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공화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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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D6B469> 튀르키예 공화국 제22대 총리 탄수 칠레르 Tansu Çiller | |
| |
출생 | 1946년 5월 24일 ([age(1946-05-24)]세) |
튀르키예 이스탄불 | |
재임기간 | 제22대 총리 |
1993년 6월 25일 ~ 1996년 3월 6일 | |
부모 | 아버지 네카티 칠레르[1] 어머니 무아제즈 칠레르 |
배우자 | 남편 외제르 우추란 칠레르[2] |
자녀 | 장남 메르트 칠레르 차남 베르크 칠레르 |
학력 | 보아지치 대학교 (경제학 / 학사) (1967년) 뉴햄프셔 대학교 (경제학 / 석사) (1969년) 코네티컷 대학교 (경제학 / 박사) (1971년) |
최종 당적 | 정도당 |
의원 선수 | 3 |
의원 대수 | 19, 20, 21 |
서명 |
1. 개요
튀르키예의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이다.2. 생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정도당(正道党) 쉴레이만 데미렐 내각에서 경제담당 국무위원을 맡았고, 데미렐이 대통령이 되자 후임 당대표로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총리를 맡았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복지당 네지메틴 에르바칸 내각에서 연정의 일환으로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맡았고, 2002년 총선에서 정도당이 0석으로 참패하자 당대표직을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3] 이 때 맞붙었던 1위 정당(정의개발당)의 당수가 바로 에르도안. 정치생명이 끝난 칠레르와 정반대로 에르도안은 이 선거에서의 초압승을 시작으로 독재자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이후 아이러니하게도 2018년부터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을 지지하고 있으며, 2023년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에서도 에르도안 지지 집회에 참석하였다. 2024년 튀르키예 지방선거에서도 정의개발당의 이스탄불 시장 후보로 나온 무라트 쿠룸을 지지하였다. 그래도 둘 다 같은 우익대중주의 정당 출신이다보니 이러한 행보가 완전 의외인 건 아니다.
3. 둘러보기
[1] 기자 출신 정치인으로,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빌레지크 주지사를 역임했다. 1954년 총선에서 고향인 무을라 지역구에 공화인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3년 사망.[2] 결혼 후 아내의 성씨인 칠레르로 개명하였다. 2024년 사망.[3] 당시 튀르키예 총선은 비례대표제로 치러졌는데, 봉쇄조항이 전국 득표율 10%로 과도하게 높았다. 그래서 정도당은 9.5%로 3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외정당으로 전락하고, 나머지 군소정당도 마찬가지로 갈려나가서 결국 정의개발당(34.3%)과 공화인민당(19.4%) 양당만 각각 2/3와 1/3씩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