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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6 20:57:44

장 드 몽포르

이름 장 드 몽포르(Jean de Montfort)
출생 1294년
브르타뉴 공국 엔봉
사망 1345년 9월 26일
브르타뉴 공국 엔봉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위 주장자
1341년 4월 30일 ~ 1345년 9월 26일
아버지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
어머니 드뢰의 욜랑드
형제 베아트리스, 잔, 알릭스, 블랑슈, 마리
아내 잔 드 플란데런
자녀 장 4세, 잔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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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위 주장자.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잔 드 팡티에브르, 샤를 드 블루아 부부와 내전을 벌였다.

2. 생애

1294년경 브르타뉴 공국 엔봉에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와 몽포르 여백작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왕비였던 드뢰의 욜랑드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베아트리스[1], 잔[2], 알릭스[3], 마리[4]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몽포르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브르타뉴의 신임 공작이 된 이복형 장 3세 드 브르타뉴와 유산 상속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장 3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그의 아버지와 욜랑드 사이의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며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장 드 몽포르와 욜랑드는 장 3세가 모든 영지를 독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며 교황청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전은 1328년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교황 요한 22세는 1319년 생플로랑 드 소뮈르의 수도원장인 장 밀레가 이끄는 사도 위원회에 중재를 맡겼고, 1324년 장 밀레가 사망한 후에는 돌드브르타뉴의 주교인 기욤 메생을 포함한 다른 위원회에 맡겼다. 소송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자가 우호적인 합의를 맺고 끝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 3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오래도록 유산 다툼을 벌였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낙점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하지만 장 3세는 1341년 4월 30일 캉에서 사망했을 때 후게자가 될 사람을 명확하게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에 오를 인물을 정하는 문제는 필리프 6세의 선택에 좌우되게 되었고, 필리프 6세는 잔 드 팡티에브르를 선택했다.

하지만 장 드 몽포르는 잔은 여자이기 때문에 공작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브르타뉴는 1297년 이래로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으므로 종주국의 법률이 브르타뉴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여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파리로 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

당시 샤를 드 블루아는 장성들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샹토소에서 3마일 떨어진 로모(l'Humeau) 농장에 머물렀다. 몽포르의 부하들은 이곳을 급습해 샤를의 경호원들을 거의 압도했다. 그러나 샤를이 농가의 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항전하는 바람에 제때에 잡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샤를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로모 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장은 낭트로 도주했고, 많은 부하들이 프랑스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거나 사로잡혔다.

낭트에 도착한 장은 시민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 달 안에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테니 그 때까지 항전하자"라고 설득해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샤를의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서 공세를 퍼붓자, 낭트 시내에서 장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장은 10월 말에 용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엔봉 공방전에서 샤를을 막아내고 잉글랜드군이 잔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면서, 금방 끝나는 듯했던 브르타뉴 내전은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이후 루브르 감옥에 갇혀 지내던 장 드 몽포르는 1343년 1월 19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이 레스트로이드 휴전 협약을 체결하면서 석방되었다. 다만 그는 브르타뉴로 돌아가는 게 금지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로 망명한 그는 1345년 3월 27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아 브르타뉴에 상륙했다. 그러나 캥페르 공방전이 실패로 끝난 뒤 중병에 걸렸고, 1345년 9월 26일 엔봉에서 사망했다. 사후 캥페를레의 셍뜨크화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295 ~ 1384, 라발 영주이자 아퀴니, 비트레 남작 기 10세 드 라발의 부인[2] 1296 ~ 1364, 카셀의 영주이자 말 백작인 로베르 드 플란데런의 부인[3] 1298 ~ 1377, 방돔과 카스트르 백작 부샤르 6세 드 방돔의 부인[4] 1302 ~ 1371, 푸아시의 생루이 수도원의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