비.jpg
야세노바츠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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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dcdc,#1f2023> 크로아티아어 Koncentracijski logor Jasenovac
Sabirni logor Jasenov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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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מחנה יאסנובאץ
(Makhané Yasenovats)
영어 Jasenovac concentration camp }}}}}}}}}
1. 개요2. 역사3. 기타

1. 개요

나치 독일괴뢰국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의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와 인접한 크로아티아 야세노바츠시에 세워진 강제 수용소. 명목상 강제 노동 수용소로, 절멸 수용소는 아니어서 비록 가스실과 같은 곳은 없었지만[1] 그 잔인함으로 인해 '발칸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2. 역사

1941년 8월에 설립됐다. 3개의 수용소가 여기 있었는데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는 1941년 사바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고 제3수용소는 1945년까지 존속했다. 1945년 4월 폐쇄될 때까지 약 75,159명의 유대인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1942년 6월 집시 수천 명을 야세노바츠 수용소로 강제 송환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었다.

여기서 만행을 저지른 것은 크로아티아인들로 구성된 우스타샤인데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사제들이 우스타샤에 의해 수용소장이나 교도관으로 선출되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수용소 바깥에서도 우스타샤와 가톨릭 세력들이 영합해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들에게 학살과 함께 공동체 파괴, 약탈, 강제 개종을 실행했다.

뿐만 아니라 야세노바츠의 부속 수용소인 스타라 그라디슈카(Stara Gradiška) 강제수용소는 세르비아/유대인/보스니아인 여성과 어린이 수감자들, 정권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을 수감하며 확인된 수치로만 도합 12,790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었는데 역시 '모든 것이 야세노바츠와 동일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으며 당시 우스타샤들은 특히 어린이들을 유난히 잔인하게 죽였고 심지어 1942년 8월 29일 밤에는 교도관들이 누가 가장 많은 수감자를 '청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2]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어린이들을 수용하는 강제수용소를 운용한 곳은 오직 크로아티아 독립국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타라 그라디슈카의 실상을 다룬 글(열람 주의)[3]

실제로 우스타샤는 총살 따위는 기피한 대신 참수[4]와 생매장은 기본에 도끼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거나, 눈알을 뽑거나, 귀와 코를 잘라내거나, 단검[5]으로 목을 그은 후 과다출혈로 죽게 냅두거나, 성기를 잘라내거나, 배를 칼로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거나[6], 산 채로 화장터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지하 감옥에 가두고 음식과 물을 전혀 주지 않은 채 서서히 굶겨 죽이거나, 수감자 2명을 철사로 묶은 후 산 채로 강에 던져 죽이거나, 갓난아기들을 야구 배트처럼 휘둘러 벽에 부딪혀 죽이거나, 공중으로 던져올린 갓난아기를 칼로 찌르거나, 방안에 치클론 B 가스를 서서히 들여보내거나, 희생자들의 베어진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거나, 희생자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당연히 강간도 성행했는데 남성 간수들은 미성년자를 부모 앞에서 강간하고, 여성 간수들은 남성 죄수들을 강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실 야세노바츠에서 수감자들을 저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한 이유는 아우슈비츠가스실과 같은 '산업적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수감자들의 처우나 학살 방식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다른 강제수용소들에 비해서도 훨씬 더 잔혹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내부 환경 역시 끔찍했다. 수감자들에게는 물과 전분으로 만든 묽은 수프 정도만 제공되어[7] 풀과 잎사귀, 개의 시체, 배설물에서 꺼낸 옥수수알, 심지어 인육까지 먹어야 했으며, 식수 역시 부족했고[8], 11시간의 강제노동 중 채찍질과 충동적인 살해는 일상이었다. 3단 침대가 있는 수용소 막사는 지붕이 엉성하여 우기에는 빗물이 흘러들어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였으며, 야외의 공개 변소는 일부러 빠져 죽도록 구멍을 넓게 설계했으며, 피, 오물, 시체, 한 달에 한 번만 씻을 수 있는 수용자들[9], 거의 세탁되지 않은 옷 등 온갖 끔찍한 악취로 범벅된 수용소는 수용자들의 건강 악화를 유도함과 동시에 오만 해충과 전염병들의 천국이었다. 옷도 얇은 비옷 수준의 옷만 제공되었다.
파일: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jpg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1915–1946)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는 가톨릭 신부임에도 우스탸샤에 동조해 야세노바츠의 수용소장으로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고 본인이 직접 살인에 가담하기도 했다.[10] 1945년 영국군에 잡혀 1946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사형을 선고받은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파일:스테파니츠 대주교.jpg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1898–1960)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는 자그레브 대주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스타샤 정권 하에서 복잡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인물이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공산 정권은 그가 우스타샤와의 협력 및 강제 개종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전범 혐의를 적용하여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이 재판은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스테피나츠가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 초기에 이를 환영한 것은 크로아티아 민족의 오랜 독립 염원이 반영된 것이며, 파시즘에 대한 지지 때문은 아니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실제로 그는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이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으며[11], 강제 개종 논란 역시 생존을 위한 임시적 조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이념적 충성이라기보다는, 전시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여러 상충하는 현실을 조율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의 형 미요 스테피나츠(Mijo Stepinac)는 1943년경 반대 진영인 공산주의 세력과의 연루 혐의로 독일군에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이는 스테피나츠 가문 전체가 특정 이념에 편향되기보다는,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균열 속에서 양 진영 모두에 의해 의심받고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복합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비오 12세는 그를 옹호하였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1998년 그를 복자시복하였다. 스테피나츠의 전후 재판에 대해 윈스턴 처칠은 “그 재판은 정의에 대한 폭행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학살을 저지른 우스타샤의 전범들은 나치 전범들과 달리 대부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12] 그뿐만 아니라 만행에 가담한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 갈취한 금품과 재산을 챙겨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로 탈출했다. 특히 야세노바츠의 간수 중 가장 핵심적이고 잔혹한 인물이던 딘코 사키치[13] & 나다 사키치[14] 부부는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1998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악행이 발각된 후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어 남편은 1999년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2008년 옥사했으며[15] 아내는 파킨슨병을 이유로 자그레브의 1급 요양원에서 생활하다가 2011년에 사망했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글 2 혐오감을 유발할 정도로 잔혹한 사진들과 내용들이 많으니 주의 바람.

3. 기타


[1] 아우슈비츠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로 치면 완전통제구역 같은 곳이라면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혁명화구역 같은 곳인 셈이다. 물론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대우는 완전통제구역 이상으로 극악했기 때문에 이같은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2] '우승자'는 페타르 브르지차(Petar Brzica, 1917~?) 중위로 전쟁 전에는 프란치스코회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곳에서 우스타샤 청년단의 일원이 되고 우스타샤 정부의 일원이 되면서 수용소의 경비원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 하루 만에 단도로 1,360명의 수감자의 목을 자르고 금시계, 실버 서비스, 새끼 돼지 통구이 및 포도주를 보상으로 받았다. 이 1,360명이라는 숫자도 불분명해서 670명 ~ 1,100명이라는 설도 있다.[3] 읽다 보면 흡사 고어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만행이 잔인했기 때문에 열람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아이들과 참수된 얼굴 부분 사진이 흑백으로 존재한다.[4] 톱으로 목을 썰기도 했다.[5] 스르보제크(Srbosjek)라는 농업용 칼을 썼다. 원래 이삭을 베는 데 쓰는 평범한 칼이었지만 우스타샤는 거기에 '세르비아인 절단기'라는 기괴한 이름을 붙여 살인 도구로 애용했다. 이렇게 생겼다.[6] 참고로 이게 우스타샤의 신고식이었다. 심지어 임산부는 태아를 끄집어낸 후 발로 짓밟아 죽였다.[7]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묽은 순무 수프 한 끼만 먹는 경우도 있었다.[8] 때문에 수감자들은 강물을 마셔야 했다.[9] 게다가 겨울에는 인근 호수가 얼어붙어 이조차 불가능했다.[10] 본인이 직접 죽였다고 재판에서 인정한 사람만 100명에 달할 정도.[11] 당시 크로아티아 주재 독일 대사는 "독일의 주교가 그처럼 행동했다면 감옥에 갔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12] 그나마 초대 소장이었던 베코슬라브 루부리치(Vjekoslav Luburić, 1914–1969)나 우스타샤의 수괴인 안테 파벨리치(정확히는 미수로 암살자의 암살 시도에 즉사하지 않았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처럼 해외에서 암살당해 죗값을 제대로 치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13] 1944년 4월부터 동년 12월 1일까지 강제수용소의 사령관이었다.[14] 심지어 나다 사키치는 생존자들에게는 남편보다 더 잔인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극악무도했으며, 소름끼치게도 모든 악행을 미성년자 시절에 저질렀다. 실제로 그녀는 야세노바츠 근무 시작 당시 만 16세였고, 패전 당시 만 18세였다. 하다못해 이르마 그레제조차 아우슈비츠에서 일하기 시작할 당시 만 19세의 성인이었다. 다만 독일, 크로아티아 기준으로는 만 18세부터 성인이다.[15] 그나마도 정상적인 수감이 아니라, 컴퓨터 등의 편의시설이 제공되는 등 이른바 범털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16] 아우슈비츠에는 4개의 밴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