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6-10-13 05:26:15

이귀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c00d45> 태조 조준 · 이화 · 이지란 · 조인옥 · 남재 · 이제 · 남은
정종 이방의
태종 하륜 · 조영무 · 정탁 · 이천우 · 이래
세종 황희 · 최윤덕 · 허조 · 신개 · 이수 · 이제 · 이보
문종 하연
세조 권람 · 한확 ·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 정창손 · 홍응
중종 박원종 · 성희안 · 류순정 · 정광필
인종 홍언필 · 김안국
명종 심연원 · ■ 이언적
선조 이준경 · ■ 이황 · ■ 이이
인조 이원익 · 신흠 · 김류 · 이귀 · 신경진 · 이서 · 이보
효종 김상헌 · ■ 김집 · ■ 송시열 · 이요 · 민정중 · 민유중
현종 정태화 · 조경 · 김좌명 · 김수항 · 김만기
숙종 남구만 · ■ 박세채 · 윤지완 · 최석정 · 김석주 · 김만중
경종 이유 · 민진후
영조 김창집 · 최규서 · 민진원 · 조문명 · 김재로
장조 이종성 · 민백상
정조 김종수 · 유언호 · 김조순
순조 이시수 · 김재찬 · 김이교 · 조득영 · 이구 · 조만영
문조 남공철 · 김로 · 조병구
헌종 이상황 · 조인영
철종 이헌구 · 이희 · 김수근
고종 박규수 · 신응조 · 이돈우 · 민영환
순종 송근수 · 이완용 · 서정순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 중 동무종향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 중 서무종향
}}}}}}}}}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623년 3월 13일 인조 책록
정사일등공신 (1등)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
이서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세
정사이등공신 (2등)
이괄 김경징 신경인 이중로 이시백
이시방 장유 원두표 이해 신경유
박호립 장돈 구인후 장신 심기성
정사삼등공신 (3등)
박유명 한교 송영망 이항 최래길
신경식 구인기 조흡 이후원 홍진도
원우남 김원량 신준 노수원 유백증
박정 홍서봉 이의배 이기축 이원영
송시범 김득 홍효손 김연 유순익
한여복 홍진문 유구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종묘배향공신 좌찬성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충정공(忠定公)
이귀
李貴
<nopad> 파일:이귀 초상.jpg
출생 1557년 4월 9일[1]
(음력 명종 12년 3월 1일)
한성부
사망 1633년 3월 24일 (향년 75세)
(음력 인조 11년 2월 15일)
봉호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시호 충정(忠定)
본관 연안 이씨 (소부감판사공파)
자 옥여(玉汝)
호 묵재(默齋)
부모 부친 - 이정화(李廷華)
모친 - 안동 권씨 권용(權鎔)의 딸
부인 인동 장씨 - 장민(張旻)의 딸
자녀 5남 5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시백
차남 - 이시담(李時聃)
장녀 - 이여순(李女順)[2]
차녀 - 변경윤(邊慶胤)의 처
삼남 - 이시방
삼녀 - 김설(金卨)의 처
사녀 - 김경여(金慶餘)의 처
서장남 - 이시응(李時應)
서녀 - 안인건(安仁健)의 처
서차남 - 이시형(李時衡)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항복과 류성룡을 따라 종군하였다. 광해군 시절 능양군, 김류,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모의하여 거사를 성사시킨 덕분에 반정 1등 공신에 올랐으며 인조반정의 대표 인사로 꼽힌다.

아들로는 이시백과 이시담(李時聃)[3], 이시방, 이시응[庶], 이시형[庶]이 있고 딸로는 이여순[6]을 포함해 5명이 있다. 형인 이시백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활약하여 효종 때 영의정이 되었고 동생인 이시방도 학업에 열중하여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시백과 이시방 형제는 김육의 대동법 확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2. 생애

세종과 세조의 신임을 얻었던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6세손으로 이정화와 권용의 딸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머니 권씨 부인의 혹독한 훈육으로 어릴 때부터 성정이 올곧고 청렴하며 한번 자신의 사람이 되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끝까지 편을 드는 등 강단이 있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선조 대에 이귀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강력히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헛소리라는 등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귀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귀를 옹호하였고 이귀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녹봉을 덜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7]

결국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하러 갈 시기에 이귀는 서울에서 강릉 참봉(康陵參奉,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소재)으로 있었는데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류성룡 휘하에서 종군했는데 <선조실록>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장성현감(長城縣監) 이귀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라며 이귀를 칭찬하는 기록이 있다. 이어 이덕형과 이항복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한 후 이천으로 가서 분조 활동을 하고 있던 세자 광해군을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는 등 이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적이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는 정인홍을 풀어주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이첨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체포된 최기를 마중나간 일 때문에 1616년 해주 옥사에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8] 1619년 풀려나와 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 신경진, 최명길, 김자점, 한교 및 두 아들 이시백, 이시방 등과 함께 반정을 준비하였다. 반정에 성공하기 위해 훈련대장 이흥립을 회유하기 위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을 이흥립에게 보냈는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귀가 반정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흥립이 반정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인조반정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자[9]"날 모함하는 놈들하고 대질을 시켜달라"며 정면돌파하기도 했다. 60이 넘은 늙은 나이에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특히 대호랑이 특수부대인 착호갑사를 이끌고 와서 계획이 비교적 허술했던 반정 성공에 앞장섰다. 허목의 기언과 정두경의 동명집의 기록에 따르면 죽천 이덕형이 능양군에게 절을 하기를 거부하자 반정군 중 어느 한 명이 죽천 이덕형을 죽이려고 했는데 김류와 함께 이덕형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반정군 무사가 윤지경을 죽이려고 하자 윤지경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이이첨을 처형할 때 직접 심문하기도 하였는데 이이첨이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며 "제가 허균같은 놈들이 대비마마를 해치려는 거 지킨 충신인 거 아십니까?"[10][11][12]라고 살려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네 졸개들 앞장세워 악행을 저질렀던 게 오늘 이 말 하려고 그런 거였냐. 그럼 폐모는 누구의 뜻이었냐?"라고 비웃었다. 인조반정 후 1등 공신으로 추대되었다.

인조 즉위 직후에는 판서직에 올랐다. 야사에는 반정 직후 김류와의 반목으로 좌천된 이괄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의 기록을 보면 딴판으로, 이괄은 오히려 김류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이귀는 오해가 있긴 했으나 이괄을 탄핵한 적도 있는 등으로 사이가 안 좋았다.[13] 이괄의 난이 벌어지자 이괄이 역모를 꾀했다는 말에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김류가 이괄의 편을 들었다. 한편 이귀는 김류와 같이 북인 처벌 문제를 담당하면서 광해군 시기에 정책에 반대해서 파작되거나 유배를 갔던, 남이공, 김산국 등 광해군 반대파 북인을 살렸지만 반대로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세력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성장해 서인과 남인 권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냉혹하게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 한찬남, 류희분,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이 목숨을 잃었다.[14]

중북의 영수 류몽인은 광해군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류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문회 이우 권진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하자 최명길과 함께 이괄을 체포해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담록의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이괄의 아들 이전만을 체포할 것을 명하자 이전의 아버지인 이괄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아들만을 체포하면 이괄이 공손하게 명을 받겠느냐며 이괄 역시 함께 체포해야 하며 이괄이 진짜로 억울하다면 이괄을 조사한 후에 도로 부임지에 보내면 된다고 주장 하였지만 무시 당했다고 한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기자헌을 포함한 북인 정치범 38명이 옥에 가둬졌고, 조정에서 이들의 처벌에 대해 여러 논의가 오갔는데 이귀는 국문을 통해 조사한 뒤 유배와 처형을 가르자고 주장했고, 김류는 국문없이 바로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괄의 반군이 우세하고 정부군이 열세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조와 삼정승은 김류의 의견을 채택해서 북인 38명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들 38명의 죽음은 억울했기에 인조 5년인 1627년에 기자헌을 포함한 몇몇 북인 정치범들이 이귀, 이원익 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15] 이런 무자비한 숙청에 분노한 북인들이 박홍구와 임취정, 유효립 등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복위 시키거나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우다가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 결과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류몽인, 정인홍 박홍구와 같은 북인 영수들의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시도로 인해, 북인은 대북과 소북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에 북인은 남이공과 김신국이 이끌다가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이후에 권세는 오래 못 가 인조반정 4년 만에 인헌왕후[16]에 대한 예송논쟁에 휘말려 탄핵을 받아 사직했고[17] 정묘호란 때에는 최명길과 더불어 후금에 대한 칭신을 발빠르게 거론하며 주화를 주장하였다.[18] 그 외에도 이귀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인조는 "경의 식견은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소."라고 칭찬하며 좋아했다.[19] 다만 생전에는 인조에게 신임받지 못했는데 왕 면전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욕을 하며 김류에게 말싸움을 걸고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정승이 자기 견해에 반대했다고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20] <조선왕조실록> 인조 3년(1625) 3월 25일 네 번째 기사에서 사신은 이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한다.
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법도가 없어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젊어서 사숙(私淑)한 기초가 있어서 그의 뜻이 이러한 것이다. 또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근심하여 뭇사람의 비방도 피하지 않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였던바, 충분(忠憤) 한 가지만은 그와 비교될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저촉되거나 거슬리는 말이 많아도 상이 죄주지 않았고, 진신(搢紳)들에게 욕설하기를 거리낌 없이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차자를 올리고 상소하였으나 말을 써 주지 않았고, 국가 일을 도모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한갖 수고로울 뿐 도움이 없었다. 평생의 행사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史臣曰: "李貴志操不端, 言語無章, 以此取笑於世人, 而少有私淑之地, 故其意如此。 且愛君憂國, 不避衆謗, 有懷必達, 忠憤一節, 罕有其比, 故當時之人, 號李貴爲雜君子云。 入侍經筵, 言多觸忤, 而上不以爲罪, 詆辱搢紳, 無所顧忌, 而人不以爲怒。 陳箚抗疏, 無日無之, 而言不見用, 竭誠殫情, 欲濟國事, 而徒勞無益。 平生行事, 類如是矣。"]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개국공신
(조준, 남은, 정도전)
이방원 정사공신
(하륜, 이숙번, 조영무 등)
관학파, 종친
(황희, 맹사성 등)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안평대군, 고명대신 정난공신
(수양대군)
훈구파
(한명회, 신숙주 등)
성종 연산군 중종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파
(임사홍, 신수근)
반정공신
(3훈)
사림파
(조광조)
反김안로계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김안로계
(김안로)
윤임 vs 윤원형
인종 명종 선조
대윤
(윤임)
소윤
(윤원형)
윤원형 vs. 이량 사림파 동인 vs. 서인 서인
(이이, 성혼, 정철)
범 동인
(류성룡, 이산해)
선조 광해군 인조
연립 (서인, 남인)
(윤두수, 류성룡 등)
북인
(이산해 등)
탁소북
(류영경)
청소북, 대북
(3창)
대북
(이이첨)
반정공신
(이귀, 김류)
공서
(김류, 최명길 등)
낙당, 원당
(김자점, 원두표)
효종 현종 숙종
산당
(송시열, 송준길)
서인 vs. 남인 범 남인
(허적, 윤휴)
일부 서인
(김석주)
산당
(송시열)
남인
(민암, 장희재 등)
숙종 경종 영조
소론
(남구만 등)
노론
(노론 4대신)
소론
(소론 5대신)
노론
(정호, 민진원 등)
온건 소론
(이광좌)
노론
(김재로 등)
영조 정조 순조
완론 탕평
(탕평당, 청명당)
청명당 vs.
홍인한과 정후겸
홍인한과 정후겸 외척
(홍국영)
소론
(서명선 등)
준론 탕평
(벽파, 시파)
벽파
(심환지 등)
시파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안동 김씨
순조 헌종 철종
세도가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여흥 민씨
(+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3대신: 영의정부사 - 황보인, 좌의정 - 남지 → 김종서, 우의정 - 정분
}}}}}}}}} ||


[1] 율리우스력 3월 30일[2] 김자점의 형 김자겸(金自兼)의 처. 남편 김자겸이 요절해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예순(禮順).[3] 이시담은 이귀의 셋째 형인 이자(李資)에게 입양되었다.[庶] 서자(庶子)[庶] [6] 김자점의 형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졸하여 예순비구니가 되었고, 광해군조에 비구니 신분으로 궁을 자주 드나들어 아버지 이귀의 반정을 도왔다.[7]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서인지 아전이 탐욕스러운 이유는 부모와 처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니 아전들에게 녹봉을 넉넉하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8] 공교롭게도 이귀가 귀양을 간 이천은 이귀가 세자 시절의 광해군을 도와 민심을 수습한 곳이다.[9]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명(李溟)이 평산에 순찰하러 오자 이귀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군사를 일으켜 바로잡아 구제할 뜻을 언급하는 바람에 들통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이귀가 사람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일이 자주 발각되었다고 한다.[10] 대감이라는 호칭은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쓰는 호칭인데 이때 이귀의 직책은 종2품 이조참판이라 대감 소리를 들을 위치가 아니었다. 이이첨이 이귀에게 아첨을 한 셈.[11] <연려실기술>에서는 유순익을 통하여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폐론(廢論)을 멈추게 하였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내 힘이오. 그런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오"라고 말한 걸로 나온다.[12]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 이귀의 비명에 의하면 이귀가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이이첨이 폐모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설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혼정평록>의 기록에 의하면 기축옥사로 이이첨과 이창후가 유적에서 삭제되자 이창후가 이귀에게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니 이귀가 처음에는 이창후에게 "너는 선비가 아니라고 책망했지만 힘을 다해 주선하겠다"며 구면(具𡩄)에게 가서 "이이첨과 이창후가 때를 맞추어 회문(回文)을 내지 않았다" 하여 갑자기 역적을 구해내려 했다는 죄를 씌웠으니 이로 인하여 마침내 망극한 지경에 이른다면 그대들은 앞으로 선비들의 논의에 죄를 얻을 것이니 우리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구면이 즉시 편지를 동료에게 내어 정거(停擧)가 해제되었다고 한다. 아마 이때의 인연들 때문에 이귀에게 살려달라고 빌 생각을 한 걸로 보인다.[13] 이괄이 좌포도대장일 때 박진장을 잡아들이다 행패를 부렸다는 죄목으로 탄핵했다. 실제로는 공조좌랑 홍진도가 이괄의 병사들을 빌려 벌인 짓이었고, 진상을 알자 이귀도 이괄이 아닌 홍진도를 탄핵했다. 그러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아 홍진도는 처벌받지 않았다.[14] 참고로 또 다른 북인 실력자였던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15] 정두경이 지은 동명집에 있는 이귀의 묘지(墓誌)에 따르면 이귀가 죽자 신원된 사람의 아들들 중에서 이귀를 위해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한 자도 있었다고 하며 조익이 지은 이귀의 비명(碑銘)에 따르면 전유형의 아둘 전현이 심상을 3년 동안 입었다고 한다.[16] 인조의 어머니이자 정원군의 부인으로 흔히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로 일컬어진다. 죽었을 때는 아직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계운궁'이라고 불렸다가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고 난 뒤에 '인헌왕후'라고 시호가 올려졌다. 정원군은 광해군 시절에 죽었으나 부인은 아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을 보았고 부대부인으로 격상되었으나 이때 죽었다.[17] 이때 인조는 아들로서 3년상을 치르려고 했는데 다들 태클을 걸었을 때 이귀만 옹호했다.[18] 둘이서 "굳이 해야 한다면 칭신도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했는데 고려 때도 송나라와 금나라를 함께 섬겼었다고 근거를 댔다.[19] 인조는 이 일로 이귀를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그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20] 이때 이귀의 공격을 받았던 정승은 상촌 신흠이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귀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베어버리겠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인조가 직접 "이귀가 남인 정경세와 최현에게도 베어버리겠다."고 한 적이 있음을 고백할 정도. (무려 이때는 인조를 인견한 자리였다. 그러니까 왕 앞에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말한 셈.) 당색이 같았던 신흠에게조차 이랬다. 다만 윤방의 옹호에 의하면 진짜 목을 벨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추고나 파직과 같은 가벼운 벌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귀의 성격이 다혈질이라 화를 못 참고 말이 막나간 것에 불과한 듯하다.[21] 김덕령은 1592년 고경명 막하에서 의병으로 종군하다 낙향하고 1593년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참조[22] 이 점은 이귀 본인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인조에게 아부하였다면 부귀를 이루었고 진작에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인조를 디스하였다. 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1번째 기사[23] 실제로도 인조반정 이전에 김류가 많은 직책을 거쳤으며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대부분 유생 신분이거나 해서 공신임에도 바로 고위직을 받은 게 아니라 종6품을 받고 고속 승진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서도 이귀, 김류, 최명길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 좌랑 등을 맡으며 인사권을 쥐었는데 3명이 그나마 벼슬을 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일 여러 직책을 거친 건 김류인데 최명길도 이전까지 가장 위로 올라간 직위가 좌랑이었고 이귀는 아예 군수만 전전했기 때문.[24] 김자점은 미운털이 박힌 데다가 잘못을 저질러 결국 역적이 되었지만 이시백은 끝까지 잘나갔다.[25]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26]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도 이귀 본인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에 선조가 살아 있을 때 정인홍을 유배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작성하였지만 미처 올리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