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트 공화국 수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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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초대 로코트 자치국 수반 브로니슬라프 블라디슬라보비치 카민스키 Бронисла́в Владисла́вович Ками́нский | |
출생 | 1899년 6월 16일 |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1] | |
사망 | 1944년 8월 28일 (향년 45세) |
나치 독일 바르테란트 국가대관구 리츠만슈타트 | |
국적 | [[로코트 자치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교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무장친위대 소장 |
경력 | 로코트 자치국 수반 |
1942년 1월 8일 ~ 1943년 8월 26일 | |
참전 |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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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로코트 자치국 수반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창기
1899년 6월 16일 비텝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폴란드인, 모친은 독일인이었으나 카민스키는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자각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재 공과대학에 재학 중 적백내전이 터지자 적군에 입대하였고 전역 후 대학교를 졸업한 뒤 화학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소련 성립 이후인 1930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잠시 투옥되었고, 1937년 대숙청이 시행되었을 때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직장에서 쫓겨나 벨라루스 브랸스크에 있던 노동 교화소로 끌려가 증류실에서 근무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카민스키가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버리고 나치 독일에 협력할 마음을 품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2. 독소전쟁
1941년 나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독일-소련 국경이 혼란해지고, 더불어 카민스키가 있던 브랸스크에도 독일군이 쳐들어왔다. 카민스키는 같이 수감되어 있던 친구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Konstantin Voskoboinik)와 같이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독일군에게 부역할 것을 약속하며 브랸스크 지방의 자치권을 얻어냈다. 브랸스크의 대표자는 보스코보이니크가 맡았고 카민스키는 그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당시 브랸스크 주변에는 소련계 파르티잔이 활동하여 치안이 불안정했다. 보스코보이니크와 카민스키는 친독계 성향 소련인을 모집해 자경단을 조직하여 치안 유지에 나섰다. 자경단을 조직한 후에 카민스키는 브랸스크 일대의 자치원을 독일군에게 양도하고, 집단 농장을 폐쇄한 뒤 반공 성향을 지닌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을 모집했다. 1942년 보스코보이니크가 소련군 공수부대와 교전 중에 사망하자 카민스키가 자경단의 수장이 되었다. 카민스키는 러시아 인민해방군(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Народная Армия)으로 바꾸었다. 당시 인원은 2만 명 정도였다.
카민스키의 군대는 동족인 소련인으로 구성된 파르티잔임에도 그들을 철저하게 진압하여 해방군 사령부 주변에는 목 매달린 파르티잔 시체가 흔히 보였고 이로 인해 침략군인 독일군에게도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독일군 제2군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 상급대장[2]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제2군의 상급 제대인 중부집단군의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도 이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카민스키는 로코트 자치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해당 지방의 민병대를 여단으로 재편해 스스로 여단장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소련 정부에서 "귀순하면 사면해 주겠다"고 통보하여 해방군에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부대 자체가 망할 뻔했으나 카민스키는 탈주자의 즉결 처분을 지시해 해방군의 붕괴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1942년 후반에는 단순히 알보병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대가 BT 전차 등의 기갑 전력을 노획하기도 하는 등 무시 못할 세력으로 자리잡았다.[3]
2.3. 무장친위대 합류
가운데가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오른쪽 무장친위대 소장이 카민스키이다. |
카민스키 여단의 약탈 행위는 힘러에게까지 보고될 정도로 도를 지나친 상황이었다. 원래 약탈품은 모두 힘러에게 가야 했으나 카민스키 여단이 그걸 무시하고 자신들이 모두 착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인 1만 명을 학살하는 일명 "오코타 학살(Ochota massacre)"을 저질렀다. 이들의 약탈, 강간, 학살 등 범죄행위는 같은 무장친위대도 기겁할 정도로 도가 지나쳤고, 보다못한 헤르만 페겔라인이 이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히틀러에게 직언을 하게 된다.
2.4. 최후
바르샤바 봉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월 28일, 카민스키는 무장친위대 회의를 위해 독일 본토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우치[4] 시에서 기관총에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당시에는 폴란드 파르티잔의 습격으로 발표되었으나 현대에는 카민스키를 혐오한 무장친위대가 회의를 연다는 거짓말로 유인한 다음 몰래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며, 실질적인 명령은 에리히 폰 뎀 바흐가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여단 장병들은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밝혀진 뒤,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못하다가 나치 독일 측이 증거를 조작한 후 보여주자 그제서야 믿었다. 이후 카민스키 여단은 해산되었고 남은 부대원들 중 2천명은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실시한 테스트를 통과하여[5] 러시아 해방군에 편입되었다가 종전 이후에 나머지 군단 장병들과 함께 소련으로 송환되어 단죄당했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방어선 구축을 위한 일반 노동자로 전락하여 독일군의 거친 대접을 받다가 1945년 독일 항복 이후에 소련으로 송환되어 단죄당했다.3. 평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같이 바르샤바 봉기를 악독하게 짓밟은 3인방 중 한 명. 특히 소련 출신임에도 독일군에 부역한 점은 안드레이 블라소프와 비슷하다. 카민스키 여단과 비슷한 인간쓰레기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도 바르샤바에서 악마 같은 행동을 자행했으며 오늘날 폴란드에서 인간말종 취급당한다. 폴란드인들에게는 폴란드계 혈통인 것 때문에[6], 벨라루스인들에게는 고향이 지금의 벨라루스 지역인 것 때문에, 러시아인들에게는 정체성이 러시아인에 가까웠던 것 때문에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으니 냉전 종식 이후로는 무려 세 나라의 매국노가 된 셈이다.카민스키 여단의 행태가 어찌나 답이 없었는지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마저도 카민스키를 혐오했다. 이 인간은 폴란드인 출신으로 무장친위대에 병으로 입대해 대장까지 진급한 골수 파시스트이고 발트 3국, 소련 일대에서 악독한 파르티잔 색출 작전을 지시해 확인된 사망자만 20만 명이 넘어가는 똑같은 인간쓰레기인데도 그렇다. 결국 카민스키는 자신이 그토록 충성하던 나치 독일에 의해 죽음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손에 죽었던 것이 그에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는 것이, 그가 죽고 8개월 뒤에 소련군은 끝끝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그 즉시 부역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한 결과로 인해서 많은 소련인 부역자들이 소련으로 송환된 후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그 앞까지 갔다가 목숨만 건져 석방되었다. 만약에 이 놈이 종전까지 살아있다가 체포되었다면 그날 바로 다른 부역자들처럼 지옥행 확정이며, 실제로 카민스키처럼 독일에 부역하기로 결심한 후 러시아 해방군의 군단장이 되어 적극적으로 독일에 부역한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전후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형 판결을 받고 처단당했다.
사실 알고 보면 카민스키도 나름 사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버렸던 이유가 스탈린의 집단농장화와 대숙청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발언이 나올 법도 했던 게 당시 스탈린이 추진했었던 무리한 집단농장화가 실패하면서 당대에는 물론 후대에까지 피해를 입혔기 때문. 문제는 부역을 하면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동 때문에 블라소프 같은 다른 러시아계 부역자들과 나치 독일에게도 손절당했다. 블라소프와 러시아 해방군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능한 군인으로 평가받을지언정 카민스키 여단원들처럼 전투력은 밑바닥인 주제에 민간인 학살만 쓸데없이 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가 폴란드에서 죽지 않고 45년까지 살아남아 소련군의 추격을 뚫고 어찌어찌 엘바 강 서안의 미군이나 영국군에게 항복한다고 해도 허사인 것이, 종전 3개월 전에 벌어진 얄타 회담에서 그와 같은 소련 출신 독일군 부역자들을 모조리 소련으로 송환하기로 미영소가 서로 합의했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 이상 결국엔 소련에 송환되어 곱게 죽지 못했을 터였다.[7]
4. 주요 서훈 내역
- 철십자 훈장
- 파르티잔 소탕전 기념 훈장
- 동부전선 동계 전투 휘장
5. 둘러보기
[1] 현 벨라루스 비텝스크주 비텝스크[2] 일부 사이트에서 루돌프 슈미트 "원수"라고 적어 놓은 것이 검색되는데 사실이 아니다.[3] 나중에는 독일군이 노획한 T-34 전차까지 몇 대 넘겨받아 굴렸지만, 어쨌든 태생은 민병대인지라 소련 정규군과 붙기에는 무리였다.[4] 독일 점령기에는 나치당원 칼 리츠만의 이름을 붙인 리츠만슈타트(Litzmannstadt)로 불렸다가 독일 패망 후에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5] 원래 독일 국방군 육군 상층부에서는 이들을 몽땅 러시아 해방군에 편입하려 했으나 이것을 사령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격렬하게 거절하였고, 결국 합의 끝에 이렇게 된 것.[6] 폴란드 내에서 학살을 자행한 건 덤.[7] 실제로 블라소프와 러시아 해방군은 종전 당시 소련군을 피해 도망쳐서 미군에게 항복했으나 이 회담 내용 때문에 미군은 이들을 보호하는 척 하면서 이들을 소련으로 넘겨버렸다. 그 결과, 중립국이나 남미 등으로 재빠르게 망명한 운 좋은 극소수의 대원들을 제외하고 블라소프와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소련으로 송환되어 처형되거나 굴라그 생활 도중 죽거나 혹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죽을 때까지 부역자라는 오명을 달고 살게 되는 등 소련으로 송환된 부역자 모두가 단죄당했다. 사실 블라소프는 스페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부하들을 두고 혼자는 못 간다며 거부하고 소련으로 잡혀갔다. 그리고 이 자가 전쟁 당시 중립을 지켰던 국가로 튀려고 해도 문제인데, 우선 1945년 5월 독일 항복 당시에 연합군은 추축국 지역을 거의 모두 점령했을 뿐 아니라 경계 역시 삼엄하여 중립국과 인접한 국경지대로 도망가기도 전에 잡힐 위험이 크다. 게다가 설렁 중립국으로 도망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이 자의 악명은 전 유럽에서 유명한지라 연합군이 송환하지 않으면 제제를 가하겠다는 내용의 압박을 해당 국가에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해당 중립국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는 뻔하다. 다만 모든 일이 그렇듯 여기서도 예외가 존재했으니, 리히텐슈타인의 러시아인 부대가 그러했다.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해방군 문서의 주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