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공화국 총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초대) | 제3대 |
이스메트 이뇌뉘 | 펫히 오키아르 | 이스메트 이뇌뉘 | 젤랄 바야르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제7대 | |
레피크 사이담 | 쉬크뤼 사라졸루 | 레제프 페케르 | 하산 사카 |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초대) | |
솀세틴 귀날타이 | 아드난 멘데레스 | 제말 귀르셀 | 이스메트 이뇌뉘 |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수아트 하이리 위르귀플뤼 | 쉴레이만 데미렐 | 니하트 에림 | 페리트 멜렌 |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제12대) | |
나임 탈루 | 뷜렌트 에제비트 | 사디 으르마크 | 쉴레이만 데미렐 | |
(제16대) | (제12대) | (제16대) | (제12대) | |
뷜렌트 에제비트 | 쉴레이만 데미렐 | 뷜렌트 에제비트 | 쉴레이만 데미렐 |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뷜렌트 울루수 | 투르구트 외잘 | 이을드름 아크불루트 | 메수트 이을마즈 | |
(제12대) | 제22대 | (제21대) | 제23대 | |
쉴레이만 데미렐 | 탄수 칠레르 | 메수트 이을마즈 | 네지메틴 에르바칸 | |
(제21대) | (제16대) | 제24대 | 제25대 | |
메수트 이을마즈 | 뷜렌트 에제비트 | 압둘라 귈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
제26대 | 제27대 | |||
아흐메트 다우토을루 | 비날리 이을드름 | |||
오스만 재상 → 튀르키예 총리 → 튀르키예 부통령 |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949 이승만 | 1949 이시영 |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 1953 장제스 | ||
1955 하일레 셀라시에 | 1957 응오딘지엠 | 1958 아드난 멘데레스 | 1962 허위 | ||
1962 김좌진 | 1962 오동진 | 1962 조병세 | 1962 안중근 | ||
1962 윤봉길 | 1962 이준 | 1962 강우규 | 1962 김구 | ||
1962 안창호 | 1962 신익희 | 1962 김창숙 | 1962 손병희 | ||
1962 이승훈 | 1962 한용운 | 1962 최익현 | 1962 이강년 | ||
1962 민영환 | 1964 더글러스 맥아더 | 1964 해리 S. 트루먼 |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 1965 다비드 다코 | 1965 수루-미강 아피디 |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 1965 레옹 음바 |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 1965 하마니 디오리 | ||
1965 조모 케냐타 | 1965 무테사 2세 |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 1965 툰쿠 압둘 라만 | ||
1966 타놈 키티카초른 | 1966 쑹메이링 | 1966 천궈푸 | 1968 쑨원 | ||
1968 천치메이 |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 1970 조만식 | 1976 임병직 | ||
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 1979 박정희 | 1980 최규하 | 1981 시리낏 끼띠야꼰 | ||
1981 푸미폰 아둔야뎃 | 1983 | 1989 김규식 | 1989 조소앙 | ||
1999 장면 | 2008 여운형 | 2019 유관순 | 2021 홍범도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
<colbgcolor=#fff> 튀르키예 공화국 제9대 총리 알리 아드난 에르테킨 멘데레스 Ali Adnan Ertekin Menderes | |
출생 | 1899년 |
오스만 제국 아이든 코차를르 | |
사망 | 1961년 9월 17일 (향년 62세) |
튀르키예 임랄르 섬 | |
재임기간 | 제9대 총리 |
1950년 5월 22일 ~ 1960년 5월 27일 | |
당적 | [[공화인민당|]] (1930~1945) [[민주당(튀르키예 1946년)| 민주당 ]] (1946~1960) |
학력 | 앙카라 대학교 (법학 / 학사) |
종교 | 이슬람교 |
배우자 | 베린 멘데레스 (결혼:1928) |
자녀 | 3명 |
경력 | 대국민의회의원(1931~1960) 민주당 대표 (1950~1960) 제9대 총리 (1950~1960) |
[clearfix]
1. 개요
아드난 멘데레스는 튀르키예의 제9대 총리이다. 솀세틴 귀날타이(Mehmet Şemsettin Günaltay, 1883년 7월 17일 ~ 1961년 10월 19일)의 후임으로서 1950년 5월 22일부터 1960년 5월 27일까지 총리직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공로로 195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아드난 멘데레스는 1899년[1] 아이든 도 코차를르 마을에서 크림타타르인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학업을 수행한 뒤 이즈미르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튀르키예 독립 전쟁 때 민병대에 가담하여 그리스군에 맞서 싸운 공로로 튀르키예 건국 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이후 앙카라 대학 법학대에 들어가 4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멘데레스는 1930년 아이든에 자유공화당 분당을 조직했지만, 당이 얼마 안가 해산되는 바람에 붕뜨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집권당인 공화인민당에 입당했으며, 1931년 당 지도부에 의해 아이든 지부 당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2.2. 민주당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튀르키예 정부는 전쟁 기간 동안 억눌렀던 사회적 불만을 더이상 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을 중심으로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던 공화인민당은 서구화, 세속주의를 내세우며 이슬람교를 억누르고 급속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소농들은 급속한 산업화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가령 튀르키예의 전력 생산은 1923년부터 1943년까지 10배 증가했지만, 전력 생산량의 80% 가량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3대 도시로 흘러갔고, 4만 개에 달하는 농촌 마을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은 10개에 불과했다.이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 자칫했다간 정권마저 위험하다는 걸 감지한 이뇌뉘 대통령은 1945년 5월 대지주의 토지 과점을 제한하고 소농에 더 많은 토지를 분배하는 내용의 토지개혁법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자 공화인민당 내부의 대지주들이 반발했다. 특히 아이든 도의 대지주였던 멘데레스는 반대파를 조직하고 토지개혁은 토지를 쓸데없이 잘게 쪼개 비효율만 양산할 거라면서 정부가 너무 권위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자, 멘데레스는 젤랄 바야르, 레피크 코랄탄, 푸아트 쾨프릴뤼와 함께 정부 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편하라는 요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를 '4인 제안서(Dörtlü Takrir)’라고 한다. 이뇌뉘 대통령은 요구안을 거부했지만, 국내에 팽배한 불만과 대외적 위신을 고려해 1947년 선거를 다당제 자유선거로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멘데레스는 야당을 창당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지자 다른 3명과 함께 공화인민당을 탈당하고 1946년 1월에 민주당을 창당했다.
공화인민당은 처음에는 민주당 창당에 대해 환영의사를 밝혔지만, 전국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세가 날로 높아지자 위협을 느끼고 선거를 1947년에서 1946년 7월로 앞당겼다. 결국 민주당은 반년 밖에 주어지지 않는 선거 준비 기간만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전체 465석 중 62석을 확보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후 양당은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총리 레제프 페케르는 민주당과의 협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공산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멘데레스는 아타튀르크 이래로 공화인민당이 시행하고 있는 계획경제체제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며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 사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1947년, 이뇌뉘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시선을 의식하고 민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던 페케르 총리를 사임시킨 뒤 좀 더 온건한 성향의 하산 사카를 총리에 임명시켰다. 그리고 공화인민당은 민주당의 경제자유화 정책에 협조하고 토지개혁안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하는 등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정부는 중공업 우선주의에서 경공업, 소비재, 농촌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경제정책을 개편해 아타튀르크 노선으로부터 후퇴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고무된 민주당은 1950년 5월에 다가올 선거를 총력을 다해 준비했고, 그 결과 민주당은 1950년 5월 선거에서 53.4%를 득표해 39.8% 득표에 그친 공화인민당을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했다. 또한 민주당은 전체 465석 중 408석을 확보했고, 공화인민당은 69석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군부는 이뇌뉘 대통령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종용했지만, 이뇌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왔다. 젤랄 바야르는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등극했고, 멘데레스는 총리에 선임되었다.
2.3. 전성기
멘데레스는 총리에 집권한 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멘데레스는 국제연합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신속하게 호응해 1만 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이는 유엔군 중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튀르키예군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966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군부와 케말주의자들은 지구 건너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귀한 병력을 파견해 쓸데없이 피를 흘리게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이러한 불만을 일축했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세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1952년, 미국은 튀르키예가 6.25 전쟁에 적극 참여해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줬다. 멘데레스는 이 덕분에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이 자본금으로 수십년 동안 외면받아온 튀르키예 농촌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농업 현대화와 기계화를 위해 트랙터를 수입했으며, 튀르키예 내륙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망을 대폭 확장했으며, 수리시설 역시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로서 농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광대한 시장에 농작물을 팔 수 있게 되었으며,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기록적인 풍작을 기록했다. 과거 대표적인 식량 수입국이었던 튀르키예는 이제 세계적인 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성공 덕분에, 튀르키예는 연간 11~13%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농민들 역시 이러한 호황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여세를 몰아 공화인민당이 집권 수십년간 밀어붙여온 세속주의 정책을 완화시켰다.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에잔(ezan)을 아랍어로 낭독하는 것을 허용했고[2], 종교 교육기관과 모스크의 건립을 허락했고, 코란을 비롯한 종교 서적의 출판도 허용했다. 이로서 그동안 족쇄에 걸렸던 이슬람교는 자유로워졌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다수의 튀르키예 국민들은 멘데레스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이렇듯 경제 호황과 이슬람교의 부활을 이끌어낸 멘데레스는 1954년 재선을 가뿐하게 달성했다. 민주당은 58%의 득표율을 확보하고 의회 의석을 503석이나 확보했다. 반면 공화인민당은 31석만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2.4. 위기
1954년, 기후가 악화되면서 장기간 가뭄이 일자, 수확물이 작년에 비해 크게 저하되었다. 튀르키예는 다시 밀을 수입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도 1953년 13%에서 4% 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멘데레스는 지금까지 성공을 거둬온 정책을 바꾸지 않고 농업 기술 및 기계 수입을 계속 유지하되 모자란 돈은 외자를 도입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자 튀르키예의 재정과 부채는 점점 위험신호를 보였고, 리라화 가치도 계속 낮아져 수입은 더 힘들어졌다. 1950년 3%였던 인플레이션은 1957년 20%로 급증했다. 이에 튀르키예 정부는 필수품에 대한 가격통제를 부활시켰고, 암시장은 이 기회를 틈타 번영을 누렸다.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주들에게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멘데레스는 본인도 대지주였던지라 이를 거부하고 계속 기계 수입을 고집했다. 그러나 토지를 트랙터로 경작할 수 있게 된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이전보다 덜 고용했고, 직장을 잃게 된 소작농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할 일자리가 충분히 창출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실업자로 전락하여 대도시 주변에 슬럼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멘데레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하고 미국의 원조액과 차관을 수입품을 구매하는 데 대부분 사용했다. 그 결과 산업 분야에서의 발전은 지지부진해졌고, 사회 불안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멘데레스는 군부와 기존 엘리트들을 불신했고,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는 자신을 축출하려는 음모라고 간주해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전체 의지’를 대변하고 있으며 타락한 엘리트와는 대비되는 존재라고 선전하며 언론 통제를 가하고 관료와 군부 인사를 주기적으로 숙청했으며, 학술 활동에 대한 자유도 억제했다. 그러나 반발을 완전히 억제하는 건 불가능했고, 1957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47% 득표에 그친 반면 공화인민당은 40%의 득표율을 회복하고 의석을 178석으로 늘릴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1957년 선거 후 "튀르키예는 이슬람 국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공언하며 공화인민당을 무신론자의 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조국 전선'이라는 이름의 대중 조직을 출범시켜 국민을 동원 및 통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농촌 지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IMF로부터 추가로 3억 5,9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돈을 풀었고, 1958년부터 작황이 다시 좋아져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1958년 4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멘데레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1959년 2월 17일, 멘데레스는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가는 특별 비행기 TC-SEV를 타고 가던 중 활주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비행기가 짙은 안개로 추락한 뒤 화재에 휩싸이는 악재를 맞이했다. 그날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 16명 중 9명이 죽었고, 승무원 8명 중 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비행기 뒷좌석에 앉아있던 멘데레스는 거의 다치지 않은 채 현지 주민들에게 구조되었고 런던 클리닉에 입원한 뒤 1959년 2월 19일 병원에서 키프로스 문제에 관한 런던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1959년 2월 26일 귀국한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고, 지지자들은 그를 알라가 선택한 인물로 추앙했다. 그러나 그의 승승장구는 여기까지였다.
2.5. 실각과 최후
"튀르크여 영원하라! 나아가 내 죽음은 언젠가 억울함이 밝혀질 것이다!"
사형 집행 전 남겼던 유언
사형 집행 전 남겼던 유언
1960년, 이스메트 이뇌뉘가 열차를 타고 카이세리로 향했다. 이에 멘데레스는 군대에 이뇌뉘를 실은 열차가 카이세리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군대는 이를 거부하고 카이세리에 들어선 이뇌뉘에게 경례했다. 이에 경악한 멘데레스는 1960년 4월 당내 강경파들을 모아 특별 조사위원회를 꾸려 군부 숙청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3개월의 조사를 거친 뒤 정부에 반역을 획책하는 이들을 추려내 합당한 처벌을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앙카라와 이스탄불 등 여러 대도시에서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고, 사관학교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멘데레스는 꿈적도 하지 않고 5월 25일 3개월의 조사를 중지하고 모든 반역자들을 1개월 만에 파악했다고 선언하고 군부, 공화인민당, 학자, 언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조사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군부는 즉시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960년 5월 27일, 튀르키예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이후 대통령 젤랄 바야르와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를 필두로 모든 민주당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그 후 멘데레스는 임랄르 섬[3]에 보내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61년 9월 1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2세.
쿠데타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를 비롯한 민주당 핵심 인사들을 체포해 재판을 열었던 야스 아다(Yassı ada)는 이스탄불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들중 하나인데, 이곳은 2020년 5월 27일에 쿠데타 60주년을 기해 민주주의와 자유의 섬(Demokrasi ve özgürlükler adası)로 명명하고 관련 기념관들이 세워졌다. 관련기사(튀르키예어) 정작 멘데레스 본인도 민주주의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런 인물을 군부가 죽여버림으로써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후에 80년대 들어서 복권되어 1990년 고향 아이든에 아드난 멘데레스 대학이 세워졌으며 추모비도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