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3E8E5><colcolor=#000000> 앙굴렘 백작부인 사보이아의 루이사 Luisa di Savoia | ||
이름 | 이탈리아어 | 루이사 디 사보이아 (Luisa di Savoia) |
프랑스어 | 루이즈 드 사부아 (Louise de Savoie) | |
출생 | 1476년 9월 11일 | |
사보이아 공국 퐁댕 | ||
사망 | 1531년 9월 22일 (향년 55세) | |
프랑스 왕국 그레술루앙 | ||
장례식 | 1531년 10월 19일 생 드니 대성당 | |
배우자 | 앙굴렘 백작 샤를 (1488년 결혼 / 1496년 사망) | |
자녀 |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1세 | |
아버지 |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 | |
어머니 |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 |
형제 | 지롤라모, 필리베르토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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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2. 생애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필리포 2세와 부르봉의 마르그리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필리포 2세는 아직 사보이아 공작이 아니었으며[1] 젊은 나이에 물려받은 브레스 지역[2]을 프랑스에 빼앗기고 떠돌아다니며 형수 프랑스의 욜랑드와 사사건건 맞붙던 시절이라 통치 가문의 일가임에도 가족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 7살 때 어머니를 여의면서 프랑스 궁중으로 보내져 섭정을 맡고 있던 안 드 프랑스[3]의 양육을 받았다.11살의 나이에 샤를 5세의 증손자인 앙굴렘 백작 오를레앙의 샤를과 결혼했다. 부부는 루이사가 15살이 되면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슬하에 딸과 아들을 각각 한명씩 두었다. 앙굴렘 백작은 여러 애인과 사생아 자식을 두었지만 부부는 사이가 좋았다. 루이사는 남편의 사생아와 자신의 자식이 같이 자랄 수 있게 하고 나중에는 혼사도 챙겨줄 정도로 넓은 이해심을 보여주었다. 1496년 앙굴렘 백작이 추운 날씨에 말을 타고 나갔다가 감기에 걸리자 정성껏 병구완을 했다. 그러나 백작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고, 루이사는 19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1498년 남편의 사촌 루이 12세가 즉위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궁중에서 살게 되었다. 궁중에서 루이사는 직접 교육용 책을 주문해가며 자식들의 교육에 열의를 쏟았다. 루이사의 두 자식은 어머니의 지도 아래 예술, 정치, 과학을 배웠고,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루이사는 아들 프랑수아가 루이 12세의 신임을 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1514년 프랑수아는 왕의 딸인 클로드 드 프랑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1515년, 루이 1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프랑수아가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초대 국왕 프랑수아 1세로 즉위했다. 당시 루이사는 38살이었으며 여전히 아름답고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이후 앙굴렘과 앙주의 여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외교 감각과 정치적 센스가 있는 루이사는 프랑수아 1세의 초기 통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15년 왕이 이탈리아 전쟁에 출전했을 때와 1525년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포로로 잡혀있을 때 섭정직을 맡아 나라를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의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평화 협정을 맺고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1529년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간의 평화 협정인 캉브레 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이 캉브레 조약은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에[4] 이후 '숙녀들의 평화(La paix des dames)'라고 불리게 되었다.
1531년 9월 22일 전염병을 피해 이동하던 중 흑사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보이아 공국 출신이나 정체성은 거의 프랑스인에 가까웠다.[5] 친동생 필리베르토 2세가 죽고 이복동생 카를로 2세가 사보이아 공국을 물려받자 자신의 상속분을 주장하며 이복오빠 레나토[6] 와 함께 끊임없이 카를로 2세의 즉위에 태클을 걸었고, 그녀의 아들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국을 정복하기 전 전초기지를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사보이아 공국을 박살냈다. 결국 그녀의 조카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고 나서 토리노로 천도해버린 후 사보이아 가문이 추구한 프랑스 정체성을 버리고 이탈리아인 정체성을 굳혔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나바라의 왕비 마르그리트 (Marguerite, Queen of Navarre) | 1492년 4월 11일 | 1549년 12월 21일 | 알랑송 공작 샤를 4세 |
헨리케 2세 슬하 1녀[7] | ||||
1남 | 프랑수아 1세 (Francis I) | 1494년 9월 12일 | 1547년 3월 31일 | 프랑스의 클로드 슬하 3남 4녀[8] |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
4. 대중매체에서
2015년 스페인에서 방영된 사극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에서 수시 산체스가 연기했다.[1] 필리포 2세는 죽기 1년 전인 1496년이 되어서야 종손자(형 아메데오 9세의 손자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가 7살에 침대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척 자격으로 사보이아 공작이 되었다.[2] 현재의 프랑스 앵 데파르트망.[3]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누나이다.[4] 여담으로 두 사람은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공통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루이사는 필리베르토 2세의 친누나, 마르가레테는 필리베르토 2세의 두번째 부인.[5] 사보이아 가문 자체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토리노 천도 이전까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어중간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애초에 민족주의 도래 이전 민족 정체성을 단정짓기도 애매모호하다.[6] 필리포 2세의 사생아. 필리베르토 2세가 즉위한 후 사보이아 공국의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에게 쫓겨나 루이사가 있는 프랑스로 도망쳤다.[7] 호아나 3세[8] 앙리 2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