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15:34

이승훈(1864)

이승훈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파일:대한민국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png
1949
이승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9
이시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파일:미국 국기.svg
1953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1955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1957
응오딘지엠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58
아드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1962
허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좌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오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조병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중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윤봉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강우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창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신익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창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손병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승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한용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최익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강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국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옹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파일:태국 국기.svg
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1970
조만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6
임병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
필립 제이슨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
최규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
시리낏 끼띠야꼰
파일:태국 국기.svg
1981
푸미폰 아둔야뎃
파일:태국 국기.svg
1983
전두환(취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김규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조소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장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
여운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유관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홍범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wiki style="margin: 0 -10px;"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박희도(日) 백용성
박준승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정춘수(日) 최린(日) 최성모 한용운 홍기조 홍병기
※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인물은 (日)로 표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f8184><tablebgcolor=#0f8184> 파일:동아일보 로고 화이트.svg동아일보
역대 사장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박영효
제2대

김성수
제3대

송진우
직무대리

허헌
제4대

이승훈
제5대

김성수
제6대

송진우
직무대리

양원모
제7대

백관수
제8대

송진우
제9대

김성수
제10대

최두선
제11대

이희승
제12대

고재욱
제13대

김상만
제14대

이동욱
제15대

김상기
제16대

오재경
제17대

김성열
제18대

김병관
제19대

권오기
제20대

오명
제21대

김학준
제22대

김재호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파일:attachment/이승훈/11.jpg
출생 <colbgcolor=#fff,#191919>1864년 3월 25일
조선 평안도 정주목 갈산면 익성동[1]#
사망 1930년 5월 9일 (향년 66세)
평안북도 정주군
본관 여주 이씨(驪州 李氏)
별칭 본명(本名)은 이인환(李寅煥)
아명(兒名)은 승일(昇日)
자(字)는 승훈(昇薰)
아호는 남강(南岡)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교육가, 사업가
가족 이석주(부), 홍주 김씨(모), 이승모(형)
학력 오산학교(설립)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개신교, 장로회)
조직 만민공동회, 신민회, 자면회, 조선 교육 협회
의거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남강. 본관여주(驪州). 본명은 이인환.

2. 생애

1864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양민 출신.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16세에 유기상 알바를 시작으로 보부상을 거쳐 10년만에 대상인이 되었다.[2][3]

하지만 그 무렵 하필이면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남강이 사업을 벌이던 지역인 평안도가 전장이 되고 말았다. 그 탓에 재산을 모두 잃게 된다. 몇 년 후 다시 재기에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처음 이승훈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자본이 없어 중국인삼 사무역으로 치부했던 조선 제일의 거부 오삭주[4]를 찾아가 돈을 빌렸다. 오삭주는 이승훈의 재목을 보고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주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사업이 거덜나자, 이승훈은 오삭주에게 다시 찾아가 "다시 자본을 대주시면 이번에는 제대로 일해 갚겠습니다"라며 당당히 요구했고, 이승훈의 진솔함에 탄복한 오삭주는 일전에 빌린 빚을 탕감해주며 물심양면 이승훈을 지원했다.[5]

이승훈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그 돈으로 능참봉직을 사서 여태 못해봤던 양반 행세를 하였다.[6] 그러다가 안창호의 교육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그의 화려한 언변[7]에 감동을 받아[8] 신민회에 들어가 평안북도 정주군에 신식 교육 기관인 오산 학교[9], 강명의숙 등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적 출판을 담당하던 태극 서관도 이 사람의 작품.

그 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고, 105인사건으로 인해 유배 중에 감옥으로 끌려가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만에 가출옥하였다. 그 동안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개신교 대표로 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로 인해 또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고, 33인 중 가장 늦게 출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살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힘쓰는 한편, 농촌 진흥에 노력을 기울이다 193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3. 기타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10]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그럼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

4. 대중매체에서



[1] 시인 백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2] 남강의 형 이승익의 고손자인 사학자 이기백 선생에 의하면, 남강의 가문은 사실 천민 집안이었다고 한다. 이기백이 생전에 쓴 <남강 이승훈의 일면>에서는, "여주 이씨 족보를 뒤져도 남강의 가계인 평안도 일파의 존재가 아예 없다"고 했다. 아마 윗대에서 조선 말기 사회적 혼란을 틈타 양반을 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남강의 고향 평안도조선 시대부터 차별받던 지역이었다(홍경래의 난 등). 그러니 멀쩡한 양반 가문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3] 젊은 시절부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덕분에 체력도 튼튼했고, 딱히 잔병치레한 적도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 눈에 축지법이라 보일 정도로 평소 걸음걸이가 엄청 빨랐다고 전해진다.[4] 본명은 오희순. 평안북도 삭주군 군수직을 돈으로 사서 '오삭주'라 불렸다. 이때 이승훈이 오삭주 눈에 뜬 계기가 재미있다. 오삭주는 나이가 들자 돈을 노리고 꼬이는 아첨배들의 아부를 들으며 매일을 소일거리로 보내고 있었다. 젊은 남강이 오삭주의 사랑채에 돈을 빌리기 위해 모여있는데 오삭주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 친척의 치부를 까발리고 흉을 보는 것이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오삭주의 말에 굽신거리며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이승훈 혼자만이 떳떳하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지적했다. 오삭주는 순간 무척 화가 났지만 생각해보니 자신도 남들 앞에서 자기 친척을 욕했으니 결과적으로 자기 체면 깎아먹는 짓이였다. 자신의 실수를 지적해준 남강의 행동에 오삭주는 그동안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고 보답으로 그를 전력으로 후원해주었다.[5] 공교롭게도 정주영이나 신격호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6] 이승훈이 불법으로 능참봉직을 산 것은 아니다. 당시 조정에서 공명첩을 통해 조정에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기부하면 능참봉 벼슬을 주고 양반으로 인정하였다.[7]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나혼자 호의호식하면 무엇하느냐[8] 비슷한 예로 여운형과 조만식이 있다. 여러모로 안창호는 놀라운 인물이다.[9] 지금의 서울 오산 중학교, 오산 고등학교.[10] 물론 지켜지진 않았다. 일본의 방해였다는 설도 있으나, 애시당초 유교적 윤리가 남아 있던 조선에서 고인의 유해를 함부로 하긴 어려웠을 터이다.[11] 숭실학교, 숭의여학교도 이와 같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