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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217대 레오 10세 | → | 제218대 하드리아노 6세 | → | 제219대 클레멘스 7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하드리아노 6세 (얀 판스호르·Jan van Schoor 작, 1523년 경)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하드리아노 6세 |
본명 | 아드리안 플로리스존 부이언스 (Adriaan Floriszoon Boeyens) |
출생 | 1459년 3월 2일 |
위트레흐트 주교령 위트레흐트 | |
사망 | 1523년 9월 14일 (향년 64세) |
교황령 로마 | |
재위기간 | 1522년 1월 9일 ∼ 1523년 9월 14일 |
문장 |
[clearfix]
1. 개요
하드리아노 6세는 로마가 일찍이 수세기 동안 본 적 없는 그런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후덕하고 검소하고, 겸손하고 강건하고, 허세를 싫어하고 성격이 단순하고 직선적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에 만연한 부패에 분노하고 직접 개혁 작업에 열정적으로 착수했다.
―조지 프레더릭 영(George Frederick Young), 메디치(the medici) 中
―조지 프레더릭 영(George Frederick Young), 메디치(the medici) 中
제218대 교황. 현재까지 유일한 네덜란드 태생 교황이다.
2. 생애
1459년 3월 2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그를 공동생활형제회에서 교육받게 했다. 17세에 루뱅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1490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의 교수가 된 후 학장을 두 차례 역임하고 1497년에 총장이 되었다. 베드로 롬바르도(1110~1160)의 명제집에 대한 그의 강의록과 12가지 논쟁점은 그의 교회법적, 도덕적 성향과 후기 스콜라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1507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는 그를 자신의 손자인 카를 5세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네덜란드의 섭정 마르가레테의 상서 자격으로 그는 1515년에 카를 5세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 1516년에서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사망하고 카를이 왕위에 오르는 1517년까지 아드리안은 인문주의자인 히메네스 추기경과 합께 섭정했다. 그는 1516년에 토르토사의 주교와 더불어 아라곤과 나바라의 이단심문관으로, 1518년에 카스티야와 레온의 이단심문관으로 임명되었다. 또 1517년에는 카를이 특별히 요청하여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카를이 대관식 때문에 1520년부터 1522년까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는 총독으로 봉직했고, 서툴기는 했지만 심각한 반란에도 대처했다.
2.1. 교황 선출
교황 레오 10세의 사망에 따른 교황 선거에서 유력한 도전자들이 정치적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콘클라베는 한겨울 12월에 열렸는데 2주 동안 어느 유력 후보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 했고 고령의 추기경이 빈사상태에서 실려 나가며 남은 추기경들도 혹한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마침 황제 카를 5세의 추천장이 내려왔고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 아드리안을 교황으로 선출했다.요한 바오로 2세 이전까지 그가 마지막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었으며[1], 베네딕토 16세 이전까지의 마지막 알프스 이북 출신 교황이며, 현재까지 네덜란드가 배출한 유일무이한 교황이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금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성직자이자 학식 높은 교수였던 아드리안은 교황 즉위 후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하드리아노 6세가 되었다. 선출 당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었는데 가는길에 역병이 창궐해서 로마로 가는데만 몇달이 걸렸다. 로마 사정에 어두워서 교황으로 선출되면 어디를 숙소로 정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준 늙은 여종 하나만 데리고 올 정도라서 로마 시민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검소한 모습의 교황을 로마 시민들은 대놓고 경멸했다. "그의 라틴어 발음은 알아들을 수 없으며,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른다."며 야만인을 교황으로 뽑았다고 원통해했다. 북 이탈리아 명문 집안 출신 추기경도 촌놈, 야만인 취급을 받는데, 하물며 북유럽 출신이 오랜만에 황제 빽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어서 자존심 높은 로마 시민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한 하드리아노 6세는 로마 시민들의 예술적 취향을 무시(!)하고 율리오 2세 시절 포도밭에서 발굴한 라오콘 상을 이교도의 조각상이라며 도로 논두렁에 쳐박으려 하자 수준 높은(!!) 로마 시민들은 그가 예술을 모른다며 경멸했다.
2.2. 치세
신임 교황은 종교개혁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도교 유럽을 일치시키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았다.당시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 치하에서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키며 헝가리를 위협하고 로도스 섬을 포위 공격했다. 교황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명백히 천명하기 위해 해로로 스페인에서 로마까지 왔다. 1522년 9월 1일 첫 추기경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랑캐' 쯤으로 취급하던 북유럽인[2]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 것에 로마 시민들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레오 10세가 남긴 큰 빚으로 인해 교황청이 재정난에 시달린 데다, 신임 교황이 르네상스 예술에 무관심하자 로마 시민들의 적대감은 커졌다.
하드리아노가 수익성 좋은 성직록들을 관례대로 분배하려 하지 않고, 세속화된 교황청을 정화하려 하자 추기경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그에게 협력하는 대신 그의 개선 노력을 방해했다. 점점 교황은 고립되었고, 스페인과 플랑드르의 절친한 친구 몇 명에게만 의지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노는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와 그에 찬성하는 루터파의 교세가 확장되었는데 1522년 12월에 열린 뉘른베르크 의회에 프란체스코 키에레가티를 대리인으로 보내,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이 되어야 할 교회가 타락하여 죄를 지었다.'며 교회에서 일어난 혼란의 책임은 교황청에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이는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첫 단계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파가 교리를 수정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그가 스페인에서 이단심문관으로 있을 때 그 의견을 단죄한 바 있는 마르틴 루터를 처벌하고 그의 가르침을 금지하는 보름스 칙령을 실행하라고 요구했다. 실제로 루터파에 대한 종교재판을 실시하여 화형시키자,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루터파 인사들에게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유럽 전선을 동원하려는 시도는 교황의 외교적 무능만 드러내고 실패로 끝나 버렸다. 우선 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해 주기를 바라는 카를 5세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립을 지켜 황제와 소원해졌다.
1522년 12월 21일 로도스 섬이 오스만에 함락되자 그는 가장 엄한 교회적 처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교 세계에 3년 간의 휴전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또한 프랑수아 1세와 음모를 꾸미다 발각된 소데리니 추기경을 체포한 사건 때문에 프랑수아 1세와 결별하게 되었다.
비로소 프랑수아는 로마로 돈을 보내지 않았고 롬바르디아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하드리아노는 1523년 8월 3일에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밀라노 그리고 기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방위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과로와 무더위에 지쳐 중병을 앓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는 좋은 의도로 교회의 일대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그것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20개월의 재임기간 중 로마에서 실제 통치한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하드리아노 6세가 사망한 후 오랜 세월 동안 교황의 자리는 오로지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에게만 돌아갔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하드리아노 6세가 사망한 지 무려 455년이 지난 1978년에 폴란드인인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1세의 후임자로 선출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