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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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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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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아힘 파이퍼 컬러.jpg
이름 Joachim 'Jochen' Peiper
요아힘 '요헨' 파이퍼
출생일 1915년 1월 30일
출생지 독일 제국 베를린
사망일 1976년 7월 14일 (향년 61세)
사망지 프랑스 트라브
신체 178cm, 61kg
복무 친위대(1933년 ~ 1945년)
최종계급 무장친위대 대령
주요 참전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아르덴 대공세
주요 서훈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아버지 볼데마르 파이퍼[1]
어머니 샤를로테 슈바르츠
형제자매 형 한스 하소 파이퍼[2], 호르스트 파이퍼[3]
배우자 지구르트 힌릭센
자녀 하인릭 파이퍼, 엘케 파이퍼, 실케 파이퍼
1. 개요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2.2. 제2차 세계 대전2.3. 전후 재판2.4. 말년과 사망
3. SS 시기의 경력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요아힘 파이퍼2.jpg
무장친위대 소령 시절의 사진.
나치 독일친위대 장교. 최종 계급은 SS 대령[4], 최종 직책은 제1 SS기갑연대장이었다.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하다. 말메디 학살에서 미군 포로와 프랑스인 주민들 다수를 살해하였으며, 소련에서도 여러 비슷한 학살을 자행한 전쟁 범죄자이기도 하다. 전후 결국 프랑스인들에 의해 보복살해당했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파일:external/peiper.reibert.info/school-peiper.jpg
청년 시절의 파이퍼
1915년 1월 30일 베를린 출생으로 볼데마르 파이퍼와 샤를로테 슈워츠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933년 SS에 자원 입대했고, 그의 지원서를 살펴본 요제프 디트리히는 그를 자신의 제1SS기갑사단에 배치했다.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을 비롯해 유능한 인물들이 다수 포진한 정예 부대였다. 초기 SS 시절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이후 라이프슈탄다르테 예하의 기갑 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되었다. 힘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3살 연상의 시구르드 힌릭센과 결혼해서 슬하 1남 2녀를 두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파일:external/1.bp.blogspot.com/Joachim_Peiper_decorating_a_soldier.jpg
능력과 카리스마, 거기에 '이상적인 아리아인'의 외모까지 겸비한 파이퍼는 엘리트 독일군의 표상과도 같은 장교였다. 초창기의 SS는 외모도 따졌기 때문에 헤르만 페겔라인, 오토 귄셰, 막스 뷘셰 등 출세에 외모 덕을 보았던 SS 장교들이 꽤 있다.

부하들도 그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는 1943년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Sd.Kfz. 251 2대로 그 유명한 파이퍼 전투단을 창설해 활약했으며,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명한 전투에 수 차례 참전했다.

파이퍼 전투단은 요제프 디트리히 휘하 제6 기갑군 소속으로 "라인의 수비" 작전에 참가한 라이프슈탄다르테 예하 병력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였는데, 아르덴 대공세에서 포병대와 기갑부대를 동원한 미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800여 명의 병력을 보존한 채 벨기에의 라 글레이즈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 학살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6대의 쾨니히스티거를 포함해 수많은 전차를 마을에 방기한 채 도보로 아군 진영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videos.videopress.com/joachim-peiper_dvd.original.jpg
파이퍼는 업무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으며, SS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30세의 젊은 나이에 SS 대령으로 진급했다. SS에서 세번째로 젊은 대령이었다. 그보다 빠른 SS 대령 진급자는 24세에 진급한 헬무트 슐츠(Helmuth Schulz)와 26세에 진급한 군터 달켄(Gunter d'Alquen)이 있다. 이는 파이퍼를 총애했던 힘러가 그의 영전에 각별히 신경을 쓴 덕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독일군 최고의 명예 훈장 중 하나인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기도 했다.

2.3. 전후 재판

파일:파이퍼 머그샷.jpg
요아힘 파이퍼의 머그샷
파일:external/d1ceaeed7b1d67735a88294771ea6a1ab9400be6c3b11d0e85d8500839098604.jpg
군사재판에 출두한 파이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다른 무장SS 병사들과 함께 말메디 학살 재판(Malmedy massacre trial)에 기소되었다.

여러 증언에 의해 파이퍼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적어도 두 번 내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벨기에의 민간인들을 사살한 혐의에 대해서 파이퍼는 그들이 파르티잔이었다고 답했다.

당시 파이퍼와 부하들은 가족을 소련측에 넘겨 버리겠다는 협박과 구타를 당했는데, 이에 파이퍼는 부하들만 방면해 준다면 자신은 모든 죄를 자백하겠다고 밝혔지만 거부당했다. 미군 제30 보병사단 119연대 소속 대대장 해롤드 D. 맥코운 소령은 재판에서 사건 당시 파이퍼가 오히려 부상당한 미군을 위해 위생병을 남겨 놓았다고 진술하는 등 파이퍼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의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고, 파이퍼의 부하들은 유죄 선고와 더불어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파이퍼 역시 감독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파이퍼는 부하들을 고통스러운 교수형 대신 총살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기각당했고,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와중 다수의 자백이 가혹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말메디 학살 사건 관련 피고자 다수에게 선고된 사형은 장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4. 말년과 사망

이후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에 석방된 파이퍼는 HIAG[5]의 주선으로 포르쉐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전범이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독 정부는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도피 생활을 해온 전범들을 낱낱이 찾아내 기소하기 시작했는데, 파이퍼 또한 보베 학살 사건을 줄곧 조사해 온 어느 이탈리아인에 의해 고발당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넘겼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증거불충분으로 아예 기소가 되지 않았고, 이후 나치 전범인 베르너 베스트 SS대장의 재판에 소환되어 여죄를 추궁당했으나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 보니 기억에 없다는 증언을 반복하여 처벌을 모면했다.

이후 잡지의 자유 기고가로 일하다가 자신 소유의 별장이 있는 프랑스의 오트 소느 트라브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라이너 부쉬만(Reiner Buschmann)이라는 가명으로 영국의 군사 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어눌한 프랑스어 발음을 의심한 사람들에 의해 정체를 들켰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가 이 사실을 보도하는 바람에 전 프랑스인들이 그의 신원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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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파이퍼
파일:external/i53.photobucket.com/whodisE.jpg
1976년 7월 14일, 파이퍼를 죽여 버리겠다는 문구가 그의 집 담벼락에 쓰여졌다. 위험을 느낀 파이퍼는 으로 투병 중이었던 아내를 먼저 피난시켰지만, 본인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고 그날 밤 자택에 투척된 화염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방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인해 신체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당시 프랑스 여론은 '마땅히 죽을 만한 놈이 죽었다'라는 식의 냉담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범행을 저지른 그 누구도 체포되거나 기소되지 않았다. 비슷하게 정체가 드러나 살해당한 나치 전범으로는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이었던 구스타프 바그너, 라트비아 리가 게토의 학살자이자 부역자였던 헤르베르츠 추쿠르스(Herberts Cukurs), 체르케스인 부역자이자 무장SS 대원이었던 체림 수브조코프(Tscherim Soobzokov) 등이 있다.

파일:요아힘 파이퍼 묘.jpg
요아힘 파이퍼의 묘.

3. SS 시기의 경력

4. 평가

오늘날에도 말메디 학살이 자발적인 것이었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가지만, 이 사건에 파이퍼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은 이상 그는 전쟁범죄자다.

부하들에게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신뢰받았다. 매사에 침착하고 냉철한 성격이었으며, 부하들 사이에서는 '파이퍼를 화나게 하기'로 내기를 걸었을 정도라고 한다.

전투에서는 직접 선두차량에 탑승해 진두 지휘를 하기도 했고, 전차장으로 탑승해 우수한 전과를 올린 적도 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당시 SS소령임에도 직접 집속 수류탄을 들고 전차에 달려들어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 공로로 전차격파 훈장 은장(Tank Destruction Badge in Silver)을 수여받는다. 에른스트귄터 크래치머(Ernst-Günter Krätschmer)가 목격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약간 구부린 자세로 적진을 주시하고 있던 파이퍼는 최고 속도로 달려온 T-34가 불과 3m 앞에서 포사격을 해오자 전차 위로 올라타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투척, 순간적으로 T-34안의 전차병들은 즉사했고 파이퍼 자신은 20~30m를 구른 다음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하들이 다가오자 그는 마치 어린이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지으면서 '얘들아 오늘은 육박전투기장을 타는 날이다'라고 서로를 격려했다."

종전 후 영국 역사학자와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파이퍼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된 랍비 일행을 풀어줬으며, 그들이 전후에 찾아와 감사를 표했다고 본인 입으로 주장했으나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파이퍼는 그 전에도 한 베를린 출신 랍비가 전범 재판 때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 재판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1943년에 파이퍼가 아우슈비츠로 보낸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24명에 불과했으며, 이들 중 누구도 파이퍼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정보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정작 본인 스스로 위의 내용을 주장하거나 말한 적이 없다는 증언도 있어서 위의 정보조차 사실인지 의문이 든다. 어찌되었든간에 확실한 것은 파이퍼 본인 스스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적은 없지만 그 자신이 힘러의 부관이었고 그가 이끄는 SS 병력들과 함께 들어온 특별청소부대들이 파이퍼 관할 하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체포한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파이퍼가 유대인에 대해서 무관심했더라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1] 독일 국방군 육군 소령, 1960년 사망.[2] 정신질환이 있었으며, 자살 시도 후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서 지내다가 1942년에 사망했다.[3] 무장친위대 대위. 동성애자설에 시달리다가 1941년에 자살했다.[4] 전쟁의 막바지인 45년 4월에 진급을 했기 때문에 SS대령 계급장을 달고 찍은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5] 친위대 상호부조협회. 이 모임은 오토 쿰, 파울 하우서, 빌헬름 비트리히, 요제프 디트리히 등 4명의 SS 출신 장군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로 무장친위대를 옹호하려고 역사왜곡을 일삼다가 1992년이 되어서야 해체되었다. 이들이 전세계에 뿌린 역사왜곡의 씨앗이 친독 밀리터리 동호인이 SS를 옹호하는 뿌리가 되었다. 전직 SS 대원들의 비밀 모임을 기자가 파헤치는 내용의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스릴러 소설 오데사 파일이 1972년에 나와 히트했고, 그 2년 후 존 보이트, 맥시밀리안 쉘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쪽은 가상의 단체다. 70년대 말에 국내에서도 개봉.[6] 처음에는 사고를 쳐서 최전선으로 발령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