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05: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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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카를 오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사령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SS 경찰고급지도자를 담당했다.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의 함부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오베르크는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입대해 1916년 9월에 소위로 승진한 후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함부르크로 돌아온 오베르크는 소매상과 플렌스부르크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1923년에 5살 연하였던 아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1926년에 함부르크로 돌아온 오베르크는 수입과일 판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 가을에 회사를 퇴직하고 함부르크 시청 가까운 곳에서 담배 소매업을 운영하였다.
1931년 6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오베르크는 1932년 4월에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1933년 5월 15일에 친위대 장군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함부르크의 친위대 조직시찰때 눈에 들어 추천을 받아 1933년 7월 1일부터 오베르크는 하이드리히의 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윽고 오베르크는 하이드리히의 오른팔이 될 정도로 위세를 얻었는데 1934년 6월 30일에 일어난 장검의 밤 사건당시에도 하이드리히의 측근으로서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후 하이드리히와 사이가 약간 벌어진 오베르크는 친위대 본부를 떠나 하노버의 참모지도자로 이동했는데 1939년에는 작센 주의 츠비카우에서 경찰서장으로도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 1941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라돔의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로 취임한 오베르크는 폴란드의 유대인 박해정책과 노동자 차출에 전념했는데 1942년 5월부터 점령지 프랑스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유대인과 레지스탕스 소탕에 전념하여 그의 지배하에서 약 75,000명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덕분에 그는 "파리의 도살자"라는 멸칭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뜻밖의 면모도 보이는데, 마르세유의 범죄구역을 소탕하고 범죄자들을 때려잡기도 했으며, 프랑스 내 무장친위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설립되는 것을 막아섰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본인이 쿠데타군에 의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쿠데타가 진압되자 자신을 체포했던 쿠데타 지휘관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하고 체포를 문제삼지 않은 전적이 있다. 여러모로 희한한 인물이다.
5. 전후 행적
전후 오베르크는 서독정부로부터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은사 석방되어 1962년 11월에 풀려나 플렌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