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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1:41:42

김장생


<colbgcolor=#c00d45> 조선 문묘 종사 동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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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공(文元公)
김장생
金長生
파일:김장생 초상.jpg
출생 1548년 8월 21일[1]
(음력 명종 3년 7월 8일)
한성부 정릉동[2]
(現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631년 8월 29일 (향년 83세)
(음력 인조 9년 8월 3일)
충청도 연산현
(現 충청남도 계룡시[3])
시호 문원(文元)
본관 광산 김씨
희원(希元)
사계(沙溪)
부모 부친 - 김계휘(金繼輝, 1526 ~ 1582)
모친 - 평산 신씨 신영(申瑛)의 딸
형제자매 5남 3녀 중 첫째[4]
여동생 - 김면생(金免生, 1555 ~ ?)
이복 남동생 - 김의손(金義孫, 1567 ~ ?)
김연손(金燕孫, 조졸)
김경손(金慶孫, 1573 ~ 1613)
김평손(金平孫, 1577 ~ ?)
이복 여동생 - 윤경남(尹敬男)의 처
김종생(金終生, 1583 ~ ?)[5]
부인 초배 창녕 조씨 조어화(曺於火, 1551 ~ ?)[6]
계배 순천 김씨 - 김수언(金秀彦)의 딸
자녀 슬하 3남 2녀
장남 - 김은(金檃, 1567 ~ ?) 조씨 소생
차남 - 김집 조씨 소생
장녀 - 김씨(1575 ~ ?)[7] 조씨 소생
3남 - 김반(金槃, 1580 ~ 1640) 조씨 소생
차녀 - 김씨(1581 ~ ?)[8] 조씨 소생
서명
파일:김장생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 문묘 배향 동국 18현 중의 한 명이다. 아들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은 문묘, 종묘 동시 배향되었다. 본관은 광산.

2. 생애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김계휘와 평산 신씨 신영(申瑛)의 딸의 자식으로 장남 김장생, 장녀가 있는데 김계휘와 측실의 자식 중 서자 김의손(金義孫), 서자 김연손(金燕孫), 서자 김경손(金慶孫), 서자 김평손(金平孫), 그리고 2명의 서녀가 있다. 즉 강변칠우 사건의 김경손은 김장생의 이복 동생이며 김장생은 김경손의 적형(嫡兄)이 된다.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부친의 친구인 송익필로부터 사서 등을 배웠으며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9] 훗날 송익필과 이이의 권유로 성혼에게도 배웠다.[10] 김장생은 훗날 스승 송익필이 부친의 일로 천민으로 환천되자 동문인 정엽, 서성(徐渻)과 함께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리기도 한다.

1578년 처음으로 관직길에 나섰으며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호조 정랑이 되었으며 1597년에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가 안성 군수가 되었다. 조정에 잠시 나갔다가 북인의 득세로 귀향하였고 이후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이복 동생 김경손이 강변칠우의 하나로 체포되어서 광해군이 강변칠우 중 하나인 박응서에게 김장생이 옥사에 연루되어 있는지 물었으나 박응서는 "신들의 음모를 이명준[11]과 김장생이 듣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역적의 패거리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음모를 두 사람이 알까 걱정하였다."라고 말해서 김장생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박응서의 진술로 김장생이 무혐의로 풀려나자 김장생은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조정에 출사했으나 병으로 다시 귀향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공주로 파천오자 어가를 맞이하였으며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조정에 출사했다. 이후 원자의 강학을 담당했고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었으며 또다시 귀향하여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 서원을 세웠는데 정묘호란 때에는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소현세자를 호위했다. 1631년 83세에 죽었는데, 이름을 지을때의 의도대로 장수했다. 아들인 김집도 80이 넘게 장수했다.

1657년(효종 8) 문원(文元)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665년(현종 6) 5월 증 영의정 김장생에게 치제(致祭)하라는 기사를 보아 이 무렵 영의정으로 추증된 듯하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낮은 직책을 전전했으나 이귀와 함께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활약했다. 특히 향리에서 머무르는 동안 아들 김집부터 시작하여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죄다 그의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들은 서인의 학문적인 계통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되었다. 김장생이 저술한 『가례집람』 도 1685년에 송시열 등의 그의 제자들에 노력에 의해 간행될 수 있었다. 예학에 정통한 인물로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이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예법에 치우친 유교 원칙주의자들의 중시조 격인 인물이다. 1688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아들 김집도 그를 이어 종사됨에 따라 부자가 문묘에 종사되는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김장생의 증손자는 형제 대제학이자 숙종의 1번째 장인인 김만기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 있고, 현종 시기 서필원의 공의, 사의 논쟁을 유발한 김만균도 있다.

3. 여담


[1] 율리우스력 8월 11일.[2] 조선 시대 정릉동은 현재 중구 소공동 행정구역 내의 정동이다. 태조비인 신덕왕후의 능이 있던 자리라 정릉동이라 불렸으나 아들 태종이 사대문 밖인 현재 정릉동 자리로 능을 옮기면서 이름만 남았었다.[3] 원래 논산시 두마면 두계2리였으나 계룡시 신설로 두마면 행정 구역이 바뀌었다. 사계 고택이 현재 남아있다.[4] 김장생 본인과 친여동생인 김면생을 제외한 나머지 4남 2녀는 모두 서출이다.[5] 김상용의 측실[6] 조대건(曺大乾)의 딸로, 정종의 8남 임언군의 외고손녀. 임언군신여걸의 처 이씨 → 조광원의 처 신씨 → 조대건 → 조어화[7] 대구 서씨 서경휼(徐景霱)의 처.[8] 청주 한씨 한덕급(韓德及)의 처.[9] 김장생은 20세에 이이 문하에 들었다. '(나는) 20살이 되어 비로소 옛 사람의 학문에 뜻이 있음을 깨달아 드디어 선현(先賢)의 문하를 쫓아 학문의 대강을 들어 알았다.'[10] '나는 율곡에게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진실로 복종하여 항상 더 할 바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우계에 대하여는 차등적인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계 문하인이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에 자주 왕래하여 그 풍채와 용모를 살펴보고 그 의논을 들은 후에야 율곡이 도의로서 사귄 이유를 알게 되었다.'[11] 강변칠우 일원 이경준의 적형이다.[12] 사실 다른 선택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풀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