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모 성당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독일에 이 이름을 가진 성당이 많이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드레스덴, 뮌헨, 뉘른베르크의 세 개를 꼽는다.
2. 드레스덴 프라우엔키르헤
기본 정보 | |
위치 | 독일 드레스덴 |
종교 | 루터교회 |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
지위 | 교구 교회(Parish Church) |
건축 정보 | |
건축가 | 게오르게 베어 |
양식 | 르네상스, 바로크 |
착공 | 1726년 8월 26일 |
완공 | 1743년 5월 27일 |
복원 착공 | 1994년 5월 27일 |
복원 완공 | 2005년 10월 30일 |
건축 내역 | |
전체 길이 | 50.02m |
전체 너비 | 41.96m |
전체 높이 | 91.24m |
2.1. 개요
독일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에 위치한 루터교회로, 독일어로 '성모 교회'를 의미한다. 종 모양의 석조 돔이 인상적인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잔해는 그대로 방치되어 공습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평화 운동을 상징하다가 독일이 통일된 후 본격적으로 재건 프로젝트가 가동되어 2005년 10월 30일 재축성식을 거행하고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 60여년만에 드레스덴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프라우엔키르헤는 재건 과정에서 전쟁 때 적대했던 국가들이 서로 힘을 합쳐 복구를 도운 화해의 상징이기도 하다.[1]2.2. 역사
[2]최초의 프라우엔키르헤는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마이센 교구의 주교좌가 설치된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16세기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뀌었다. 1727년 낡은 교회를 허물고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교회를 짓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신교도였던 드레스덴 시민들의 성원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도 교회 건축을 지원했다.
바로크 양식의 프라우엔키르헤 설계는 건축가 게오르게 베어(George Bähr, 1666.3.15~1738.3.16)가 맡아 1726~1743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베어의 설계는 기존의 교회와는 달리 정면을 생략하고 제대, 성단소, 세례반, 파이프 오르간을 신도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한 파격적인 평면 구성을 취했다. 베어는 교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38년에 세상을 떠나 프라우엔키르헤의 지하묘실에 안장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요한 게오르그 슈미트가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 고트프리트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 1684-1753)가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은 1736년 11월 25일에 봉헌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일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다.
드레스덴의 신시장 광장, 베르나르도 벨루토, 1750년, 캔버스에 유채, 136 x 236cm, 독일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옛 거장의 회화관) |
2.3. 파괴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3일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이 개시되었다. 프라우엔키르헤는 이틀 밤낮 동안 공습을 견뎠지만 65만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교회 내부의 온도가 1,000도를 넘어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돔이 폭발하면서 붕괴했다. 무너진 시각은 1945년 2월 15일 오전 10시. 고온으로 녹아내리고 검게 그을린 수천 조각의 돌무더기가 폐허를 뒤덮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드레스덴 시민들은 폐허에서 파편을 골라내 번호를 매겨 보관하면서 언젠가 프라우엔키르헤의 재건이 시작되는 날 파편을 재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잔해를 밀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려던 당국에 항의해 계획을 철회시켰다. 교회 자리에 남은 시커먼 돌들은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동독의 다른 큰 교회들은 그에 가세하여 공산주의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로 가는 한 걸음이 되었던 인권 저항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통일 직전인 1989년 12월 19일 동독 총리 한스 모드로프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드레스덴을 방문 중이던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 이곳 프라우엔키르헤의 폐허 앞에서 즉흥 연설을 하면서 "역사적 순간이 허용한다면 내 목표는 한결같이 우리 민족의 통일이다"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2분 50초부터) 그는 이곳에서 통일이 시작되는 기운을 느꼈다고 훗날 회고했다.
2.4. 재건
2.4.1. 자금 조달
독일이 통일되면서 프라우엔키르헤 재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드레스덴 시민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민간기금과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각국의 민간단체들이 재건에 필요한 비용을 모으는 데 협력하는 국제적인 공조가 이루어졌다.독일 출신의 미국 생물학자로 어렸을 때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프라우엔키르헤를 직접 봤던 귄터 블로벨(Günter Blobel, 1936.5.21~2018.2.18)은 1999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을 재건 비용에 충당해달라며 전액 기부해 개인 자격 기부금으로는 최대 액수를 기록했다.
기업 단위 켐페인으로는 레고 사에서 개최한 모금 켐페인이 대표적인데 블럭 하나 당 5마르크를 주고 행사장에서 레고로 만든 프라우엔키르헤 모형을 조립하는 켐페인이었다. 이 켐페인을 통해서 총 28만 마르크가 모였다.
2.4.2. 폐허에서 부활하다
돔 지붕 꼭대기에 있는 종루에 얹혀진 금박 십자가는 영국의 그랜트 맥도널드 사가 18세기 기술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었으며, 런던 출신의 금세공사 앨런 스미스가 조립했다.[3] 완성된 십자가는 영국 본토 항공전 때 공습 피해를 입었던 코번트리 대성당, 리버풀 대성당,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 등을 거쳐 2000년에 켄트 공작 에드워드[4]가 프라우엔키르헤에 전달했다. 이 십자가는 2004년 6월 22일 종루 위에 세워지면서 외관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885년 교회 앞에 세워졌다가 공습 때 한쪽으로 쓰러진 채 그대로 방치되었던 마르틴 루터의 동상도 다시 원위치에 세워졌다. 다만 파이프 오르간은 질버만의 원설계도가 남아 있음에도 복제품 대신 새것을 설치하기로 결정해 2005년 4월에 작업이 끝났다.
마침내 2005년 10월 30일, 완공 예정일보다 1년 앞서 공사가 끝난 프라우엔키르헤의 재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영상 드레스덴 창건 800주년인 2006년을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 부활한 프라우엔키르헤는 드레스덴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소이자 전쟁으로 소실된 역사적 건축물이 성공적으로 재건된 사례가 되었다.
2.5. 기타
K(애니메이션) 1기 9화에서 드레스덴 폭격 때 아돌프 K 바이스만이 누나 클로디아 바이스만을 폭격으로 잃고 드레스덴 석판을 사용해 백은의 왕이 된 장소로 나온다.제국건설에서는 식민지 시대 위대한 건축물중 하나로 나온다. 레벨 1 기준으로는 행복지수 1500, 1일 마다 상품 7개 생산.
복원이라곤 했지만 사실 2차대전 전의 모습과는 실내구조가 약간 다르게 구성되었다. 원래는 제대에 십자고상을 놓았지만 2005년 복원시에는 대못으로 만든 단순한 십자가 틀로 대체되었고, 제대 좌측 기둥에 있어야 할 설교대도 따로 복원하지 않고 그냥 제대 앞에서 기도문 및 성경봉독과 설교를 동시에 하도록 해놓았다.
3. 뮌헨 프라우엔키르헤
독일 바이에른 주의 주도 뮌헨에 위치한 가톨릭 대성당. 프라이징의 프라이징 대성당과 함께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다. 독일에서는 위 드레스덴의 프라우엔키르헤 못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나, 본 위키에서는 문서가 뒤늦게 작성되었다.
뮌헨 프라우엔키르헤는 15세기에 건설되었고, 그 후에 두 개의 돔이 추가되었다. 붉은 색의 고딕 본당에 양파 모양의 솟아나온 두 개의 돔을 한 특이한 양식으로, 뮌헨의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의 대주교를 지낸 경력도 있어, 그와도 인연이 깊은 성당이다. 테아티너 교회, 미하엘 교회와 더불어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군주들이 묻힌 성당이다.[5]
4. 뉘른베르크 프라우엔키르헤
독일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 14세기에 카를 4세의 인가로 건설된 성당인데, 원래 유대교 시나고그가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벽돌로 된 고딕 양식 건물이며, 성당 건물 중앙 정면 시계탑 안에는 움직이는 인형이 설치되어 있어 매일 일정한 시각이 되면 인형이 공연을 펼친다.
[1] 사진을 보면 하얀 성당에 검은색 벽돌 같은 게 드문드문 보이는데 하얀색 돌이 복원한 것이고 검은색 돌이 폭격에서 살아남은 잔해이다.(!!!) 거의 대부분이 날라가고 극소수의 잔해만 간신히 남은 것을 거의 새로 짓다시피하면서 복원했으면서도 기존의 자재들을 모두 제자리에 가져다 박은 기적 같은 복원이라고 볼 수 있다.[2] 위 그림에서 오른쪽 위의 푸른 지붕의 교회가 프라우엔키르헤다.[3] 앨런 스미스의 아버지인 프랭크 스미스는 드레스덴 공습에 참여했던 승무원 중 한명이었다.[4] 조지 5세의 손자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사촌동생.[5] 대표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이 교회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