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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4세 드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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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an IV de Bretagne.jpg
이름 장 4세 드 브르타뉴(Jean IV de Bretagne)
출생 1339년
브르타뉴 공국
사망 1399년 11월 1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365년 4월 12일 ~ 1399년 11월 1일
아버지 장 드 몽포르
어머니 잔 드 플란데런
형제
아내 잉글랜드의 메리, 조앤 홀랜드, 나바라의 호아나
자녀 장 5세, 잔, 마리, 마르그리트, 아르튀르 3세, 질, 리샤르, 블랑슈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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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작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풍지풍파에 시달렸다.

2. 생애

1339년경 브르타뉴 공국에서 몽포르 백작 장 드 몽포르와 느베르 백작 루이 1세의 딸이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의 누이인 잔 드 플란데런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잔[1]이 있었다.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드 브르타뉴가 사망한 뒤,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 공작이 되기 위해 장 3세의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잔의 남편인 샤를 드 블루아와 대적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는 1341년 11월 낭트에서 샤를 드 블루아에게 포위된 끝에 항복하고 루브르 감옥에 갇혔다. 이후 어머니 잔 드 플란데런이 남편을 대신해 잉글랜드 왕국의 도움을 받으며 항전했다.

1345년경 4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로 이동한 뒤 런던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어머니 잔 드 플란데런이 정신병에 걸려 틱힐 성에 감금되었고, 아버지 마저 134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을 부모 없이 지내야 했다. 1357년 18살의 나이에 몽포르 파의 지도자로서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전쟁을 쉽사리 끝내지 못했다. 1363년 7월, 그는 베서렐에서 샤를 드 블루아와 대치하던 중 합의를 이뤘다. 이에 따르면, 블루아는 낭트 시를 포함한 북동부를 가지고, 몽포르는 남부와 서부를 가질 예정이었다.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잔 드 팡티에브르가 자신은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합의를 거부해, 협정은 무효로 돌아갔다.

1364년 2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와 장 4세 드 몽포르는 아키텐 공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브르타뉴 내전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몽포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고, 잉글랜드 장궁병과 프랑스 석궁병간의 사격전이 펼쳐졌다. 이후 양측 맨앳암즈들과 창병들이 정면 충돌했다. 양자 모두 길고 잔혹한 전쟁을 이번 전투에서 끝내고 싶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반나절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끝에, 존 챈더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챈더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놀스는 존 챈더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블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오레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몽포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1372년까지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며, 이 팡티에브르와 아보구르 등지의 영주로서 장 4세 드 몽포르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아도 되며, 장 4세에게 남성 후손이 없으면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성 상속인이 공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제1차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만 여자는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으나, 그는 자기를 옹립하는 데 기여한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65년, 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메리 공주는 결혼식 직후 사망했지만, 장 4세는 에드워드 3세의 허락 없이는 재혼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1366년,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의붓딸인 조앤 홀랜드와 재혼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지만, 이 공국은 이후로도 수년간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브레스트 등 해안 지대의 여러 요새와 주변 지역의 통제권을 여러 잉글랜드 대장과 영주에게 위임하거나 확인해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실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베르트랑 뒤 게클랭, 올리비에 드 모니 등 친 프랑스파 브르타뉴 인사들은 그를 불신했다.

장 4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그가 잉글랜드와 연합할 가능성이 높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게클랭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비롯한 샤를 5세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브르타뉴 인사들은 장 4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 샤를 드 블루아가 죽은 후에도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잔 드 팡티에브르 역시 장 4세와 대립했다. 1372년 10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렌을 포위했다.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를 맺었다.

그러던 1373년 3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생말로 항구에 상륙해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2,000명의 맨앳암즈와 2,000명의 궁수병을 육지에 내려보내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동의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게클랭에게 브르타뉴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게클랭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2달 만에 브르타뉴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브르타뉴 서부 해안 요새들인 브레스트, 오레, 베세렐, 데르발만이 프랑스군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 4세는 4월 28일 브르타뉴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73년 8월 ~ 12월, 장 4세는 곤트의 존칼레에서 출발해 보르도까지 진군하면서 단행한 약탈 행렬에 참여했다.

1378년경, 잉글랜드군은 칼레, 보르도, 바욘 등 몇몇 항구만을 확고하게 통제했다. 반면, 그들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브레스트 등 여러 요새를 장악했고, 생 말로 항구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서 새로운 항구를 확보하기 전에 브르타뉴를 확실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378년 12월 18일 잉글랜드에 망명하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브르타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으며,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브르타뉴의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지난날 장 4세와 오랜 세월 내전을 치러가며 대립했던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브르타뉴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자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 역시 여기에 동감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때 프랑스 무관장 게클랭은 장 4세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브르타뉴인인 그가 브르타뉴 영주들의 뜻에 동조하고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게클랭은 왕이 자신에게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무관장의 검을 왕에게 반환하고 카스티야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개입으로 샤를 5세의 신임을 되찾았다. 이후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샤를 5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고, 새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단이 협상을 이어간 끝에 1381년 5월 2일에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인되었다. 그는 렌에서 열린 공작 대관식을 프랑스 왕실 대관식을 모방하여 거행하게 해, 브르타뉴 공작의 자치권은 프랑스 왕국이 침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1387년, 장 4세는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팡티에브르 백작이며 고인이 된 아버지 샤를 드 블루아가 생전에 미지급한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담보로 잉글랜드에 수감되어 있던 장 1세 드 샤티옹을 대신해 팡티에브르 백국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의 딸 마르그리트를 장 1세 드 샤티옹의 아내로 삼았다. 개랑드 조약에 따르면,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팡티에브르 백작이 브르타뉴 공작이 될 수 있었다. 장 4세는 이 때문에 올리비에가 자신을 배제하고 장 1세 드 샤티옹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러던 1387년 6월 26일, 올리비에는 반에서 열린 연회에서 장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장 4세는 그를 가방에 가둔 뒤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지만, 이내 명령을 철회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는 몸값으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블랑, 조슬랭, 주곤 및 르 길도 요새를 장 4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1388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장 4세가 압수한 영토를 올리비에 5세에게 돌려주지만 몸값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중재했다. 이후 올리비에 5세는 장 4세에게 반감을 품었다.

1392년 6월 13일, 올리비에 5세는 생폴 호텔에서 개인 저택으로 이동하던 중 라 페르테 베르나르, 프레시네, 사비에 영주인 피에르 드 크레옹이 이끄는 무리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피에르 드 크레옹은 사비에 요새로 피신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브르타뉴 공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이 올리비에 5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으며,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올리비에 5세는 분명 장 4세가 사주했을 거라고 여겼다. 프랑스 왕실은 장 4세에게 피에르 드 크레옹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장 4세는 거부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장 4세는 피에르 드 크레옹을 대면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면, 당신은 약자요. 당신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소. 첫 번째는 그를 공격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를 놓친 것이오."

크레옹이 답했다.
"이건 정말 사악한 일입니다. 나는 그가 속한 지옥의 모든 마귀가 그를 지키고 나와 내 백성의 손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60번 이상의 칼질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 후 샤를 6세는 올리비에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암살 미수범을 숨기는 장 4세를 응징하겠다고 선포하고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1392년 6월, 샤를 6세가 르망 숲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원정이 중단되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숙청되었고, 장 4세는 프랑스 왕실과 휴전을 맺고 지속적으로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395년에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의 권위를 거부한 생 말로 시는 1394년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놓였고, 1415년까지 브르타뉴 공국 변두리에 남아 있었다.

1393년, 장 4세는 올리비에가 프랑스 왕국에서 추방된 뒤 숨어든 조슬랭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1394년 정신을 어느정도 회복한 샤를 6세는 올리비에가 무관장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도록 허락했고, 올리비에는 이를 기회로 삼아 생브리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장 4세에 맞섰다. 여기에 샤를 6세의 형제이자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동맹을 맺고 브르타뉴 공작에 맞서 싸울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결국 장 4세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1396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를 통해 올리비에와 화해를 모색했다. 장 4세는 그의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자기 아들 을 그에게 보내 반에서 인질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 후 올리비에와 장 4세는 정식으로 화해했다.

1397년 6월 12일, 장 4세는 샤를 6세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협상 덕분에 브레스트를 잉글랜드로부터 돌려받았다. 그 대신, 그는 잉글랜드에 120,000 금 프랑을 지불했다. 이후 리치먼드 백작과 영지 역시 1398년 4월 23일에 돌려받았다. 그러나 1년 후 리처드 2세가 폐위된 뒤, 새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는 리치먼드 백작위를 그로부터 박탈했다.

1399년 11월 1일, 장 4세는 낭트에서 사망했다. 사후 생피에르에생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341 ~ 1402, 드레이튼의 3대 바셋 영주 랄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