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마을인 베르그라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스웨덴인으로 아버지는 무역회사의 중역이었다.[1] 양친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지만 집안은 부유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독일로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개인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었다. 다레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4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양친은 그가 9살일때 독일로 이주해 하이델베르크로 이사했다. 1911년에 다레는 교환학생으로서 윔블던의 킹스 컬리지 스쿨에 다녔다. 그 후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914년부터 괴팅겐 남부의 비첸하우젠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농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다닌 후 군대에 지원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다시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패전 후 경제공황으로 인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져 이를 단념했다. 대신 그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비첸하우젠으로 돌아왔다. 그 후 포메른에서 농장 조수로 무보수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독일병사의 치료를 관찰했을 때 훗날 저작에 영향을 미쳤다. 1922년에 다레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할레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축의 사육을 전공하여 농학 학위를 취득했다.
1929년에 박사연구를 마친 그는 동프로이센과 핀란드에서 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독일청년으로서 조국의 회복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토지회복에 열중인 청년단체인 <아르타마넨>에 가입했다. 다레가 <북방인종의 장래는 땅에서 결정된다>라는 관념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도 있어 이것을 피와 땅(Blut und Boden)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Blut>는 곧 피, 인종 및 혈통을 표현하며 <Boden>은 땅, 영역, 혹은 토지로 해석한다. 이 이론의 본질은 점령되어 경작되어진 토지와 인간과 사이에 장기간에 걸쳐 벌어지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1926년에 발표된 다레의 첫 정치적 논문은 식민지화에 관한 것으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기를 포기한 독일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첫 저서인 <북방인종 생명의 원천인 농민>은 1928년에 쓰여졌다. 그는 삼림보호를 크게 강조하여 자연스런 토지관리 방법을 주창하며 가축을 사육함에는 개방적인 공간과 공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크게 감명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 하인리히 힘러였다. 힘러 자신도 <아르타마넨>의 멤버였다. 다레는 독일농민을 <독일국민의 문화적 인종적 중핵을 형성하고 북구인의 선조를 지닌 균질적인 인종집단>이라 정의했다. 북구인의 출생률은 다른 인종보다 낮았기에 북구인은 오랫동안 절멸의 위협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다레는 열렬한 나치당원이어서 농민을 나치에 가입시키기 위해 1930년 여름에 농업에 관한 정치적인 조직을 설립했다. 그는 이 조직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도시정부에 대한 무기로서 전원지역의 농민의 불안을 틈타 나치에 충실한 후원자로서 농민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과 장래 동구권 정복지에서 슬라브인을 대신해 이민할 농민에게 대해 선거권을 주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리하여 그는 농촌을 국가사회주의의 기틀아래 넣는데 성공했다. 친위대에도 가입하여 상급집단지도자까지 승진했다.
나치가 정권을 획득한 후에 다레는 식량장관, 인종이주국 장관, 전국 농민지도자 등에 취임하여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일했다. 그는 소규모 단위의 농장이 분할되는 것을 막기위해 세습농지법의 제정을 추진했지만 이 법률은 지주와 소작농 간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레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인종과 영역>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여 <나의 투쟁>에서 서술한 <동방으로의 충동>과 <생존권>을 대표하는 나치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부여했다. 다레는 1942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는데, 실제로는 강제수용소에서 배급을 줄이려고 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