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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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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인터폴 총재 및 초대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Reinhard Heydrich
파일:라인하르트 오이겐 하이드리히 정면.jpg
<colbgcolor=#DD0000><colcolor=white> 본명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
Reinhardt Tristan Eugen Heydrich
출생 1904년 3월 7일
독일 제국 할레
사망 1942년 6월 4일 (향년 38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프라크
정당
재임기간 제2대 비밀국가경찰국 국장
1934년 4월 22일 ~ 1939년 9월 27일
초대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1939년 7월 27일 ~ 1942년 6월 4일
제6대 국제형사경찰기구 총재
1940년 8월 24일 ~ 1942년 6월 4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대리
1941년 9월 29일 ~ 1942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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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D0000><colcolor=#fff> 최종 계급 친위대 대장
질서경찰 대장
공군 소령
국적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장 191cm
학력 독일 해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가톨릭고트글로이비히[1]
부모 아버지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
(1865년 2월 23일 ~ 1938년 8월 24일)
어머니 엘리자베트 마리아 하이드리히[2]
(1871년 ~ 1946년)
형제 남동생 하인츠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
배우자 리나 하이드리히 (1911 ~ 1985, 1931~1942; 그의 죽음)
자녀 4명
별명 사형 집행관[3]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4]
금발의 야수
프라하의 도살자
힘러의 사악한 천재
서명
파일: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서명.svg
}}}}}}}}}}}} ||

1. 개요2. 생애
2.1. 암살 - '유인원 작전'2.2. 사후 - 나치의 보복
3. 평가4. 어록5. 기타6. 진급 내역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7.2. 소설 및 기타 대중매체7.3. 논픽션7.4. 하이드리히를 모델로 한 캐릭터
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라인하르트 오이겐 하이드리히.jpg
나치 독일의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질서경찰 대장(SS Obergruppenführer und general der Polizei), 초대 친위대(SS)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본부장과 국가보안본부 제4국(Amt. IV)-비밀국가경찰국(Geheimes Staatspolizeiamt, Gestapo)의 제2대 국장 및 제6국(Amt. VI)-해외보안국(SD-Ausland)의 초대 국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하인리히 뮐러와 함께 그 유명한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든 장본인으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나치당에 들어오고 죽을 때까지 나치당이 관련된 사건에는 모두 하이드리히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유대인의 절멸을 사실상 결정한 반제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장 잔인한 나치 인사들을 뽑을 때도 이 모든 것을 결정한 아돌프 히틀러홀로코스트의 주동자인 하인리히 힘러를 제외하고 그 다음으로 평가될 정도다.

2. 생애

1904년 3월 7일 독일 동부의 할레안데어잘레(Halle an der Saa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테너인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Richard Bruno Heydrich, 1865~1938)였는데, 유대인 혈통의 유명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회고에 따르면 가창 면에서나 연기 면에서나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두드러지지도 않았던 2류 성악가였다고 한다. 덤으로 발터는 성품에 모난 데가 없었던 이 인물에게서 어떻게 라인하르트 같은 악마가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엘리자베트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크란츠(Elisabeth Anna Maria Amalia Krantz, 1871~1946)로, 작센 왕국의 드레스덴 궁정의 궁정 고문관을 맡은 음악 연구자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Georg Eugen Krantz, 1844~1898)의 딸이었다.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1895년에 지은 오페라 아멘(Amen)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트리스탄 오이겐이라는 미들네임은 아서 왕 전설트리스탄과 이졸데트리스탄과 외조부인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 교수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이드리히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수영, 펜싱, 승마 등 엄청 다양한 운동을 했다고 하며 귀족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꽤 잘나가는 음악가이며 어머니 또한 집안이 괜찮아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감상을 자주 했다고 하며 이 바그너의 음악이 그가 히틀러를 따르게 된 이유라고도 한다. (Hitler's Hangman -Robert Gewarth-). 참고로 히틀러는 바그너의 팬이었단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바그너는 먼 훗날에도 바그너 그룹의 어원이 되면서 또다시 풍평피해를 입었다.

하이드리히는 학창시절 때부터 유대인이라면서 왕따를 당해왔다. 내성적인 성격과 톤이 높았던 목소리도 한 몫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의 별명은 모세 헨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대인들과 절친했고 집으로 랍비들까지 데려와 사이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술자리를 가진 점 때문에 이런 소문은 신빙성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나 아버지는 극구 부인했고 사업이나 여러 인맥 때문에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밝혔다.당시 독일 음악계에 유대인들 비중이 높았기에 음악가들이 유대인들과 친한 경우는 허다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찬양곡을 지휘하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묵살하자, 히틀러가 수용소로 보낸다고 협박함에도 푸르트벵글러는 거리낌없이 "그거 잘됐네요. 수용소로 가면 음악가 친구들이 많을테니 저는 반갑게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할 정도로 음악계에 유대인들이 많았다. 결국은 푸르트벵글러가 유대인 음악가들에 한하여 자비를 베풀어주는 조건으로 지휘를 수락했지만.

유대계라는 소문은 하이드리히가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거론됐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조사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소문의 유포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 Hitler's Hangman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가 유대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그는 성적이 레포름김나지움에 진학 할 정도로 우수하였고 화학분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어머니가 사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했고 그는 작곡가가 되어 가업을 이어나가는것을 포기하고 1922년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중위까지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자랑스러워 했고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가 되길 포기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1931년에 모종의 이유로 쫒겨났다. 하이드리히가 훗날 이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일부에서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다른 처녀와 내연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여성의 명예와 장교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퇴역했다고 한다. 퇴역할 사안 까지는 아니나 처녀의 아버지가 당시 해군총사령관이던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강제로 퇴역되었다고 한다. 레더 제독은 1928년 10월 1일 한스 젠커 해군 상급대장에 이어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므로 강제 예편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최소한 이 이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은 독일 국방군 정보부서인 방첩국(Abwehr, 아프베어)을 이끌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소장이었다. 훗날 대장까지 진급한 방첩국의 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나치당 소속 보안국(SD)을 이끌던 하이드리히는 정보기관 특유의 충성경쟁 때문에 라이벌이 된다. 그러나,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에 들어했고 보안국과 방첩국의 관계가 라이벌 관계였지만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하기 직전까지도 둘은 개인적으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이 회고록에서 카나리스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묘사할 만큼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카나리스가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에도 계속 방첩국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리스가 위에도 언급된 하이드리히의 석연찮은 전역에 관련된 진상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유대인 가계라는 것을 카나리스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국방군과 나치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보부서를 자기 휘하에 두고 싶어했던 하이드리히가 그래서 카나리스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힘러와의 암투에서 보듯이 하이드리히는 상관이라고 공손해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있다. 이는 또한, 강제 예편으로 해군 및 관련 인사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딱히 해군 인사들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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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이드리히는 리나 폰 오스텐(Lina von Osten 1911년 6월 14일~1985년 8월 14일)과 약혼한 상태였다. 이 여성은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전범과의 생활>이라는 자서전을 썼다고 한다. 하급귀족 출신인 리나는 발트 해 연안의 페마른 섬 출신의 마을 학교 교장의 딸로, 엷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리나의 동생 위르겐 폰 오스텐은 1928년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리나 자신도 나치당 여성단체에 가입했다. 참고로 동생 위르겐은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습니까?'를 말한 주인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은 위르겐 기르겐존이다.

하이드리히에게는 나치당에서의 길이 이미 다져져 있는 셈이었지만, 처음에는 나치당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돌격대의 거친 이미지만 보고 그들을 판단했다. 그러다가 약혼녀 리나 폰 오스텐이 하이드리히에게 SS에 입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후 리나는 하이드리히와 결혼하여 실케(1939년 출생), 마르테(1942년 출생), 클라우스, 하이더(1934년 출생)를 낳았다.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클라우스(1933~1943)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회 유명인사가 되어 잘 살았다.

당시 SS는 히틀러의 친위 경호대로써 약 1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1년 27세의 하이드리히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SS의 대원이 되었다. 하지만 하급병사는 봉급이 없는 자원봉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하이드리히는 보다 높은 직위로 올라갈 궁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SS의 첩보 부서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발탁되었다.

하이드리히가 힘러의 부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특히 하이드리히가 장신의 금발에 탄탄한 체구를 가져서 겉으로는 금발벽안에 탄탄한 체격이라는 이상적인 게르만족의 전형으로 보인다는 점에 힘러가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였다. 알려진 바로는 하이드리히는 어릴적 친구인 친위대 대장 카를 폰 에버슈타인(Karl von Eberstein) 남작을 통해 힘러의 측근이었던 에버슈타인은 하이드리히와 힘러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중에 들리는 설명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첫 만남은 오해로 인해 이루어졌다. 당시 하이드리히는 통신전문가(하이드리히가 해군에 있었을 때의 직무가 통신분야였다)를 모집하는 줄 알고 지원했는데 정작 힘러는 보안전문가를 찾다가 하이드리히를 고용하게 된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어렵게 면접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제국지도자의 착각을 바로 잡아주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독일어로 통신장교는 Nachrichtenoffizier, 정보장교는 Nachrichtendienoffizier이다. 단 네 글자 차이인 것.

게다가 다른 1순위 후보가 이미 있었고 힘러는 이쪽을 더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쪽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나치를 정탐하기 위해 밀어넣은 프락치였다고 한다. 힘러는 하이드리히에게 단 20분을 주고 친위대 정보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써보라고 했다. 하이드리히는 자신이 해군 정보 세미나에서 얻은 피상적인 지식과 오래전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대부분 영국산 스릴러 소설을 읽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추가했고,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적절하고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군 전문 용어를 조금 포함시켰다. 그 결과 힘러는 그것을 검토한 뒤 만족스럽다고 평했다.

하이드리히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힘러로부터 고향 함부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1년 7월 14일 하이드리히는 친위대 상병이라는 초라한 계급으로 함부르크 친위대에 합류했다. 당시 함부르크 친위대 대원 대부분은 도시의 홍등가와 비어홀에서 빌붙어 살던 젊은 사회 부적응자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10월 5일 뮌헨에서 전문이 왔는데 내용은 "당원 번호 544916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당원은 본부의 명령에 따라 올해 10월부로 친위원수의 참모진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으로 함부르크 본부를 놀라게 했다. 봉급은 190제국 마르크로 변변치 않았고 정보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하부조직은 거의 없었다. 뮌헨 투르프켄슈트라세(Turfkenstrasse) 23번지 건물의 비좁은 4층에서 하이드리히는 비서인 아내와 조수 3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일했다.

하이드리히는 처음부터 세 사람 몫의 능력을 하며 밤낮으로 일을 했다. 하이드리히의 업무량은 베를린에 있는 괴링의 업무량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이드리히는 기존의 친위대 기록에서 자료를 뽑아 독재 권력의 기반인 방대한 색인 카드를 만들었고 그 속에는 동료 친위대원들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을 비롯해 정권에 미약하게나마 위협을 줄 수 있는 모든 인물들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으로 이어졌다. 정식명칭은 친위대(SS)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제6국, 해외보안국(SD-Ausland)이었다. 제3국도 약칭이 SD였는데 이는 국내보안국(SD-Inland)이었다. 하지만 3국은 인지도가 낮아서 보안국이나 SD라 하면 보통 6국을 가리킨다. 보안국은 하인리히 힘러의 산하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하이드리히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 후 쾌속 진급해 SS대위로서 보안국의 초대 국장이 되었다.

하이드리히의 보안국은 나치가 벌인 숙청과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하며 은폐공작을 벌였다. 나치 당내 온건파(좌파)와 돌격대를 싸잡아 숙청한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나 폴란드 침공을 위한 증거조작(통조림: Konserve 작전), 수정의 밤(Kristallnacht) 등이 대표적인 하이드리히의 작품이다. 전쟁 전 소련의 손발을 자르는 삽질이었던 대숙청독일 국방군 방첩국(Abwehr)과 보안국의 보기 드문 공동공작으로 촉발되었다는 연구도 있으며 베르너 폰블롬베르크 장군의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1939년 8월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글라이비츠 사건, 1939년 11월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펜로 사건 등 국내외의 정치사건에는 대부분 하이드리히가 관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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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Bf 109 E-3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스스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해 "국가보안본부"를 세우고 수장 자리에 올랐다. 1941년 6월에는 독소전쟁에 앞서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토벌을 위해서 살인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으며 독일 국방군에두아르트 바그너와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업무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독소전쟁이 터지자 자기 자신도 공군 소령의 계급을 달고 Bf109 조종사로 참전한다. 당시 독일 국방군은 타군으로의 전군이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하이드리히가 마침 해군에 중위 계급으로 몸담았던 이력이 있었으므로 공군으로 현역 복귀할 수 있었다.

하이드리히는 조종사로서 1941년 7월까지 소련의 대공포에 맞기 전까지 100여번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정규군 장교 복무 경험이 있는 일반친위대 고위 장교 중 하이드리히처럼 정규군 하급 장교로 복귀해 임무를 치른 경우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그가 이렇게 현역에 복귀한 이유가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려는 노림수였건, 단순한 애국심이나 불타오르는 열정이었건 간에 대단히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음은 틀림없다.

대공포에 맞은 같은 달에는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유럽 전역에 걸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을 건의받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 학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폴란드 유대인 학살계획은 (아마도) 하이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라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작전 이름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따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다른 유력한 후보는 재무장관이던 프리츠 라인하르트(Fritz Reinhardt)로 루돌프 회스가 재판 당시 이 계획의 이름을 딴 대상으로 증언했던 바 있다. 프리츠 라인하르트는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처리하는 총책임자였다. 한편, 폴란드 이동에서 이루어진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그리고 독일 직할령에 세워진 헤움노 절멸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것이 아니다. 라인하르트 계획으로 세워진 절멸수용소는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의 3개로 오로지 폴란드 유대인 절멸을 위해 세워졌다. 아우슈비츠는 설립 자체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발효된 후 절멸수용소로 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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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는 냉혹냉철한 성격에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 타고난 근면성과 예리한 정치수완에 해군에 있을 때부터 익힌 정보능력(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해 해군시절 정보부에 적을 두기도 했다) 등 출중한 능력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권력서열로는 뒤쳐졌으나 정보/경찰권을 장악한만큼 나치 당내에서조차 히틀러 유고시 권력을 장악할 제1순위라는 예측이 떠돌 정도였다. 이쯤 되니 하이드리히를 처음 발탁한 힘러 또한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죽을 때까지 냉각관계를 유지했다.

하이드리히도 힘러를 무능하다고 경멸하여 힘러의 의견에 반대되는 보고서를 제출해 물먹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이에 힘러는 쪼잔하게 하이드리히의 째진 눈을 트집잡아 "몽골인"이라 욕하곤 했다. 그런데 힘러야말로 전형적인 아시아인 스테레오 타입 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러를 포함, 괴벨스, 괴링 등 외모를 가장 중요한 인종적 기준 중 하나로 삼던 나치 고위 인사들은 거의가 추물투성이여서 원래도 준수한 외모였던 하이드리히는 이들 사이에 가져다놓으면 그야말로 나치가 꿈꾸던 아리아인의 이상향 그 자체였다. 다만 괴벨스나 힘러는 원래 못 생겼어도 괴링은 살이 찌기 전 사진을 보면 나름 쾌남형 외모를 갖고 있긴 했다.

또한 하이드리히가 키가 작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이드리히의 키는 무려 191cm로 오히려 매우 큰 편이었으며, 밑의 사진에서도 하이드리히의 키가 제일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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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줄의 세 명 중 가운데가 하이드리히[5][6]
1936년에 게슈타포는 사법경찰(Kriminalpolizei)까지 흡수하여 공안경찰(Sicherheitspolizei, 略 SiPo)[7]로 거대해졌다. 하이드리히는 상급대장 직위의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이 되었으며 1941년 37살의 나이에 노이라트의 뒤를 이은 체코 총독이 된다. 당시 나치 독일의 명칭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가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 나치 독일의 점령지였다.

체코 총독이 된 하이드리히는 잔인한 철권통치를 펼쳐 저항조직을 분쇄하고 체코인들의 저항을 찍어눌렀다. 이때 얻은 별명이 '프라하의 도살자' 혹은 '교수형 집행자 하이드리히'다. 헌데 강경책만 쓴 것이 아니라 체코인 노동자들에게 배급량을 대폭 늘려주거나, 체코인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접견하거나, 휴양시설을 개방하는 등의 온건책도 병행하여 체코 지역의 민심이 '안정'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채찍과 당근'의 교과서적 사례.

자신의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답게 매일 출퇴근에 호위차량, 경호원 심지어 전속부관조차 없이 전속 운전부사관 한명만 대동하고 메르세데스-벤츠 320B 컨버터블 차량을 뚜껑까지 열어놓고 타고 다니는 등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때문에 아래와 같이 암살에 노출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암살 후에 그의 이런 자만심 넘치는 행보에 대해 다른 나치 고관들은 "바보같다"고 평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외출도 자주 나가던 개전 전과 달리 개전 후 숱한 암살시도의 영향으로 총통 벙커 같은 곳에 쳐박혀서 나올 생각을 못했던 걸 생각해보면 나름 정확한 평가다.

2.1. 암살 - '유인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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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이드리히는 자신의 오만함으로 인해서 경력의 정점에 인생의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독일의 체코 지배를 정착시킨 원흉으로써 1942년 5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영국군 SOE(특수작전사령부, Special Operation Executive)가 공모한 암살계획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의 목표가 된 것이다. 영화 새벽의 7인앤트로포이드,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요제프 갑치크(Jozef Gabčík, 슬로바키아인) 육군 상사와 얀 쿠비시(Jan Kubiš) 육군 중사 등 9~10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군인이 선발되어 영국군 특수공작부 SOE로부터 암살에 필요한 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았다. 암살단은 영국 공군기로 체코 영내에 낙하해서 프라하로 잠입했다.

1942년 5월 27일 이른 아침부터 암살단은 트로야 다리 앞의 홀레쇼비체 거리로 향하는 커브길에서 프라하 성으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의 차량을 기다렸고 오전 10시 반 경에 하이드리히의 메르세데스 벤츠 오픈카가 나타났는데, 역시나 평소 하이드리히의 습관답게 호위차량은 없었고 운전부사관 클라인만 권총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차량이 커브길에 접어들고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자 갑치크는 차량 앞으로 뛰어들면서 숨겨둔 스텐 기관단총을 꺼내 쏘았다. 하지만 탄환이 약실에 걸려 발사되지 않았다. 스텐 기관단총은 급조된 총기였기에 탄환이 약실에 걸려 발사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총을 보고 놀란 하이드리히는 클라인에게 차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갑치크가 달아나자 클라인이 그 뒤를 쫓았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자가 된 하이드리히에게 쿠비시가 수류탄을 던졌다. 쿠비시도 수류탄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고 하이드리히가 권총을 난사해오자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곧장 달아났다. 갑치크를 쫓아간 클라인은 이 사건을 다루는 영화들에서는 총격전에서 사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다리에 부상만 입었으며 1990년대까지 살아있었다 한다.
이때 하이드리히는 무사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수류탄 폭발로 튄 파편과 차에 있던 말총 시트 조각 등이 몸에 잔뜩 박힌 상태였다. 하이드리히는 현장을 지나던 프라하 시민에 의해 바로 브로프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을 점거한 친위대는 다른 환자들을 모두 내쫓고 하이드리히 전용 응급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일단 현지 외과의사들에 의해 수술이 진행되었다.

하이드리히가 피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베를린의 하인리히 힘러는 SS 군의관들을 선별한 후 그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건너갔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처음 수술 당시의 예상과는 달리 패혈증이 생겨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결국 사건이 발생한 지 고작 1주일 만인 6월 4일 오전 4시 30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패혈증이란 걸 예상을 못 하고 상처들만 치료를 끝냈을 당시에는 하이드리히 스스로 밥도 잘 챙겨먹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패혈증을 간과한 채로 신체 내부에서는 패혈증이 점차 심해졌으며, 패혈증에 의한 쇼크로 쓰러져 사망한 것이다.

물론 하이드리히는 현장에서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서 사건 직후 공작원들에게 총질을 할 정도로 멀쩡했으나 체코인 의사들을 믿지 못해 치료가 지체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군의관들도 시간을 낭비하다가 결국 2차 감염에 의한 합병증으로 6월 4일 사망했다. 지금이야 정말 이렇게 사람이 죽느냐며 황당하겠지만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가 널리 보급되고 감염 예방이란 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이런 경우가 제법 많았다. 게다가 하이드리히를 병원에 이송할 때 급한 나머지 농업용 트럭의 짐칸에 태웠는데, 이 때 심각한 감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페니실린은 전량 영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맞붙었던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이 포로 교환이나 필요한 약품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영국군 쪽에서 페니실린을 보내준 기록이 있긴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인간 말종이었고 체코는 전장도 아니었다. 그나마 당시 히틀러의 주치의인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독일제 항생제인 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고했다. 모렐이 돌팔이 의사로 소문날 만큼 논란이 있는 처방을 많이 했어도 이 처방 자체는 정상이었는데 정작 담당 의사인 게프하르트가 이를 거부했다.

물론 치료를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죽을 수 있느냐는 의문 때문에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했거나 죽어가도록 방치하였다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는 당시 힘러가 파견한 의사가 힘러의 주치의 카를 게프하르트인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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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17일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대성당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작원들의 시체를 조사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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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에 성공한 체코 대원들은 이후 도주를 시도했으나 밀고를 당한다. 이들을 밀고한 카렐 쿠르다는 이후 나치로 전향하여 독일 여성과 결혼하고 적극적으로 옛 체코 망명정부의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등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전후 체포되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자신의 죄를 추궁하는 판사에게 "100만 마르크를 준다면 당신도 그랬을 것" 이라며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일절 후회하지 않는 뻔뻔한 모습을 보여 스스로 체코인들의 분노를 산 끝에 1947년 처형된다. 밀고로 거점이 게슈타포에게 발각당해서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의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대성당(Chrám svatých Cyrila a Metoděje, Saints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에서 저항하였다. 이중 쿠비시, 오팔카 등 세 명은 지상에서 저항하다가 전사했고, 갑치크 등 나머지 4명은 성당 지하실로 들어가서 저항하다가 독일군이 지하실에 물을 채우려 하자 모두 자결했다. 현재 대성당에는 당시의 총알 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곳에 전사한 대원들을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여러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사건 직후 미국에 망명해있던 거장 감독 프리츠 랑의 1943년작 '교수인들도 죽는다(Hangmen Also Die)'가 나왔고,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75년작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다.그리고 2016년에도 "앤트로포이드(유인원)"와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로 영화화되었다.

생전에 하이드리히가 가졌던 수많은 직위들은 다음과 같이 분산되었다. 제국보안본부장은 하인리히 힘러를 거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가져갔으며 게슈타포 총수직은 하인리히 뮐러가 승계하였다. ICPC(현 인터폴)의 수장은 아르투어 네베에게 승계되었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직은 형식적으로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에게 반환되었으나 실권은 쿠르트 달루게가 가지고 있었다. 친위대의 정보부서를 이처럼 완전 장악했던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2. 사후 - 나치의 보복

하이드리히의 장례식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라하 성의 명예의 궁전에 안치된 하이드리히의 관에 꽃과 화환을 바치기 위해서 보호령 전 지역의 당국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카를 다리 위의 궁전에서 중앙 철도역으로 옮겨졌다.

친위대 및 질서경찰 상급대장인 쿠르트 달루게가 하이드리히의 관이 베를린으로 운구될 때 동행했다. 이 사람은 체코의 리디체 마을 주민을 학살한 인물로 훗날 전쟁이 끝나고 이 죄를 물어서 1946년 프라하에서 처형되었다. 친위대에 4명밖에 없던 상급대장의 최초 역임자이며 에밀 마우리스와 함께 친위대의 창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자이다.

하이드리히의 장례 절차는 베를린에 신설된 제국 수상 관저에서 치러졌고 배경 음악은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이 연주되었다. 1942년 6월 9일 히틀러는 죽은 하이드리히를 찬양하면서 훈장을 수여했고, 특히 하이드리히의 두 어린 자녀들을 만났다. 이 훈장은 1942년 2월 11일에 만들어진 제3제국 최고 영예의 훈장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하이드리히에게 훈장을 선물하면서 추모 연설을 했다.
"나는 이 죽은 이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가장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독일 제국 사상 가장 강력한 보호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제국의 모든 적들의 가장 강력한 적수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을 방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순교자로서 쓰러져갔습니다. 당의 지도자이자 독일 제국의 지도자로서 나는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당신에게 최고 영예의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보답을 드립니다. 당신은 당 동지 프리츠 토트[8] 이후 두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히틀러가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하이드리히는 살아 생전에 히틀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베를린 도로를 지나 인발리덴 묘지로 옮겨져 1813년에서 1815년의 해방전쟁 때에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보병 연대장 타우엔치엔 폰비텐베르크 백작의 무덤 옆에 전사로서의 명예와 함께 묻혔다. 영국 언론은 이 장례식을 "화려한 시카고식의 갱스터 장례식"이라고 불렀다. 하이드리히를 위해서 건축가 빌헬름 크라이스와 아르노 브레커가 디자인한 기념묘가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없었다.

나치 독일은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체코의 리디체(Lidice) 마을을 불도저로 파괴하고 16세 이상의 남자 196명을 모두 처형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그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105명의 아이 중 88명이 죽고 17명만이 살아남았다. 전개를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이건 말도 안 되는 행위다. 연좌제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무엇보다 이 마을 사람들이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다. 위키피디아 링크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 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 전체를 파괴하였다. 또한, 암살범들이 성당 지하실에 피신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의 수좌주교인 프라하 대주교 고라스트 2세(Svatý Gorazd II., 이후 1961년에 시성됨) 및 사제 2명을 총살하고, 550여명의 정교도를 체포, 처형하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내에서의 정교회의 활동을 금지, 성당을 폐쇄함과 동시에 보호령 내의 정교회 성직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수감시켰다.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 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 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했다. 또한,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을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시키는 한편, 베를린에서는 수정의 밤 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첩보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다. 본래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 점령정부에서 교육 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에마누엘 모라베츠(Emanuel Moravec)와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카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점령지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협력하기를 극도로 꺼리자 더 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첩보부는 방침을 암살에서 납치로 바꾸게 됐다. 관련 글

또한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나치의 대규모 보복은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인들이 독일로 추방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하이드리히 암살 전까지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의 공식 입장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수복하더라도 미우나 고우나 독일계와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었다. 사실 체코 또한 나치 부역 행위로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그런 관계로 종전이 되자 수데테란트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폭행, 학살 등 보복행위가 잇달았다. 이 보복행위들은 소련군과 정부가 들어서서야 수습되었지만 그 뒤에는 추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뮌헨 협정 전까지만 해도 수백 년 동안 부대껴 살아온 같은 나라 국민이기도 하고, 그 숫자도 1,2만 정도도 아닌 체코슬로바키아 1300만 인구 중에 300만이 넘으니 300만이 넘는 자국민을 없애버리는 것도 망명정부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의 보복을 목도한 망명정부는 독일인과의 공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부 필요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추방하는 것으로 방침을 굳히게 된다.

망명정부의 의도와 무관하게 소련은 전후 독일인들을 거의 다 추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전후 독일인의 추방 자체는 필연이었다. 다만 독일인 거주지역 전체에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때 나치의 보복학살이 없었다면 독일인들의 추방 자체는 좀 더 온건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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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의 관을 지켜보는 하인리히 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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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의 데스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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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를 기리던 추모비.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죄다 박살났다. 하이드리히의 목재 묘비는 1945년에 사라져버리고 무덤에는 현재 아무런 표지도 없다. 패전 이전에 묻혔고 그의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관리는 되고 있다..같은 이유로 명문가 출신 나치 전범들은 시신이 화장되어 뿌려졌더라도 가문에 별도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하이드리히의 데스 마스크만이 나치가 하이드리히를 기리기 위해서 발행한 우표에 존재할 뿐이다.

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본부장에는 힘러에 충직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임명되었고, 1943년 1월 말에 정식 취임했다. 그리고 하이드리히가 계획했던 학살을 본격적으로 집행한 게 바로 칼텐브루너다.

나치 패망 이후 리디체 마을은 복원되었지만 원래대로 지금도 작은 마을이다. 2022년 인구가 600명도 안된다. 체코나 슬로바키아에선 이 학살을 잊지 말자고 리디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여러 개 생겨나기도 했다.

3. 평가

하이드리히는 야심이 매우 큰 인물이었다고 하며 이는 발터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사령부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보안국(SD)장 하이드리히와 첫 만남을 가졌다. 하이드리히의 사무실이 있는 게슈타포 건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하이드리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넓고 유난히 솟은 이마에 짐승의 눈처럼 빛나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작고 찢어진 눈, 포식동물 같은 긴 코, 크고 두툼한 입술을 가진 인상적인 인물이였다. 그의 손은 가늘면서 좀 지나치게 길어서 거미의 다리를 연상시켰다. 그의 큰 엉덩이는 멋진 용모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이 주는 여성적 효과는 그를 더욱 더 사악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체격이 큰 남자에게서 나오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높았고 말투는 신경질적인 스타카토 같은 음색이었다. 이후 수년간 하이드리히를 알고 지냈지만, 그에 대한 첫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이드리히는 나치 독일의 막후 실세였고, 정권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국가 전체의 발전 방향은 그의 강한 성격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정계의 모든 동료들보다 우월했고, 보안국의 방대한 정보기구를 장악하듯 그들을 장악했다. 하이드리히는 야심이 너무 컸다. 마치 한 무리의 포악한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속임수든, 배신이든, 폭력이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등이고 최고가 되려고 했다. 하이드리히는 얼음같이 차가운 지성의 도움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불의를 잔인함의 극단까지 몰고 갈 수 있었다.
- 발터 셸렌베르크의 "셸렌베르크 회고록" 중에서 [9]
하이드리히의 업적 중 하나는 별볼일없는 조직에 불과했던 보안국(SD)을 국방군의 방첩국(아프베어)을 본떠 독일 최대의 정보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보안국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하이드리히는 1934년 게슈타포와 보안국 양쪽을 이끌면서 악명높은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활약했다. 게슈타포를 창설한 것은 괴링이었지만,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들어낸 인물은 사실상 하이드리히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SD는 조직적으로는 매우 정비되어 있었으나, 자기 기관 수장의 암살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는 등, 실제 정보 수집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였다.

빌헬름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했다. 하이드리히가 카나리스와 영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D는 이후 카나리스의 아프베어와 권력다툼을 지속하였으며 결국 카나리스 제독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아프베어를 SD에 흡수시키면서 SD는 제국 최고의 정보부서로 등극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전에 죽었지만 하이드리히의 심복인 발터 셸렌베르크하인리히 뮐러가 계속 아프베어를 약화시키고 결국 카나리스도 체포해 처형했다.

하이드리히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총통의 지시를 받아 유태인 최종해결계획(홀로코스트)을 수립, 추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홀로코스트 실무 총책임자가 바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직접 집행한 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치 독일의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이올린 연주에 능했다. 또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수영, 스키, 승마는 선수급이었고 특히 펜싱 실력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 독일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될 정도였다.

체코의 총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호차량 없이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오픈카로 종종 다녔다고 한다. 이는 암살 이후 히틀러가 사석에서 하이드리히가 방탄설비를 갖추지 않은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다가 암살당한 것을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놀리는 등 나치당 최상층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후 점령지역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경비수준을 상향시켰다.

사실 이런 풍문 수준의 자료가 아닌 서방쪽 자료에서도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등 코미디 무대를 방불케하던 추물투성이인 나치 당내에서, 요아힘 폰리벤트로프와 함께 전형적인 게르만인의 외모를 하고 능력도 있었기에 히틀러를 제외한 나치 최고간부들을 꽤나 깔보았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지독히 의심이 많고 까다로운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하이드리히의 아내조차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동생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형처럼 SS 장교)는 형이 자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으나, 암살 후 그 행적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유태인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후 게슈타포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자,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권총 자살했다.

1939년에 하이드리히는 SD의 자금을 이용해 '살롱 키티'라는 매춘업소를 운영했다. 여기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요인들과 외국 귀빈들의 도청에 이용되었는데 당연히 하이드리히 자신이 이용할 때에는 도청기가 모두 떼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부하들에게도 냉혹한 상사로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도리어 기뻐한 부하들도 적지 않았다. 무자비한 일처리를 마다하지 않고 근면성실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하게도 그가 지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부하들에게도 높은 성과에 대한 기대치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에게만은 충성했지만, 괴벨스같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퍽 타산적인 충성이었다고 한다.

하이드리히가 처음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벌어진 부대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성 바츨라프 대성당에서 있었던 보헤미아 왕들의 왕관 보석 전시회였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작품은 성 바츨라프의 금관으로, 그곳에 박힌 사파이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유명했다. 하이드리히는 성 파츨라프가 10세기에 동생 볼레슬라프 1세가 음모를 꾸며서 살해되었으며[10] 바츨라프가 원래는 독일의 친구였기 때문에 동쪽에서 온 악랄한 패거리들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히틀러가 체코를 보호령으로 만든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강조했다.

왕관의 보석들은 전시되지 않을 때는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봉인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자물쇠가 채워지는데 전통적으로 열쇠는 국가원수를 포함한 일곱 명의 사람들이 보관했는데 이 열쇠들은 하하(Hacha) 대통령이 하이드리히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하이드리히는 "이것은 우리의 신뢰와 당신의 의무에 대한 증표로 보아주십시오."라며 열쇠 세 개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하이드리히는 이 보석이 박힌 왕관을 삼엄하게 경비하는 이유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왕국의 진정한 계승자가 아닌 사람이 그 왕관을 쓰거나 그 왕관에 손을 대는 자는 죽음의 표적이 된다는 전설이었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그 전설을 미신으로 생각하고 왕관을 반쯤 들어올렸는데 그로부터 약 9개월 후 저격당해서 사망했다. 영화 새벽의 7인에서는 부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있었던 일로 각색되고 하이드리히가 왕관을 머리에 써보자 부하들이 총통의 후계자가 되실 것이라고 축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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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장면
다수의 사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개전 직전까지 하이드리히가 상관인 하인리히 힘러를 암살하거나 격하시켜서 자신이 SS 제국 지도자가 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전 이후 1941년에 하이드리히는 '공식적'으로 힘러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4. 어록

동유럽 유대인은 볼셰비즘의 저수지이므로, 총통 각하의 뜻에 따라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 독소전쟁 개전 직전.
반유대주의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의학적 문제.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의 과정에서, 독일군의 감독하에 동유럽에서 유대인의 노동부대를 편성해야한다. 남녀별 대규모의 노동부대 안에서 노동이 가능한 유대인은 철도건설에 투입되지만 대부분은 자멸에 의해 결핍되겠지. 최후의 생존자는 의지가 강한 인간이니 그들에 대해서는 상응한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도태에 맡겨서 방치하면, 새로운 유대인의 피가 후세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란 것은 1100만명의 유대인의 처리를 의미하고, 거기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유대인도 포함된다. 유대인의 절멸이라는 목표는, 다름아닌 인류의 재편성을 의미한다.
- 반제 회의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가령 다른 누군가가 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거나 조직을 이용할 뿐이야.
- 아내 리나 하이드리히에게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 지역의 잠재능력을 완전히 써먹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방해하려고 한다면, 설령 그게 어떤 곳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철저히 진압할 생각입니다.
- 권한대행 취임 직후, 기자들 앞에서 성명 발표하며
세상은 손풍금이라네. 신께서 손잡이를 돌리시면 우리 모두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11]
- 하인리히 힘러에게 남긴 유언

5. 기타

6. 진급 내역

<rowcolor=#ffffff> 연도 계급
1922. 4. 1 해군 사관 후보생
(Fähnrich Zur See)
1924. 4. 1 준위
(Oberfähnrich Zur See)
1926. 7. 1 소위
(Leutnant Zur See)
1928. 7. 1 중위
(Oberleutnant zur See)
1931. 7. 14 SS 이병
(Mann)
1931. 8. 10 SS 소위
(Sturmführer)
1931.12. 1 SS 대위
(Hauptsturmführer)
1931.12. 25 SS 소령
(Sturmbannführer)
1932. 7. 29 SS 대령
(Standartenführer)
1933. 3. 21 SS 상급대령
(Oberführer)
1933. 11. 9 SS 소장
(Brigadeführer)
1934. 6. 30 SS 중장
(Gruppenführer)
1941. 9. 27 SS 및 질서경찰 대장
(Obergruppenführer)[12]
(general der Polizei)[13]

7. 대중매체에서

무자비한 나치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든 장본인인데다 정작 체코슬로바키아의 레지스탕스들이 짠 계획을 눈치 채지 못 해서 암살당해 죽었다는 점까지 상당히 드라마틱한 각색이 쉬운 인물이기 때문에 대중매체들에서 흔히 등장한다.

7.1. 영화

파일: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사형집행인도 죽는다!).jpg

암살 사건 자체를 다루는 영화로는 암살 바로 직후인 1943년에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프리츠 랑 감독, 베르톨트 브레히트 각본의 '사형집행인도 죽는다!(Hangmen Also Die!)'가 있다.[14] 배우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알란 역을 맡았던 한스 하인리히 폰트바르도프스키(1898-1958)가 하이드리히 역을 맡았다. 다만 비중은 초반에 등장했다가 암살당해서 적은 편이다. 일종의 맥거핀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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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는 1975년작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 유명하다. 1960-70년대 헐리우드 전쟁영화에서 나치 장교 역을 자주 맡았던 독일 배우 안톤 디프링(1916-1989)이 하이드리히 역을 맡았다. 배우 안톤 디프링은 유대계 혈통인데다 동성애자여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사람이었다. 안톤 디프링은 1963~67년에 나온 드라마 인터폴(Interpol)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실존 인물과는 닮지 않았지만 나치 고관스러운 차갑고 냉혹한 느낌은 잘 살렸다. 이목구비 자체는 닮은 편이나 38세에 죽은 하이드리히와 달리 디프링은 영화 촬영 당시 58세로, 실제 인물과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났었다. 또한 목소리가 다소 굵직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녔던 하이드리히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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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HBO에서 반제 회의를 영화화한 컨스피러시에서는 케네스 브래너가 하이드리히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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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는 킬리언 머피, 제이미 도넌이 체코 암살요원 역을 맡았고 배우 데틀레프 보테(Detlef Bothe)가[15] 하이드리히 역을 맡은 영화 앤트로포이드(Anthropoid)가 개봉했다. 하이드리히를 연기한 배우들 중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는 배우이며 흑백 쪽이 실제 인물, 컬러가 배우 데틀레프 보테. 젊은 청년기에 세력을 떨치다가 죽은 하이드리히에 비하면 중년의 느낌이 좀 나긴 하지만 보다시피 실제 하이드리히와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그래서인지 데틀레프 보테는 2005년에 나온 BBC 다큐멘터리 영화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과 2011년에 나온 체코 영화 Lidice에서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역할을 맡았었다. 아쉽게도 앤트로포이드에서는 비중이 매우 작아 하이드리히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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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하이드리히의 전기 영화 겸 암살을 다룬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가 개봉했는데 여기서는 배우 제이슨 클라크가 하이드리히 역할을 맡았다. 포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즉결처형시키거나 반제회의에서 수백만명의 유대인 절멸에 대한 내용을 마치 해충 박멸을 위한 작전처럼 말하는 등 하이드리히 역할로 나온 어떤 매체보다 매우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연출되었다. 다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주연으로 하고 있음에도 후반부에는 암살 작전을 시행하는 레지스탕스 중심으로 돌아가서 비중은 적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CGV 스크린문학전 기념으로 2018년에 제한상영했다가 제이슨 클라크가 나왔던 퍼스트 맨의 개봉 이후인 11월에 정식 개봉했다.

2011년 체코 영화 리디체는 그가 암살당해 그야말로 박살난 실존 마을 리디체 사람들을 통해 사건을 그려냈다. 극중, 하이드리히는 나오지 않고 라디오나 신문으로 암살 소식이 나온다.

7.2. 소설 및 기타 대중매체

나치의 승리를 다루는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의 뒤를 이을 후계자 또는 아예 2대 총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당신들의 조국에서 하이드리히는 괴링, 힘러 등 자기 윗자리의 거물들을 소련 잔당의 테러로 위장하여 암살해버렸으며, 히틀러는 아직도 총통으로 남아있고 자신은 서열 2위지만 그건 명목상일 뿐 실권은 자기가 쥐고 있다.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나치가 승리한 평행계(라이히-n이라고 명명)중 라이히-5,[16] 라이히-2에서 2대 총통으로 등극한다고 언급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 소설 강철 심장의 사나이에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42년 체코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기존 역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진 무장 게릴라 조직 베오볼프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패전 후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비정규전을 벌인다. 제목이 가리키는 사람은 당연히 하이드리히. 여기서 히틀러와 힘러는 원래대로 자살했고, 하이드리히가 알프스 산맥의 비밀기지에 은신하여 베오울프를 지휘하는데, 그 전과가 심히 충공깽스럽다. 이반 코네프조지 S. 패튼, 콘라트 아데나워를 암살하고 베를린에서 소련 장교들의 신년 파티에 사용될 술에 독약을 섞어 몰살시키는 한편, 전범재판이 열릴 예정이던 뉘른베르크 법원을 자살트럭으로 파괴해 재판을 무산시키기도 한다. 이에 소련이 자체적으로 전범재판을 열려고 하자 폭발물을 실은 C-47 수송기를 하이잭하여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프랑크푸르트에 더티 밤과 비슷한 방사능 테러를 일으켜 수많은 미군들을 방사능 피폭환자로 만들어버린다. 파리의 에펠탑과 영국의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 세인트폴 대성당도 독일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파괴. 덕분에 미국에서는 당장 독일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라는 반전 시위가 빗발치는 가운데 연합군은 알프스 지하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노예 노동자의 증언을 토대로 하이드리히의 기지를 습격하여 그를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힘러가 죽은 뒤 하이드리히의 부관이 된 요아힘 파이퍼가 뒤이어 저항운동을 지속함으로써 결국 자국 시민들의 반전 여론에 굴복한 영국과 미국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철수한다. 철수하지 않은 프랑스와 소련은 독일 점령지에 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로 하는데 이들의 가혹한 통치로 점령지의 독일인들도 곧 봉기할 암시를 주면서 끝난다. 터틀도브는 이 소설을 부시 행정부가 벌인 2차 이라크 전쟁을 풍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또다른 대체역사 소설 The War That Came Early에서는 히틀러와 힘러가 국방군과의 내전으로 사망하자, SS 국가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나치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나 결국 나치 세력이 국방군에게 패배하면서 끝난다.

최후의 신조에서는 발터 모델이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비폭력 시위대를 학살한 것을 놓고 라디오에서 "제국보안본부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인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영웅적으로 진압한 발터 모델 원수의 행동을 크게 칭찬했다"라는 식으로 언급된다.

내가 히틀러라니!에선 히틀러가 사망 후 비록 총통이 되지는 못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고, 어떤 생각에선지 직접 권력을 쥐지 않고 다른 나치스 간부들을 설득 및 숙청해 빌헬름 2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4세를 카이저로 모시는 독일 제국을 부활시킨 대신 국가보안본부장 자리는 종신토록 지키며 천수를 누리다 1979년에 사망한다. 작중 친 독일 국가인 독재국가 통일 대한민국에 핵무기 완제품과 자료를 넘겨주어 대한민국의 핵보유를 돕는다.

위대한 총통 각하에서는 나치스가 되기 전 루돌프 폰 베리툴트의 제의로 자유군단의 인원이 된다. 원 역사와 같이 냉혹한 성품을 보인다. 다만 그 대상자가 유대인과 같은 무고한 이들이 아닌 주인공에게 방해가 되는 나치당을 대상으로 찍어누르려 하는 것이 차이점이고 원래하고 비교하면 아이러니하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디트리히의 미래지식으로 반나치파인 아프베어들이 폴란드 침공 빌미를 만들려던 SS를 제압하자 이 때문에 힘러가 반나치파로 몰아 죽인다.

파일:Bscap0176.jpg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SS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전후 아프리카 총독이 되어 독일령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화시켰다고 묘사된다.[빅스포일러] 드라마에서는 레이 프로시아가 하이드리히 역을 맡았다.

필립 커의 베를린 느와르 3부작 중 1부 '3월의 제비꽃'과 2부 '창백한 범죄자'에서 등장. 1부에서는 주인공 베른하르트 귄터가 수사하고 있는 사건이 괴링의 약점을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를 다하우로 잠입시켜 결정적 증거를 쥘 수 있도록 도와준다. 2부에서는 권터에게 유태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독일 소녀 연쇄살인에 관한 수사를 의뢰한다. 비이성적인 유태인 박해를 막고 독일 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는 거짓이고 사건의 배후에 있는 힘러의 약점을 잡아 기관 내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소설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나 실존 인물처럼 음험하고 시종일관 악의 카리스마를 풍긴다.

닥터후의 소설에서는 2번 등장하는데, 5대 닥터 시절에 1934년 장검의 밤 당시 베를린에서 닥터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힘러와 동행하여 마스터를 추격했다고 한다. 후에 닥터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둘 중에 한명에게서 총을 빌려 둘 다 쏴버렸으면 좋았을거하고 한다(The King of Terror). 두 번째는 7대 닥터 시절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하이드리히가 저지 섬에 있던 하트만 대위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독일 점령군은 레 뮤 엔지니어링 구역에서 발견한 사이버맨 잠복 병력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트만은 쇼트 대령과 조지 림의 행동이 계획의 진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나. 하이드리히는 하트만이 그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이드리히가 권위를 제공한것처럼 행동하도록 허락한다. 여기서 하이드리히에 대해 묘사되길 총명하고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안목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제3제국의 모든 중요 사람들에 대한 파일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의 두뇌가 기억 속에 모든 정보를 간직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침착한 태도는 "전설적"이었다고 하며, 그는 항상 여자를 유혹하는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Illegal Al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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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버린 Vol 3 #32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1942년에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를 방문하여 수용소장인 바우먼 소령에게 현재 수용소의 수용력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며, 동쪽 벽에 5천 명을 추가로 수용할 수용소의 증축을 명한다.

히로에 레이의 초기 작품 비취협기담에서는 쿠쿨칸 계획을 위해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등장하는데, 힘러와는 다르게 오컬트에 부정적이며, 메인 악역인 그리말킨에게 게슈타포로 소속을 옮기라는 제안을 했다가, 비웃음과 협박을 받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목숨구걸을 하는 추태를 보여준다.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1936년을 시작 시점으로 플레이시 선택 가능한 치안장관 중에 하나로 등장한다. 보유한 특성은 공포의 왕자.[18] 1942년 이후에도 영국과 전시 상황이라면 유인원 작전 이벤트가 발생하여 체코에서 암살당한다.
파일:Tno_heydrich.png 파일:Reinhard_Heydrich_Post-GCW.png
독일 내전 시기의 하이드리히 내전 이후의 하이드리히

Hearts of Iron 4의 대체역사 모드 중 추축국의 2차대전 승리 후 세계를 다룬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나치당 내 SS 계파(국가사회주의-스파르타주의)의 수장으로 나온다. 작중 히틀러가 사망하면 북프랑스, 벨기에 지역에서 ‘부르군트 기사단국’을 차린 힘러의 도움을 받아 총통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에 뛰어든다. 또한 작중에는 보어만과 괴링, 슈페어에 비해 광신적인 SS 파벌을 이끄는 하이드리히는 넷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람으로 간주되어 대다수 독일인들은 하이드리히가 총통 자리에 앉는 것을 반대하며,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한 슈파이델 정권마저 SS 파벌이 전쟁에서 이긴 이후로도 입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할 정도이다.

독일을 발전을 위해 내전에서 승리한 하이드리히는, 지구에 오직 '우등민족' 아리아인들만 남기기 위해 핵전쟁을 일으켜 모든 '열등민족'들을 죽이려는[19] 힘러의 미친 계획을 알게 된다. 이후 그는 제국과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 힘러의 2차 내전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SS 군벌은 물론 비 독일계 반군 및 개혁파들과도 손잡게 된다. 독일 전국에 퍼져있는 핵탄두를 과반수 확보해 핵전쟁을 막아낸 후, 부르군트 기사단국을 공격해 힘러를 총살시킴으로써 핵전쟁을 막아 낸 하이드리히지만, '우등민족' 독일인들의 잔학행위와 그와 비교되는 '열등민족' 슬라브인, 발트인, 유대인 등의 성과를 확인하며 나치즘의 모순에 절망하게 되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역설적으로 나치즘 자체에 대한 회의와 자기혐오로 얼룩진 유서를 작성한 후 자살하고 독일은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된다. #1 #2 #3 #4

슬레이어의 앨범 Divine Intervention에 수록된 SS-3는 하이드리히의 암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SS-3은 하이드리히가 암살당시 탑승했던 차량의 차량번호라고 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들을 감시하다 그들이 반역을 꾸미는 증거를 찾아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아프베어SD에 합병되며 독일 첩보망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특유의 꼼꼼한 성격과 미래를 아는 히틀러의 지식이 더해져 그가 이끄는 SD는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 있지만 정작 하이드리히 본인은 자기도 몰랐던 고급 정보를 히틀러가 알고 있자 의문을 가지고 히틀러 주변인들을 조사한다. 측근들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 때마다 히틀러는 측근들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유능한 비밀 정보원들이 있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막상 하이드리히가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측근들을 조사해봤으나 이들은 붙어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괴벨스는 그 정보원들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냐고 말했다. 이외에도 역사에서처럼 힘러를 내심 경멸하며 언젠가 그를 제거하고 자신이 슈츠슈타펠의 수장이 될 계획을 가지고 있다가 실행에 옮겼으나, 히틀러가 관련 보고를 듣고 제거를 결심하여 원래 힘러에게 갈 폭탄을 하이드리히의 비서를 통해 그의 집으로 보내 가족째로 날려버리며 사망한다. 하이드리히의 사망으로 히틀러의 정보의 출처를 캐내려는 사람이 없어진 덕분에 히틀러의 정체가 밝혀질 걱정도 없어진다.

7.3. 논픽션

프랑스 작가 로랑 비네가 하이드리히의 삶과 암살작전 전후의 사정을 다룬 논픽션 "HHhH(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힘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가 국내 번역 출간되어 있다. 위에 나온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의 원작이기도 하다. 참고로 굽시니스트가 홍보용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7.4. 하이드리히를 모델로 한 캐릭터

Dies irae의 등장인물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신좌만상 시리즈)의 모델이 이 인물이다.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하이드리히 랑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성은 영화감독 프리츠 랑에서 따온 듯하다. 참고로 프리츠 랑은 위에서 설명되었듯이 라인하르트의 암살을 다룬 영화 '사형집행인도 죽는다'를 찍었다.

우주전함 야마토 2199의 등장인물 하이돔 김레의 외모와 행동거지의 모델이다. 이름과 직위는 하인리히 힘러에서 따왔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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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Holy Reich: Nazi Conceptions of Christianity, 1919–1945. p. 219.[2] 풀네임은 엘리자베트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하이드리히.[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붙인 별명이다.[4] 아돌프 히틀러가 그를 칭찬하며 붙인 별명이다.[5] 맨 오른쪽은 제외.[6] 하이드리히 옆에는 하인리히 뮐러, 하인리히 펠리스가 있다. 맨 왼쪽에서 두번째가 발터 셸렌베르크이다.[7] 나치 점령지의 현지 부역자들도 보통은 SiPo로 합류한 편이었다.[8] 프리츠 토트(Fritz Todt, 1891년 9월 4일 ~ 1942년 2월 7일)는 독일의 건축기술자 및 나치의 고위 인물로, 나치당 내각의 군수탄약성 장관을 지냈다. 또한 1938년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하였고, 외국인 강제노동 징발 조직인 토트 조직(Organisation Todt)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9] 다만 셸렌베르크가 하이드리히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러 독극물을 이용한 고문을 당한 전과가 있었음을 감안해 들어야 한다[10] 유대인들이 배신하는 것을 연상시키기 위해서 한 말.[11] 1942년 체코에서의 암살 작전 이후 회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힘러에게 남겼던 말. 작곡가인 아버지가 쓴 오페라 『아멘』의 구절이라고 한다.[12] 나치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대장).[13] 질서경찰 대장.[14] 시기를 보면 알다시피 미국의 전시 프로파간다 영화이기는 하지만 감독과 각본가가 세계적 거장인만큼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15] 1965년 생 독일 배우이다.[16] 홈라인/센트럼과 더불어 무한세계의 3대 세계중 하나.[빅스포일러] 드라마판에서는 히틀러를 죽이고 마르틴 호이스만을 총통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보낸 암살자가 오히려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눌려 자살하고(...) 죽은 줄 알았던 히틀러의 전화를 받고 놀라다가 SS대장 존 스미스의 총격을 맞고 체포된다. 그리고 후에 존 스미스의 유도 심문에 걸려들어 음모의 전모를 자백한 뒤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다.[18] 2, AoD에서는 외국의 공업력 +15%, 필요 소비재 +10%, 3에서는 여당 지지율 +15% 파르티잔 능률 +10이다.[19] 힘러는 아리아인들이라면 나약한 운터멘쉬들과 달리 위버멘쉬 아리아인은 핵전쟁이 일어나도 죽지 않고 버틸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