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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8:08:23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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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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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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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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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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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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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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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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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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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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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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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8세 루이 9세 필리프 3세
카스티야의 블랑카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아라곤의 이사벨 브라반트의 마리아
필리프 4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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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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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장 2세
부르고뉴의 잔 나바라의 블랑슈 보헤미아의 보나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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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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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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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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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왕조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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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 루이 16세
마리아 레슈친스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오를레앙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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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FFF> 프랑스 왕국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a Antonia von Österreich
파일:wm_marie_antoinette_with_a_rose_Q3937618.jpg
<colbgcolor=#f5fffa,#191919> 이름 독일어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프랑스어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출생 1755년 11월 2일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쇤브룬 궁전
사망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프랑스 공화국 파리 혁명 광장
장례식 1815년 1월 21일
생 드니 대성당
신체 154cm[1]
배우자 루이 16세 (1770년 결혼 / 1793년 사망)
자녀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차녀 소피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프란츠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Marie-AntoinetteSignature.png
1. 개요2. 명칭3. 작위4. 생애5. 평가
5.1. 정치적 측면5.2. 능력5.3. 사치?5.4. 악명
6. 가족관계
6.1. 조상6.2. 자녀
7. 성격8. 성품9. 문화10. 매체
10.1. 소설10.2. 영화10.3. 드라마10.4. 뮤지컬10.5. 만화10.6. 애니메이션10.7. 게임
11. 기타

[clearfix]

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공주이자,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왕비.

2. 명칭

풀네임은 마리-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Marie-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오스트리아식(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외스터라이히 대신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von Habsburg-Lothringen)’ 을 쓰기도 한다.

‘마리 앙뚜아네뜨’,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투와네트’ 등으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표기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다. 프랑스어의 ‘t’ 발음은 기식이 약하여 ‘ㄸ’로 들리나, 무성음의 기식의 유무로 뜻을 구별하는 언어가 아니면 파열음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저렇게 표기한다. 자음 뒤에 쓰인 'oi[wa]'의 표기도 분분한데, 'ㅜ아'로 쓰는 게 표준. 순수 프랑스어의 w 발음은 무조건 u 발음의 변이음이기 때문이다.

3. 작위

파일:CoA of Marie-Antoinette of Austria.png
문장

4. 생애

1755년 11월 2일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11녀호프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Maria-Antonia Josepha Johanna)였다.

참고로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외종조부(외할아버지의 형제)가 루이 14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6]이 프란츠 1세의 어머니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할머니. 또한 남편 루이 16세의 외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7]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사촌으로, 이러한 관계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에게 외가쪽으로 7촌 이모가 된다.[8]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났을 당시 오스트리아 궁정의 에티켓은 비교적 느슨했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영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쇤브룬 궁전에서 회화, 클라비코드, 춤, 피아노 등을 배우고 형제자매[9]들과 뛰어노는 등 당시 왕실 공주로선 상당히 자유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세 때 합스부르크 제국프랑스 왕국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한 동맹의 역전으로,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당시 대 제국인 오스트리아의 공주라는 특수한 신분에 프랑스 왕비와 왕세자비가 부재한 상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제일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던 지라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때 시할아버지의 애첩인 뒤 바리 부인과 종종 충돌했다.

그후 프랑스에 시집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천연두로 세상을 떠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10] 그뒤 프랑스 왕비로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얻고 여러 자선 활동과 과학,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가짜 뉴스는 사그라들지 않고 이후 목걸이 사기 사건으로 그녀의 평판은 완전히 박살이 난다. 설상가상으로 오랫동안 축적된 프랑스 내부의 문제와 루이 14세부터 축적된 왕실의 엄청난 빚과 미국 독립 전쟁, 미시시피 거품 등 여러 실책으로 프랑스 혁명이 터져 버린다.

결국 불안한 프랑스 정국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설득해 친정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하자고 제안을 하나 이 탈출도 실패하고 남편 루이 16세는 국민 투표로 처형된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도 딸 마리 테레즈, 아들 루이 17세, 시누이 엘리자베트와도 떨어져 콩시에르쥬리에 감금된다.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정부로부터 국고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으로 기소당했다.

우선 국고 낭비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지만 결국 유죄로 인정되었다. 소위 반역죄 및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 혐의는 루이 16세와 함께 유죄로 인정됐다. 판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에는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에, 왕이 아예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비가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도 이런 경우 왕자나 형제에게 물려주고 말지, 여성의 개입을 허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도 살리카법이 유효했기 때문에 애초에 여자들이 왕위를 물려받기는 사실상 어려웠고, 그나마 퐁파두르 부인이나 카트린 드 메디시스처럼 비선 실세로 활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마리에 대한 유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왕비는 다이아몬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현대 법학자들이 이 사건의 기록 문서를 찾아 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앙투아네트에게 전혀 죄목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자체도 뭔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루이 17세에게서 증언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혐의를 제기한 것이기는 한데,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던 루이 17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가져다가 써먹었던 것. 그 시절의 동성애근친상간은 기본이 사형이었다. 물론 혁명정부도 이게 유죄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테니 그냥 왕비에 대한 모욕과 사형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사소한 첨가물이었을 것이다. 이 근친상간 혐의의 고발자인 에베르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자, 재판 내내 왕비의 품격을 지키며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한다.

재판장에 있었던 모든 여성은 가혹했던 프랑스 사회를 견뎌내면서 악에 받친 시장의 아낙네였다. 사치스럽다고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뻣뻣한 태도로 침묵을 유지하여 아낙네들의 증오를 받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말하자 다들 태도가 돌변해서 에베르를 역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몇몇 남성도 그녀를 옹호할 정도로 기가 막힌 고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혐의는 너무 어설프게 급조되어 만들어졌던지라 도리어 그랬을 거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죄목을 갖다 붙여 앙투아네트를 죽이려는 혁명 정부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막스 갈로는 재판정이 수치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보고받고 접시를 깨뜨리며 "에베르라는 바보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좀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 결국 한 어린아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 어머니와 고모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에 단단히 일조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결국 국고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같은 혐의로 루이 16세의 여동생이자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 공주도 사형 판결을 받고 몇 개월 후 처형당했다. 감옥으로 돌아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정부는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정부에 서약한 사제에게 고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이 잘리기 전날 밤 시누이마담 엘리자베트(루이 16세의 여동생)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11][12]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 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아버지의 마지막 말[13]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나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압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강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재판 당시 루이 17세의 증언에 대한 언급).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니다.
이 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사제가 계실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4]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신앙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는데, 형리가 그녀의 잘린 목을 가지러 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다지 품위있는 대접을 받으며 목이 잘리진 못했다. 왕실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 입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하에 단두대로 이동해 죽은 루이 16세와 달리, 허름한 옷차림에[15]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욕을 먹으며 목이 잘렸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참수 직전 유언은,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예요."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 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이 잘릴만한 죄는 아니었다.[16]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벌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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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 때 조성된 무덤
그리고 마리의 잘린 목은 파리생 드니 대성당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17]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18] 하지만 당시 사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고, 무엇보다 단두대의 구조상 사람을 바로 눕히기가 쉽지 않다.[19]

5. 평가

끝나지 않는,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극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 여론에 퍼져 있던 대부분의 평판은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의 프랑스 왕국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 하지만 시대가 원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비극이었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절대왕정 체제의 왕들은 주로 새로 부상한 제3계급인 부르주아[20][21]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했다. 대혁명 당시 프랑스에서도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료 중 90% 이상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두고 "이미 국가를 사실상 장악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대를 한 세기 이상 착각한 이해이다. 오히려 이 시기 국왕과 부르주아 계급은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귀족(영주), 교회 등 중세 이래 서유럽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다른 권력구조들을 억누르려 시도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즉, 국왕의 행정부와 사법부 대부분을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 장악했다는 것은 국왕이 대귀족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시민계급 출신의 관료들을 등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장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정작 비슷한 시기 서유럽의 다른 절대군주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여 이들을 통해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절대 군주권을 강화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왕이 몰락한 중세적 귀족계층의 마지막 흔적이자 형식적 수장 비슷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은 대혁명에서 한참 뒤, 근대에 진입하고도 한참 시간이 흘러 부르주아 계층과 귀족 계층의 대립이 결국 부르주아 계층의 완승으로 끝난 이후의 시기에나 어울리는 설명인 것. 하물며 프랑스 혁명 무렵의 시기라면 국왕과 부르주아의 동맹관계에서 더 우세한 파트너는 국왕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사악한 왕과 사치스러운 왕비가 벌을 받은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부질없지만, 반대로 '이미 부르주아 계층이 모든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국왕 부부의 저항따위는 부질없는 것이니,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부족이나 잘못을 탓할 일이 아니다' 식의 이해 역시 지나친 것이다. 루이 16세 문서등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만 루이 16세(그리고 군주정의 특성상 그 국정 파트너인 왕비 앙투아네트)에게는 '자신들에게 충분히 유리하게, 또는 최소한 불리하지는 않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내리칠 칼날로 만들어버린 정치적 역량 부족 및 오판이 분명 있다. 이 문단 첫머리에서 앙투아네트를 '왕정 시대의 왕비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나, 시대가 요구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고 평가한 것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 중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22][23]는 그녀가 무개념이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한 구절인데 마치 왕비가 한 것인 양 악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민중의 아픔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혁명파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민중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한 수단이였다.

프랑스 대혁명 발발 4년 전 일어난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내세운 희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도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를 양산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출신이 좀 수상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장관 자리를 노리고 왕비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백작부인은 어느 날 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왕비를 닮은 한 창녀를 대역으로 삼아 추기경과 가짜 왕비의 밀회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추기경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백작부인은 자선사업에 쓴다고 속여 추기경으로부터 여러 차례 돈을 받아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주문하고, 왕비의 친필 사인이라고 믿은 보석상은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보낸다. 만기일까지 돈이 입금되지 않자 보석상은 왕비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목걸이는 이미 백작부인의 남편이 가로채 영국 런던으로 빼돌려진 뒤였다. 창녀는 왕비의 대역을 자백했고, 가짜 편지를 쓴 라모트 백작부인은 태형(笞刑)에 처해진 후 양쪽 어깨에 ‘도둑(voleuse)’의 첫 글자인 v 낙인이 찍힌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없음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공식 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신문과 팸플릿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여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당시 팸플릿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 굶주린 괴물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왕비는 온갖 방탕한 쾌락에 몸을 내맡긴 색정광이 되어 있었다. 이성 간의 섹스는 물론이고 대공 부인들이나 사촌 자매 등,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섹스 스캔들은 인류 문명의 금기인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어릴 때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제프 2세에게 처녀성을 잃었고, 프랑스로 시집 온 후에는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패륜(자신의 8살 난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근친상간 루머는 결국 1793년 10월 12일, 국민 공회에 불려 나온 날까지 그녀의 주요 혐의 중 하나에 이르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흰색의 헐렁한 평민복을 입었고, 신발은 해졌으며, 흰 머리칼은 목 근처에서 덤벙덤벙 잘려져 있었다. 38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매에는 아직 왕비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왕비는 미동도 하지 읺고 국고 탕진, 내란 음모, 적과의 내통 등 자신의 혐의 내용을 듣고 있다가 8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마지막 죄목이 낭독되자, 한순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청중석의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여러분, 이 말이 믿겨지시나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청중도 술렁였다. 비록 왕비에게 적대적인 평민들이었고, 그만큼 왕비에 대한 동정조차 큰 위험을 내포하는 시대였지만, 많은 여성이 경악하여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왕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누군가 내 말을 수긍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절망적인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나흘 뒤 그녀는 혁명광장[24]에서 군중의 환호 속에 목이 잘렸다.

또 허영심이 가득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지 그녀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예산 중 1/10에 불과했다. 다만 시기가 워낙 시기였던지라.[25] 나폴레옹의 전기를 쓴 프랭크 맥클린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황후 시절 사치에 쓴 돈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 있던 기간의 10배가 넘었다고 꽤 신랄하게 촌평했다.

후대의 연구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불행과 저울질해볼 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평했다. 다만 프레이저가 역사학자가 아닌 전기작가이며, 영화 <앙투아네트>를 두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할 정도로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

5.1. 정치적 측면

일단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실로,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프랑스의 왕비이긴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특수한 배경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30년 전쟁으로 황제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자리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이 대체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프랑스는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동맹의 증표로 맺어진 것이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의 혼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26]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새롭게 나타난 공동의 적을 맞아 손잡긴 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루이 11세부터 수 백년 동안 계속되어 온 갈등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깊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 여론은 결혼 초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루이 16세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며 그대로 굳어졌고, 그 후의 마리는 악의적 루머의 희생양이 되게 된다.

결국 평생 "오스트리아 스파이"나 "오스트리아년"[27]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고, "루이 16세를 조종하여 프랑스보다는 친정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에 가까웠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큰오빠 요제프 2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1세가 황제라곤 하나 사실상 데릴사위이자 허수아비인 바지사장이고, 앙투아네트의 들도 하나같이 남편과 권력을 둘 다 손에 잡고 휘둘렀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에서 남편을 잡고 휘두른다는 이미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제로 따르는 편이었다. 혁명 전의 치세에서 루이 16세는 아내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막았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정치에 무관심했다. 애초에 당대 왕비들은 정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긴 했지만,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예외 사례들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별나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점차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내리기에 곤란한 감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왕당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웅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왕당파들에겐 거의 성녀와도 같은 완전무결한 여성으로 여겨졌다.

왕당파였던 미라보 백작과 손을 잡고 신권과의 타협을 모색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연계해 군사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은근히 혁명 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에서 왕실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비싸져서 못먹게 된 밀가루 대신 값싼 감자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학교를 열어 지원하고, 자식들에게 빈민가를 보여주거나 빈민들을 구휼하는 일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다. 후기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슈미즈 아 라 렌도 전성기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와 비교하면 많이 단순해졌는데 이는 사치로 인한 비판을 덜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20세기의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 전에 순수했던 이미지가 혁명을 겪고서 강건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신체적·정신적 한계가 뚜렷한 바, 차라리 그녀가 혁명 전에 이렇게 성장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과감성과 엄정함으로 나라를 개혁시킨 어머니, 언니들과 비교하면 이러한 선행은 도움이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평범한 황녀이자 왕비로 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어머니, 언니들이 특수한 거고 이 정도가 발상의 한계인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허나 루이 16세가 왕가의 입지를 크게 악화시키는 일을 저지르는데, 일명 바렌 사건이라고 한다. 1791년 6월 당시 국왕 일가는 파리에 거의 억류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혁명파와의 의견차를 좁히는데 실패하고 유일한 협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라보마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이 장인 사르데냐 국왕을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고, 루이 16세의 숙모 2명이 프랑스 밖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격앙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국민의회는 섭정으로 루이 16세의 가장 큰 경쟁자이며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을 선출했다.

그러자 왕태자 루이 샤를의 왕위 계승마저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미사에 참례하러 떠나는 왕의 마차를 성난 군중들이 둘러싸는 사태가 발생했고, 국왕 호위대조차 혁명 세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국왕 부부가 영웅적인 용기를 지녔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국왕 일가는 파리를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했으나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한 탓에, '바렌'이라는 마을에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가거나 국경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할 계획으로 여겨졌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레오폴트 2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제네바를 탐내는[28]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지지를 얻으라든가, 스페인에게 나바라 지방의 이권을 양보하고 지원을 받으라든가 등, 편지를 통해 마리에게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막상 자기 자신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알자스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가, 왕실에 우호적인[29] 로렌 지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에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일 경우,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라보의 사망 이전까지 급진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의 중도파를 왕당파가 포섭해 나가는 형국이었으나, 미라보 사후 세를 불려나가던 자코뱅 당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결국 루이 16세의 몰락의 단초가 되었고, 왕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이 왕비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지도 크게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온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 남편이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하자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로 알려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무비판적인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30]

그녀는 1793년 1월 혁명파에 의해 남편이 죽고 나서 유폐되어 있다가, 재판을 받고 10월에 반역, 국고낭비,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다. 집행자는 18세기의 유명한 망나니샤를앙리 상송으로, 젊은 시절 바리 백작부인과 만난 적도 있으나 나중에 그녀를 처형한다.

5.2. 능력

비슷하게 정략결혼을 했지만 뛰어난 통치술을 보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아말리아와 다르게 고작 14세 때 프랑스로 시집 와서 태자비가 되었기 때문에 모국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으며 결혼 후 고작 4년 뒤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승하해, 10대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로서 성숙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남매를 낳고 정치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11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창 유아기일 때에는 7년 전쟁을 치르느라 특히 더 바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교육 담당에게 맡겨두기만 하고 일정 기간마다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양육할 시간이 있었다 한들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그녀는 자식들을 심하게 편애하는 어머니였고 때문에 사이가 좋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거의 일평생 사이가 매우 나빴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31] 아버지 프란츠 1세는 그저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예스맨 아버지여서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집안 단속에 신경 써야할 부모가 무관심하니 서로 총애를 얻으려 싸워대는 언니 오빠들과 경쟁하기에 가장 어린 막내딸이었던 앙투아네트는 모든 면에서 방치 상태였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도 춤과 음악 부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낮은 집중력에 공부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어서 유년기의 교육은 큰 성과가 없었으며, 특히 결혼이 정해진 뒤에도 프랑스의 왕세자비이자 차기 왕비로서 정말 필요했던 정치와 처세 부분의 교육에선 완전 0점 수준이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32] 결국 막내딸이 일자무식 상태임을 알고 뒷목 잡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교육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 앙투아네트가 떠나기 전 수 일간 단둘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다.[33] 떠나기 전에 마리에게 매일 읽어보라고 주는 지침서를 준 것은 물론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 하루를 전해 듣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교육하려 했다.[34]

문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부 문제도 그렇지만 너무 순진하고 사람관계에 솔직한 성격이다보니 궁정 내에서 행동도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걱정을 더 사게 만들었다는 것. 먼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고모 3명(루이 15세의 딸들 아델레이드, 빅투아르, 소피.)의 말을 듣고 국왕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여 국왕의 화를 일으킬 뻔 하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화야 말할 것 없고 자신이 하는 말을 다 들어주고 늘 조용하게 있던 남편 루이 16세를 마리가 '어리석은 사람', '바보' 등으로 부르는 걸 측근으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해 듣고는 '왕비가 존경하지 않는 왕이 과연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행동부터 고쳐라.'의 논조로 딸을 꾸짖기도 했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루이 16세와 관계가 지지부진해 아이가 생기지 않는 데 대해 우리말로 치면 '이번에도 대자연이 찾아왔다'는 식의 사생활 사찰성 보고까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올라갈 정도여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5.3. 사치?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왕비가 되고 사치도박, 유흥으로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호화스러운 생활도 했었다. 도박을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해서 빚을 많이 지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비생산적인 퇴폐문화일 순 있지만, 이는 딱히 그녀가 방탕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당대의 귀족 문화에 어울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사교 활동이었다.도박을 위해 빚을 졌다는 것 역시 현대인이 보기에는 막장 도박중독자로 보이겠지만, 당대에는 신용카드 결제 비슷한 감각[35]으로 빚을 지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제 때 갚기만 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박에서 자주 졌다는 것도 당대의 맥락을 살피면 이해되는 부분인데, 당시에는 "귀족이라면 잃을 때 적당히 잃어주면서 놀이 자체를 즐겨야지, 돈을 따려고 정색하고 달려드는 것은 천박하다"는 인식[36]이 있었다.

따라서 당대 유럽 귀족 사회에서 적당한 사치와 유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유럽 귀족 중에도 마치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존경을 받거나 소위 '찐따' 취급을 당하거나 양자택일이었다. 이것 역시도 현대와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국왕 부부 중 남편인 루이 16세는 최상류층에서 어리숙한 바보 취급 당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국왕 부부의 '적당한 사치'가 필요했다. 사실 이 '적당한 사치'의 기준이 애매하기는 하다. 다시 현대의 예를 들어 '사회생활을 위해 적당히 놀 줄 안다'의 기준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답이 궁색해진다. 그저 본인의 형편과 주변 시선에 맞게 해야 한다는 원론적 말만이 가능할 뿐이고, 재벌, 연예인의 '적당한 사치' 기준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지층이냐 반대층이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간다. 국왕 부부의 '사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중세~근세 유럽 사회에서 근검절약, 또는 수입에 맞춰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귀족의 미덕이 아니었다. 수입에 지출을 맞추는 것은 소시민의 미덕이었고[37], 반대로 귀족에게는 귀족 신분에 어울리는 과시적인 지출을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귀족 중의 귀족'[38]인 국왕도 "왕답지 못하고 좀스럽게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사치 로 왕의 권위를 세우고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39]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대통령 정도 되면 각종 행사와 의식주에서 격에 맞는 의전과 대우를 받듯이, 전근대 신분제 국가의 군주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40]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는 당대, 그리고 동급의 귀족 사이에서는 심하지 않은 편에 속했다. 왕실 기록에 따르면 루이 16세 즉위 후 1789년까지의 왕실 소비 금액은 대략 2억 2천만 리브르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의 10%도 쓰지 않았다.[41] 약 100만 리브르에 가까운 금액인데, 당장 왕의 동생이었던 프로방스 백작만 해도 궁전 개축에 100만 리브르가 훨씬 넘는 돈을 썼을 정도니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검소했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셈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미국 독립 전쟁에 투입된 군비가 10억 리브르에 달하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100만 리브르 정도는 그렇게 과한 소비는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 사이에서의 정설이다. 물론 100만 리브르는 당시 금 가격을 바탕으로 환산했을 때 대량 1천 2백억에 달하는 거금이니 아무리 '상대적으로 사치를 덜 했다'도 반대층 입장에서는 '아무튼 사치를 하긴 하였다'가 되어버렸다.

5.4. 악명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 일컬어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라며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여기서 따와 나쁜 소문을 퍼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덧붙여지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일삼는 멍청이'로 폄하된 것이다.[42] 여담으로 사실 이와 비슷한 말을 정말로 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바로 서진의 2대 황제였던 진 혜제 사마충(司馬衷)[43]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곡식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44])"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자치통감에 실려있는 사실이다. 다만 사마충은 백치라 판단력이 흐렸으며, 실제로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추측도 나온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중국에서 나온 이 이야기가 대륙을 횡단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인 것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45]

사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으로[46] 기여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이 사건에 앙투아네트가 관여된 것은 아니었지만[47], 대중들은 진범은 앙투아네트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만 믿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유죄 선고를 받자 일반 민중들의 여론은 더욱 격앙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혁명 재판에서 확인해본 결과, 무고가 맞았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 갖다 붙였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등 주로 18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야설에 귀족, 특히 왕과 왕비를 많이 갖다 붙였는데, 당연히 주적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많은 악성 창작자들의 펜 끝에 능욕당했다. 루이 16세의 경쟁자였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뿐만 아니라 상속후계자였던 두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도 그러한 소문을 부추겼으며 프랑스 왕실을 증오했던 혁명가들도 그런 식의 야설들을 마구 써내서 출간했다.

당대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는 루머에 불과하며, 연구에 의하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튼 동성애자였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고귀한 희생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봉건군주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전제군주정에서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곧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과 왕비의 사이가 소원하고 왕비가 무도회장을 누비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건 루이 16세가 부부관계를 기피하였기 때문으로, 그에게 일종의 성기능 장애가 있었다는 소문, 정확히는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루이 15세가 특별히 의사를 불러 루이를 진찰하게 했고, 나중엔 친정 오빠 요제프 2세가 매제인 루이를 설득하러 프랑스까지 출동했다. 둘만의 대화라 모르지만 요제프의 말빨이 먹혔는지 결혼한 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마리는 아이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또 신혼 시절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루이는 사냥이나 대장간에서 힘 쓰고 나면 밤에 충분히 자고, 남편이 잠든 시간에 마리는 파티에서 춤 추고 노느라 진이 빠져 아침이 되면 거의 기절해 잠들었다. 아내가 자는 동안 해 뜨면 루이는 다시 사냥이나 대장간으로 출근, 마리는 밤에 나가 아침에 들어와 둘 다 힘을 다른 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은 루이의 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과 앙투아네트의 (조작된)퇴폐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다. 보다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갖출 것을 타이를 정도로 당시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는 그녀 이전 역대 프랑스 왕비들보다 적었으며, 전체 프랑스 재정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새 발의 피였다.

그녀가 이렇게 심한 악명과 루머에 시달렸던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실 일원 중 가장 비방하기 좋은 위치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부인인지라 국민들에게 처음부터 인기가 없었고,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행실과 딱히 상관없이 원래 적 취급을 받았으며, 몇 가지 성격적 특징이 당시 프랑스 궁정생활과 역효과를 일으켜 자기 편이어야 할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1번째로 그녀는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간첩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베르사유 궁전,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모조리 뒤집어 엎어졌고, 그 중에는 당연히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나 오빠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그리고 자매들 및 친족들과 교환한 편지도 있었다.[48] 정치외교학과와 사학과에서 동맹의 역전이라 불릴 정도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외교 관계가 급반전+급진전된 18세기 중후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2번째로 왕비를 그저 애 낳는 기계 정도로만 취급하여 뒷방에 처박아놓고는 공식적으로 정부(情婦)를 임명하여 궁정의 꽃으로 삼았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앙리 4세 이래 전통적으로 호색한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별로 밝히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기준으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국왕' 정도의 취급이었겠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이런 행동은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에게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49], 반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기를 죽이는 몹쓸 여자"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50][51]

3번째로 당시까지 프랑스 여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의 정부를 씹어대는 것이 취미였고, 스트레스 풀이용 범 국민 스포츠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에게는 정부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유로는 비난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프랑스 국민들은 없는 정부 대신 왕비를 씹어댔다.

4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비들과 비교하면 매우 활동적이었고, 궁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52]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상"에 어긋나는 모습이 되어 궁정의 보수파들에게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근엄한 고위 귀족들을 고리타분한 인물들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나이 또래의 인물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5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사 행정 문제 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에 오르자마자 시녀, 측근들을 새로 뽑았는데 문제는 뽑은 시녀들이 프랑스 사교계를 지배했던 대귀족들이 아닌 랑발 공비[53][54]와 욜랑드 드 폴리냐크 백작부인 등 신진 세력들이었다. 특히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원래 작위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으나, 비슷한 나이의 왕비와 곧 친구 사이가 되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던 왕손의 가정교사 자리에 '겨우' 백작부인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린 것은, 귀족들에게 또 한 번 큰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6번째로, 측근들에 대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총애였다. 전술한 신분과 시누이와 시아버지의 도움으로 유복했던 랑발 공비와 다르게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베르사유에 출입할만큼의 유복한 귀족이 아니다보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연간 50~10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욕이 없던 랑발 공비[55]과 다르게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매우 약삭빠른 여자여서 연금과 대저택, 각종 선물 따위를 가능한 한 우려내려 들었다. 먼저의 조치로 고위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데 이어 이러한 처분은 대중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56]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먹인 언론 싸움. 당시 프랑스인들은 언론의 힘을 깨달아가고 있었는데,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초기 상태였던지라 언론의 힘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파괴력에서 더욱 강력했다. 이미 루이 15세 때부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정적을 소재로 한 음란물과 비방 서적을 출판해 댔고,[57] 이 와중에 짭짤한 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야설들은 기본적으로 인격모욕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수간, 윤간, 혼음, 강간은 기본으로 묘사되는 막장물이었고, 여기서 여주인공으로 당첨된 것이, 주는 것 없이 미운 마리 앙투아네트. 남주인공은 로앙 추기경[58]이나 훗날 부르봉 왕조 마지막 왕이 되는 아르투아 백작(샤를 10세),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한때 고자 소문이 돌 정도로 이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주로 네토라레 당하는 역할로만 나왔다.[59]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대 프랑스에서 이런저런 악성루머에 시달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악성 루머들이 꽤나 오랜 세월 동안 사실(史實)로 둔갑했던 것은 장폴 마라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과격파가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딴 과자가 존재한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름을 딴 케이크가 있었다는 거지, 그녀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자. 당시 귀족사회에는 왕족을 비롯해 귀족의 부인이나 정부들까지도 각각 자신의 이름을 딴 케이크(혹은 디저트)를 가지고 있었다. 호화로운 만찬이 끝날 무렵 그것을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교계에서의 위엄이었으며 그녀들의 긍지 높은 자기 표현이었다. 특히나 왕비의 이름이 붙은 과자는 왕비 본인이자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신의 상징이었다. 왕비의 이름을 가진 과자들은 '비스켓 글라스 앙투아네트', '샤를로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출처][61]

6. 가족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ntonia of Austria)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Francis I)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카를 6세
(Charles VI)
레오폴트 1세
(Leopold I)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6.2. 자녀

<rowcolor=#373a3c,#ddd>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테레즈
(Marie-Thérèse, Duchess of Angoulême)
1778년 12월 19일 1851년 10월 19일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1남 프랑스의 도팽 루이 조제프
(Louis Joseph, Dauphin of France)
1781년 10월 22일 1789년 6월 4일
2남 루이 17세
(Louis XVII)
1785년 3월 27일 1795년 6월 8일
2녀 소피 공주
(Princess Sophie)
1786년 7월 9일 1787년 6월 19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e_Antoinette_and_her_Children_by_%C3%89lisabeth_Vig%C3%A9e-Lebrun.jpg
이 초상화는 당대의 유명 여성 화가이자 앙투아네트의 화가라 불린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룬의 작품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기 2년 전인 1791년의 작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그려진 집단 초상화이나 당시 연속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왕비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장남 루이 조제프가 가리키고 있는 요람은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의 것으로, 여기에 누워 있던 소피가 죽었기 때문에 검은 천이 둘러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엔 차녀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최종본에서는 지운 것이다.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7. 성격

근래까지는 혁명이 정당화되려면 왕실이 악의 축이 되어야 했기에 남편과 도매금으로 묶여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져있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 왕비치고는 오히려 매우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64]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실제로 루이 16세가 사냥 중에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간호해주고 모든 손해를 물어주었고, 후술했듯이 고아들을 돌봐주는 등 훈훈한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우아함으로 대표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취향은 불운하게도 기존 프랑스 궁정환경과는 잘 맞지 않았다. 당대의 프랑스 궁정은 베르사유 궁전과 루이 14세의 영향으로 누가 더 사치스러운지 겨루기 식으로 대단한 사치를 부렸다. 특히 왕을 포함한 왕실 식구들의 일과는 전부 공적 영역이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왕의 식사를 포함한 모든 일상을 지켜보며 하늘처럼 우러러 보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왕궁에는 매 시간마다 왕비가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명 '투알레트'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는 귀부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고, 하나하나 역할이 정해져 있었기에, 이 때문에 왕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과정도 그냥 옷을 갈아입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담 다투르가 치마를 보여주고 드레스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주고,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녀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등등,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러한 까다로운 과정들은 귀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유인책인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왕족의 눈에 들 수 있는 하나의 영광이자 특권이었고, 그러다 보니 세세하게 에티켓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수백 명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이 구경거리가 되는 삶은 왕족에게도 고된 일이라, 루이 15세의 딸들도 이런 자리에는 꼭 참석했지만 불편해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공식 행사에서만 굉장한 에티켓을 요구했고 할 일만 잘 하면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였던 오스트리아의 분위기와 프란츠 1세의 방침으로 비교적 가족적이고 소박한 유년시절을 보내왔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생활은 전혀 없다시피 하고 하나하나가 에티켓에 따르는 루이 14세 때부터 형성된 프랑스 궁정의 시시콜콜한 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다보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르주아 출신인 의상 전문 디자이너로즈 베르탱을 고용했고, 투알레트를 아예 생략해버리고 아침마다 카비네(전용탈의실)에 불러들여 로즈 베르탱과 시녀장 등 최소 인원만 두어 옷을 골라 입었으며,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왕비의 수행원들이 잘려버린다. 이를 보다 못한 노와이유 백작 부인 등 여러 사람들이 충고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투알레트를 하는 대신, 로즈 베르탱이 동석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귀족들이 "부르주아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여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루이 16세에게 프티 트리아농 궁을 요양처로 받은 뒤에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자기 취향으로 꾸몄고,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주로 이곳에 친한 사람들만 함께 머물며 베르사유 궁정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원생활에 환상이 있어 프티 트리아농 궁에서 오리, , 를 키우고 세브르산 고급 도자기에다 우유를 짜는 등,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도교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프티 트리아농 궁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던 당대 생각과는 달리 소박했다. 방이 8개 정도 되는 건물로, 현대 기준으로도 부잣집 별장 정도의 크기이며 내부도 섬세한 장식과 전원풍의 우아함을 간직한 형태이며 사치스럽기보다는 편안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증축 공사도 하지 않았고, 바리 백작부인이 남긴 가구를 물려받아 사용하는 등, 쓸데없이 건물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실내장식에 거금을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는 건설 비용이 20만 리브르로 당대 왕실에서 건물 하나 개조하는 데 사용한 돈의 일부밖에 안 썼다. 물론 당시 2개의 후작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프랑스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됐던 라파예트 후작의 뒤모티에 가문의 연수입이 23만 리브르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긴 하다. 현 가치로 환산하면 프티 트리아농의 리모델링 비용이 대략 285억이다. 참고로 트리아농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했던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곳이다.

하지만 프티 트리아농에 틀어박혀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연회를 열고 살아가는 왕비의 모습은 '일국의 왕비가 왕비로서 규정된 의무를 방임한 채, 그저 소수의 친한 측근들과 숨어서 놀기만 하는 게으름'으로 비춰져 "로트리시엔(오스트리아 년), 외국인이어서 저런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발 더 나아가 프티 트리아농에 입회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귀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낌으로써 “왕비가 자기와 친밀한 몇몇을 챙겨서 권력과 이권을 나눠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순수하게 왕비를 걱정해준 랑발 공비를 제외하고, 왕비의 측근들은 숨도 쉴 수 없던 에티켓에 지쳐있고 타국에서 온 외로워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했기에, 이런 모습은 더더욱 귀족 사회의 반발을 나오게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왕비의 안일한 태도는 당시 귀족 계층에선 왕실에서 귀족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보였고, 왕비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인위적인 이상향에 빠져들게 됨으로써 정작 중요한 바깥 민중들의 삶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왕국에서 왕비란 항상 귀족 사교계 중심에 서서 사교계 전체를 두루두루 살피고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그 중심에서 도피해버렸으니 이런 불만이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야 단지 나이가 들수록 허례허식 심한 베르사유 본궁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에 지쳐서 조용한 프티 트리아농 궁에서 휴식하며 살고자 그런 것뿐이었겠지만, 당시 왕비의 행동은 프랑스 왕실에 대한 지지 기반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8. 성품

과장이 덧붙여졌겠지만 그녀의 매력은 외모보다는 왕족 특유의 타고난 우아함과 예술성에 있었다고 한다. 나긋나긋한 몸동작과 기품은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웠으며 뛰어난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패션 센스도 자연스러우면서 뛰어나서 프랑스 궁정 뿐 아니라 전 유럽의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모든 유럽 여성들이 퐁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스타일을 따라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된 이후부터는 그녀가 패션의 선두주자가 된다.

감자가 "악마의 음식"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보편화 되지 못했을 때, 감자 꽃을 모자에 꽂으면서까지 백성들의 감자에 대한 호감을 얻으려 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취미 중엔 프랑스식 농사 짓기[65]도 있었다.

감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면, 파르망티에라는 사람이 감자를 보급하여 백성을 먹여살리기 위해 왕과 왕비에게 호소했다. 이에 왕과 왕비는 제빵학교를 열어 백성이 값싼 감자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허락했다. 문제는 프랑스 민중이 "감자빵 말고 밀가루빵을 달라!"라고 울부짖는 등, 폭등하는 밀 시세에도 불구하고 밀가루빵만을 원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66] 앙투아네트는 아예 빵집학교를 열어 서민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맏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가 어린 시절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떼를 썼을 때는, '궁전 밖에는 많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주는 어린 마음에 꽤 서운했던지 단단히 토라져서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현대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라를 망친 사치스러운 악녀의 이미지에 거리가 있는 성품이었다.

혁명 이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정치적이며 자선적인 삶을 견지했고, 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입헌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내용만 봐도 알겠지만, 그녀가 왕비가 된 직후에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환경이었고, 사치와 도박을 하긴 했으나 왕비가 되었으니 다른 귀족들과 사교 생활로 어울리느라 같이 한 것이었다. 궁정에서 할 일이 사치와 도박 아니면 없어서기도 했지만 임신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다가 엄청나게 날려먹은 것도 사실이라 당대의 파티 걸 이미지에 일조했다. 정작 그 스트레스의 원인 루이 16세는 자기 때문에 욕받이가 되고 있는 아내를 위해 돈줄이 되어주었다. 그것을 전해들은 친정에서는 잔소리 편지를 통해 크게 재교육시켰고 마리가 아이를 낳고 양육에 집중하면서 이런 생활도 그만두었다. 사실 따지자면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과하지 않으면 사치는 허용되었고 그게 당연한 시대다. 당장 다른 왕족/귀족에 비하면 사치한 축에도 못 낀다. 저 때 프랑스 귀족들은 누가누가 더 부유하고 사치를 잘하는지 겨루던 시대였다.

약간 천연적인 면도 좀 있었다. 바렌 사건 당시 목숨에 위협을 느껴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친정으로 튀어야 했던 상황에서 마차를 눈이 잘 띄는 초록색으로 도색해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아직 빤쓰런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 설레발쳐서 왕실 물품이나 옷들을 미리 빼돌리거나 마차에 아이들을 위한 각종 생필품을 뭉텅이로 챙기는 눈치없는 짓을 하여 주변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다만 초록 마차는 기각되었고 물품을 빼돌리는 건 들키지 않았으며 장기간 망명길에서 생필품을 챙기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에 놀랍게도 각종 철없는 행동이 그리 문제되지는 않았다.

9. 문화

전체적인 센스가 좋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부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루이 14세, 루이 15세 시대와는 달리 왕비 본인이 유행을 이끌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궁정에서 확고한 자기 취향을 고수했으며 항상 유행의 최첨단에 섰던 패션 스타였다. 당대 패션 리더이자 문화 선진국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타일은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 갈량의 판화에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궁을 거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먼저 마리는 즉위 직후 로즈 베르탱이라는 평민 출신 드레스 디자이너와 레오나드라는 개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따로 두어 아침마다 2시간 넘게 직물 샘플과 디자인을 검토하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 중에서 마리는 깃털과 섬세한 레이스를 좋아했으며 머리를 벌집처럼 높이 틀어올리는 푸프(pouf)와 벼룩색 드레스[67], 편안하며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세 갈레 퍼브의 로브 아 라 폴로네즈 드레스, 편안하고 소박한 모슬린 드레스도 마리가 크게 유행시킨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영향으로 마리 또한 음악,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68][69] 프랑스 궁정에 스스로 최신 오페라와 가장 무도회, 연극을 도입했고 어떤 날에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짜고 배우가 되어 출연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재능 있는 화가를 보는 능력도 뛰어나,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동갑내기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을 궁정화가로 발탁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데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벽이 높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70]

또한 그 예술적 안목을 설계와 인테리어에도 적용해 베르사유 궁전의 인테리어를 새단장하기도 했고, 특히 그녀가 설계한 프티 트리아농 궁전[71]은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문화의 극치로 평가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 로코코 문화는 절정을 이루었다. 이처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평가는 로코코의 여왕.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미있게도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시작된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에서 축소형 농장을 만들어 시골풍 옷을 즐겨 입고 연극에서 젖 짜는 처녀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옷이 바로 슈미즈 드레스(영국에서는 퀀즈 가운)이었다. 이 슈미즈 드레스는 무슬린, 면직물로 만들었으며 네크라인은 깊고 넓게 파여 여러 층의 러프 칼라를 달았고 소매는 풍성한 허리통을 중간 중간에 한두 번 오므려서 부풀린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속에 파니에를 입지 않고 스토마커,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지 않아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던지리 이 복식이 일반에서도 퍼져서 유행하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 엠파이어 드레스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손에 장미 1송이를 들고 밀짚모자와 흰 모슬린으로 만든 슈미즈 아 라 렌을 입은 왕비의 초상화를 보고 대다수의 귀족들은 "이게 무슨 꼴이냐"며 심한 혹평을 받는 등 예상외로 반응이 안좋았던지라 [72]이 그림을 비공개 처리하고 국산 실크 산업을 독려하고자 국산 실크로 만든 드레스에 그림을 같은 구도로 재현한 위에 나오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게다가 개인 위생을 중요시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신성 로마 제국(현 오스트리아)은 목욕이 일상화 되었던 지라 마리도 프랑스 왕국에서도 이 루틴대로 1주일에 3번 목욕을 했으며 아직 목욕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프랑스에도 크게 영향[73]을 준다. 다만 이때의 목욕은 지금처럼 혼자서 옷을 벗고 하는게 아닌 주변의 시녀들과 왕비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있던 지라 마리는 영국산 리넨 소재의 목까지 단추가 채워진 얇은 가운을 입은 상태로 욕조에 들어가고 백리향, 마조람, 굵은 소금이 포함된 허브 혼합물 또는 조향사가 직접 만든 아몬드, 잣, 습지아욱 뿌리, 백합 구근을 담은 향주머니를 입욕제로 사용했다. 목욕을 마친 후에는 전담 시녀들이 새 시트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싸서 몸을 말리고 새 슈미즈와 가운을 걸친다. 그 뒤 마리는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으며 아침에 목욕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침식사가 욕실에서 제공되었다.

욕조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온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냉수용이었다. 이 욕실은 1782년 베르사유 궁전의 왕비 구역에 만들어졌으며 바닥에는 특유의 흑백 모양이 있다. 1788년에는 욕실을 개조하고 나무 패널을 설치했다. 1830년대에 해체되었으며, 1984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 서양에서는 이 욕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집 욕실 디자인으로 꾸미는 사람들이 있고, 그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욕실 디자인을 적용한 프랑스의 한 호텔도 있다.

향수에도 관심이 많아 전담 조향사 장 루이 파르종(Jean-Louis Fargeon)[74]를 두어 여러 종류의 향수를 애용했으며 처형 직전에는 우비강(Houbigant) 향수를 세 통이나 비웠다. 이전의 프랑스 귀족들이 체취를 가리기 위한 동물성 향수를 사용한 것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은은하고 식물성 향수를 주로 사용했고 전술한 입욕 습관과 깨끗하고 하얀 피부 덕분에 청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주었다.

10. 매체

프랑스의 왕비에서 비운의 결말을 맡은 드라마틱한 생애와 당대 악녀라는 오명과 다르게 사실은 온화하고 착한 왕비라는 등 여러 재조명이 되는 인물이란 점에서 여러 매체에서 끊임없이 다뤄지고 있다.

10.1. 소설

10.2. 영화

10.3. 드라마

파일:marie antoinette(canal+).jpg

2022년 프랑스-영국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로 영화 더 페이버릿의 각본을 맡은 데보라 데이비스가 대본집필을 담당하고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는 독일 여배우 에밀리아 슐레가 맡았다. 실존인물 자체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만큼, 바로 옆나라이지만 사실상 같은 문화권 출신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이런 현실 반영을 한 듯 하다. 이전에 카날 플뤼에서 제작한 드라마 베르사유의 후속작[82]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배경은 프랑스지만 극 중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영어로 제작되었다. 이전작처럼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듯. 게다가 이전작처럼 똑같이 실제 베르사유 궁전에서 촬영·진행했다.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땐 실제 문화재인 곳에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는 게 이상해보일 수는 있지만 원래 베르사유 궁전은 관광객이 모이지 않는 매주 화요일날 촬영 허가를 굉장히 잘 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10.4. 뮤지컬

10.5. 만화

10.5.1. 베르사유의 장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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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애니메이션

10.7. 게임

11. 기타


파일:Marie-Antoinette Gruppe_q80.jpg

[1] 남편인 루이 16세의 키는 193cm로 키가 39cm나 차이가 난다.[2] 루이 16세(당시엔 프랑스의 도팽 루이 오귀스트 왕자)와 혼인한 이후의 칭호.[3] 루이 16세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의 칭호.[4] 루이 16세와 함께 나바라의 국왕과 왕비에서 폐위된 이후의 칭호.[5] 카페 부인이란 의미로 왕비직에서 폐위된 이후의 칭호. 남편 루이 16세도 국왕에서 폐위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칭호 다 빼고 루이 카페란 본명으로 불렸다.[6]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이다.[7] 요제프 1세의 딸로 요제프 1세의 동생 카를 6세의 딸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요제파가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루이 16세의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이다.[8] 또한 친할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이 루이 14세의 조카이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 기준으로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와 8촌이고 남편 루이 16세는 10촌 손자가 된다.[9] 특히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아말리아와 제일 친하게 지냈으며 이 둘과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또한 14살이나 많은 첫째 오빠 요제프 2세도 막내 여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우 아끼고 시집 간 여동생을 걱정해 직접 프랑스로 갔다.[10] 이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즉위 소식을 듣자 기뻐하는 주변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불안해하며 하느님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11] 실제 편지 사진이 남아있는데 앙투아네트가 쓰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편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12] 일부는 이 편지가 거짓이라며 앙투아네트는 독일어만 쓸 수 있고 프랑스어라곤 결혼시 배운 몇 마디가 전부라고 주장하지만, 14세에 시집 와서 23년을 프랑스 왕비로 살았는데 프랑스어를 못 쓴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오히려 앙투아네트는 독일에 있을 때도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익숙했고, 프랑스에 시집오자마자 그나마 쓰던 독일어도 전부 까먹었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국어부터 먼저 가르치고 모국어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제일 마지막에 가르쳤기 때문이다.[13] '짐은 그대들을 용서한다. 이후로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또는 '짐의 피가 프랑스 백성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였다고도 한다. 루이 16세가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는 "내가 죽더라도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마라" 를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14] 당시 혁명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은 사제는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정부에 충성하는 신부를 인정하지 않았다.[15] 원래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검은 상복만을 입고 있었는데, 혁명 정부가 "대중을 흥분시킨다"며 금지했기에 다른 옷을 입었다. 실제로는 가벼운 흰 드레스와 가장 좋은 구두를 신었기에 허름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그게 왕족의 최후에 어울리는 화려한 옷이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천대받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16] 바렌 사건은 큰 죄가 맞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친것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향이 있었던것도 맞지만 이조차도 현대 기준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도 참작이 가능한 배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바렌 사건이 아니라 아들을 강간했다는 끔찍한 누명을 어거지로 씌워서 그렇게 된것이기에 마리 앙투아네트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게 당연하다.[17] 그러니까 단두대의 칼날과, 그것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도록 했다.[18] 휴거를 다룬 모 영화에서 이 장면이 재현된다.[19] 다만 후대 나치 독일 시절 나치는 실제로 이렇게 사형을 집행했다. 팔바일이라는 독일식으로 소형화된 단두대는 사형수를 수술대 내지 들것처럼 생긴 틀에 벨트로 묶은 후 틀 째로 뉘어서 목을 잘랐다. 나치의 잔인성이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 단두대 항목 참조.[20] 오늘날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富)와 사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상류층을 뜻하지만, 그 어원은 중세 작은 도시(bourg)에 거주하며 상업수공업에 종사하던 평민, 즉 사제귀족 다음의 제3신분이었다. 중세까지 이들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0세기경 유럽에 자유도시가 생겨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이런저런 기록에 얼핏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했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와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한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덕분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 계급은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 계급이 되었다. 돈과 교양과 여가를 갖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에 이르러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1]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이란 현대적인 표현으로 "시민(市民)계층"이다. '기도하는 자'와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중세 유럽의 사회상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사, 군인이었던 이들이 제 2계급인 귀족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실질권력을 행사하고, 지식과 문화권력을 가진 사제들이 제 1계급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농민과 같이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제 3계급인 평민으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대한 부와 인구, 생산성이 집중된 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이 나타나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1~2계급이 아닌 평민이지만 도시에 집중된 역량을 기반으로 부와 지식을 갖춘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성안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라 불리게 된 것. 그리고 중세 이래 전통적으로 유럽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층은 이들 부르주아를 "그래봤자 너희는 평민, 우리의 신하일 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았지만 반대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이제 우리도 너희에게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추었는데, 너희에게 고개숙일 이유가 없다"고 기존의 질서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 이것이 근세 수백년간 유럽을 긴장시킨 기나긴 대립의 단초였고, 결국 여기서 도시와 부르주아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르주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대명사가 되고, 시민(市民/citizen)은 단순히 도시 거주자가 아닌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정치체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22] 프랑스어 원문은 브리오슈[23]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 행정명령으로 수백명의 무슬림이 공항에서 억류 당했을 때, 그들 일가의 초호화 생활이 비난 받았는데, 이때 이 말이 인용되면서 SNS에서 #letthemeatcake 운동이 불었다.국내 기사[24] 오늘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25] 비난 여론뿐만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7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가 뭐든 가리지 않고 지원해줬기 때문. 자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 참조. 게다가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계속된 전쟁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26]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자매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대부분이 부르봉 가문정략결혼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의 결혼 대상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반도파르마 공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등 부르봉 방계이고 부르봉 가문의 본국인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장가)간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다. 게다가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으니, 가히 마스코트라 할 만하다.[27] L'Autrichienne(로트리시엔)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사실 이 단어 자체는 그냥 평범하게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chienne'이란 단어가 '개(여성형)' 뜻이어서 사람들이 그 부분을 강조해 부르곤 했다고. 대충 '오스트리아 개년' 정도의 뉘앙스가 된다.[28] 제네바는 사보이아 백국 시절 사보이아 가문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제네바에서 대판 깨진 이후에도 대대로 이곳을 노렸다.[29]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전 로렌 공국의 공작이었던 프란츠 1세의 딸이기도 했다.[30] 일단 루이 16세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한 일이 아니며, 때문에 루이 16세가 반역죄로 처형된 반면 왕비는 무죄판결을 받았긴 했다.[31] 이는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남매간의 관계가 뒤틀리는 결과를 낳는다.[32] 실제로 에서 앙투아네트를 가르치던 가정교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했고, 이후 교육을 맡게 된 빈의 대주교도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과 기품을 가졌지만 집중력이 부족하다"며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했다.[33]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전까지 막내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과 나라를 위해 결정한 정략결혼이 막내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략결혼을 한 다른 딸들보다 마리의 결혼 내내 불안해하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보내는 날에는 바닥에 쓰러지며 통곡했다.[34]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도 장남 요제프 2세처럼 프랑스의 현실이 불안했던 걸 직감했는지 루이 15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메르시 백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잘 지켜 달라고 부탁함과 동시에 딸이 행복했던 나날은 이제 끝났을지도 모른다며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35] 카드 결제도 빚을 지고 물건을 샀다가 나중에 갚는 외상거래 행위의 일종이지만, 카드값이 밀리거나 하지만 않으면 특별히 문제있는 행위로 보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큰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신용이 있는 인물이라면 외상빚을 일단 달아뒀다가 나중에 정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36] 도박으로 돈을 따 가며 생활을 유지하는 건 몰락귀족이나 방탕한 파락호, 즉 돈은 없지만 직접 일하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다소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의 군인들도 봉급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런 도박사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뒤마의 삼총사나 포레스터의 혼블로워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귀족들이 "돈 있는 우리가 도박놀이 하면서 아득바득 돈 따가면 쟤들은 뭐 먹고 살라는 거냐?"는 의미에서 더욱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도박을 즐기기도 했다.[37] 이 소시민의 미덕이 도시 시민계층의 미덕으로 이어지고 또 부르주아지의 미덕으로 이어져 근현대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잡았다.[38] 이것이 중근세 시절 동양과 서양의 왕권의 본질적 차이이다. 유럽 군주는 귀족 중의 귀족이었던 반면, 동양의 군주는 귀족과는 차원이 다른 불가침의 존재에 가까웠다. 이는 예송논쟁에서 국왕은 사대부랑은 아예 다르다라는 논의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양의 군주는 근검절약을 한다고 해서 왕의 카리스마가 실추되지 않는다. 오히려 백성을 배려하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모범으로써 권위가 상승한다.[39] 루이 14세마리아 테레지아 등 절대군주들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같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과시하듯이 지은 것도 군주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물 건설 → 왕권 강화 → 세금 더 뽑아내기 → 건축 무한반복… 이런 식이었다.[40] 물론 유럽 사회의 왕실 분위기가 다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아내로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같은 경우엔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을 비롯한 프랑스 왕실 인사들의 지나친 식탐과 과시적 사치를 에둘러 비판하며 "내 생각에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우트소시지, 맥주 수프와 같은 영양가 있지만 검소한 식단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즉, 프랑스에 비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의 정서와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던 프랑스의 정서는 달랐다.[41] 오히려 소박한 이미지인 남편 루이 16세가 돈을 훨씬 많이 썼다. 루이 16세의 열쇠와 시계 만들기 취미는 당시 기술을 감안한다면 스위스에서 명품 부품 조달해서 고급 기계식 시계 만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지 개인적인 취미활동이어서 티가 안 났을 뿐이다.[42] 국내의 모 학습만화에선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착한 앙투아네트는 구라임"이라고 역으로 구라를 쳐버렸다.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스페인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백성들을 동정해서 '이 없다고? 그럼 어디서 케이크라도 구할 수 없을까?'라는 식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말투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사는 가문의 고질적 근친혼 후유증 탓에 그리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품은 선량한 왕비였다는 의견이 사학계에서는 대세이다. 또는 루이 14세의 서출 딸이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일단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정작 이 말을 했다는 원조로 추정되는 여러 일화들도 "바보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라는 투라기 보다는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포함한 모든 부류)라도 먹게 할 수 없을까?" 라는 투에 가깝다.[43] 증조할아버지가 사마의이다. 대체 중달의 피는 어디로?[44] '하불식육미'라고 읽는다. 직역하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45]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이미 프랑스 혁명 전에 진혜제의 일화가 기록된 자치통감강목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프랑스인들이 진혜제의 일화를 접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태였다.[46] 물론 진짜로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그녀의 잘못인 바렌 사건이 있다.[47] 정작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가 갖고 싶으면 사주겠다"는 루이 16세의 말에 "지금 우리 왕국은 다이아몬드보다 군함 1척이 더 필요하다"고 개념 넘치는 답변을 했다.[48] 다만 친정이 오스트리아라는 점을 고려하면, 친정 가족과 편지를 교환했다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보기에는 현대 학자들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외국에서 시집 간 왕비들도 친정 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하고 지냈다. 이국의 땅에 와서 가족이 그리운 것은 남녀 불문하고 당연지사이고 거기다 사적인 내용을 담은 거지, 정치적인 내용이라던가 프랑스에게 위협이 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가 이렇게 되어가니까 조금 불안하다"는 내용 정도는 있었겠지만 이를 가지고 정치적 스파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49] 심지어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서, 결혼 초반에는 진짜로 그랬다.[50] 사실 비슷한 시기 조선도 남자가 이 없으면 애처가 이미지가 아닌 공처가 이미지가 붙어버렸기 때문에, 양반 부인들은 적당한 여자를 첩으로 골라주어야 했다. 자기 손으로 남편에게 첩질을 시켜주는 꼴인데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지만, 일단 좁게는 남편과 자신의 체면과 명예가 걸린 문제고, 넓게 보면 자신의 친정까지도 가정교육의 부실함을 빌미로 삼아 얼마든지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51] 같은 시대 청나라에서도 남자들은 정실인 적복진을 맞이하기 전에 첩인 측복진부터 들여야 했다.[52] 사실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게, 바로 직전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폴란드-리투아니아 공주 출신인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선거군주정이었던지라 일반 귀족가문 출신에다가 친정아버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폐위당한 상황이어서 부르봉 왕가의 종가인 프랑스 왕비로는 다소 처지는 가문 출신이었고, 그 전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누적된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인해 지능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53]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귀족이며 루이필리프 1세의 외삼촌이자 부르봉 가문 서자 출신인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20세에 죽음)의 아내. 참고로 랑발 공가는 이 사람과 당주인 루이 드 부르봉이 죽어 1793년 남계가 단절되고, 나머지 재산은 1821년 루이필리프에게 간다. 이후 루이필리프의 아들인 샤를 도를레앙이 랑발 공-팡티에브르 공작 작위를 받지만 8살의 나이로 죽는다.[54] 아이러니하게도 루이필리프의 어머니는 이 사람과 반대로 부르봉 적자 가문인 오를레앙 왕가에 시집갔는데(이 가문이 상당히 유산이 많아 오를레앙 쪽에서 이를 노렸다.) 남편인 루이필리프 2세에게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뭐, 이 사람의 성욕도 한 몫 했고. 오죽하면 루이 15세까지 이 결혼에 대해 "저놈은 방탕한 놈이야. 그 결혼 다시 고려해 봐."라고 루이필리프 1세의 외조부에게(랑발 공비의 시아버지)에게 충고했다고 한다.[55] 혁명 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킨 유일한 충신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베르사유 습격 당시 납치되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그 머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창문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56]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으로 국외로 피신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후 곧 암으로 사망했다.[57] 심지어 이때 볼테르잔 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적도 있다. 당연히 금서가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중들이 몰래 구입해 읽어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58] 근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다. 라모트 백작부인 항목의 1.2 참고.[59] 사실 당대의 음란물 산업에서 절대군주와 그 가족들은 거의 예외 없는 희생양이 되었다. 푸가초프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예카테리나 2세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이유도 비슷한 것이었으며, 유명한 예카테리나는 말과 함께 검열삭제하다가 줄이 끊어져 깔려죽었다는 서술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근친상간 설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출처] 요모타 이누히코. 라블레의 아이들: 천재들의 식탁. 씨네21(주). 2009. p145-154[61] 현대에도 이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테크의 메리 대왕대비를 통해 물려받은 헝가리 혈통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가 헝가리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로, 방영(訪英) 당시에 어전에서 헝가리 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여왕은 만찬 자리에서 조상의 이름을 딴 요리를 차우셰스쿠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는데, 차우셰스쿠는 무식해서 이 행동의 의미를 몰랐다고 한다.[62]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완전히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이다.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63] 참고로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와 방돔의 선배 장군인 루이 드 부플레르 장군(1644-1711)과 같은 가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장군은 빌라르와 방돔에 가려진 능력자로 릴 공성전에서 패했지만 동맹군의 피해를 최대화해서 오죽하면 동맹군 앞에서 항복 조건을 직접 말했고 말플라케 전투에서는 65세의 고령에도 자기보다 어린 빌라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빌라르의 부상 이후 기병대를 지휘했다.[64]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주변의 소문만 듣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싫어한 로잘리도 직접 왕궁에서 만난 후 성모같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평했다.[65] 진짜 하는 건 아니고 흉내만 냈다.[66] 왜냐하면 당시의 감자는 오늘날의 것과 달리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토란 같은 식물 뿌리를 먹는 기분이라, 프로이센 왕국에서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신의 식사에 감자를 올리는 모범을 몸소 보이고 나서야 백성들이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67] 피를 빤 후의 벼룩의 색에서 유래했다는 것과 1775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새 드레스 색을 본 루이 16세가 벼룩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유래가 있다. 현대에선 짙은 붉은 색 또는 자주색과 갈색이 합해진 것, 회색이 섞인 자주색이나 분홍색, 적갈색 등을 넓게 통틀어서 부른다. #[68]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이 하나 있긴 하다. 음악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있던 시절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에게 배웠다. 그 덕택에 글루크는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원을 받았다.[69] 당시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하이든, 모차르트 등 여러 음악가들이 활동하였으며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도 어린시절 연주여행을 다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7살의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면 동년배인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으나 어린애가 한 얘기라서 왕실 사람들은 모두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클래시컬로이드에서도 나온다.[70] 비제-르 브룅은 이후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얻게 되는데, 이를 두고 앙투아네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앙투아네트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앙투아네트 왕비의 뛰어난 식견을 대변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71] 마리 앙투아네트가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았을 때, 루이 16세난산으로 고생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선물한 궁전이다. 흔히 떠돈 소문과 달리 이 궁은 궁전 치고는 제법 작은 편이고, 정원을 중심으로 하는 편안하고 수수한 곳이었고 마담 뒤 바리에게 받은 가구들을 비롯해 왕실에서는 적은 지출로 마련한 곳이었다. 마리는 여기에 자기 취향대로 궁전과 정원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72] 그럴 만한 게, 당시까지만 해도 슈미즈는 그냥 속옷 내지는 잠옷이었고 그 옷의 재료인 모슬린이 프랑스와 오랜 라이벌 국가인 영국 용품이었다.[73]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물 보급 문제나 물이 병을 유발시킨다는 미신 때문에 목욕을 무지 꺼렸다. 프랑스에서 향수 문화가 발달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게다가 당시 프랑스에서는 목욕을 격주로 하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1주일에 3번 목욕을 한다는 게 너무 사치스럽고 외국스럽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판받았는데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마리가 욕조에서 알몸으로 남자 손님을 받은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74] 장 루이 파르종은 앙투아네트 이외에도 여러 왕실 및 귀족 인사들을 주요 고객으로 두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트리아농 정원을 그대로 옮겼다고 평가한 '르 트리아농'은 현대에도 꾸준히 재해석된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천연 향료만을 이용해 18세기의 향수 제조법으로 만든 향수에 M.A. 시야주 드 라 렌느(M.A. Sillage de la Reine)라는 이름을 붙여 25ml에 350유로(고급형 8000유로)로 주문 판매했다.[75] 처형 직전까지 덤벨로 근육단련을 하며, 식사로 프로틴을 섭취한다.[76] 네년의 자식들도 갈기갈기 찢어서 길거리에 전시해주마.[77] 본인 말로는 벤치프레스의 바벨보다 못하다고 했으며 이후 이 단두대 칼날 은 로즈 베르탱의 손을 거쳐 마리 전용 무기가 된다.[78] 루이 15세의 아들이자 왕태자였던 루이 페르디낭의 사생아라는 설정이다.[79] Maëlia Gentil.[80] 정황상 튈르리 궁에서 벌어진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묘사한 듯 하다.[81] 단두대로 걸어갈 때는 왕비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나 단두대에 목이 고정될 때는 표정이 굳으며 두려운 기색을 보인다.[82] 아예 공식 홍보 SNS계정을 재활용하기까지 했다.[83] 전술했듯이 시집 온지 7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했었고 불운하게도 루이 16세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장남 앙투안 백작을 가지게 되었다.[84] 1편의 빌런격인 시드 필립스가 한 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85] 독일의 유명 문학가인 괴테도 마침 이 인도식이 있던 해에 학생으로 있었다가 이 광경을 보며 자서전인 '시와 진실'에 '신성한 결혼식에 끔찍한 행동이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86] 완전히 결점없는 피부는 아니었고 뺨에 희미한 곰보 자국이 있었지만 당시 이 정도의 흠은 흠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87] 결혼 전까지는 분명 그랬지만 출산 후 초상화들에서는 살집이 있는 편.[88] 물론 꼭 그렇지 않은게 부르봉 왕가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 가족의 망명을 요청해서 그들이 살 집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친불정권이 들어선 건 나폴레옹 집권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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