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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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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남곤
南袞
출생 1471년(성종 2년)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대항리 상항
(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상항마을)[1]
사망 1527년 4월 20일[2] (향년 55 ~ 56세)
(음력 중종 22년 3월 10일)
재임기간 제57대 영의정
1523년 5월 13일[3] ~ 1527년 3월 12일[4]
(음력 중종 18년 4월 18일 ~ 중종 22년 2월 1일)
시호 문경(文敬)1568년(선조 1) 추탈
본관 의령 남씨[5]
사화(士華)
지정(止亭), 지족(知足), 지족당(知足堂)
부모 부친 - 남치신(南致信)
모친 - 진주 하씨 하비(河備)의 딸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
자녀 슬하 1남 4녀
장녀 - 한산 이씨 이선(李墠)의 처
차녀 - 여산 송씨 송지한(宋之翰)의 처(1492 ~ ?)
3녀 - 진주 류씨 류충경(柳忠慶)의 처
4녀(서녀) - 거창 신씨 신대윤(愼大胤)의 처
장남(서자) - 남승사(南承嗣)[6]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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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문관이자 유학자이다.

2. 생애

고려 말 참지문하부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양주에 은거한 남을진(南乙珍)의 증손으로, 조부는 남규(南珪)[7]이며 아버지는 곡산군수를 지낸 남치신(南致信)이다.# 개국공신 남재는 남곤의 조부 남규의 사촌 형으로서, 남곤에게는 재종조부로서 6촌 관계가 된다. 세조 대의 무신인 남이는 남곤의 사종손(四從孫)으로 10촌 관계이다. 배위는 숙천부사 이세웅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사림파의 중시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직계 제자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김일손과도 친했다고 한다. 김일손, 김안국과는 7살 차이, 김굉필과는 무려 17살이나 나이차가 나며 조광조와는 아래로 11살차. 다만 당시에는 나이차가 나도 망년지교를 맺는 관계가 많았다고 한다.[8] 물론 친구를 먹었다한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호 존대하는 것은 기본 예의였다. 어려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죽을 위기를 넘긴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갑자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으며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은 물론 반 세대 차이나는 선배인 남곤 또한 즐겨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오사화 이후 시점이면 남곤은 이미 생존자로 끝발 높은 고위 관료였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어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으나 남곤은 눈길 1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그는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도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참고해야 할 것은 이처럼 지나치게 냉정한 인간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흔히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므로 출처도 불분명하고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한 야사다. 이와 비슷한 야사는 다른 인물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며 조광조 모친의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에 그저 야사 정도로 취급하는게 좋을 듯하다.[9] 남곤이 진짜 냉혹한 사람이였다면 조광조를 죽일 때도 찬동하였을 것이다. 너무 차갑고 냉정하다고 박한 대접을 받던 남곤은 정작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하여 대명 외교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으니 남곤 입장에서는 억울할 따름.

성종 때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494년에는 과거에 급제했으며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성종 때 외척 윤필상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류순정, 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또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10] 그 뒤 낭관, 직제학, 부제학, 좌부승지를 거쳐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연산군 초기 도승지를 지냈다.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을 성종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라 비난했고 연산군의 행동에 간언을 하다가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된다. 1504년의 갑자사화로 유배지에 위리안치형이 내려짐으로서 자칫하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으며,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는 밉보였지만 중종반정을 긍정하고 지지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오사화에 죽은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뒤 이장할 때 추도시를 짓기도 하였다. # 역모를 고변한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한 뒤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으며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했다. 1518년에는 종계변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변무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되돌아왔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홍순언이 해결하는 그 일이다. 글을 잘 써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했었다고 하며 당대의 대문장가였는데 애초에 조광조 측의 미움을 받은 것도 문장을 잘해서였다. 남곤은 조광조를 천거하고, 적극 밀어주면서 조광조의 벼슬까지 중종에게 올려달라 청하는 등 조광조를 지지하면서 도움을 주었지만, 시와 문장을 잘한다는 이유로 소인으로 몰리고 이후 정광필과 함께 현량과에 반대하면서 이후에 조광조는 남곤에 대해 근거없는 편협한 망상에 휩싸였다. 남곤은 조광조가 하는 행동이 지나치다고는 여겨도, 젊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해보려다가 철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으로 여기며, 축출 자체도 중종이 병력을 동원한 모습에 마지못해서 따른 모습으로 보인다.[11]

1519년 심정, 김전 등과 함께 중종의 비밀 명령을 받고 입궐해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했다. 발의와 결정은 중종이 했으며 정광필 등을 설득하는 역은 남곤이 맡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파와 안당 등의 친사림 재상들이 모조리 숙청됐는데, 후에는 진짜 원인 제공자인 중종을 대신해 그가 모든 죄를 쓰게 됐다. 비록 심정과 홍경주와 함께 중종의 기묘사화를 초기에는 방관했다고 해도 조광조가 잡힌 이후에는 처벌 수위를 낮게 청하며 가장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조광조를 살리려고 애썼지만 부끄러움을 느껴 귀가했다고 했고, 조광조의 사사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슬퍼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히려 남곤이 조광조빠라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다.[12] 이 때문에 남곤이 조광조 축출 자체에는 동의해도, 정말로 죽이기 보다는 '조광조를 파직하고 몇 년 귀양 보내서 정치에서 손떼게 하는 정도면 되겠지?' 정도로 온건하게 판단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조광조를 살리기 위해 가장 노력한 것이나 조광조의 행동이 도가 지나쳐서 잠시 반성 좀 하고 오길 바라는 것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13] 또한 중종이 병력까지 동원하여 완전히 기세를 잡고, 조광조 세력을 모두 축출할 때 남곤은 중종에게 소극적으로 따르면서도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등 동의하지 않는데 위세에 눌려 마지못해서 따른다는 기색이 대놓고 드러난다.

그 후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이 된 이후 떠오르고 있던 김안로에 대해 위험 의식을 느끼고 그를 유배시켜 버린다. 도학 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를 몰아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김안로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간신은 아니었는데, 차림은 수수했고 뇌물을 멀리했다. 사실 심정이나 이행 등 남곤 일파들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한 인물들이었으며 차라리 사림의 지지를 받은 김안로가 독재자급의 만행과 사치를 보였다.[14] 반정 3대신이 죽은 이래 윤씨 외척들이 등장할 때까지의 관료들은 대부분 사림이며 그래서 이 시대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보기 보다는 되려 선조 초기 사림의 노소 분열과 유사한 강온 대립이라고 보는게 이해에 빠르다.

남곤의 입장은 현실적인 업무에 치중하는 쪽으로 정광필과 비슷한 업무자였지만, 권력을 쟁취할 생각도 없었고 조광조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면 중종에게는 대들지도 못하기도 했다.[15] 조광조 측에서 '시나 문장 같은 거 모조리 없애야 됩니다!' 식의 발언을 하자 '그럼 중국과의 외교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하고 반대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는데 사화 이후 땅으로 떨어진 학풍과 권신들의 행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등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기묘사림이 남곤을 포용하지 못하건 사실이며, 심지어 조광조의 경우는 특별 고과에서 장원급제 때 감독관이 남곤이었다. 그저 시를 잘 한다고 공격하면서 소인배로 몰아세우는 등 조광조는 자신을 밀어주고 줄곧 지지해준 선배를 통수친 것. 그러나 아무나 소인으로 몰면서 공격하는 조광조의 행동은 결국 오만함과 독선이 되었고, 본인은 나름 개혁을 생각했지만 독선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서 수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었다.[16] 남곤은 과격한 개혁은 없이, 안정적을 중시했다지만 현실적인 업무를 해왔었고 조광조와 딱히 척을 질 생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조광조가 뽑힌 특별히 주최한 고과에서 감독관이 남곤이었다.. 인물임에도 지나치게 사림이 꼬장꼬장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며, 조광조는 죽기 전에도 남곤이 자신을 구하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남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있었다. 정작 조광조를 살리려고 중종에게 앞장서서 정면으로 대든 것이나, 조광조가 죽자 가장 슬퍼한 사람이 남곤이었다고 기록됐다.[17] 중종에게도 젊은 사람이 잘 해보려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며 죽을 죄가 절대 아니라는 것 외에도 수없이 중종과 언쟁까지 벌이며 앞장서서 조광조를 살리려고 했던 것이나, 조광조가 고과에 장원 급제 때 감독관을 했던 것, 그리고 조광조가 죽은 후에 사관들도 다 알 정도로 가장 슬퍼했다는 것을 보면 남곤은 조광조를 독선적인 면과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경험이 부족한 젊은 후배가 실수를 할 뿐이라 생각하며 조광조가 장원급제할 때 자신이 감독관이었에도 자신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며[18] 온갖 음해망상을 품고 있던 조광조를 원망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중종이 조광조를 죽인다고 할 줄도 모를 때도 중종이 조광조를 찍어내기 하루 전, 남곤에게 밀지를 내려서 정광필을 설득하라 지시했지만 남곤은 정광필을 찾아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광필이 쏘아보자 무안해하면서 이장곤더러 대신 말해달라고 하는 등 조광조를 찍어내는 것조차 찬성하지 않고 거부감을 느꼈으나 중종이 두려워서 중종의 억지에 따르던 것임을 알 수 있다.[19] 그리고 중종이 아예 조광조를 죽이려는 순간, 조광조를 살리려고 필사적이 된 것을 보면 중종이 무서워서 파직 정도는 굴복했었으나, 아예 죽이려고 하니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기묘사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개혁을 지지하던 사림에게 주적으로 찍히면서 복지부동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20] 남곤은 조광조를 죽음까지 몰고 갈 생각이 아니었으나, 결국 자신이 악명을 뒤집어썼고 결과적으로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사림파의 차세대 리더라는 명망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세력도, 명망도 모두 잃은 허울 좋은 영의정 남곤에겐 하던대로 하면서 누리던 영달을 계속 누리는 길만 남는다.

중종 18년에는 이미 남곤이 누명을 쓴 것을 그대로 믿는 사관들도 나오고 있었지만, 이런 사관도 이계맹이 기묘사화에 피해를 본 자들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두고 기묘인들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곤을 간사하다고 비난하면서 남곤이 기묘사화를 주도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 때 조광조를 발탁하여 천거한 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감독관이었던 남곤이 조광조를 발탁하여 천거한 장본인인 것. 사실 중종만 사사를 외쳤지, 신하들 모두가 소극적으로 반대하거나, 남곤과 정광필이 필사적으로 반대한 것을 보면 "젊은 사람들이 뭘 모르고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실수 좀 한 것 갖고 너무한다."라는 인식은 다들 공유하던 것으로 보인다.[21]

죽기 전 자신이 쓴 글들을 꺼내면서 "나는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나의 죄가 더해지지 않도록해라. 나의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조광조가 죽은지 8년만의 조금 빠른 죽음이었다. 자신의 글들 대부분을 태우지 않고 남겼더라면 당시 문학과 시대, 남곤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기에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세상을 떠난 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김안로의 복귀로 그의 동지들은 4년만에 풍비박산이 났으며 당장 중종 말년부터 조광조 일파인 김안국이 복권되었다. 김안로의 축출로 잠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조광조의 후학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 13년) 도로 관작과 함께 삭탈당하였고 선조 초년에는 결국 관작을 추삭(追削)당하였다.

사후에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가계가 몰락했으므로 그의 가계는 연대도 맞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 본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 사이에서는 딸만 3명이지 아들이 없고 서자로 1570년(선조 3) 식년시 의과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을 지낸 남승사(南承嗣) 한 사람을 두어 겨우 후손을 이어갔으므로 누구 하나 그에 대해 정확하게 재조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22] 서자인 남승사는 의과에 급제했는데 이극돈의 서자들의 케이스와 같으며 이건 사실 서얼은 당시 문과 응시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진급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3][24] 이후 조선사에서 서자로 고관에 오른 류자광 같은 사람은 씨가 마르게 되고 당상관에 오른 허준은 족보에 서자라고 되어 있음에도 알고 보면 적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 정도가 된다. 사실 허준의 경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던 선조의 영향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25]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썼으나 사화를 일으킨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당장 이 누명은 중종 시대때부터 벌어지는 징조가 있는데, 정광필이 아랫사람들은 억울하게도 남곤과 홍경주가 저지른 일인 줄 알고 있으니, 중종이 한 일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서 이것은 두 사람이 한 게 아니라 임금의 뜻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야한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욕먹었는지 후에 현종김만중허적을 남곤과 심정에 빗대어 탄핵했다. 탄핵 과정은 서인인 김만중이 좁게는 탁남, 넓게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지만 말이다.[26][27] 그런데 허적은 서인 세력들과도 인척으로 엮어져 있었고 서인에게도 온건히 대했으며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28] 김익훈, 김석주와 인척이었으므로 허적은 김만중, 김만기와도 인척이 된다.[29] 그래서 허적이 경신환국 이후 사약을 받을 때 서인 세력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송시열이나 김수항, 김수흥, 민정중, 민유중, 이단하, 홍처량, 이정영, 정지화, 이상진 등은 허적을 살리려고 했다.

3. 기타

庭前柏樹儼成行(정전백수엄성행) / 뜰앞의 잣나무는 삼엄하게 늘어서
朝暮蕭森影轉廊(조모소삼영전랑) / 아침저녁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돈다
欲問西來祖師意(욕문서래조사의) /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 물으려 하니
北山靈風送凄凉(북산령풍송처량) / 북산의 신령한 바람 서늘한 기운 보내온다

4. 대중매체

5. 둘러보기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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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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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이방원 정사공신
(하륜, 조영무 등)
관학파, 종친
(황희, 맹사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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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고명대신 정난공신
(수양대군)
훈구파
(한명회, 신숙주 등)
성종 연산군 중종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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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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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조광조)
反김안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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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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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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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

[1] 이 마을은 외조부인 호군 하비(河備)의 고향이며, 지금도 진양 하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457번지에는 남곤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남곤이 딱밭이라고 하는 지명이 남아있다.#[2] 율리우스력 4월 10일[3] 율리우스력 5월 3일[4] 율리우스력 3월 2일[5] 사천백공파(沙川伯公派)-사간공파(司諫公派)[6]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 서자를 법적으로 본처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민간 양반가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후사를 이은 서자는 당연히 그 집안의 적장자로 취급받았다. 이는 민간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경종 등이 대표적인 사례.[7] 남규는 임사홍의 외할아버지이다. 즉 남곤-임사홍은 내외종 사촌 관계다.[8] 당장 오성과 한음이항복이덕형, 정몽주정도전도 나이차가 있었던 망년지우였다. 오히려 1~2살 나이 꼬치꼬치 따지는건 근현대에 들어 군대 문화가 침투해버리는 바람에 굳어진 풍토다.[9]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는데 이 쪽은 평가가 정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용두 화흠과 용미 관녕의 일화. 이 때 인간적인 화흠을 관녕은 선비도 아니라고 갈라서는데 화흠이 악역이다. 조조 쪽에 붙어서 화흠이 대표적으로 디스당한 인물이라고 해도 해석이 정반대라는 것이 이채롭다. 재미있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한국이 더 극단적이고 교조적인 경향이 강한데 야사에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10] 유순정과 성희안은 뒷날의 반정 공신으로 이 때문에 중종 때 1번의 위기를 또 넘기기도 한다.[11] 정광필을 설득하라고 중종이 남곤을 보냈을 때, 남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부분을 보면 병력까지 동원한 중종의 친위 쿠데타에 소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도 본심은 축출 자체에도 동의하지 않고 그저 중종의 위세에 눌려 소극적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조광조랑 남곤과 같이 정면에서 싸우던 정광필은 이런 축출 자체를 중종이 하는 것을 대놓고 싫어하며, 중종의 면전에다가 대고 전하 외에 축출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데 이게 왜 조정의 뜻이냐고 따지기도 했다.[12] <다시 쓰는 간신 열전>을 쓴 함규진은 이를 보고 예수십자가에 매달려 죽자 후회하고 자살한 유다에 빗댔다. 복음서를 봐도 유다 역시 죽일거라 생각은 못했는지 울부짖는 기록이 있다.[13] 조광조의 행동이 잘못됐다 비판하나, 동시에 의욕이 넘쳐서 자신이 소인이 된 줄도 모르고 한 실수일뿐이라 감싼다.[14] 정작 사림들은 김안로보다 남곤과 심정을 간신으로 취급하며 욕을 해댔고, 주초위왕 같은 불가능한 일까지 지어냈으며, 사림파들에게 살해의도가 전혀 없던 심정 등과 달리 사림들은 심정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는 이에 대한 비판은 다 사림을 해하려는 음모로 몰아붙이며 심정 등을 죽이며 사실상 서로를 진짜로 죽이는 조선 정쟁의 시작을 김안로와 함께 열었다. 사림파의 위선을 보여주는 부분.[15] 그리고 본인이 감독관일 때 장원급제한 조광조에게 정치적으로 공격받는다.[16] 흔히 조광조 일파의 개혁에 대해서 현량과 실시나 소격서 폐지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성우 교수에 따르면 조광조 일파는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의 수탈로 악화된 조선을 복구시키기 위해 공안개정, 노비종모법, 한전제 같은 개혁을 주장했다. # 실현 가능성 운운하며 폄하하는 주장도 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기득권층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전에 중종이 죽여버렸기 때문에 선구자인 이들이 그런걸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현량과와 소인몰이는 해도해도 도가 지나치는 수준까지 갔었다.[17] 심지어 관직도 내버릴 정도로 강경하게 반대했다. 애초 적극적으로 맞서던 사림파였던 남곤이 중종 대에는 훈구파와 소극적으로만 대립하던 이유가, 연산군 때 자신은 유배를 가고 수많은 동문 사림들이 죽은 광경을 봤기 때문이란 추측도 있는데, 중종의 이런 행동은 남곤의 PTSD를 자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18] 이는 개인적으로는 배은망덕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조광조의 주장도 시나 문장을 없애자는 헛소리였고, 현량과는 특히 조광조를 신격화하는 후대 사림들도 옹호하지 못하고 넘어가려는 도를 넘는 심각한 문제였다.[19] 중종 14년 11월 16일 병오 3번째기사.[20] 그렇게 하던 열정적인 사람이 어찌 됐는지를 눈앞에서 똑똑히 봤으니... 공신 몰수에 반대한 주체이자, 공신들의 반발을 얻지 않아야 할 주체가 바로 누구였겠는가? 군주 중종이었다.[21] 남곤도, 이계맹도 이런 식으로 조광조나 기묘사화 때 피해를 본 이들을 옹호했다.[22] 그의 외손자 송인은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중종)와 결혼했으나 아들이 없었던 탓에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23] 성종 대 서얼 차별이 시작된 이래 서얼 및 서얼 자손들에게 문과 응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원래 양천제였던 조선 초기에서 서서히 양반들의 특권이 본격화되고 그 외 신분들을 본격적으로 차별한 시대가 성종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차대법(서얼), 재가자손 금동법, 종친사환 금지법 등의 정책은 성종 대 훈구파가 시작했고 중종 대에 등장한 사림에 의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분할 상속으로 훈구파가 세대가 지나며 자동 소멸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처사였으나 어쩌니저쩌니 해도 훈구파는 자연히 사라졌다.[24] 당장 조광조부터가 낮은 신분에 있다가 벼슬에 오른 사람들을 용납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광조가 서얼 출신 등용을 반대한건 아니다. 조광조는 서얼 허통을 주장하였고 아예 중종에게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아 인물이 적은데 서얼(庶孽)과 사천(私賤, 사노비)을 분별하여 쓰지 않는다며 서얼과 사노비가 등용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25] 선조임진왜란 호송 공신으로 마의, 종계변무로 역관을 공신에 올리는 파격적인지 감정에 휩쓸리는지 모를 행동을 했다. 종계변무와 엮인 야담은 선조의 기행 때문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6] 그러나 정작 김만중의 선조는 남곤보다 보수적인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김만중의 선조는 다름 아닌 세조~성종 때 세조 찬위에 찬성하고 예종 시절 남이의 옥을 주관했으며 성종 때는 원상으로 한명회, 신숙주 등과 조정 국사를 주관했던 김국광이었다. 김만중은 숙종의 외척이었는데 형인 김만기가 숙종의 1번째 장인이었으며 김만중의 숙부인 김익훈은 소인배로서 온갖 공작 정치를 주도해서 남인들을 싹쓸이를 해버리려다가 허새의 옥사를 조작한 혐의로 후에 기사환국 때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27] 그러나 허적은 당시 같은 서인이자 병조판서였던 김석주와 연합해서 정권을 잡은 고명대신이었다.[28]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29] 김만중의 종조부인 김집이 허적과 인척을 맺었다.[30] 하지만 알게 모르게 전해져오는 문장이 많다. 일례로 소세양 부친 소자파의 묘비명도 있고 절친 읍취헌 박은, 용재 이행과 함께 지은 시를 엮은 <천마잠두록>도 있다.[31] 다만 작품에서는 남곤의 아들이 여럿인 것처럼 표현했는데, 전술했듯 남곤의 알려진 아들은 서자 남승사밖에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있다고 해석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