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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01:59:38

의령 남씨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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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寧 南氏
의령 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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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관향 경상남도 의령군
시조 남민(南敏)[1]
분파 여남 김씨[2] → 영양 남씨[3] → 의령 남씨[4]
중시조 남군보(南君甫)[5]
파조 충경공계(忠景公系) 충간공파(忠簡公派)[6]
남윤(南倫)[7] / 감사공파(監司公派)
남칭(南偁)[8] / 부정공파(副正公派)[9]
남구(南俅)[10] / 간성공파(杆城公派)[11]
남휴(南休)[12] / 별좌공파(別坐公派)
남의(南儀)[13] / 참판공파(參判公派)
충경공계(忠景公系)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14]
남준(南俊)[15] / 감찰공파(監察公派)[16]
남척(南倜)[17] / 목사공파(牧使公派)
남건(南健)[18] / 호군공파(護軍公派)
남급(南伋)[19] / 군수공파(郡守公派)
충경공계(忠景公系) 의산위공파(宜山尉公派)[20]
남빈(南份)[21] / 부사공파(府使公派)
남붕(南倗)[22] / 소간공이자붕파(昭簡公二子倗派)
강무공계열(剛武公系列)[23]
남경우(南景祐)[24] / 안호공파(安胡公派)
남경복(南景福)[25] / 판사공파(判事公派)
남경지(南景祉)[26] / 부정공파(副正公派)
남실(南實)[27] / 보문각제학공파(寶文閣提學公派)
사천백계열(沙川伯系列)[28]
남근(南瑾)[29] / 정랑공파(正郎公派)
남이(南珥)[30] / 목사공파(牧使公派)
남규(南珪)[31] / 사간공파(司諫公派)
남을경(南乙敬)[32] / 좌찬성공파(左贊成公派)
남천명(南天命)[33] / 시중공파(侍中公派)
양정공계열(良靖公系列)[34]
남상명(南尙明)[35]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남상치(南尙治)[36] / 쌍청헌공파(雙淸軒公派)
집성촌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동[37]
경기도 가평군·부천시·성남시·양주시·용인시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충청북도 청주시·영동군·음성군·진천군
충청남도 논산시·아산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정읍시
전라남도 고흥군·담양군·순천시·신안군·여수시
경상북도 구미시·상주시·안동시·영양군·울진군·청도군
경상남도 밀양시·의령군·진주시·창녕군·창원시·하동군
황해도 연백군
평안남도 대동군
함경북도 경흥군·부령군·종성군
인구 162,729명(2015년)
130,179명(1985년)
링크 남씨대종회
1. 개요2. 역사3. 인구4. 분파5. 집성촌
5.1. 경기5.2. 강원5.3. 충청5.4. 전라5.5. 경상5.6. 북한
6. 인물
6.1. 조선시대 인물6.2. 조선 왕실의 인척6.3. 근·현대 인물
6.3.1. 22세 (종(鍾), 정(廷) 항렬)6.3.2. 23세 (연(淵), 희(熙) 항렬)6.3.3. 24세 (상(相) 항렬)6.3.4. 25세 (우(祐) 항렬)6.3.5. 26세 (기(基) 항렬)6.3.6. 27세 (현(鉉) 항렬)6.3.7. 28세 (택(擇), 윤(潤) 항렬)6.3.8. 세수 미상
7.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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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의령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자, 경남여객 등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수원시, 용인시 일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토호다.

2. 역사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씨의 시조는 당나라 현종이부상서를 지낸 김충(金忠)이다. 당 조정은 755년(천보 14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낙양과 수도인 장안을 내주고 김충은 황제를 따라 옛날 촉한의 수도였던 성도로 파천하였다. 이후 김충은 왕명을 받아 군사원병을 청하러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신라 영해부에 정착하였는데 본국의 정세가 어지러워 신라 국왕에게 귀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경덕왕이 이러한 사실을 현종에게 알리자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의 출생지가 당나라 여남(汝南)이라하여, 남씨(南氏)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렸다. 이로써 영양남씨(南氏)의 시조가 되었다.[38]

다만, 의령 남씨의 시조에 대한 배경은 당대의 소중화 및 숭화 사상의 영향으로 각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39] 안록산의 난은 물론, 그 뒤이어 발발한 사사명의 난 당시에도 당나라는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한 바 없고[40], 일본 측 사료에서도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남씨는 김충(남민)이 아닌, 당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남단덕(南単徳)[41]이다. 즉, 전술한 근거들로 보았을 때 남씨의 시조 배경은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유래가 중원이 아닌 고구려에 있었음이 되려 개연성이 있어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42][43]

이처럼 족보상으로는 남민(南敏)이 시조가 되겠지만, 전술했다시피한 이유들[44] 때문에 실질적인 시조는 고려 무신정권 때 대장군을 지낸 남진용(南鎭勇)에 더 가깝다. 남민의 7세손이 남진용이라 히지만 시조의 유래가 맞다는 것을 전제로 8세기 중후반의 남민으로부터 13세기 중후반의 남진용까지는 약 50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약 20대 이상으로 추정되고 해당 인물들을 알 수 없다.[45]

여하튼 원종-충렬왕대의 대장군 남진용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차남 남군보(南君甫)는 원간섭기인 고려 충렬왕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으며, 이후 의령 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그 밖에 장남 남홍보(南洪甫)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영양 남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3남 남광보(南匡甫)는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시조가 되었다고한다.
남군보의 후손은 영양남씨의 밀직공파로 남기도 하였다. 이에 영양남씨이기는 하지만 남군보의 5대손인 남휘주(南暉珠)는 1356년 친원파 기철, 권겸, 노책 등의 역모를 진압한 공으로 중랑장에 발탁되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의령남씨는 1세인 남군보가 추밀원부사[46]를 지낸 이래로 풍저창사[47]를 지낸 2세 남익지와 지영광군사[48]를 지낸 3세 남천로 이후 4세 남을번, 남을진 형제가 각각 밀직부사[49]참찬문하부사[50]를 지내면서 고려말에 두 형제가 모두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남을번의 경우 이성계와 교분이 깊어 그의 네 아들이 모두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장남 남재와 차남 남은조선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녹훈되면서부터 그의 후손들은 조선조 시작과 더불어 중앙 정계의 중추에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정승 6명[51], 대제학 6명[52][53], 판서 24명[54]을 배출했다. 그리고 종묘배향공신 4명[55]을 배출하였다. 사실상 개국공신[56] 가문들 중 조선후기까지 가장 오래 버틴 가문이라고 보면 되겠다.# 남이 장군, 남이흥 장군과 생육신 남효온, 숙종영의정을 지낸 남구만 등도 의령 남씨이다.

의령 남씨는 당파적으로 크게 노론/소론/소북(小北)[57]으로 나뉘었다.

먼저, 노론의 감찰공파 [58] 는 개국1등공신 남재의 손자로 세종 때 예문관의 직제학과 사간원의 차관인 지사간원사를 지내고 대사헌에 추증된 7세손 남간의 장자인 8세손 남준 [59] 으로부터 시작된다. 파조 남준의 손자인 10세 남효의가 생육신인 남효온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한때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중종 때 대사헌·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지내면서 이후 감찰공파는 중앙 정계에서 계속 활동을 하게되는데 이를 통해 파조 남준의 고조인 4세 남을번부터 증조 5세 남재, 부친 7세 남간으로 부터 남준을 거쳐 26세 남기창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으며 8세 남준 [60], 12세 남맹하 [61] 를 제외하고는 4세 남을번부터 26세 남기창까지는 모두 3품이상의 관직에 있으면서 조선조 명문가의 반열에 있었다. 특히 이 기간에 대제학을 4명이나 배출하고 안동 김씨와 혼맥관계를 맺으며 노론 벽파 무리를 조정에서 쫓아내었고 노론 시파의 명문가로서 순조~철종 시기 최고의 경화사족 세도가문의 일원으로 승승장구하였다. 특히 남효의의 5세손인 15세손인 남득붕과 아들 16세손 남용익은 당상의 반열에서 서인세력의 중진으로 있었고 그의 아들인 17세 남정중 역시 대사헌, 대사간, 경상관찰사 (이상 종2품) 등을 역임하며 노론의 중진인사인 김창집김창협조태채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남정중은 노론에 속하였으나, 숙종 후기에 노론과 소론이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일 때에, 그는 가능한 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이러한 가문적 배경이 남정중의 증손자인 영의정 남공철로 하여금 강경파인 노론 벽파가 아닌 시파를 선택하게 한 것 같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4세 남을번 [62] - 5세 남재 [63] - 6세 남경문 [64] - 7세 남간 [65] - 8세 남준 [66] - 9세 남회 [67] - 10세 남효의 [68] - 11세 남경춘 [69] - 12세 남맹하 [70] - 13세 남복흥 [71] / 남복시 [72] - 14세 남진 [73] / 남선 [74] - 15세 남득붕 [75] - 16세 남용익 [76] - 17세 남정중 [77] - 18세 남한기 [78] - 19세 남유상 [79] / 남유용 [80] - 20세 남공필 [81] / 남공철 [82] - 21세 남인구 [83] / 남지구 [84] - 22세 남주헌 [85] / 남정헌 [86] - 23세 남태순 [87] / 남구순 [88] - 24세 남병선 [89] /남병철 [90] /남병길 [91] - 25세 남일우 [92] - 26세 남기창 [93] 으로 4세부터 26세까지 조선조 내내 중앙정계에 있었던 가문이다.

둘째로, 소론의 간성공파는 개국1등공신인 남재의 장손이자 남간의 형인 좌의정 남지의 후손인데 남구만이 서인의 온건파로써 윤증, 박세채, 나양좌 등과 함께 소론을 창당하였다. 이들도 역시 소론의 명문대가로서 잘 나간 것으로 보이나, 영조이인좌의 난을 거쳐 나주괘서사건의 여파로 소론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다. 흥선대원군고종 시절 탕평책으로 남정철(후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집안을 크게 키워준 걸 보아, 소론의 명문가로서의 위세가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것 같다.

셋째로, 소북(小北)의 부정공파는 역시 문종·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남지의 후손인데 소북의 영수인 남이공의 형 남이신의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소북은 이후에 근기남인으로 탈바꿈 하였는데 사색당파(북인 중 대북은 인조반정 때 멸문되었다. 따라서 실록에서 북인이라 함은 근기남인으로 전향한 소북을 가르킨다) 중 영남남인과 더불어 소수파에 속했다. 영조~정조기의 당상관 배출 인원 비율은 노론 81%, 소론 14%, 소북(근기남인) 4%, 영남남인 1%이었다. 소북(근기남인)이 비록 4%에 불과했지만 부정공파 가문이 판서를 8명이나 배출하면서 4%에 기여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순조~철종때의 세도정치 시기에도 소북으로서 당상관을 배출한 명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흥선대원군 시절 탕평책을 천명하면서 구한말의 남씨 인물들이 부정공파에서 많이 중용되었다.

한편 3세 남천로의 차남이자 남을번의 동생인 4세 남을진(南乙珍)은 고려 말 도당 회의에 참석하는 재신이자 중서문하성재상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94]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양주남선굴(南仙窟)에 들어가 은거한 불사이군(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충신으로 숙종과 영조 년간에 서원에 배향되었고, 1841년(헌종 7) 남을진의 신도비를 세우면서 풍양조씨의 우의정 조인영이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남군보의 또다른 후손 남효원(南孝元)은 조선 중종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의령 남씨의 한 파를 이루었다고 증보문헌비고에서 전한다.

남군보의 후손으로서 조선시대 봉군(封君)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 남재 - 태종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다.
● 남은 - 태조 때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에 올랐으며, 의성부원군(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 남지 - 세종 때 우의정, 문종/단종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 남휘(南暉) - 태종의 4녀 정선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 남치원(南致元) - 남재의 5대손으로 성종의 서4녀 경순옹주(慶順翁主)와 혼인하여 부마로서 의성위(宜城尉)에 봉해졌다.
● 남섭원(南燮元) - 남재의 5대손으로 성종의 서9녀 휘정옹주(徽靜翁主)와 혼인하여 부마로서 의천위(宜川尉)에 봉해졌다.
● 남찰(南巀) - 남은의 5대손으로 선조 때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올랐으며, 평난공신(平難功臣)#으로 의계군(宜溪君)에 봉해졌다.
남이흥(南以興) - 남재의 8대손으로 인조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며,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 남이웅(南以雄) - 남재의 8대손으로 인조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진무공신으로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 남두북(南斗北) - 남재의 9대손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으로서 의풍군(宜豊君)에 봉해졌다.
● 남연년 - 양정공 남좌시의 후손으로 청주영장을 지냈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다. 충장공 시호를 받았고 숭선군에 추봉되었다.
별록 고려시절(양정공파 계열)
남효윤: 남군보의 아들로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을 지내고 봉익대부 판도판서, 선력좌리공신에 추증되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남훈: 남효윤의 아들로 봉익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를 지내고 익조공신 중대광에 증직되고 의춘군에 봉해졌다.
남대번: 남훈의 아들로 첨의부 좌정승[95]을 지내고 시호는 충질공, 장함부원군에 봉해졌다. 시를 잘하였고 금을 다룰 줄 알았다.
남좌시[96]: 남대번의 아들로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는 양정공, 의성군에 봉해졌다. 양정공파 파조.

3. 인구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의령 남씨는 162,729명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2018년 12월 28일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하면 잘못 기재된 성씨와 본관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는데, 2015년 인구조사에서도 조사원 또는 담당 공무원의 실수로 잘못 집계된 본관들이 상당히 많다.

의령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본관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의령(宜寧)의 의(宜)선(宣)으로 잘못 판독한 것으로 추정. 寧은 녕, 령, 영 등으로도 읽힘. - 선녕 1,583명, 선령 766명, 선영 2,452명
동남 방언의 영향으로 의령을 소리나는 대로 읽은 것을 본관에 집계한 것으로 추정. - 어령 19명, 어룡 6명, 어영 15명, 을녕 75명, 을량 12명, 을령 43명, 을영 106명
● 의령의 령(寧)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 - 의녕 7,955명, 의룡 14명, 의영 1,206명
● 의령의 고려 때 이름 의춘(宜春) - 의춘 56명
● 성씨 남(南)의 한자를 잘못 기재 - 의령 남(男)씨 7명

※ 이들 본관을 의령 남씨에 합산하여 집계하면 총 177,044명이다. 남씨의 본관이 대개 의령, 영양, 고성, 남원 등 4개가 있는 것으로 보는 반면 2015년 통계에는 139개의 본관이 나타났으므로 잘못 집계된 의령 남씨의 숫자는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분파

의령남씨(宜寧南氏)는 크게 충경공파(忠景公派), 강무공파(剛武公派), 보문각제학공파(寶文閣提學公派), 사천백공파(沙川伯公派), 좌찬성공파(左贊成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양정공파(良靖公派)로 나뉜다.

충경공파(忠景公派) - 파조는 좌명개국공신 1등(佐命開國功臣 一等, 1392)이자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강무공파(剛武公派) - 파조는 좌명개국공신 1등(佐命開國功臣 一等, 1392)이자 태조 때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를 지낸 의성부원군(宜城府院君) 남은(南誾)[100]
보문각제학공파(寶文閣提學公派) - 파조는 태종/세종 때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남실(南實)

사천백공파(沙川伯公派) - 파조는 공양왕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남을진(南乙珍)[102][103]
좌찬성공파(左贊成公派) - 파조는 의정부 좌찬성(종1품)을 지낸 남을경(南乙敬)

시중공파(侍中公派) - 파조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남천명(南天命)

양정공파(良靖公派) - 파조는 우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낸 남좌시(南佐時)[105]

5. 집성촌

5.1. 경기

5.2. 강원

5.3. 충청

5.4. 전라

5.5. 경상

5.6. 북한

6. 인물

6.1. 조선시대 인물

6.2. 조선 왕실의 인척

6.3. 근·현대 인물

신분과 직위를 넘어서 나열하며, 특정 인물의 강조 표기를 금지한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는 사람은 기재를 금지한다.

6.3.1. 22세 (종(鍾), 정(廷) 항렬)

6.3.2. 23세 (연(淵), 희(熙) 항렬)

6.3.3. 24세 (상(相) 항렬)

6.3.4. 25세 (우(祐) 항렬)

6.3.5. 26세 (기(基) 항렬)

6.3.6. 27세 (현(鉉) 항렬)

6.3.7. 28세 (택(擇), 윤(潤) 항렬)

6.3.8. 세수 미상

7. 관련 항목



[1] 시조 설화가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점을 들어 실존 인물이었어도 중국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2] 6세기 동위 ~ 8세기 당나라[3] 8세기 신라 ~ 13세기 고려[4] 13세기 고려 ~ 현재[5] 영양 남씨 밀직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6] 파조는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의 장남인 남경문(南景文)의 장남 남지(南智).[7]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장남.[8]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차남.[9] 부정공파(副正公派) 15세이자 효종 때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낸 남훤(南翧)공의 아들 7명이 모두 영달하였고 그의 자손에서 현관(顯官)이 많이 나와 판서(判書)만 8명으로, 남훤의 호를 따서 창명공파(滄溟公派)로 일컬어졌다.[10]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3남.[11]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남구만이 간성공파이다. 남구만 가문의 혼인 관계를 살펴 보면 노론과 소론의 주요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어 소론의 영수로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의 감찰공파(監察公派)와는 달리 주로 소론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겠다.[12]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4남.[13]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5남.[14] 파조는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의 장남인 남경문(南景文)의 차남 남간(南簡).[15] 예문직제학 증 대사헌 남간(南簡)의 장남.[16] 현달한 인물로는 생육신 남효온, 숙종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남용익(南龍翼), 영조 때 형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 순조 때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남공철(南公轍), 철종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남병철(南秉哲), 철종 때 이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낸 남병길(南秉吉) 등이 있다. 대제학공파 충간공파(忠簡公派)의 간성공파(杆城公派)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노론 → 노론 시파의 길을 걸었으며 순조와 헌종의 국구김조순, 김조근 일가 그리고 김좌근과 혼맥관계를 맺었다.[17] 예문직제학 증 대사헌 남간(南簡)의 차남.[18] 예문직제학 증 대사헌 남간(南簡)의 3남.[19] 예문직제학 증 대사헌 남간(南簡)의 4남.[20] 파조는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의 장남인 남경문(南景文)의 3남 남휘(南暉).[21] 의산위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의 장남.[22] 의산위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의 차남.[23] 검교문하시중 경렬공(敬烈公) 남을번(南乙蕃)의 차남인 남은(南誾)이 파조이다.[24] 삼사좌복야 증 영의정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의 차남.[25] 삼사좌복야 증 영의정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의 3남.[26] 삼사좌복야 증 영의정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의 4남.[27] 검교문하시중 경렬공(敬烈公) 남을번(南乙蕃)의 3남. 남재(南在)의 둘째 동생. 여담으로 막내동생인 4남 우상절제사 남지(南贄)는 증손대에서 절손되었다.[28] 지영광군사 남천로(南天老)의 차남인 남을진(南乙珍)이 파조이다.[29] 문하평리 사천백(沙川伯) 남을진(南乙珍)의 장남.[30] 문하평리 사천백(沙川伯) 남을진(南乙珍)의 차남.[31] 문하평리 사천백(沙川伯) 남을진(南乙珍)의 3남.[32] 지영광군사 남천로(南天老)의 3남. 남을번(南乙蕃)의 막내 동생.[33] 풍저창사 남익지(南益胝)의 차남. 남천로(南天老)의 동생.[34] 첨의부좌정승 남대번(南大蕃)의 장남인 남좌시(南佐時)가 파조이다.[35] 정당문학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장남인 남심(南深)의 장남.[36] 정당문학 양정공(良靖公) 남좌시(南佐時)의 장남인 남심(南深)의 3남.[37] 자하동(백운동)의 현재의 지명은 청운동이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기에 형조참의를 지낸 유한준(1732~1811)은 문집인 <자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서울의 북쪽은 사대부로서 세거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청풍계에 세거한 안동 김씨, 자하동(백운동)에 세거한 의령 남씨, 옥류동에 세거한 기계 유씨가 가장 오래 됐다.” 하지만 현재의 지명은 전부 다른데 당시 청풍계는 현재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남쪽, 자하동(백운동)은 청운동 북쪽, 옥류동은 옥인동을 말한다. 조선의 청풍계와 자하동(백운동)은 합해져 현재 청운동이 됐고, 옥류동은 인왕동(수성동)과 합해져 옥인동이 됐다.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뜻의 자하동(紫霞洞)은 본래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자하동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 남공철 가문이 자하동(백운동)에서 세거하였다.[38]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남병철의 묘지명 중 일부를 발췌[39] 앞서 언급된 철종 대의 이조판서 남병철의 묘지명처럼, 고대 삼국의 유민들의 묘지명은 이런식으로 중국계 조상을 창조하는 수준으로 각색을 자주하였다. 일례로,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 고씨 왕족 출신들의 경우 중국의 후손을 자처하며 발해 고씨에 뿌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주류 사회에 녹아들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작제건 설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려 왕실인 개성 왕씨도 비슷한 수법으로 조상 바꿔치기 수준으로 가문의 배경을 윤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40] 정확히 말해서는 기록이 일절 없다.[41] 공교롭게도 안사의 난 당시 반란군 측에서 싸우다 정부군에 투항하여 요양군왕(饒陽郡王)에 책봉되었다. 또한 현재 확인된 인물 중 이정기와 함께 고구려 유민 출신 중 유이하게 당나라로부터 군왕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42] 이는 중국계를 자처하지만 실상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은 강릉 유씨나, 기자조선의 왕실을 자처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행주 기씨의 경우처럼 별다를 바 없다. 이외에도 남양 방씨, 남양 홍씨, 의령 옥씨, 진주 형씨, 노씨 등 중국인의 후손을 자처하는 한국의 성씨 전반에는 이런식으로 각색된 내용들이 태반이다. 이들의 시조 설화들을 자세히 보면 기록이 일절 없는 풍랑, 사신, 망명, 한림학사(8학사) 설이 주요 패턴이다.[43]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 관직을 제수하고 눌러앉은 중국인들에 대한 기록은 사료상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에 대거 흘러들어간 고구려 유민들의 존재를 감안하면 의령 남씨는 중국계보다는 한국계(고구려계) 성씨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대 삼국의 기록이 고려나 조선 대의 것에 비해 부실하다는 점은 유효하면서도 말이다.[44] 시조 남민(김충)은 강릉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이나 다른 자칭 중국계 성씨계의 여타 시조들처럼 그 존재가 불명확하고 미상이다.[45] 조선 초기 5세 개국공신 남재부터 대한제국 무렵 26세 남기창까지 총 22대가 흘러갔다.[46] 중추원부사, 정3품[47] 정5품[48] 지군사는 훗날의 군수를 의미, 종4품[49] 추밀원사, 종2품[50] 참지정사, 종2품[51] 1위 전주이씨(22명), 2위 동래정씨(16명), 3위 안동김씨(신)(15명), 4위 청송심씨(13명), 5위 청주한씨(12명), 6위 파평윤씨, 여흥민씨(이상 11명), 8위 대구서씨, 연안이씨(이상 9명) 10위 안동권씨, 경주이씨, 청풍김씨, 문화류씨, 양주조씨(이상 8명), 15위 남양홍씨(당), 평산신씨, 덕수이씨, 풍양조씨, 반남박씨(이상 7명), 20위 의령남씨, 연안김씨, 해평윤씨, 경주김씨(이상 6명), 24위 창녕성씨, 광주이씨, 풍산홍씨, 광산김씨, 진주강씨, 양천허씨, 연일정씨(이상 5명)[52]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최고 책임자로 정2품직이며 전임직(專任職)이 아니라 타관이 겸임하는 겸직이다. 관직은 둘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두 관서(官署)의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국가의 모든 문한(文翰)을 장악하여 사령(辭令), 과거시험(科擧試驗) 등을 통괄하고 학문과 관계되는 제반 일을 관장하였다. 대제학(大提學)은 정2품의 관계이지만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 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로서 정승 3명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자와 인격자로서의 최고 지위라 할 수 있어 본인은 물론 일문의 큰 명예로 여겼다. 대제학 후보 선정은 전임 대제학이 후보자를 천거하면 이를 3정승,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가 모여 다수결로 정하게 된다. 대제학의 임기는 본인 의사에 따라 결정하며 종신직이었다. 이와 같은 위상으로 볼 때 관직 중에서 최고의 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문형(文衡)이라고 평가되기도 한 대제학은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문과의 대과 급제자이면서도 임금의 특명을 받아 문신들이 공부하던 호당(湖堂) 출신만 가능하였고, 또한 문형(文衡)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및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3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53] 1위 연안이씨, 광산김씨, 전주이씨(이상 7명), 4위 대구서씨, 의령남씨, 안동김씨(신)(이상 6명), 7위 덕수이씨(5명), 8위 풍양조씨(4명), 9위 해주오씨, 경주이씨, 청풍김씨, 안동권씨, 고령신씨, 연일정씨 3명, 해평윤씨, 양주조씨, 풍산홍씨, 여흥민씨(이상 3명)[54] 1위 연안이씨(45명), 2위 안동김씨(신)(35명), 3위 여흥민씨(33명), 4위 대구서씨(29명), 5위 청송심씨(28명), 6위 풍양조씨, 경주이씨(이상 27명), 8위 반남박씨(25명), 9위 의령남씨(24명), 10위 동래정씨(19명), 11위 청주한씨(18명), 파평윤씨(18명) (전주 이씨 제외)[55] 1위 안동김씨(신)(6명), 2위 안동권씨, 풍양조씨(이상 5명), 4위 의령남씨, 여흥민씨(이상 4명), 6위 광산김씨, 평산신씨, 동래정씨, 청풍김씨(이상 3명), 10위 연안이씨, 연안김씨, 한양조씨, 진주하씨, 경주이씨, 청주한씨(이상 2명) (전주 이씨 제외)[56] 정도전의 봉화정씨, 조준의 평양조씨 등[57] 근기남인이라고도 불린다.[58] 충경공계 직제학공파[59] 사헌부 감찰 역임[60] 사헌부 감찰[61] 동교처사[62] 밀직부사, 정3품[63] 정1품, 영의정[64] 26세 요절. 정4품 봉정대부 병조의랑[65] 정3품 예문직제학[66] 사헌부 감찰, 정6품[67] 남준의 3남, 정3품 제주목사[68] 남회의 장남, 정2품, 자헌대부, 형조판서[69] 정3품, 통례원 좌통례[70] 종8 수의부의, 동교처사[71] 종2품하 가선대부[72] 정3품 통훈대부, 영의정 김명원의 사위[73] 5품, 의빈부도사[74] 남복시의 3남, 정2품 우참찬, 이조판서[75] 남진의 장남, 우참찬 남선의 조카, 통정대부 정3품상[76] 정1품 보국숭록대부, 대제학, 형조판서, 이조판서[77] 종2품 대사헌, 대사간, 관찰사[78] 종2품 오위도총부 부총관, 동지돈녕부사[79] 이조정랑, 1727년 성균시 장원[80] 정2품 대제학, 형조판서[81] 정3품하 통훈대부, 남유상의 장남[82] 정1품 영의정, 남유용의 차남[83] 남유용의 장손, 남공철의 조카, 정3품 돈녕부 도정, 광주목사[84] 종2품 가선대부[85] 정3품상 통정대부, 승지[86] 정3품하 통훈대부[87] 종3품하 중훈대부[88] 판관, 영의정 김조순 사위[89] 정3품상, 승지[90] 종1품상 숭록대부, 대제학, 이조판서[91] 종1품하 숭정대부, 예조판서[92] 종1품 판사, 대사성, 대사헌, 관찰사[93] 3품, 시종무관, 대한제국 육군 참령, 일본육사 15기, 1908년 사망[94] 문하시중 - 문하시랑평장사(문하찬성사) - 참지정사(참지문하부사) 순서[95]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 아들인 남좌시가 현달하여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96] 위의 양정공파 계열 인물들 중 유일하게 고려사에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첨서밀직, 강릉도부원수, 정당상의 등을 역임하고, 의성군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97]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사돈관계이다.[98] 여담으로 젊은시절 영양남씨 목사공파의 파조인 남회(南薈) 등과 함께 동주계를 만들었다. 동주계는 태종 16년(1416년) 함께 과거를 준비한 11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서울에서 영남으로 내려오면서 서로 우의와 선비 정신을 갈고 닦기 위한 모임이었다.[99] 세조 때 최연소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南怡)의 할아버지이다.[100] 사후 영의정에 추증[101] 1457년(세조 3) 2월 20일 의성군(宜城君)에 봉작[102] 평소 정몽주·길재 등과 교유하였고 형제인 남을번(남재·남은의 아버지), 남을경과는 달리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부름을 피하고자 감악산에 은거하였다.[103]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도첨의부(都僉議府)가 문하부로 개편되면서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로 바뀌었다가, 1372년(고려 공민왕 21) 6월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개칭되었다.[104] 손자가 중종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남곤(南袞)이다. 또한 임사홍의 외할아버지이다.[105] 판군부사사(判軍府司事),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첨의부좌정승(僉議府左政丞)을 지낸 장함부원군(獐含府院君) 남대번(南大蕃)의 장남[106] 독립유공자 남상순·남병우·남종우가 이 마을 출신이다.[107] 독립유공자 남경명이 이 마을 출신이다.[108] 독립유공자 남병희가 이 마을 출신이다.[109] 고려의 진사와 중국의 진사는 조선과 달리 과거시험(문과) 최종합격자(대과합격자)를 의미한다.[110] 하연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남지가 우의정으로서 함께 하였다. 하연은 1376년생으로 남지와는 약 20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111] 할아버지인 남주헌은 남공철의 아버지인 남유용의 장증손이며, 남주헌의 2남이자 남병철의 아버지인 남구순이 남유용의 형인 남유상의 종가에 양자로 입적하였다.[112] 딸은 장인인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좌근의 장남인 이조판서 김병기에게 출가하였다.[113] 대한제국 내부대신, 친청파, 친일반민족행위자.[114]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115]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박사.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116] 윤석열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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