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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3:55:03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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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
Pierre Ier de Bretagne
파일: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png
이름 피에르(Pierre)
별명 모클레르(Mauclerc: 나쁜 성직자)
출생 1187년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두르당
사망 1250년 5월 25일
지중해 해상
지위 브르타뉴 공작
1213년 ~ 1221년
브르타뉴 보안관
1221년 ~ 1237년
아버지 로베르 2세 드 드뢰
어머니 욜랑드 드 쿠시
형제 로베르 3세, 엘레오노르, 이자벨, 알릭스, 필리프, 앙리, 아녜스, 욜랑드, 장, 잔, 조프루아
배우자 알릭스 드 투아르, 니콜, 마르그리트 드 몽터규
자녀 장 1세, 욜랑드, 아르튀르, 올리비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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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보안관.

2. 생애

1287년경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두르당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로베르 2세 드 드뢰는 드뢰, 브렌 및 느베르 백작이고, 페르, 퐁아르시, 퀸시의 영주였다. 어머니 욜랑드 드 쿠시는 쿠시 영주 라울 1세의 딸이다. 형제로 로베르 3세[1], 엘레오노르[2], 이자벨[3], 알릭스[4], 필리프[5], 앙리[6], 아녜스[7], 욜랑드[8], 장[9], 잔[10], 조프루아[11]가 있었다.

1209년 5월 17일 오순절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로부터 형 로베르 3세, 루이 왕자와 함게 콩피에뉴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13년 1월 27일, 필리프 2세의 주선에 따라 브르타뉴 여공작 알릭스 드 투아르와 약혼한 뒤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14년 2월 또는 3월, 알릭스와 피에르 드 드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피에르는 알릭스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가 되었다.

1214년, 일찍이 알릭스 드 투아르와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팡티에브르와 트레고르 백작, 아보구르, 고엘로 영주인 앙리 1세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했다. 이에 피에르 1세는 불경을 저지른 봉신을 벌하겠다며 팡티에브르와 트레고르 백국을 몰수했고, 앙리 1세는 아보구르와 고엘로의 작은 영주로 전락했다. 앙리 1세의 후견인을 맡은 레옹 자작 코난 1세가 반기를 들자, 피에르 1세는 1216년 레옹의 주요 거점인 레스네벤을 점령했다. 이후 앙리 1세는 마옌과 디낭의 영주인 유헬 3세 드 마옌에게 피신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는 필리프 2세를 도왔다. 1213년 5월 31일 잉글랜드 해군이 브리튼 섬으로 쳐들어가려던 프랑스 함대를 담메에서 기습 공격해 파괴하자, 그는 필리프 2세의 지시를 받아 담메 항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뒤이어 존 왕의 침공으로부터 낭트를 망어했다. 1214년 7월 2일 루이 왕자가 로슈오무앵 전투에서 존 왕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으며, 1216년 루이 왕자가 존 왕의 통치에 반감을 품은 잉글랜드 남작들의 초대를 받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비록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1218년에 헨리 3세와 협의해 리치먼드 백작위 및 영지를 돌려받았다. 1219년에는 알비 십자군에 가담해 마르망드 공략에 기여했고, 뒤이은 툴루즈 공방전에 참여했다.

1221년 10월 21일, 아내 알릭스가 사망했다. 이후 피에르 1세와 알릭스의 장남인 장 1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고, 그는 브르타뉴 보안관으로서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 1222년 레옹 자작 코난 1세, 크라옹 영주 아이머리 1세 등 브르타뉴 영주들이 피에르 1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223년 초, 아이머리 1세는 푸앙세의 영주권에 속한 샤토브리앙과 라 구에르쉬를 공략했지만 푸앙세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피에르 1세는 즉각 푸앙세를 구하러 출진했고, 그 해 3월 3일 샤토브리앙 인근에서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쳤던 아이머리 1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해 궤멸시키고 아이머리 1세를 생포했다. 브르타뉴 영주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했고, 피에르 1세는 그들의 성을 허물고 영지 일부를 내놓게 했으며, 아이머리 1세에게는 풀어주는 대가로 무거운 몸값을 매겼다. 또한 렌 백국에 가장 강력한 두 영주인 비트레와 푸제르를 견제하기 위해 생토뱅뒤코르미에 시와 요새를 1223년에서 1225년까지 건설했다.

1224년,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뒤 니오르와 라로셸을 포위 공격할 때 가담했으며, 같은 해 헨리 3세의 편에 선 샹토소 영주를 격파한 뒤 왕으로부터 샹토소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226년 루이 8세의 남부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다. 한편, 그는 당시 부빈 전투에서 생포된 뒤 루브르 감옥에 갇혀 지내던 플랑드르 백작 페랑의 부인인 잔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잔에게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사람을 보내 페랑과 자신이 친족 관계이니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하도록 했다. 호노리오 3세는 이에 동의했지만, 루이 8세는 브르타뉴 보안관과 플랑드르 백작부인의 재혼을 단호히 반대했다. 이는 브르타뉴와 플랑드르가 겨랍하면 프랑스 왕실 영토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루이 8세는 호노리오 3세에게 페랑과 잔이 도로 결혼 상태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게 했다.

피에르 1세는 모클레르(Mauclerc: 나쁜 성직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브르타뉴 성직자들과 오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1213년, 그는 낭트의 방어를 강화할 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낭트 주교 에티엔 드 라 브뤼에르가 관장하던 낭트 주교구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이에 에티엔은 교황령에 불만을 제기했고, 호노리오 3세는 1218년 4월 20일 피에르 1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당했다. 낭트 주교는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에티엔이 투르 대주교구로 피신했고, 투르 대주교 장 드 페이는 1218년 6월 28일에 브르타뉴 전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호노리오 3세는 1218년 12월 7일에 낭트 주교가 피에르 1세에게 내린 파문을 승인했고, 상스, 투르, 부르주, 루앙 등 대주교 4명도 그에게 파문을 내렸다. 당시 알비파 십자군에 참가했던 피에르 1세는 일단 파문이 즉시 집행되는 건 모면했지만, 이대로면 큰일난다고 판단해 낭트 주교와 화해하기로 했다. 1220년 1월 28일, 그는 낭트 주교구를 복원하고 약탈한 재물을 돌려주고 피해를 보상하며, 세금을 매기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그에게 내린 파문을 취소하기로 했다.

1225년 5월 17일, 낭트에서 열린 회의 중 피에르 1세와 렌 주교 조슬랭 드 몽토방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는 렌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백성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주교구를 지나치게 요새화한 점을 지적했다. 렌 주교는 즉각 반발했고, 생브리외 주교 기욤 핀숑과 트레귀에 주교 에티엔이 그를 지지했다. 1227년 르동 회의에서, 피에르 1세는 브르타뉴 세속 영주들의 지지를 받아낸 뒤 군대를 동원해 렌 주교, 생브리외 주교, 트레귀에 주교를 추방했다. 그러자 생말로, 돌, 반, 레옹 주교들이 추방된 동료들을 옹호했고, 이들 7명은 피에르 1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1228년 3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파문을 승인했으며, 1228년 11월 14일 브르타뉴 전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고, 교황령의 중재에 따라 추방했던 주교들이 복귀하는 걸 받아들이고 그들과 화해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루이 8세가 재위 3년만에 중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하고, 아들 루이 9세가 아직 어린 걸 보고, 이 틈에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1226년 10월 19일, 잉글랜드로 파견된 브르타뉴 사절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륙의 공통의 적"에 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그의 딸 욜랑드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사이의 결혼도 고려되었다. 이후 1227년 프랑스 각지의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각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반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브르타뉴를 압박하자 즉각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 당국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생잠 요새, 벨렘 요새, 라 페리에르 요새를 양도하는 방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독립할 때를 노리고, 1229년 10월 포츠머스로 가서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30년 5월 3일 헨리 3세가 생말로에 상륙한 뒤 기옌에서 브르타뉴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돌려 병사 1,500명만 브르타뉴로 보내고 자신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 3세가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이자, 피에르 1세는 감히 프랑스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군사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그 사이,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카스티야의 블랑카는 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브르타뉴 보안관 직책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그에게 반감을 품었던 아보구르 영주 앙리 1세, 비트레 자작 앙드레 3세, 푸제르 자작 라울 3세, 샤토브리앙 영주 조프루아 4세, 코부르 영주 겔두인 2세, 디낭 영주 리샤르,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 등 주요 영주들이 그로부터 이탈해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1231~1232년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해 국경 요새들을 공략했고, 생토뱅코르미에까지 진군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 왕국에 항복했고, 루이 9세는 1234년 11월 4일 방돔 조약 때 획득한 이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지만 그의 아들 장 1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브르타뉴 보안관을 맡는 걸 허용하기로 했다. 1235년, 루이 9세는 브르타뉴 영주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를 입은 부분과 보안관이 부과안 의무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1237년 11월 16일 장 1세가 성인이 되어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후 보안관에서 물러난 그는 브렌의 영주로 물러났다.

1239년 6월 24일 샹파뉴 백작이자 나바라 왕국의 군주 티발트 1세십자군에 참여해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지만, 원정이 실패하자 귀환했다. 1248년 ~ 1250년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략하기 위한 제7차 십자군을 이끌었을 때 참여했다. 루이 9세의 일대기를 집팔한 작가 장 드 조인빌(Jean de Joinville, 1224 ~ 1317)은 그가 1250년 2월 8일에 벌어진 알 만수라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싸웠다가 중상을 입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알 만수라 전투는 프랑스군의 참패로 끝났고, 그는 4월 초에 생포된 뒤 갤리선에 억류되었다가 1250년 5월 6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브르타뉴로 돌아가다가 1250년 5월 25일 지중해 해상에서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브렌의 생이브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피에르 1세는 생전에 샹송 쿠엔 드 브르타뉴를 지었다. 이 시는 4편의 사랑 노래, 예수, 성모 마리아, 삼위일체론 등의 주제를 다뤘다.

3. 가족



[1] 1185 ~ 1234, 드뢰 백작[2] 1186 ~ 1248년 이후, 샤토뇌프앙티메레 영주 위그 4세와 초혼, 로베르 드 생클레어와 재혼[3] 1188 ~ 1242년 이후, 루시 백작 장 2세 드 피에르퐁과 초혼, 르노 드 샤티옹과 재혼[4] 1189 ~ 1258, 살린 영주 고셰르 4세 드 마콩과 초혼, 르노 2세 드 쇼아줄과 재혼[5] 1192 ~ 1242, 바르 백작 앙리 2세 드 바르의 부인[6] 1193 ~ 1240, 랭스 대주교이자 공작.[7] 1195 ~ 1258, 옥손 백작 에티엔 2세 드 옥손의 부인[8] 1216 ~ 1239, 엑수둔 영주이자 외 백작 라울 2세 드 뤼시냥의 부인[9] 1198 ~ 1241, 마콩과 비엔 백작.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트리폴리에서 후손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10] 1199 ~ 1272, 노트르담 드 퐁트브로 수도원의 제13대 수녀원장[11] 1200 ~ 1219, 미혼인 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