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空名帖조선시대에 있었던 매관매직 제도의 일종.
공명(空名)은 "이름이 비었다", 즉 "성명란에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는 뜻이고, 첩(帖)은 "임명장"을 뜻한다. 즉, 오늘날로 치자면 '백지 임명장'인 셈이다.
성명란에 이름을 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아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는 용도로 쓰였다.
2. 역사
보통 국사시간에는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재정이 파탄나 이를 보충하기 위해 공명첩을 팔았다는 식으로 가르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시절에 이미 논상의 목적으로 공명공신(空名空身)을 발행하자는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공명공신이 이름과 신분을 쓰지 않고 발행하는 첩이었던 것을 보면 조선 초에도 공명첩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 설명
중앙의 관리들이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돈이나 곡식의 상납을 독려하고 누군가가 돈과 곡식을 바치면 즉석에서 그의 이름을 써서 첩을 내려주는 형태로 운용됐다. 이때 주는 첩은 벼슬을 내리는 고신첩(告身帖), 천인을 양인으로 면천시켜 주는 면천첩(免賤帖), 향리들에게 역을 면제하는 면향첩(免鄕帖)이 있었다.공명첩은 중앙에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엄격하게 관리됐는데 위조하거나 훔쳐서 내다팔았다가 적발될 경우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발행 수는 중앙에서 정하고 통제하였으며 연간 발행 수를 각 지방 및 중앙의 관청에 재정 요구에 따라 할당해서 분배하는 식이었다. 다 팔지 못하고 남은 공명첩은 회수해서 소각했다.
고신첩을 통해 받는 벼슬은 말 그대로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
납속을 남발하면서 서류 상 사족이 늘어나 부역과 군역에 동원할 양민이 줄자 공명첩으로 벼슬 받은 사람의 병역 면제권도 없애고 부역 면제권도 1대로 한해 버려 백성들에게 인기는 떨어졌고 조정에서도 이건 백성들 대상으로 나라가 사기치는 꼴이니 관두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매우 적었던 조선의 특징 상 흉년으로 인한 구휼이나 지방재정 충당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공명첩 발행이 아예 멈추는 일은 없었다. 대체적으로 지방에서 난이 발생하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공명첩 발행량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공명첩으로 산 벼슬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에 구매자가 나이가 많으면 자신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들이나 손자의 이름을 써서 넣어 실질적으로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4. 영향
조선 후기의 납속 제도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사람들의 신분을 상승시켰다는 평이 일반적이지만 고신첩은 애초에 혜택이 적어 '개나 소나 양반이 되는' 증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명첩은 수요가 높았는데 조선시대 신분 질서에서 양반은 못 되더라도 벼슬이라는 것이 가문의 체통이 되고 지역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는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이름뿐인 벼슬이라도 사려고 했다. 처음에는 하급 품계만 팔았다가 점점 가격이 떨어져 아무도 안 사니 당상관급 품계도 팔고 조선 후기에는 실제 벼슬 이름이 들어간 첩을 팔았으며 고종 시기에는 영의정 공명첩도 쌀 몇섬으로 폭락하여 과거합격증이자 양반 인증인 공명홍패까지 팔아먹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면천첩, 면향첩은 실제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인정되었으므로 신분제 해체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된다.5. 루머와 반박
일설에 공명첩이 너무 남발된 나머지 개도 공명첩을 물고 다닐 지경이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지나친 과장이다. 공명첩은 지방 수령이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축성이나 흉년이든 지방 관아에서는 중앙에 공명첩 판매를 요청하여 허가 받은 개수를 받아 명부를 작성하여 공명첩에는 어보가 찍혀서 발행되기 때문에 중앙에서 누구에게 팔렸는지, 그리고 구매자 또한 증서를 받았기 때문에 누가 받았는지는 확실히 검증이 가능했다. 위에서 다루었듯이 공명첩 위조 같은 짓을 했다가 걸리면 참수형이었다.흔히 족보 매입과 혼동되곤 하는데 아마도 교육과정에서 신분제의 붕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명첩과 족보 매입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 때문에 '공명첩=족보매입'이라는 식으로 와전된 모양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벼슬을 판매한 것이지 성씨를 판매한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 족보를 매입하는 것은 민간에서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