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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6:44:05

알 만수라 전투

파일:알 만수라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십자군3.2. 이집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250년 2월 8~11일,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과 아이유브 왕조군이 맞붙은 전투. 이집트 정복을 목표로 삼은 7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게 만든 결정적인 전투이다.

2. 배경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진두지휘한 리처드 1세가 이집트 정복의 필요성을 설파한 이래, 십자군은 이집트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는 중동 제일의 곡창지대로, 그곳을 점유한다면 예루살렘 왕국이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집트를 점령한다면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보장할 수 있었으며, 갈수록 심해지는 무슬림의 공세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217년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 공략에 나섰으나, 이집트의 항구도시 다미에타를 공략하지 못하다가 1221년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 때 카이로로 진격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원정군이 궤멸되고 말았다.

이후 1229년 제6차 십자군 원정을 이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한 끝에 예루살렘 내부의 모스크를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예루살렘 왕국이 예루살렘을 양도받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1244년 8월 23일 아이유브 왕조에게 고용된 호라즘 용병들이 십자군이 자기들끼리 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예루살렘을 기습 점령했다. 예루살렘 왕국과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은 이에 맞서 다마스쿠스, 홈즈, 트란스 요르단의 아이유브 왕조와 연합하여 예루살렘 탈환 작전에 나섰으나 1244년 10월 18일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더 이상 대규모 원정을 단행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왕국을 구원하기 위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요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그는 이에 앞서 1244년 12월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는 병상에서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맹세했고, 얼마 후 회복했다. 이에 맹세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1245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영주들을 소집해 그들로부터 십자군에 가담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후, 전국의 장정들을 징집하고 성직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포함한 거액의 세금을 징수하여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제노바마르세유에서 수송선 수백척을 고용했다.

수년 간의 준비 끝에, 루이 9세는 1248년 8월 25일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에그모르트 항구를 떠났다. 그의 함대는 9월 17일 키프로스에 도착한 뒤 곧장 이집트로 가려 했지만 병력이 모두 집결하지 않아서 내년 5월까지 미뤄야 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혹독했고, 250명의 기사들과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죽어갔다. 그렇지만 날씨가 개이자 추가 병력이 도착했고, 아크레에서 파견된 십자군이 합류하고 키프로스의 용병대가 대거 고용되면서, 손실을 어느정도 메꿀 수 있었다.

1249년 5월 말, 루이 9세의 군대는 키프로스에서 출항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1250년 6월 4일, 십자군은 나일강의 다미에타 지류에 도착했다. 참모들은 나머지 합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권했지만, 루이 9세는 이를 거부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다미에타 공략에 나섰다. 다음날 새벽, 나일강 하구 서쪽 둑의 모래 기슭에서 무슬림군이 기습했지만, 십자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이들을 격퇴하고, 여세를 몰아 6월 6일 다미에타를 공략했다. 적의 저항이 미약하자, 루이 9세는 내친 김에 카이로까지 진격하는 안건을 고려했다. 하지만 제5차 십자군의 말로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7월에 최고조에 달할 나일강의 홍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다미에타에서 추가 병력과 합류하여 가을에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다 다미에타가 공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상에서 일어나 군대를 재정비했다. 다미에타를 적에게 쉽게 내준 장교 50명을 참수했으며,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150km, 다미에타에서 서남쪽으로 60km 떨어진 나일 강변의 도시 만수라로 군선을 타고 출정했다. 그는 십자군에 전갈을 보내 다미에타를 돌려준다면 예루살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하는 걸 원했던 루이 9세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베두인 기병대가 종종 십자군을 급습하여 기독교인을 잡아서 참수했지만, 루이 9세는 일절 대응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오트레치의 월터가 이끄는 기사 몇명이 이를 무시하고 베두인 족을 쫓아갔다가 매복에 걸려 몰살당하자, 루이 9세는 이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겠다고 엄포했다. 이후 십자군은 베두인 족의 도발에 일절 응하지 않으며 진영 수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이윽고 범람이 잦아들고 셋째 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추가 병력이 도착하자, 루이 9세는 원정을 개시했다.

참모들은 수송선들이 보급품을 상륙시킬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자고 건의했지만, 왕의 동생인 아르투르의 로베르는 "뱀을 죽이려면 먼저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려야 한다."며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공략하고 무슬림군을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 9세는 동생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11월 20일 카이로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나일강의 오른쪽 둑을 따라갔고, 함선들은 나일강을 내려가면서 보급품과 공성 기계 등 군장비들을 운반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22일, 술탄 알 살리흐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남편의 임종을 지켜본 왕비 샤자르 앗 두르는 사령관 파크루딘 유수프와 논의 끝에 술탄의 사망을 숨기기로 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던 투란샤를 극비리에 불러들었다. 한편, 십자군은 이집트군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시달리며 느린 속도로 진군했다. 기사들은 자기들을 향해 화살을 퍼붓고 도망치는 적에게 이를 갈았지만, 루이 9세가 추격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울분을 삭혀야 했다. 그렇게 한 달동안 힘겹게 행군하던 십자군은 야슈문-타라로 알려진 나일강의 운하에 도착했다.

십자군은 아슈문 운하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려 했지만, 무슬림군의 지속적인 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게다가 이집트군이 먼 둑을 파괴해 강 수위를 높이면서, 도로 건설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게 3개월간 온갖 고생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던 중, 한 이집트인이 십자군 진영에 찾아가서 쉽게 건널 수 있는 건널목을 알고 있으니,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안내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루이 9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운하 건너편의 무슬림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습 작전을 고안했다. 이리하여 알 만수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십자군

3.2. 이집트군

4. 전투 경과

1250년 2월 7일, 루이 9세는 전군을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석궁병들은 진영에 남아서 적과 대치하게 하고, 아르투아의 로베르가 이끄는 기사들은 선봉에 서서 이집트인의 안내를 받으며 건널목을 도하하여 먼 둑을 확보하게 했다. 그동안 자신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뒤따랐다. 그는 모든 부대에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자기가 추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독단적으로 적을 쫓지 말라고 지시했다. 다음날(2월 8일) 새벽, 기사들은 안내인을 따라 건널목을 건너서 먼 둑에 도착했다. 이때 300명의 무슬림 기병대가 나타나자, 기병대는 그들을 공격했다. 무슬림 기병대는 적의 출현을 본대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달아났다.

아르투르의 로베르는 적이 달아나는 걸 보고 루이 9세의 엄명을 잊고 기사들과 함께 그들을 뒤쫓았다. 로베르와 기사 290기는 적 진영으로 난입하여 적군을 마구잡이로 살육했다. 이때 파크루딘 유수프는 목욕 중이었는데, 적이 갑자기 난입하자 허겁지겁 밖으로 나와서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말에 올라타 뛰쳐나왔다가 살해당했다. 로베르는 적군이 만수라 시로 도주하는 걸 보고 그들을 추격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즈베리 백작 등 여러 기사들이 "왕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권했지만, 로베르는 그들을 겁쟁이라고 모욕하고 단독으로 만수라로 달려갔다. 이에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도시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이 열린 성문을 통과하여 도시에 들어왔을 때, 이집트군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기사들은 앞을 가로막은 시민들을 학살하며 궁으로 달려들었지만, 궁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바르스의 술탄친위대가 사방에서 공격했고, 다른 수비대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제야 일이 틀어진 걸 깨달은 로베르와 기사들은 서둘러 퇴각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로베르와 솔즈베리 백작을 포함한 기사들 거의 전부가 처참하게 죽었고, 겨우 다섯 명만이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한편, 루이 9세는 아슈문 운하를 건너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섯 기사들이 중상을 입은 채 달려와서 만수라 시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자, 국왕은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베르를 처단하여 사기가 오른 이집트군이 맹렬하게 공격했고, 루이 9세는 방진을 친 채 적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한편, 그는 석궁병과 보병들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리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대응해 경기병대를 수시로 보내 다리 건설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많은 노동자가 사살되었지만, 그날 저녁 다리가 완성되면서 보병들이 운하를 건너 국왕과 합세했다.

이후 십자군이 운하를 등에 진채 진영을 세워서 적과 대치하자, 무슬림군은 2월 11일 새벽에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이를 격퇴했고, 무슬림군은 만수라 시로 후퇴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성채를 공격할 공성용 무기를 미처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루이 9세는 만수라 시 공성을 포기하고 함선들이 공성용 무기를 가지고 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알 만수라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루이 9세의 십자군은 4개월간 운하를 등에 진 채 버텼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함선들은 이집트 해군의 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갈 수 없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 달려온 새 술탄 투란샤가 보급로를 끊어버려서 식량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졌고, 전염병마저 창궐하면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루이 9세는 더 이상 여기 있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다미에타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철수하는 동안 사방에서 몰려온 적군의 습격에 시달렸고, 함선 수십척이 술탄의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다. 1250년 4월 6일, 루이 9세는 다미에타에서 약 20km 떨어진 파리스크르 마을에서 중병에 걸려서 꼼짝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군대 역시 지칠대로 지쳐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 이윽고 무슬림군이 마을을 포위하자, 루이 9세는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발을 사슬에 묶인 채 만수라로 옮겨진 뒤 유폐되었다가 4년 후인 1254년에야 몸값을 지불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기사들 역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지만, 일반 병사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집트에서 살아야 했다. 이리하여 제7차 십자군 원정은 처참하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