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독일의 경순양함급에 대한 내용은 드레스덴급 경순양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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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 (UTC+1/+2) | ||||
주 | 작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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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328.48km² | ||||
인구 | 566,222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1,724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디르크 힐베르트[1] | [[자유민주당(독일)| 자민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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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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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 |||||
1석 | Freie Sachsen | ||||
1석 | Volt | ||||
1석 | Dissident:innen Dresd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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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작센 주의 주도. 엘베 강 연안의 마이센과 피르나의 중간, 베를린 남쪽 191km 지점에 위치한다. 본래 슬라브 취락에서 시작된 도시로 슬라브어로 "늪" 혹은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오랫동안 작센의 정치적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구수에서는 라이프치히에 밀려 제2의 도시이다. 독일 전체에서는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2000년대 한때는 인구증가율이 라이프치히에 앞섰기 때문에 2010년 기준으로는 드레스덴이 작센 최대 도시가 되기도 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다시 역전당했다.
엘베강을 기준으로 강남의 구시가(Altstadt)와 강북의 신시가(Neustadt)[2] 로 나뉘며, 7개의 교량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2. 역사
본래 슬라브족의 취락지대였으나 중세시대 독일인의 동방식민운동에 의하여 독일인 주민들이 대거 이주했다. 1200년 이전에 성이 세워져, 1206년에 도시가 되었고 이후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인 하인리히 3세가 거성을 구축했다. 1316년에 일시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에 귀속되었으나 1319년, 다시 베틴 가문에게 반환되었다.1485년, 베틴 가문의 영지 분할 조약인 라이프치히 조약으로 베틴 가문의 방계인 알브레히트계에게 넘어갔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는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어 1547년, 종가인 에른스트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가지고 있던 선제후직을 찬탈하여 작센 선제후로 등극하였고 드레스덴을 거주지로 정하면서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3]가 되었다. 17세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30년 전쟁과 1685년의 대화재 등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거나 전소되자 도시 주위에 성벽을 구축하고, 18세기에 이르러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각종 문화시설을 정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을 세우면서 독일 유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허나 7년 전쟁 때 작센이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의 포격을 받아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때 작센 왕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계기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 도시를 작전기지로 삼고 동맹군과 싸웠기 때문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산업화로 인한 경제 붐이 일어나면서 초기 단계의 기계 엔지니어링, 자동차, 항공, 카메라, 초콜릿 산업 등이 발달하기 시작, 1945년 이전 드레스덴은 독일의 주요 도시 중 가장 활발한 산업도시 역할을 했다.
2.1. 제2차 세계 대전과 동독 시절
정말이지 드레스덴은 멋진 도시였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아니,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자 아버지를 두었어도, 내 말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는 없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에리히 캐스트너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드레스덴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후방에 위치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 14일 영국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건축물들과 공장시설이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종전 후 동독령으로 들어가면서 전쟁보상으로 주요 공장들이 해체되고, 기업들은 본사를 서독으로 이전했다. 그나마 많은 숙련된 전문 인력들은 동독에 남았다. 에리히 캐스트너
이후 도시의 고 건축물에 대한 일부 복구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나 공산 정권 하에서 복구 속도는 매우 지지부진했으며 드레스덴에 남아있던 유일한 고딕 건축 양식의 건물이었던 성 소피아 성당(Sophienkirche)는 1962년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완전히 철거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후 30여년 가까이 엘베 강변의 브륄 테라스(Brühlsche Terrasse)를 구성하는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드레스덴의 구 시가지, 특히 노이마르크트(Neumarkt)는 사실상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알트마르크트(Altmarkt)와 프라하 거리(Prager Straße)의 경우 196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 양식으로 재건되어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2.2. 통일 이후
이후 고 건축물의 폐허 더미와 사회주의 양식 건축물이 뒤섞여 난개발로 몸살을 앓던 드레스덴은 1989년 동독 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통일 직후 연방정부는 동독 시절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구시가지의 복구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작센 주 정부는 구시가지 내 사회주의 시절의 건축물들을 전부 철거하고 궁극적으로는 구시가지를 폭격 이전의 상태로 원상복구시키겠다는 중장기 플랜을 수립해 현재까지 작업을 착수하고 있다.[4] 3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 현재는 이 작업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인데 1726~1743년에 세워졌다가 1945년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성모 마리아 교회(Frauenkirche, 프라우엔키르헤)가 1993년부터 복원에 착수해 2005년에 준공되어 다시 축성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프라우엔키르헤 복원과 동시에 구시가지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던 경찰본부(1979년 완공)가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사진과 설계 자료를 토대로 폭격 이전의 건축물들이 복원된 상태이다.현재 구시가지 복원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드레스덴은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알트마르크트내 동독 시절 지어진 스탈린주의 양식 건축물과 알트마르크트내 문화과학궁전(Kulturpalast)의 경우 드레스덴의 공산권 역사를 상징하는 시민공간이라는 이유도 있고 시민들이 보존을 원하여 철거되지 않고 낮에는 도서관으로, 저녁에는 레스토랑으로 아직도 계속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콘서트홀도 이 건물 안에 있다.
3. 정치
옛 동독이다보니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네오나치 등 PEGIDA로 대표되는 극우 세력들이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도시로, 2019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단, 드레스덴 자체는 도시권인지라 녹색당과 좌파정당(좌파당+사민당) 지지율이 높은 곳이다. 시의회에서도 녹색당이 10석, 좌파당과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각각 5석에다가 기민련이 13석으로 14석의 대안당을 압박하고 있다. 교외로 나갈수록 작센의 여타 농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 지지세가 높아진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시위할 때마다 드레스덴 시내로 모여들어 시위하기 때문에 도시 브랜드가 와장창 박살나고 있어 관광업이 중요한 도시 입장에서는 골치를 썩는다.연방하원의원은 드레스덴시에는 2석이 배정되어 있으며 2석 모두 기독교민주연합 소속 의원이 현직이다
매년 드레스덴 폭격 추모일마다 나치들이 모여서 '시위'를 한다. 이때에도 반나치 시위대가 몇배로 더 운집해서 머릿수로 밀어버린다.
4. 산업
항공기 제조, 자동차 제조, 정밀 광학기기·기계·화학·담배 등 각종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폭스바겐이 드레스덴에다가 수제 공장을 차려서 페이톤을 생산했다. 또 도자기로도 알려져 있며 1828년에 창설된 드레스덴 공과대학교(TU 드레스덴)와 조형미술·음악·교통·의학 등의 대학이 있고, 도서관·방송국·박물관 등의 문화 시설도 잘 정비되어 있으며, 특히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프리드리히 쉴러, 슈트라우스, 에리히 캐스트너 등과도 연고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5. 스포츠
지역을 상징하는 축구팀은 SG 디나모 드레스덴. 2020/21 시즌 3부 리그인 3. 리가에서 우승 및 승격에 성공하여 2021/22 시즌에는 2부 리그인 2. 분데스리가에 소속되어 있다. 비록 2~3부 리그에 머물러 있지만 구 동독 시절 최고의 인기팀이자 연고지가 대도시인 드레스덴인지라 홈경기 때마다 경기장에 3만명 이상의 팬들이 꽉꽉 들어찬다. 라이벌은 FC 한자 로스토크, 1. FC 마그데부르크, FC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 켐니처 FC 등등 인근 동독 지역 축구팀들이다.다른 연고 스포츠 팀으로는 도이체 아이스하키 리가(DEL) 2부 리가에 소속되어있는 아이스뢰벤이 있다.
6. 관광
아래 구경거리의 대다수가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건설로 그 문화유산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어 2006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가 결국 2009년 세계유산에서 지정해제되었다. 애당초 1945년 이후 만들어진 건물들에게 세계유산이란 칭호를 붙여준 것 자체가 연합군이 이 도시에게 너무했다는 의미로 붙여준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도시 동쪽으로는 엘베강이 체코에서 독일로 흐르며 좁은 협곡을 지나는데, 이 곳의 경치가 작센의 알프스라 불리며 널리 알려져있어서 드레스덴과 함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과거에 도시 곳곳에 세워졌던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과 예술품들 덕분에 '엘베강의 피렌체 (Elbflorenz)[5]'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1711∼1722 년에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츠빙거 궁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궁전들과 박물관, 미술관 등 유명한 건축물과 회화 등 많은 문화재가 있고,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의 이름을 딴 젬퍼오퍼(Semperoper)라는 오페라 극장 등이 있어 예술의 도시, 음악의 도시로서 알려져 있다.
먹거리로는 시내의 Camondas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
6.1. 구시가(알트슈타트)
구시가는 중세시대부터 드레스덴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엘베 강의 남쪽에 해당한다. 구시가 답게 계획되지 않은 복잡한 길거리가 펼쳐져야 정상이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폭격 이후 동독에서 복원 없이 공산주의식 직선형 신도시계획으로 만들어져 구시가지로 복원된 강가 주변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바둑판식 모양을 하고 있다. 물론 노이마르크트 까지 구시가지가 조성된 2021년 기준으로는 복잡한 길거리가 형성되었다.* 구시장 광장 또는 알트마르크트 광장
시청사와 십자가교회 등이 있으며, 드레스덴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물론 시청사는 광장에 접해있지는 않고 조금 떨어져있다. 시청사의 탑 위에는 금박을 입힌 높이 4.9m의 '황금 사나이' 입상이 서 있다. 시청사 발코니에서는 드레스덴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1945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었는데 1953년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만 되찾았다. 시청사 건물 옆에는 외벽이 검게 그을린 십자가교회가 서 있으며, 후기 바로크와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소년성가대는 매우 유명한데 그 역사가 700년이 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1434년부터 시작된 Striezelmarkt가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드레스덴의 무료 무선인터넷스타벅스도 이곳에 위치해있다.
* 노이마르크트 광장
* 노이마르크트 광장
구 시청광장 북쪽, 엘베강 쪽에 더 가까이 위치하는 광장으로 과거 왕궁 마굿간으로 지금은 교통박물관인 요한노임(Johanneum)과 성모 교회, 드레스덴 시역사 박물관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있다. 1945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후 이후 동독 정부에 의해 그 외형이 달라졌으나 통일 후 구시가지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점차 옛 모습을 되찾는 중으로 광장에 서 있었던 예 건축물과 바닥에 깔린 블럭들을 옛 모습과 유사하게 다시 깔고 있는 중이다. 2020년대를 기점으로 건물들은 모두 복원이 완료된 상태다.
* 성모 교회 또는 프라우엔키르헤Die Frauenkirche in Dresden
자세한 내용은 프라우엔키르헤 문서 참고하십시오.
* 성모 교회 또는 프라우엔키르헤Die Frauenkirche in Dresden
자세한 내용은 프라우엔키르헤 문서 참고하십시오.
1726년에서 1743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프로테스탄트 루터교회이다. 이 교회는 제단과 성단소, 세례반, 오르간[6]을 신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두는 급진적인 내부 배치를 채택했고 200년 동안 도시의 하늘을 지배했으나 1945년 영국 공군과 미국 공군의 드레스덴 공습으로 성당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전후의 독일 공산주의 정부하에서 프라우엔키르헤는 돌무더기 상태로 남아 1980년대 동안 성당 자리에 남은 시커먼 돌들은 평화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동독의 다른 큰 교회들은 그에 가세하여 공산주의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로 가는 한 걸음이 되었던 인권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독일 통일 직후, 원래 성당의 그림과 사진을 이용해서 1993년 복원이 시작, 2005년 완공되었다.
- 레지덴츠 궁전Residenz
12세기부터 마이센 변경백국을 통치해온 베틴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이 살던 궁전으로, 증축과 복원을 거듭해 복합적인 양식의 건축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공습으로 파괴되었으나, 옛 왕궁 마굿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거리 옆의 슈탈호프벽만은 기적적으로 전화를 모면했다. 슈탈호프벽에는 길이 101m, 높이 8m의 마이센 자기 타일로 베틴 가문의 역대 군주들을 새긴 '군주의 행진'이라는 벽화가 남아 있는데, 무려 25,000여 개의 타일이 쓰였다고 한다.
성 안에는 교통박물관, 궁정 교회, 드레스덴 박물관 등이 있다. 고가의 보물들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드레스덴 박물관은 1560년경에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1세에 의해 비밀금고 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그 당시 총 8개의 전시관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최고의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이마르크트 방면을 마주보고 있는 옛 마굿간의 교통박물관 또한 다른 지역의 교통박물관과 달리 트라반트, 바르트부르크, DR 시절의 열차들 등 옛 동독의 교통수단에 특화되어 있어 당시 시대상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둘러 볼 만 하다. 꼭대기 층에 있는 대형 철도모형 전시도 나름 볼거리.
- 브륄의 테라스
엘베 강변을 따라 하인리히 폰 브륄이 설계한 높고 넓은 정원테라스가 펼처져있으며, 현대미술관인 알베르티눔(Albertinum)과 주립 미술관인 예술아카데미(Kunsthalle im Lipsius-Bau), 구 작센의사당(현재는 작센주법원)이 위치해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아우구스투스다리, 엘베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괴테는 이곳을 '유럽의 테라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테라스는 대계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톨릭 궁정 교회와 레지덴츠 궁전으로 연결된다. 브륄의 테라스 아래에서 엘베강을 따라 필니츠 궁전과 작센 알프스 지역을 오고가는 관광용 증기선을 탈 수 있다.
- 가톨릭 궁정 교회
젬퍼오퍼 바로 옆에 있으며, 약 16,000㎡의 부지에 높이 85m에 이르는 작센 지방에서 가장 큰 가톨릭 성당. 1783년에서 1751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신교도 선제후국 작센의 군주였음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자로 선출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7]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작센을 다시 가톨릭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1980년 이후 천주교 드레스덴-마이센 교구의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이후 작센 군주들의 납골당[8]이 마련되어 있으며, 독일 바로크 오르간 제작자로 유명한 고트프리트 질버만의 웅장한 오르간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의 강론대가 눈길을 끈다. 외부의 1·2층 꼭대기는 많은 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을 연상시킨다. 드레스덴의 약 90%를 며칠 사이에 잿더미로 만든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으로 인해 궁정 교회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검게 그을린 건물 위에 흰색으로 보수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 젬퍼오퍼 (Semperoper Dresden)
작센의 국립 오페라극장으로서 1841년 처음으로 세워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두 차례에 걸쳐 건물의 설계를 맡았던 독일 절충주의 건축의 거장인 고트프리트 젬퍼의 이름을 따서 이름 지어졌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이곳에서 지휘를 했으며, 《방황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änder)》과 《탄호이저》를 비롯한 유명한 오페라들이 초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이 많이 파괴되어 1985년까지 복구작업을 했으며 주변에 있는 츠빙거 궁전의 무기 박물관이 있는 쪽 문을 통해 극장 광장에 있는 기마상이 보이는데, 이 동상의 주인공은 작센 왕 요한이다. 지금도 오페라, 발레 등의 공연이 열린다. 참고로 현 작센주 주의사당은 젬퍼오퍼 뒷편에 위치해있다. 독일의 다른 주들이 역사적 건물을 주의사당으로 주로 사용하는 반면에 그냥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 츠빙거 궁전
포스트 광장에 있는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인 궁전으로 1728년에 건설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었다. 건물은 크로넨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미를 살렸으며, 십자형의 넓은 뜰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다. 특히 '요정의 샘'이 유명하며, 광장에서는 매년 여름 드레스덴 음악제가 열린다. 도자기로 만든 카리용이 있으니, 종이 울리는 시간에 맞추어서 가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북쪽 회랑의 미술관에는 15~18세기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남쪽 회랑에는 화려한 왕궁의 도자기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는데 수많은 마이센 도자기, 도자기 인형들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양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역사박물관, 동물학박물관, 역사적 과학 도구 박물관 등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궁 내에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북쪽 회랑의 미술관에는 15~18세기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남쪽 회랑에는 화려한 왕궁의 도자기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는데 수많은 마이센 도자기, 도자기 인형들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양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역사박물관, 동물학박물관, 역사적 과학 도구 박물관 등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궁 내에 있다.
6.2. 신시가(노이슈타트)
신시가는 19세기에 혼잡하고 지저분한 구시가에서 벗어나 강 북쪽에 귀족과 신흥 부자들을 위해 새롭게 조성한 시가지로, 방사형으로 도로가 뻗어있다. 이 때문에 드레스덴의 도심지임에도 불구하고 전원풍 분위기가 강하다. 다만 가운데 대로를 기준으로 서쪽은 과거 모습이 보존된 반면 동쪽은 공산주의식 건물들이 들어서있어 분위기가 사못 다르기도 하다. 당연하지만 신시가지 쪽 엘베강면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 풍경도 멋지다. 해가 뜨는 아침이나 해가 지는 저녁을 추천. 현재 구시가지의 복원프로젝트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이 곳도 복원 프로젝트가 계획 중에 있다. 드레스덴 노이슈타트역이 위치해있다.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S반을 타고 노이슈타트 역에서 내리거나, 구시가지에서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트램이나 도보로 건너가면 된다.- 드레스덴 로만틱 박물관
구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이너레 노이슈타트에 위치한 미술, 문학, 음악 박물관으로 하웁트 거리에 있으며 박물관 건물은 독일의 화가인 퀴겔겐이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으로 퀴겔겐 하우스라고 부르기도 하며, 드레스덴 시립 박물관에 속해 있다.
17세기 후반에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1970년대 말에 드레스덴의 예술사 학자인 칼 루드비히 호크가 이 건물에 박물관을 설립했으며, 박물관 주변에는 에리히 케스트너 박물관, 드레스덴 예술의 집, 축구 박물관 등과 같은 박물관들이 인접해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에른스트 호프만과 로베르트 슈만, 리하르트 바그너 등의 예술가들이 드레스덴에서 활동했던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다. - 세 동방박사의 교회
구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이너레 노이슈타트에 위치한 교회로 건물의 일부는 여전히 교회로 사용되고 나머지 부분은 '교회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15세기 초반에 건축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 되었다가 공산주의였던 동독 치하인 1980년대 후반에 재건되었으나 동독이 공산주의였기에 재건 당시 교회 내부의 좌석 수를 3천 여 석에서 500석 정도로 줄였다.
이후 교회의 집에는 약 500석 규모의 큰 연회장과 작은 홀이 있고 10개의 회의실이 있어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고 회의나 세미나등의 학술 모임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작센주 의회의 의사당으로 사용됐다. 교회의 상징과 같은 높은 탑은 1854년에서 1857년에 걸쳐 건축됐다.
- 알베르트 광장
구 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이너레 노이슈타트 중심부에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 1812년에 지어졌을 당시에는 이름이 없다가 1829년 바우츠너 광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얻다가, 1871년에 훗날 작센의 왕이 될 알베르트를 기념해 알베르트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7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1945년 소련 점령시에는 붉은 군대의 광장으로 불리다가 동독정권 하에는 통일의 광장으로 명명되었으나 그러다가 1991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다시 알베르트 광장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교통의 요지 답게 드레스덴 노이슈타트역이 서쪽으로 가까이 있으며, 전철 노선 다섯 개가 이곳을 지나간다. 엘베강 북쪽 시내 중심의 9개 주요 거리가 이곳에서 별모양으로 만나고 있으며, 엘베강 다리들의 북쪽 연장선이 대부분 이곳에서 만난다.
- 에리히 캐스트너 박물관
드레스덴 엘베강 북쪽 교통의 요지인 알베르트 광장 인근 안톤 거리에 있는 "에밀과 탐정들"로 유명한 동화 작가이자 시인 에리히 캐스트너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본래는 빌라 아우구스틴이라 불렸고 에리히의 삼촌이 이곳을 구입했고 에리히 또한 어릴때 이곳에 들렸다고 한다. 독일 고건물 관리법에 의해 1997년 개조 되어 개인 소유로 있다가 1999년에 박물관으로 조성 됐으며, 드레스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드레스덴 문학 협회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다.
- 일본식 궁전
구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이너레 노이슈타트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1715년에 야코프 하인리히 백작의 궁으로 건축되었고, 이후 1717년 궁의 소유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에게 넘어갔다. 1729년에서 1731년까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일본 자기 컬렉션과 예술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건물 증축을 개시, 그 와중에 일본풍의 지붕이 얹혀지면서 이것이 일본식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계기가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5년 폭격으로 크게 파괴 되었다가 1951년에서 재건이 시작, 1987년에 완공되어 2009년 1월까지는 드레스덴 시립 고고학 박물관과 민족학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민족학 박물관만이 남아있다.
6.3. 시 근교
- 대정원(Großer Garten, 그로싸 가르텐)
구시가지 옛 성벽[9] 바로 바깥에 위치한 대규모 바로크식 정원이자 사냥용 숲으로, 중앙에는 바로크/로코코식 궁전이 위치해있다.[10] 본래 작센왕가의 여름 별궁이자 연회, 왕가 소유의 예술품 전시 및 보관용으로 쓰이던 곳으로 작센지방의 바로크 건축물로서는 가장 화려했으나 2차 세계대전에 괴멸적인 파괴를 입었다. 이후 궁전 건물은 외관은 똑같이 복원하였으나 내부는 현재 복원이 일부만 진행되었고 나머지는 계획 중이라 입장은 불가능하다.[11] 대정원은 전후 바로크식 정원과 호수, 동물원, 음악당이 복원, 유지되어 시민들의 공원이 되었다. 아름다운 곳이니 시간이 있다면 방문해보자. 드레스덴 동물원과 드레스덴 축구경기장도 이 곳에 위치해있다.
- 드레스덴 중앙역
과거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구시가지가 이 지역까지 뻗어있어서 구시가지라고 해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중앙역에서 구시가지 입구까지인 850여 m 거리가 근현대식 상가건물과 아파트로 채워져있어서 사실상 드레스덴의 신도시역할을 하고 있다. 드레스덴 중앙역은 그륀더차이트 시대인 1898년에 바로크양식으로 완공되어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통일 이후에는 대대적인 보수예산이 투입되어 모든 내부 시설이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역 구조가 매우 독특한데, 역의 한 가운데는 독일지역을 이어주는 두단식 승강장이지만 양옆으로 고층선로가 있고, 체코 방향으로 철도가 연결되어있다.
- 필니츠 궁전
드레스덴에서 엘베강을 따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가서 자리 잡고 있다. 강변에 위치해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여름 별궁으로 정부 코젤을 위해 지었다고 하며, 그 당시 바로크 시대의 드레스덴 혹은 작센 선제후국의 번영을 느낄 수 있다.
건축가 푀펠만이 궁전을 엘베강에 접하도록 하여 강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 별궁은 '작센의 베르사유'로 불리기도 한다. 수상 궁전과 산상 궁전은 18세기에 세워졌고 바로크 양식의 신궁전은 19세기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민예품이나 미술품 전시회장으로 쓰인다. 중국풍으로 지은 건물 외에 드넓은 영국풍의 정원도 눈길을 끈다. 여름에는 정원에서 종종 음악회가 열린다. 근처에는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베버의 집이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아쉽게도 이 곳을 연결하는 트램은 없어서, 63번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트램 2호선을 종착역(Freystraße)까지 타고 간다음에 엘베강을 소형 페리를 타고 건너는 방법도 있지만, 초행인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최고 방법은 드레스덴에서 역사적인 증기선을 타고 가는 것이나, 시즌에 따라 운행을 안하기도 하니 반드시 확인할 것.
- 모리츠부르크 궁전
드레스덴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 떨어져 있는 모리츠부르크에 위치한 궁전으로 해자 역할을 하는 넓은 호수 한가운데 섬 위에 위치한 바로크식 사냥용 궁전이다. 독일의 성과 관련된 사진이나 영상물에 한번씩 등장하는 편이다. 이 궁전의 역사는 16세기의 작센 선제후 모리츠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의 모습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때 형성되었다. 드넓은 숲속 거울 같은 호수 위에 정방형 대칭의 궁전이 자리 잡고있는 풍경도 멋있지만 이 궁전 내에는 최대 규모의 사슴 뿔 컬렉션이 소장되어있다. 무려 19.6kg에 달하는 사슴 뿔도 있다. 참고로 동독-체코 합작의 유명 고전 영화인 <Drei Haselnüsse für Aschenbrödel>(신데렐라)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해 겨울 시즌이 다가오면 영화 관련 전시도 열며 궁전 바깥 계단에는 청동으로 된 신데렐라 구두 한짝이 놓여져있어 방문객이 신어볼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 곳도 트램이 없어서, 드레스덴 노이슈타트 역에서 477번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맞다. 커트 보니것 투어라고 하며, 그가 전쟁포로로 있었던 제5도살장을 보러간다. 주로 미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듯. 정작 드레스덴 시민들은 잘 모르던 곳인데, 19세기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건설된 드레스덴의 진짜 대형 도살장이었던 곳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어있다. 지금은 드레스덴의 박람회장으로 쓰이기 때문에 드레스덴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면 사실상 거의 사업차 방문하는 외부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박람회장이기 때문에 트램 10호선(Messering (HALLE 1) 정거장 하차)으로도 연결되어있어서 교통은 편하다.
- 독일 연방군 군사 역사 박물관
1961년에 설립된 박물관으로 신시가지 북쪽 외곽인 현재 자리에는 2011년에 19세기 무기고 건물을 현대식으로 개축함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독일 연방군이 운영하는 중대형 박물관으로, 신개장을 한 2011년에만 50만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독일 연방군은 물론, 독일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 동독 군의 유물과 의상,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트램 7호선 또는 8호선(Stauffenbergallee 정거장 하차)을 타고 갈 수 있다.
7. 교통
여기도 서쪽의 부퍼탈처럼 현수식 모노레일이 존재한다. 이름은 슈베베반(Schwebebahn). 개통 연도도 비슷하며(다만 이쪽은 5월이다) 폭격도 운 좋게 피해갔을 정도. 다만 길이가 워낙 짧아 인지도는 부퍼탈쪽에 확실히 밀린다.[12] 부퍼탈의 모노레일이 도심교통수단의 역할을 한다면 드레스덴의 슈베베반은 그냥 언덕 하나 올라가는 역할이다. 당연히 정거장도 두 곳밖에 없다. 원리는 부퍼탈과 동일하지만 사실상 케이블카라고 보는게 맞을 정도. 동독 시절인 1984년부터 통독 직후인 92년까지 잠깐 운행을 중단했던 적도 있었다.현재 드레스덴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교통은 트램이다. 역사가 상당히 오래됐지만 통일 후 드레스덴 시가지 정비에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면서 싹 다 뜯어고쳤는지 시설은 무진장 좋다.
체코 국경[13]과 약 32km 정도 떨어져있기에 프라하로 가는 기차도 여기를 지나간다. 현재 드레스덴과 프라하를 연결하는 고속철도선 건설이 계획 중에 있다.
8. 여담
- 2014년 3월 28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드레스덴 선언' 또는 '드레스덴 구상'이라고 알려진 평화통일에 관한 연설(이른바 '통일 대박론')을 이 도시에서 했다.[14] 이 연설문은 훗날은 한국 정치사를 뒤흔든 희대의 정치 스캔들에 엮이게 됐다.
[1] Dirk Hilbert[2] 신시가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이어서 중세시대의 구도심과 대비하여 신시가여서 붙여진 이름이지, 한국 서울의 강남과 같은 근현대식 신도시가 아니다. 다만 역설적으로 2차대전 중의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해 알트슈타트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노이슈타트에 더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졌다. 구시가지의 옛날풍 건물들은 전부 전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3] 에른스트계 시절에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진 비텐베르크가 수도였다.[4] 도시 재건축 프로젝트라고 하여 드레스덴 외에도 수도인 베를린을 비롯한 일부 독일의 도시들이 2차 대전 말기 파괴된 구시가지를 복원하려는 중장기적인 계획이다.[5] 19세기에 유래한 상당히 오래된 별칭으로 사실상 드레스덴의 대용어로 쓰인다.[6]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연주했다.[7] 이게 왜 이슈였냐면 작센은 나중에 프로이센이 되는 브란덴부르크와 더불어 독일 신교도 국가의 맹주였기 때문이다.[8] 독일어로만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로만 입장할 수 있다. 여담으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전 베틴 가문의 군주들은 주로 노센(Nossen)의 알첼라 수도원, 마이센의 마이센 대성당, 프라이베르크(Freiberg)의 프라이베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9]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성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현 도심의 외곽순환로 역할을 하는 대로가 놓여져 있다.[10] 정원에 비교해 궁전 건물 자체의 규모는 작다.[11] 결혼식에 한해 개장하는 듯[12] 노선 총연장이 무려 274m(…)이다.[13] 독일 작센과 체코의 국경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경으로, 1459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에게르에서 조약을 체결한 이래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 시기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변경이 없었다.[14] 이를 기념하는 한국 광장(Koreanischer Platz)가 있다. 다만 주변의 치안이 별로 좋지 못해서 안 좋은 뉴스로 지역방송에 오르내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