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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대 성 요한 바오로 2세 | → | 제265대 베네딕토 16세 | → | 제266대 프란치스코 |
<colbgcolor=#ffe100,#ffe100><colcolor=#670000,#670000> | |||
| |||
출생 | 1927년 4월 16일 |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마르크틀암인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 마르크틀암인) | |||
사망 | 2022년 12월 31일 (향년 95세) | ||
바티칸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 | |||
재위기간 | 제265대 교황 | ||
2005년 4월 19일 ~ 2013년 2월 28일 (7년 10개월 10일) | |||
묘소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1]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e100,#ffe100><colcolor=#670000> 본명 |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 (Joseph Aloisius Ratzinger) | |
가족 | 아버지 요제프 라칭거 어머니 마리아 라칭거 형 게오르크 라칭거 | ||
학력 | 뮌헨 대학교 (신학 / 박사) | ||
신체 | 175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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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1. 개요
교황 선출 직후 첫 강복을 하는 베네딕토 16세 |
Cooperatores Veritatis 진리의 협력자 사목표어 |
(교황께서는) 허영이나 교만은 전혀 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분이다. 스스로 교회를 위해 진정 어린 시중을 들려 했고, 자신의 입을 통해 성령의 말씀을 신자들과 함께 들일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분이다. 페터 제발트[2] |
신학자 출신 교황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 그룹에[5] 꼽힐 정도의 걸출한 석학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 기간에 오랫동안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았고 평생 정통 가톨릭 신앙 수호에 매진해 왔다.
8년간 재위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2013년 85세의 나이로 자진 퇴위하였는데, 교황은 종신직이기에 일반적으로 생전 퇴위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퇴위 이후에는 '명예교황'이라는 뜻의 'Pope Emeritus'[6]로 불렸으나 2022년 사망하기 전까지 집필과 기도 등으로 소일하며 조용히 지내면서 후임자의 권한 행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비록 일반 대중 사이의 인기는 전임자와 후임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신앙과 믿음, 학문적 깊이와 성품, 신조를 아는 많은 신자들로부터 퇴위한 이후까지도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다.[7]
명칭 베네딕토는 1차대전 시기에 교회의 중립을 지키고 평화를 위해 노력한 베네딕토 15세, 그리고 베네딕도회의 창립자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인 성 베네딕토에게서 따왔다.
2.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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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즉위 이후 문장 | 추기경 시절 문장 |
교황 문장의 필수요소로 쓰이던 교황 삼층관(papal tiara)을 3줄의 줄무늬가 그려진 소박한 일반 주교 모관(mitra)으로 교체한 최초의 교황이다.[8] 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레오 14세 역시 베네딕토 16세를 따라 자신의 문장에 삼층관이 아닌 주교 모관을 그려넣었다.
중앙에는 성 아우구스티노를 상징하는 조개, 프라이징 교구장 시절을 나타내는 무어인과 등에 짐을 진 곰이 그려져 있다.
하단에 주교가 어깨에 걸치는 장식인 팔리움이 그려진 것이 특이한데, 이는 주교로서의 책임과 권위를 나타낸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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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베네딕토 16세/생애#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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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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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에게는 3살 위의 형 게오르크 라칭거 몬시뇰(Georg Ratzinger, 1924년 1월 15일 ~ 2020년 7월 1일)이 있다. 남다른 우애를 자랑하는 이들 형제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함께 사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교감의 폭이 남달랐을 것이다. 오오 얼짱사제형제.[9] 사제가 된 뒤 형은 교회음악가로, 동생은 신학교수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전화와 편지로 안부를 묻고 매년 서너 차례 고향을 찾아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동생이 1969년 레겐스부르크대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 형은 이미 1964년부터 레겐스부르크 성당 성가대(Regensburger Domspatzen)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던 교회음악가여서, 1977년 뮌헨 대주교로 발탁될 때까지 '게오르크의 동생'으로 알려졌다. 동생은 4개월 뒤 추기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형 게오르크 신부는 당초 동생이 교황에 선출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교황 선출소식을 듣고는 "동생의 나이와 건강 때문에 추기경들이 다른 사람을 선택하길 기대했으나 뜻밖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고령을 염려하는 소리가 나오자 "교황직이 동생에게 짐이 될 지 모릅니다."라고 동감을 표하면서도 언론들이 교황의 보수성에 너무 초점을 맞추는 데 유감을 표했다. 사고의 명료함과 함께 인내심, 사람은 서로 돕는 존재라는 인식 등 동생의 장점을 전하면서 건망증이란 약점도 함께 털어놨다. 곳곳에 동생에 대한 형의 사랑이 묻어난다.
형은 교황이 된 동생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말년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역력했다. 동생이 바티칸에서 돌아오면 고향에서 함께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형은 "인생 황혼기의 동반자를 잃었습니다."라며 아픔을 솔직히 드러냈다. 다행히 게오르크 몬시뇰 본인도 장수했고 동생도 쉽게 볼 수 없던 생전 퇴위를 택한 덕분에 2013년 3월부터는 바티칸에서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한편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이 된 이후, 게오르크가 성가대 지휘자로 재직(1964년 부터 1994년) 하던 당시 취입한 레겐스부르크 성당 성가대의 음반들 중 몇 가지가 2006년에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재발매되었다. 물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형이 지휘한…'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고,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전곡 음반 같은 경우 이 때 처음으로 CD 발매가 이루어지는 혜택을 입기도 했다.
게오르크 몬시뇰은 2020년 7월 1일 사망했다. 향년 96세. 형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불과 열흘만의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평화방송 기사
5. 인터넷 밈
일반적으로 인터넷의 서브컬처와 밈에서 교황은 언급될 계기나 이유가 딱히 없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첫인상이 강렬한 덕에 특이하게도 밈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특히 베네딕토 16세의 얼굴이 하필이면 스타워즈의 시스 로드이자 스타워즈 시리즈 사상 최악의 악인 중 한 명인 다스 시디어스와 닮아서 이러한 밈이 더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이 바닥에서 나도는 교황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포스 라이트닝을 시전 중이거나 빨간색 라이트세이버를 손에 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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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다크 사이드의 힘을 알아야만 한단다.[10] |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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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고 만든 듯한[12] 종이 인형도 나왔다. |
베네딕토 16세가 추기경 시절과 교황 선출 이후 각각 2번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후유증과 격무로 인한 다크서클이 인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교황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격무를 수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교황이란 직책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교황 일을 하다간 절대로 오래 못 사니까."라는 악담이 있을 정도. 일단 기본 하루에 최소 14시간, 1주일에 7일을 일해야 하는데 주말에는 더욱 바빠진다. 교황은 가톨릭의 최고 수장으로서 일요일이 가장 많이 일하는 날이기 때문이다.[13]
구 리그베다 위키의 이 항목에서도 교황을 시스로드의 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장난성 서술이 너무 느는 통에 토론을 거쳐 이러한 현상이 있다고 소개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전 버전을 확인하면 알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베네딕토 16세를 포스의 어두운 힘에 타락한 시스로드로 소개할 정도였다. 다만,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이 된 만큼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선하게 살았던 사람이며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가톨릭 신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밈이 다소 불쾌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이 밈을 교황청측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타일리스트들을 고용해서 베네딕토 16세의 메이크업이나 스타일을 최대한 교정해서 다소 온화한 인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6. 대중매체에서
2019년 11월, 그와 후임자 프란치스코 전 교황의 관계를 다룬 영화 <두 교황>(Two Popes)이 개봉했다. 베네딕토 16세 역으로는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안소니 홉킨스가 출연해 대단한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그의 상대역인 조나단 프라이스도 프란치스코 현 교황과 닮아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예고편 영상을 보고서는 "다큐인 줄 알았다"는 평이 있을 정도.작중에서는 진보적인 추기경인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와 대비시키기 위해서 보수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14] 오스트리아 수사물 드라마를 보고 소소한 농담도 날리는 등,[15] 본인도 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걸 인지하는 등 꽉막힌 사람은 아닌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위의 나치 관련 루머 때문인지 본인은 나치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보적인 신도들에게 나치라고 까인다. 정치적 견해가 정반대인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말이다
7. 기타
베네딕토 16세의 선출 당시 독일 언론의 관심은 그가 몇 번째 독일인 교황인지부터 비롯되었다. 996년 5월 138대 교황으로 즉위한 첫 독일인 교황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5세는 본명이 브루노 폰 케른텐으로 오스트리아 케른텐 출신이다.[16] 문제는 가장 최근의 독일인 교황은 누구인가가 문제였다.가장 최근의 인물로 알려진 것은 1522년 1월에 218대 교황에 즉위했던 하드리아노 6세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 위트레흐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나, 현재는 네덜란드 영토라는 것 때문에 문제가 불거졌다. 하지만 그의 본명은 또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로서 독일식이다. 만일 그가 독일인이 아닐 경우, 1057년 8월에 154대 교황 스테파노 10세가 가장 최근의 독일인 교황인 셈이 된다. 하지만 1000년에 태어난 그의 출생지 역시 신성 로마 제국령이었던 프랑스의 로렌 지방이며, 이름도 프랑스식인 프레데리크 드 로렌이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이의들이 제기되면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1055년 4월에 선출된 153대 교황 빅토르 2세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는 슈바벤의 귀족 프란코니아 가문 출신이고, 본명도 게브하르트 그라프 폰 돌른슈타인-히어슈베르크이다. 독일 언론들은 진정한 독일인 교황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결국 베네딕토 16세는 이들을 다 합쳐 8번째 독일인 교황이자, 반대로 빅토르 2세 이후 950여 년만의 독일인 교황도 되는 셈이 되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오스트리아 국영방송사인 ORF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해 바티칸의 내부 조직과 운영방식을 직접 소개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박물관 등도 보여주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교황청에 대한 음모론에 반박하며 "일반인들의 생각처럼 바티칸이 비밀 문서보관소를 운영하거나 하지 않는다"며 "다른 정치·행정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은밀한 것도 없는 조직이 바로 교황청"이라고 말했다.
바티칸 기적 조사관 1~2권에서는 교황명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3권부터 베네딕토 16세의 교황명이 등장한다. 사건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고, 전례를 집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국내에서 EBS가 베네딕토 16세 선출 2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바티칸>을 방영하면서 이 오스트리아 방영분을 1부 <베네딕토 16세의 바티칸>으로, 영국 공영방송 BBC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부터 베네딕토 16세의 선출까지의 과정을 차례로 담은 다큐멘터리를 2부 <21세기 바티칸의 선택-베네딕토 16세의 탄생>으로 방영하기도 하였다. 1부, 2부
베네딕토 16세가 재임 시절 직접 등장한 영화도 있다. 2011년 다큐멘터리 영화 <프란체스코와 교황>이다. 이 영화에서 교황은 프란체스코라는 어린이의 시점에서 보여진다. 교황이 직접 거주하는 공간인 시스티나 경당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이 있는데, 프란체스코는 초등학교 3학년생으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교황 앞에서 솔로를 부르기 위해 열심히 연습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아프리카와 중동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프란체스코는 교황 앞에 선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밋밋하지만 교황의 전용기 옆에 전투기가 따라다니고 바티칸 통제실에 3천여 개의 CCTV가 설치돼 있는 것 등 그동안 바티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10세기부터 전해진 성 말라키의 예언에 따르면, 다음 대의 교황이 마지막 교황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예언 자체가 하나같이 끼워맞추기 식으로 쓰인 거라서 신빙성이 아예 없다. 당장 베네딕토 16세에 관한 예언도 '올리브의 영광'인데 이건 교황의 새 이름인 '베네딕토'와 똑같은 이름의 수도회인 베네딕토회의 상징이 올리브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꿰어 맞췄다. 정작 교황은 베네딕토회와는 관련이 없으며, 더욱이 올리브에 꿰어 맞추려고 호사가들이 난리친 추기경들이 산더미 같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 말라키 본인은 이런 예언을 한 적이 전혀 없으며, 16세기경 성 말라키의 이름을 차용한 위조문서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결국 차기 교황에 이르러서 예언은 사실상 박살나 버렸다.
사임으로 인해 원로사목사제 최종보스가 되었다. 원로사목사제 중 가장 고위직에 있었던 인물이다.
사임 후 일각에서 흑인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2013년 콘클라베를 통해 뽑힌 교황은 흑인이 아닌 첫 남미권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되었다.
2010년 작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와 비슷한 끝을 맞이하여서 해당 영화의 픽션이 현실이 되었다 소리를 듣고 있다. 큰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데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작중에서 교황이 고백하는 모습은 베네딕토 16세의 뒷이야기와 직결되고 있다. 유난히 영화에 브라질 국기가 자주 나오는 등, 보면 볼수록 2010년 작품인데도 미래 상황을 그대로 그려낸 모습이 경이롭다.
젊었을 적 오토 프레밍거 감독에 리온 샴로이와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은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의 전기 영화인 추기경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과 영화 제작진을 연결하는 연락 담당관을 두었는데 담당관이 베네딕토 16세였다고.
재위기간 7년 동안 130회의 시복식을 거행해 869위의 복자를 시복했고, 11회의 시성식을 거행해 45위의 성인을 시성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식과 시성식을 모두 집전한 반면, 베네딕토 16세 때부터는 시복식에 한해서 교황을 대리한 추기경이 이를 집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베네딕토 16세 때 시복된 복자의 목록은 시복식/목록/베네딕토 16세 문서를, 시성된 성인의 목록은 시성식/목록/베네딕토 16세 문서를 참고.
대한민국과의 인연으로는 즉위 이듬해인 2006년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대한민국 천주교회의 2번째 추기경으로 서임한 바 있으며, 같은 해 바티칸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 비레타를 하사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대한민국에서 재임한 두 대통령과도 면담을 가졌다. 먼저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단독 면담하고 한반도 평화 문제, 북한의 인도적 지원 등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한 이래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두 번째였다고 한다. 2009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하여 방한을 초청하기도 했다.
교황으로서 대한민국을 방한한 적은 없으나 추기경 시절 1989년 세계 성체대회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다른 추기경들, 가톨릭 지도자들과 함께 잠시 대한민국에 왔었다. 당시 대한민국에 있던 독일 교민들과 함께 성체대회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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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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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2005년 콘클라베 | }}}}}}}}} |
[1] 지하 묘지 내 과거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안장되었던 자리에 안장되었다.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과 동시에 순례객이 참배하기 좋은 자리로 순차 이장되어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딕토 16세가 같은 자리에 세 번째로 다시 안장되었다. 앞선 무덤 주인 두 명은 최종적으로 모두 시성되었다.[2]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를 떠났지만, 나이를 먹고 삶과 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가톨릭 교회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후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며 한국에도 번역된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을 비롯한 유명한 가톨릭 관련 신앙저서도 많이 냈다.[3] 하드리아노 6세는 당시 현재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정말 오랜만에 선출된 독일인 교황임에도, "유럽인"이란 딱지로 주목받지 못한 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신자 국적의 변화 등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20여 년 동안 가톨릭 세계의 변화가 급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4] 약 만 95세 8개월까지 살아 역대 교황 중 가장 장수했으나, 퇴임 당시에는 85세였다. 그러므로 종신 교황으로서는 하드리아노 1세(700~795)가 역대 최고령 교황이다. 약 만 94~9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종신 재위했기 때문. 정확한 생일이 전해지지 않아 알 방법은 없으나 700년 4월 중순 이전에 태어난 게 확실하다면 베네딕토 16세보다 더 장수한 셈이다.[5] 그 외의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로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S.J., 1896~1991),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카를 라너(Karl Rahner, S.J., 1904-1984), 이브 콩가르(Yves Congar, O.P., 1904-1995) 등을 꼽을 수 있다. 참고로 앞의 둘은 베네딕토 16세가 직접 최고로 여긴 신학자들이다.(아래 인터뷰 참조)[6] 전통시대 동아시아 용어를 적용한다면 '태상교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한국 천주교에서는 간소하게 '전임교황'으로 번역했다. emeritus라는 말을 직역하여 옮기면 '은퇴교황'정도가 될 것이다.[7] 이는 전임자와 후임자가 교황이 되기 전부터 사목자로서 정치,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활동을 많이 펼쳤던 반면, 베네딕토 16세는 신학자 요제프 라칭거로서 활동해온 이유로 대중적 주목을 덜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앙교리성 장관이라는 라칭거 추기경의 포지션상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수구적이라고 음해받기 딱 좋운 언행'을 도맡아 이미지 훼손이 심한 것도 한몫을 했다. 결정적으로 교황 재위 시절 베네딕토 16세의 스타일도, '인기 떨어질 언행'을 추기경들 대신 본인이 직접 부담하는 걸 선호했다.[8] 비공식적으로는 삼층관이 그려진 문장도 사도궁전 테라스에 거는 배너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간혹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소품들은 대부분 신실한 개인들의 기증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제작자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후임자인 프란치스코나 레오 14세의 문장도 사적으로는 삼층관이 그려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이미지 및 실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시에나 대성당에 조각으로 걸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은 대놓고 삼층관이 조각되어 있는데다 원본보다 훨씬 화려하다.#[9] 우하단의 사진에서 왼쪽의 더 앳되어 보이는 사제가 교황이고, 오른쪽에 영대 두른 사제가 게으로크 몬시뇰.[10] 2006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중에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모습이다. 이날 강론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고통받는 아이들을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11] 너 고소 짤의 패러디다. 옆에 있는 사제는 베네딕토 16세 재임 당시 바티칸 국무원장이었던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교회법 제354조에 따라 국무원장과 궁무처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재밌게도 베네딕토 16세는 실제로 이단을 판별하는 신앙교리성 장관을 지냈으며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의 장관 재임 하에서 신앙교리성 차관을 지냈다.[12] 당장 요한 바오로 2세 종이 인형과 비교해 보자.[13] 그래도 이를 알아서 추기경단도 건강을 고려하여 교황을 선출하고 교황은 최고 수준의 건강관리를 받으므로, 현대처럼 평균수명이 늘어나기 전에도 교황들 중에선 장수한 사람이 많았다.[14] <두 교황>이 실제 가톨릭 신자들에게 많이 까이는 점이기도 하다.[15] 교황이 둘일 수 없다는 호르헤의 말에 1978년에는 교황이 셋이었다는 말로 호르헤를 기겁시키고는 독일 농담이오. 독일 농담은 다른사람을 웃길 필요가 없소라는 명언을 남긴다.[16] 미리 말해두자면 오스트리아도 독일어권으로 독일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요즘도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을 꼽는 설문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가 항상 순위권 안에 들어간다. 당장 독일 국가의 작곡가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제프 하이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