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Ernst Heinrich Freiherr von Weizsäcker 에른스트 하인리히 폰 바이츠제커 남작 |
출생 | 1882년 5월 25일 |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 |
사망 | 1951년 8월 4일 (향년 69세) |
서독 린다우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소장 (여단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가족 |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1]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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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군인, 외교가.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을 거치며 파란 많은 이력을 쌓았다.2. 유년 시절
슈투트가르트에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재상이던 카를 폰 바이츠제커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다.3. 군 경력
1900년에 해군에 입대했다. 이후 해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주로 베를린에서 근무하여 군 경력을 쌓으며 승진했다.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주로 라인하르트 쉬어 제독 밑에서 근무하며 유틀란트 전투 등에 참전했다.
1916년에 남작작위를 상속받았다.
1917년에 1급 철십자 훈장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8년 8월부터 라인하르트 쉬어 제독과 함께 해군 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패전 후 1919년 헤이그에 해군 대사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4. 외교관 경력
1920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외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21년 이후 바젤, 코펜하겐, 제네바, 오슬로, 베를린 등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다.1931년 오슬로 공사(envoy)에 임명되었다.
1933년 베른 공사로 부임했다. 1933년 나치 집권이 시작되었다.
1936년 베른 대사(ambassador)에 임명되었다.
5. 나치당 입당과 친위대 입대
1938년에 나치당에 입당 후 친위대에 들어갔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의 아래에서 외무차관을 지낸 바이츠제커는 전쟁도 불사하는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서 상사인 폰 리벤트로프에게 불려가 질책당하기도 했다.6. 제2차 세계 대전
독소불가침조약당시 외무차관이기도 했던 바이츠제커는 1942년에 친위대 명예소장으로 승진하였다.1943년 바티칸의 대사로 부임하여 1945년 종전 때까지 자리에 있었다. 그는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할 때 바티칸을 점령하지 말라고 히틀러에게 탄원해 승낙을 받아내기도 했다.
7.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
재판에 회부된 폰 바이츠제커 |
1950년에 은사석방된 바이츠제커는 이후 반전, 반나치 운동에 대한 회고록을 편찬했는데 1951년에 바이에른 주 린다우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8. 가족관계
1911년에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장교의 딸인 마리아네 폰 그레페니츠(Marianne von Graevenitz, 1889~1983)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1912~2007)
- 에른스트 빅토어 폰 바이츠제커(?~1915) - 영아기에 사망
- 아델하이트 폰 바이츠제커(1916~2004)
- 하인리히 폰 바이츠제커(1917~1939) - 폴란드 침공에서 전사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1920~2015)
장남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는 원자핵 모델과 항성 핵융합 반응 등에 관한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저명한 핵물리학자였으며, 막내아들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전후 서독의 연방 대통령이 됐고, 독일 재통일을 재임중에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