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5:45:08

남상도

파일:남상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기모토 아이미치(宜本相道)
기모토 타이지(宜本泰治)
본관 의령 남씨
출생 1918년 6월 17일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권곡리
(現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1]
사망 1950년 7월 (향년 32세)[2]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00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8년 6월 17일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권곡리(현 아산시 권곡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 남곡면 남지리(現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901번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931년 진주고등보통학교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부터 조국 독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1939년 잠시 동안 창녕군 성산면에 있던 성산심상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했다.

그 뒤 1940년 초 이관술의 권유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 10원을 현금으로 제공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중 1940년 4월 도쿄에서 재일 유학생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정신을 교육한 것이 발각되어 그 해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국내에 이송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1년 11월 5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까지 했지만 1942년 1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1년간 옥고를 치렀다.
파일:남상도.png
1941년 11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43년 1월 26일 출옥한 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수감 중에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며 사상 전환을 하여 출옥할 수 있었다. 1949년 12월 18일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결성된 창녕군 국민보도연맹에 가입,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 발발 직후 실종되었다가 1950년 7월경 별세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21년 4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194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권곡리가 출생지 및 주소지로 기재되어 있다.[2]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2년 7월 10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