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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dcab8><colcolor=#000>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1세의 왕비 브르타뉴 여공작 프랑스의 클로드 Claude de France | |
출생 | 1499년 10월 14일 |
프랑스 왕국 로모랑탱랑트네 | |
사망 | 1524년 7월 20일 (향년 24세) |
프랑스 왕국 블루아 성 | |
배우자 | 프랑수아 1세 (1514년 결혼) |
자녀 | 루이즈, 샤를로트, 프랑수아, 앙리 2세, 마들렌, 샤를, 마르그리트 |
아버지 | 루이 12세 |
어머니 | 안 드 브르타뉴 |
자매 | 르네 |
종교 | 가톨릭 (세례명:클라우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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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공주이자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왕비.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장녀이자 프랑수아 1세의 첫번째 왕비로 앙리 2세의 어머니다.2. 생애
루이 12세의 장녀로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공주였으며 어머니 안 드 브르타뉴에게서 물려받은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인데다 이후 프랑수아 1세와 혼인하여, 프랑스의 왕비까지 되었으니 권력을 누릴 만 했지만 시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당굴렘에게 밀려서 영 빛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왕비로서의 실권은 클로드가 곱추에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프랑수아 1세가 당시 자신의 '공식 정부'였던 프랑수아즈 드 푸아[1]에게 주었기에 궁정에서 그다지 대접받지 못했다. 비록 실권을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의 정부에게 빼앗기고 남편은 사랑은 커녕 존중도 해주지 않았지만 클로드는 늘 품위 있게 처신하며 사람들에게 상냥해서 타인에게 평판이 좋았다.그 유명한 앤 불린과 메리 불린이 클로드의 시녀로 있었던 적이 있다. 본래 둘은 헨리 8세의 동생 메리 공주가 클로드의 아버지 루이 12세의 세 번째 왕비로 프랑스에 시집 올 때 시녀로 따라왔다. 루이 12세가 죽자 메리 공주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불린 자매는 프랑스 궁정에 계속 남아 클로드의 시녀가 되었으며 이 즈음에 메리 불린은 클로드의 남편 프랑수아 1세와의 불륜설이 났다.[2] 메리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이후에도 앤은 얼마간 프랑스에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궁정 문화는 타국의 궁정 문화를 선도했기 때문에 앤은 프랑스에서 수준급의 교양, 밀당, 예의범절 등을 배워서 나중에 잉글랜드로 돌아갔을 때 퀸카 대접을 받게 되었다.
본래부터 허약한 몸이었는데 결혼 생활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 보니 더욱 악화되어 24세에 요절했다. 프랑수아 1세와의 사이에서 앙리 2세를 포함하여 총 3남 4녀를 낳았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랑스의 클로드 (Claude of France) |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 12세 (Louis XII) | <colbgcolor=#ffffe4,#323300> 오를레앙 공작 샤를 (Charles, Duke of Orléans) | |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Louis I, Duke of Orléans) | |||
발렌티나 비스콘티 (Valentina Visconti) | |||
클레페의 마리 (Marie of Cleves) | |||
클레페 공작 아돌프 1세 (Adolph I, Duke of Cleves) | |||
부르고뉴의 마리[3] (Marie of Burgundy) | |||
브르타뉴의 안 (Anne of Brittany) | |||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Francis II, Duke of Brittany) | |||
에탕프 백작 리샤르[4] (Richard, Count of Étampes) | |||
베르튀스 여백작 마르그리트[5] (Margaret, Countess of Vertus) | |||
푸아의 마르그리트 (Margaret of Foix) | |||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Gaston IV, Count of Foix) | |||
레오노르 1세 (Eleanor, Queen of Navarre)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발루아의 루이즈[6] (Louise of Valois) | 1515년 8월 19일 | 1518년 9월 21일 | |
2녀 | 발루아의 샤를로트[7] (Charlotte of Valois) | 1516년 10월 23일 | 1524년 9월 18일 | |
1남 |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수아[8] (Francis, Dauphin of France) | 1518년 2월 28일 | 1536년 8월 10일 | |
2남 | 앙리 2세 (Henri II) | 1519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카테리나 데 메디치 슬하 5남 5녀[9] |
3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들렌[10] (Madeleine, Queen of Scotland) | 1520년 8월 10일 | 1537년 7월 7일 | 제임스 5세 |
3남 | 오를레앙 공작 샤를 2세 (Charles II, Duke of Orléans) | 1522년 1월 22일 | 1545년 9월 9일 | |
4녀 | 사보이아 공작부인 마르게리타 (Margaret, Duchess of Savoy) | 1523년 6월 5일 | 1574년 9월 15일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1] 슬하 1남[12] |
[1] 스페인의 명문가 출신 귀족 여성이자 클로드의 7촌 이모(어머니 안 드 브르타뉴의 육촌).[2] 메리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프랑수아 1세로부터 "가장 수치스러운 창녀", "나의 전용 마차" 등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에는 헨리 8세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3]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차녀.[4]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4남.[5]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고명딸.[6]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3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7] 언니 루이즈의 뒤를 이어 카를 5세와 약혼했지만 샤를로트도 8살에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8] 어머니 클로드를 통해 브르타뉴 공국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브르타뉴 공작으로서는 프랑수아 3세(Francis III)다. 한때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혼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객기부리는 바람에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카를 5세에게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의 아들들을 잡아두면서 동생 앙리와 함께 카를에게 끌려갔다.[9] 프랑수아 2세,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샤를 9세, 앙리 3세, 프랑스의 왕비 마르그리트 등[10] 마들렌이 자녀 없이 1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임스 5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다시금 굳건히 하기 위해, 같은 프랑스 출신의 마리 드 기즈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했는데 그녀의 딸이 훗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11] 마르그리트에겐 오촌 숙부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외사촌이기 때문. 다만 나이는 마르그리트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보다 4살 더 많았다.[12]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