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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4년 9월 12일 | ||
프랑스 왕국 코냐크 코냐크 성 | |||
사망 | 1547년 3월 31일 (향년 52세) | ||
프랑스 왕국 랑부예 성 | |||
재위기간 | 프랑스 왕국의 국왕 | ||
1515년 1월 1일 ~ 1547년 3월 31일 | |||
밀라노 공국의 공작 | |||
1515년 10월 11일 ~ 1521년 11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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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랑수아 당굴렘 (François d'Angoulême) | ||
아버지 | 앙굴렘 백작 샤를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루이사 | ||
형제 | 마르그리트 | ||
배우자 | 프랑스의 클로드 (1514년 결혼 / 1524년 사망) | ||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1530년 결혼) | |||
자녀 | 루이즈, 샤를로트, 프랑수아, 앙리 2세, 마들렌, 샤를, 마르그리트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200cm[2], O형(Rh-)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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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구나 그의 말을 들으면 그가 학문이든 예술이든 논하지 못할 분야가 없을 정도로 호방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에 놀란다.... 그의 재능은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문학과 회화, 언어에도 탁월했다.
- 당시 프랑스 주재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 마리노 카발리
- 당시 프랑스 주재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 마리노 카발리
16세기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초대 왕이다.
키가 무려 200cm로 역대 프랑스의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도 188cm로 당대에나 지금이나 엄청난 장신이였지만 프랑수아 1세가 넘사벽으로 더 컸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두 사람 다 장신이다.
2. 생애
2.1. 프랑스 왕위 계승
선왕 루이 12세의 사촌 샤를 도를레앙과 사보이아 공국 공작 필리포 2세의 장녀 루이사[3]의 아들로 왕의 5촌 조카였다. 루이 12세가 아들이 없는 발루아 본가의 루이 11세의 왕녀 잔과 결혼하여 루이 11세의 사위이자 샤를 8세의 매형 자격으로 왕에 즉위했듯, 프랑수아도 후사가 없었던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결혼하여 루이 12세의 사위 자격으로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그 이전 청년기에는 왕족으로서 군생활을 지내며 방탕함을 몸에 익혔고,[4]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을 갖춘 남자로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또한 어머니와 누나의 영향으로 자존감 하나는 지존이었다.2.2. 대(對) 합스부르크 전쟁과 국가재정
1520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북부의 발링헴 지역에서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 제2대 왕 헨리 8세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양국의 자존심을 걸고 화려하게 꾸미느라 돈지랄이 난 이 발링헴 회담에서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레슬링 시합을 가졌는데, 프랑수아 1세는 헨리 8세를 완패시켜 굴욕을 주었다. 프랑수아 1세가 젊은 시절에 브르타뉴 지역의 레슬링 선수들한테 레슬링을 배웠기 때문에 그 자신도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지닌데다 헨리 8세(188cm)보다도 키가 훨씬 더 컸다. 레슬링 실력이 뛰어난데다 키와 체격까지 더 컸으니 당연히 헨리 8세가 질 수 밖에. 다만 프랑수아 1세는 이 회담을 통해 헨리 8세와 손을 잡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견제하려 했으나, 헨리 8세는 도리어 전쟁을 피하고,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관계를 중재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엄청난 돈을 들인 이 회담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프랑스 국왕으로서 그의 삶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으로서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를 5세와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처음에는 선왕 루이 12세가 실패했던(제3차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침공에 나서 초기 마리냐노 전투(1515)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물리쳤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 사후 본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카를 5세에게 밀려 황제선거에서 단 한표도 받지 못한채 낙선했고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스페인군에 밀려 패퇴했다. 동맹자였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독일 용병단에 의해 로마가 쑥대밭이 되자 카를 5세 편으로 돌아섰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 역시 스페인 손에 넘어갔다. 그 후의 제4차 이탈리아 전쟁(1521~1526)에서도 밀려,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참전하는 친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대패하였고 한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에게는 일대의 치욕적인 굴욕이었으나 스페인 입장에서는 최고의 전성기였다.[5]
이처럼 프랑수아 1세는 당대의 평가와 같이 "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군주"였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라이벌 카를 5세에게 크게 패하고 생포되어 포로 생활을 하는 등 씻기 어려운 치욕을 겪었고, 말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와 대립했지만 결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프랑수아 1세(좌)와 쉴레이만 1세
자신이 직접 나선 전쟁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치욕으로 인해 카를 5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한 때문인지 틈만 나면 카를 5세에게 복수하려고 들었다. 제6차 이탈리아 전쟁(1536~1538)때는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카를 5세에게 대항하려 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유럽 국가들의 비난만 샀다. 특히 제7차 이탈리아 전쟁(1542~1546)때는 악명 높은 오스만의 해적 겸 해군 제독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가 이끄는 함대가 프랑수아 1세의 허가를 받아 1543년 프랑스 남부 툴롱에 정박하고, 니차 등, 이탈리아 해안[6] 등을 공격하자 유럽 각국에서 교황에게 프랑수아 1세를 파문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쳤다.[7]
더구나 카를 5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도 여러모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프랑수아 1세가 노른자 땅인 부르고뉴 공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때 당시 스페인 제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떠난 조카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부르고뉴 공국[8]을 대리 통치하고 있었던 마르가레테가 이를 저지한 바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제위를 놓고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와 경쟁할 때도 그녀의 계책으로 거부 푸거 가문의 자산이 대거 융통되어 카를 5세의 이름으로 선제후들에게 뿌려졌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카를 5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스페인 제국에게 질 수 없다는 듯 프랑수아 1세는 아메리카 신대륙에도 관심을 가져 자크 카르티에를 파견해 캐나다를 탐험하게 하기도 했다.
잦은 원정과 실패, 건축, 배상금 등으로 프랑스의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고, 왕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그저 관직매매를 통해 임시변통을 했을 뿐이었다. 앙시앵 레짐의 병폐 중 하나인 관직매매와 징세권 매매는 이 시기에 악화되었다.
2.3. 내치에서의 업적
대외정치와 재정쪽으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인격적으로는 예술의 후원자이자 인간적이고 너그러웠던 유쾌한 왕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프랑수아는 호탕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으로, 당대 프랑스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프랑스 궁정에서 평민 출신으로 푸대접을 받던 며느리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항상 염려하고 챙겨주었다.문화적인 공적도 많은데 이탈리아 반도의 르네상스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후원해주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저택을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다 빈치는 감사의 의미로 <모나리자>를 비롯해서 프랑스로 올 때 가지고 온 작품들을 모두 왕에게 선물했다. 그가 예술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다진 덕분에 그 아들인 앙리 2세 대에는 이탈리아 출신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공로로 프랑스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궁정 역시 정비되어, 기존의 거친 궁정을 대신하는 세련된 궁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라틴어를 밀어내고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위치를 확립했던 것도 이 시기(1539년)였다.[9]
151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에 출마했는데, 여기서도 카를로부터 태클이 들어왔다. 선거 자금으로 300,000 굴덴을 뿌렸으나 경쟁 후보인 카를 5세가 당시 독일 최고의 금융 가문으로 통하던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의 힘을 빌려 850,000 굴덴을 뿌린 결과에다가 프랑스를 외세로 여긴 독일 선제후들의 경계심으로 인해 한 표도 받지 못하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2.4. 종교 개혁과 사망
종교면에서는 외치와 재정만큼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스스로를 '교회의 보호자'로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1533년부터 개신교가 득세하고, 1534년에 '벽서 사건'까지 발생[10]하자 개신교 탄압을 심화시켰다. 1535년 7월에 <쿠시 칙령>을 내려, 당장 복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추방하겠다고 선포했다. 게다가 탄압에 반발하는 개신교를 군대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개신교의 위세가 강했던 프랑스 남동부 메린놀 지역에서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탄압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내 개신교 신자들은 국외로 도주했으며 위그노 성향이 강했던 누나 마르그리트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다만 개신교 탄압과는 별개로 카를 5세와 대립하던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 등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여 카를 5세를 견제했다. 장 칼뱅은《기독교 강요》<서문>의 헌사를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편지로 서술했다.1547년, 50세를 조금 넘긴 프랑수아 1세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병상에서 죽어가던 프랑수아는 "주님, 처음에는 왕관이 저에게 주시는 선물인 줄 알았습니다만 지금은 너무도 무겁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인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매독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이는 남의 아내를 NTR하는 바람에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이 확대된 것이었다.
사후 그의 시신은 장례를 치른 다음 첫째 왕비와 어머니가 묻힌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고 나서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가 공화국이 될 때 그의 무덤은 왕비랑 어머니의 무덤과 함께 혁명 과격파에게 파괴되었다.
3. 가족
바람기가 상당한 걸로 유명해 장인 루이 12세의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 그의 젊은 왕비 잉글랜드의 메리[11]의 침실 근처를 어슬렁거려서, 괜히 왕비이자 의붓장모와 추문이 나서 왕위고 뭐고 다 날려버릴까봐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마저 기겁하게 만들었다.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프랑스의 클로드 (Claude of France) | ||||
1녀 | 발루아의 루이즈[12] (Louise of Valois) | 1515년 8월 19일 | 1518년 9월 21일 | |
2녀 | 발루아의 샤를로트[13] (Charlotte of Valois) | 1516년 10월 23일 | 1524년 9월 18일 | |
1남 |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수아[14] (Francis, Dauphin of France) | 1518년 2월 28일 | 1536년 8월 10일 | |
2남 | 앙리 2세 (Henri II) |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카테리나 데 메디치 슬하 5남 5녀[15] |
3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들렌[16] (Madeleine, Queen of Scotland) | 1520년 8월 10일 | 1537년 7월 7일 | 제임스 5세 |
3남 | 오를레앙 공작 샤를 2세 (Charles II, Duke of Orléans) | 1522년 1월 22일 | 1545년 9월 9일 | |
4녀 | 사보이아 공작부인 마르게리타 (Margaret, Duchess of Savoy) | 1523년 6월 5일 | 1574년 9월 15일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7] 슬하 1남[18] |
3.2. 아내
3.2.1. 프랑스의 클로드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의 클로드 문서 참고하십시오.프랑수아 1세의 첫 번째 왕비. 선왕 루이 12세와 두 번째 왕비 안 드 브르타뉴 사이의 딸.[19]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서쪽에 있는 브르타뉴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아버지 프랑수아 2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먹을 생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혼까지 마친 안을 낼름 납치했고, 안은 이미 결혼했으니 결혼 못한다고 난리쳤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 왕비로 삼아버렸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의 황녀인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가 왕비가 되기 위하여 어린 나이부터 프랑스 궁정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샤를 8세가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딸이 모두 닭 쫒던 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치사하게 결혼한 안과의 사이에 살아남은 남성 후계자가 없었다.
샤를 8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가 선왕의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해 낳은 장녀가 클로드. 부모는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것은 클로드와 막내 여동생인 르네가 유일했다. 프랑스의 공주이고 어머니의 후계자로 브르타뉴 공국의 주인에다 프랑스 왕비까지 된 클로드는 권력을 누릴만 했지만 시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당굴렘에게 밀려서 영 빛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왕비로서의 실권은 클로드가 곱추에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프랑수아 1세가 당시 자신의 '공식 정부'였던 프랑수아즈 드 푸아[20]에게 주었기에 궁정에서 그다지 대접받지 못했다. 비록 실권을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의 정부에게 빼앗기고 남편은 사랑은 커녕 존중도 해주지 않았지만 클로드는 늘 품위 있게 처신하며 사람들에게 상냥해서 타인에게 평판이 좋았다.
그 유명한 앤 불린과 메리 불린이 클로드의 시녀로 있었던 적이 있다. 본래 둘은 헨리 8세의 동생 메리 공주가 루이 12세의 왕비로 프랑스에 시집올 때 시녀로 따라왔다. 루이 12세가 죽자 메리 공주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자매는 프랑스 궁정에 계속 남아 클로드의 시녀가 되었으며, 이 즈음 메리 불린은 프랑수아와 불륜설이 났다. [21] 메리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이후에도 앤은 얼마간 프랑스에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궁정 문화는 타국의 궁정 문화를 선도했기에, 앤이 프랑스에 있으면서 배운 교양, 밀당, 그리고 예의범절은 나중에 앤이 잉글랜드로 돌아갔을 때 앤이 퀸카 대접을 받게 했다.
본래부터 허약한 몸이었는데 결혼 생활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 보니 더욱 악화되어 24세에 요절했다. 프랑수아 1세와의 사이에서 총 3남 4녀를 낳았고 프랑수아의 자녀들은 전부 클로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다.
3.2.2.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문서 참고하십시오.프랑수아 1세의 계비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여왕 후아나 1세와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이자 부르고뉴 공작인 펠리페 1세의 장녀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펠리페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어머니 후아나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끝에 토르데시야스 성에 유폐되자 엘레오노르는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스페인에서 양육되던 둘째 남동생 페르디난트, 아버지의 사후 유복녀로 태어나서 유일하게 어머니 후아나와 함께 토르데시야스에서 살던 막내 여동생 카탈리나를 제외한 다른 남매들과 함께 고모인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22]에게서 양육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이모부였던 포르투갈 왕국의 왕 마누엘 1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되어 2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딸인 비제우 여공작 인판타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고 50대에 사망했다.[23] 첫 번째 남편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20대 초반의 엘레오노르는 다시 남동생 카를 5세가 있는 궁정으로 딸과 함께 돌아왔다. 황제의 큰누나인 엘레오노르는 좋은 정략 결혼 상대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간을 봤고, 결국 10년 후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마드리드에 잡혀와 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재혼하게 된다.
당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어린 시절 프랑스 왕실에서 미래의 왕비로 지냈던 엘레오노르의 고모 마르가레테의 협약으로 혼인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귀부인들의 협약'이라고 한다. 엘레오노르는 딸을 두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는데 자존심이 강했던 프랑수아는 굴욕적인 혼인에 매우 기분이 상했고 결혼 생활 내내 엘레오노르를 푸대접했다.[24]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묵묵히 왕비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하며, 의붓아들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결국 프랑수아 1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고 프랑스의 궁정에서 후계자가 없는 왕비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외롭게 살다가 프랑수아가 사망한 이후 다시 동생 카를 5세에게 돌아갔다. 이후 어린 시절 두고 온 딸 비제우 여공작 인판타 마리아에게 함께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오래 살았던 딸은 어머니와 동거하기를 거부했고 엘레오노르는 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사망했다.
4. 창작물에서
4.1. <튜더스>
배우는 엠마뉴엘 르콩트. 프랑스의 왕으로 주인공 헨리 8세가 열폭하는 대상이다. 서로 동맹하고 배신하고를 무한 반복하는 사이. 실제로 직접 대면하게 되면 체면상 형제처럼 친한 척을 하지만 헨리 입장에서는 싫은 놈인데, 상대는 프랑스의 왕이라 성질대로 할 수 없으니 더 열받는 상대다.
시즌 1에서는 평화 협정 겸 프랑수아의 아들과 메리 공주의 약혼식에서 직접 만나는데, 처음에는 서로 친근하게 대하다가 프랑스의 모든 것이 잉글랜드보다 뛰어나다는 말에 빡친 헨리가 프랑수아에게 직접 레슬링 시합을 신청한다. 프랑수아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헨리가 자신을 겁쟁이라고 하자 프랑스의 명예가 걸렸다며 헨리의 도전을 받아주고 가볍게 헨리를 이긴다.[25]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헨리는 재차 재대결을 요구하고 토머스 모어에게 평화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토머스 모어가 그런 짓을 하면 잉글랜드의 왕이 더욱 더 가볍게 보일 것이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서명한다.
시즌 2에서는 왕비가 되려는 앤 불린에게 그녀가 앉으려는 자리는 절대로 가벼운 자리가 아니라고 하며, 만약에 나는 내가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운명을 바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26] 앤 불린은 계속해서 엘리자베스를 프랑수아의 막내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프랑수아는 앤 불린이 왕비인 것을 인정하기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사생아와 결혼시킬 수 없어서 거절했다.
4.2.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
스페인의 RTVE에서 방영한 사극 <Carlos, rey emperador>에서도 등장한다. 여러 여자들과 열심히 놀기 바쁘고 그나마 있는 안 드 몽모랑시의 조언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카를로스에게 탈탈 털린다.[1] 프랑스의 왕호 작명법대로라면 후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와야 '1세'가 된다. 프랑스 왕 중에는 프랑수아 2세가 있으므로 이 사람 역시 프랑수아 1세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대에 이미 프랑수아 1세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당시 만들어진 기념 메달 등에 FRANCISCUS I라고 쓰여 있는 경우가 많다.
[2] 역대 프랑스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2번째로 큰 지도자는 샤를 드 골.[3] 루이사의 어머니는 부르봉의 마르그리트였으며, 필리베르토 2세는 루이사의 친동생, 카를로 2세는 이복동생이었다.[4] 실은 사위가 못마땅했던 루이 12세가 군무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엄격함을 체득해 보라며 국경지대의 군부대로 보낸 것이었지만, 도리어 군대에서 방탕함을 배운 것.[5] 그 후 카를 5세의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둘을 볼모로 보낸 조건으로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두 아들들을 돌려받았고, 카를 5세가 부르고뉴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소유지와 아르투아 지방,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또한 배상금 200만 크라운을 지불했는데 1차분으로 넘긴 120만 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 덕에 스페인 국고는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받았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평생 증오했다. 여담으로 이 캉브레 조약은 "마담들의 평화"라는 이명으로 불리는데,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6] 니차(Nizza)는 오늘날 프랑스 제5의 도시 니스이다. 당시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영토였으며 니스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은 이탈리아 통일에 따른 1860년 토리노 조약 이후이다.[7] 사실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던 카를 5세 역시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의 시아파 사파비 왕조와 나름대로 접촉하며 프랑스와 수니파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다만 오늘날에는 기독교 유럽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은 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 억지춘향식 결과주의적 해석이라 타당한 평은 아니다.[8]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미 부르고뉴 본토는 프랑스 왕령에 흡수된 상태였고 홀란트, 플랑드르, 브라반트와 같이 부르고뉴와 동군연합으로 묶여있던 저지대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다.[9] 다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처음 선언한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자치주였던 발레다오스타였다. 발레다오스타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프랑스어권 지역으로 남아있다.[10]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문까지 개혁 벽보가 붙었다.[11] 헨리 8세의 여동생. 루이 12세의 3번째 부인이며 자녀없이 사별한 후 헨리 8세의 신하 찰스 브랜던과 비밀 결혼을 감행해 딸을 낳았고 메리의 외손녀가 바로 '9일 여왕'으로 유명한 제인 그레이.[1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3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13] 언니 루이즈의 뒤를 이어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샤를로트도 8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14] 어머니 클로드를 통해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브르타뉴 공작으로서는 프랑수아 3세(Francis III)다. 한때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혼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객기부리는 바람에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카를 5세에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의 아들들을 잡아두면서 동생 앙리와 함께 카를에게 끌려갔다.[15] 프랑수아 2세,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샤를 9세, 앙리 3세, 프랑스의 왕비 마르그리트 등[16] 마들렌이 자녀 없이 1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임스 5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다시금 굳건히 하기 위해, 같은 프랑스 출신의 마리 드 기즈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는데 그녀의 딸이 훗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17] 마르그리트에겐 오촌 숙부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외사촌(이복외삼촌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의 아들)이기 때문. 다만 나이는 마르그리트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보다 4살 더 많았다.[18]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19]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남편.[20] 스페인의 명문가 출신 귀족 여성이자 클로드의 7촌 이모(클로드의 어머니 안 드 브르타뉴의 육촌).[21] 메리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프랑수아 1세로부터 "가장 수치스러운 창녀", "나의 전용 마차" 등으로 불렸고도 한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에는 헨리 8세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2] 샤를 8세와 약혼했던 그 마르가레테.[23] 인판타 마리아는 혼인 적령기 당시 가장 부유한 신부였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24] 엘레오노르가 파리에 입성한 날 자신의 정부 에탕프 공작부인 안 드 피셸루 드 에일리(Anne de Pisseleu d'Heilly)와 함께 테라스에서 엘레오노르를 구경하며 망신을 주었다. 참고로 에탕프 공작부인 안은 프랑수아 1세의 정부로서 그가 죽을 때까지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사실상 프랑스의 왕비로 군림했는데, 왕세자였던 앙리 2세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와도 궁의 실권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결국 프랑수아 1세의 사후 앙리 2세의 보복으로 안의 남편인 에탕프 공작 장 4세 드 브로스(Jean IV de Brosse)는 이단 혐의로 고발당해 투옥되고 에탕프 공작위도 빼앗겼으며, 안 본인도 이단 혐의로 고발당해 반역자 신세가 되어 투옥된 뒤 재산도 몰수당하면서 모든 권세를 잃고 프랑스 궁정에서 쫒겨났다. 그래도 얼마 안가 풀려나서 남은 재산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25] 두 사람이 레슬링 시합을 벌였고 프랑수아가 헨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젊은 시절의 헨리도 엄청난 거구의 장사였지만 프랑수아는 그 이상이었다.[26]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는 왕비의 지위의 무게에 대한 순수한 경고거나, 둘째는 고귀한 태생도 아니면서 감히 왕비의 자리를 노리냐는 조롱의 의미일 수도 있다. 후에 끝까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 취급한 것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물론 위에 보면 알 수 있듯 프랑수아는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2] 역대 프랑스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2번째로 큰 지도자는 샤를 드 골.[3] 루이사의 어머니는 부르봉의 마르그리트였으며, 필리베르토 2세는 루이사의 친동생, 카를로 2세는 이복동생이었다.[4] 실은 사위가 못마땅했던 루이 12세가 군무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엄격함을 체득해 보라며 국경지대의 군부대로 보낸 것이었지만, 도리어 군대에서 방탕함을 배운 것.[5] 그 후 카를 5세의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둘을 볼모로 보낸 조건으로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두 아들들을 돌려받았고, 카를 5세가 부르고뉴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소유지와 아르투아 지방,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또한 배상금 200만 크라운을 지불했는데 1차분으로 넘긴 120만 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 덕에 스페인 국고는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받았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평생 증오했다. 여담으로 이 캉브레 조약은 "마담들의 평화"라는 이명으로 불리는데,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6] 니차(Nizza)는 오늘날 프랑스 제5의 도시 니스이다. 당시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영토였으며 니스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은 이탈리아 통일에 따른 1860년 토리노 조약 이후이다.[7] 사실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던 카를 5세 역시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의 시아파 사파비 왕조와 나름대로 접촉하며 프랑스와 수니파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다만 오늘날에는 기독교 유럽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은 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 억지춘향식 결과주의적 해석이라 타당한 평은 아니다.[8]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미 부르고뉴 본토는 프랑스 왕령에 흡수된 상태였고 홀란트, 플랑드르, 브라반트와 같이 부르고뉴와 동군연합으로 묶여있던 저지대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다.[9] 다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처음 선언한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자치주였던 발레다오스타였다. 발레다오스타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프랑스어권 지역으로 남아있다.[10]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문까지 개혁 벽보가 붙었다.[11] 헨리 8세의 여동생. 루이 12세의 3번째 부인이며 자녀없이 사별한 후 헨리 8세의 신하 찰스 브랜던과 비밀 결혼을 감행해 딸을 낳았고 메리의 외손녀가 바로 '9일 여왕'으로 유명한 제인 그레이.[1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3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13] 언니 루이즈의 뒤를 이어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샤를로트도 8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14] 어머니 클로드를 통해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브르타뉴 공작으로서는 프랑수아 3세(Francis III)다. 한때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혼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객기부리는 바람에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카를 5세에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의 아들들을 잡아두면서 동생 앙리와 함께 카를에게 끌려갔다.[15] 프랑수아 2세,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샤를 9세, 앙리 3세, 프랑스의 왕비 마르그리트 등[16] 마들렌이 자녀 없이 1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임스 5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다시금 굳건히 하기 위해, 같은 프랑스 출신의 마리 드 기즈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는데 그녀의 딸이 훗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17] 마르그리트에겐 오촌 숙부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외사촌(이복외삼촌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의 아들)이기 때문. 다만 나이는 마르그리트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보다 4살 더 많았다.[18]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19]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남편.[20] 스페인의 명문가 출신 귀족 여성이자 클로드의 7촌 이모(클로드의 어머니 안 드 브르타뉴의 육촌).[21] 메리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프랑수아 1세로부터 "가장 수치스러운 창녀", "나의 전용 마차" 등으로 불렸고도 한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에는 헨리 8세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2] 샤를 8세와 약혼했던 그 마르가레테.[23] 인판타 마리아는 혼인 적령기 당시 가장 부유한 신부였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24] 엘레오노르가 파리에 입성한 날 자신의 정부 에탕프 공작부인 안 드 피셸루 드 에일리(Anne de Pisseleu d'Heilly)와 함께 테라스에서 엘레오노르를 구경하며 망신을 주었다. 참고로 에탕프 공작부인 안은 프랑수아 1세의 정부로서 그가 죽을 때까지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사실상 프랑스의 왕비로 군림했는데, 왕세자였던 앙리 2세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와도 궁의 실권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결국 프랑수아 1세의 사후 앙리 2세의 보복으로 안의 남편인 에탕프 공작 장 4세 드 브로스(Jean IV de Brosse)는 이단 혐의로 고발당해 투옥되고 에탕프 공작위도 빼앗겼으며, 안 본인도 이단 혐의로 고발당해 반역자 신세가 되어 투옥된 뒤 재산도 몰수당하면서 모든 권세를 잃고 프랑스 궁정에서 쫒겨났다. 그래도 얼마 안가 풀려나서 남은 재산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25] 두 사람이 레슬링 시합을 벌였고 프랑수아가 헨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젊은 시절의 헨리도 엄청난 거구의 장사였지만 프랑수아는 그 이상이었다.[26]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는 왕비의 지위의 무게에 대한 순수한 경고거나, 둘째는 고귀한 태생도 아니면서 감히 왕비의 자리를 노리냐는 조롱의 의미일 수도 있다. 후에 끝까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 취급한 것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