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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僻波조선 후기,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벽(僻)은 '편벽되다'라는 뜻이다.
2. 역사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경주 김씨) 및 정조의 사부였던 김종수,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청명당의 일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로 영조 재위기의 척신이었던 홍인한과 홍봉한 등 풍산 홍씨 가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김귀주는 또다른 척신을 우려한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지만 노론 청명당은 그대로 정조에게 등용받았다.[1]대중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서고 정조의 즉위에도 반대한 적폐 무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벽파라는 이름의 명칭은 사도세자와는 관련이 없다. 정조 초기 정국을 주도하던 홍국영이 탄핵되어 나간 이후 소론의 서명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는 노론 세력이 자신들의 궁벽한 처지를 빗대 벽파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벽파는 소론의 서명선이 주도하던 체제 내에서는 할 일이 없었지만 1788년 정조의 반 시파 정책에 따라 영의정에 김종수의 당숙 김치인이 오르게 되면서 정권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론과 남인이 시파였긴 하지만 남인과 소론내에서도 벽파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서명선은 소론이면서도 벽파로 활동했고 순조 시기에 목만중 이기경등은 남인 벽파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추숭을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고, 왕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이루어 시파가 되자 벽파는 자연스레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2] 그랬음에도 정조는 준론탕평의 자기 원칙에 힘입어 그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고 말년엔 벽파 심환지를 기용, 어찰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3] 당시 야당 컨셉이던 벽파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을 제거하고, 시파를 조정에서 내쫓으면서 벽파가 원내 제 1당이 되었으나, 1805년 정순왕후 사후 1806년 다시 시파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미 영수 심환지가 순조 3년에 사망했고, 정순왕후가 순조 4년에 물러났으며 이듬해 사망했다. 또 대혼 저지 기도 사건으로 인해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명망있는 인사들이 제거되고, 우의정 김달순의 발언[4]으로 인해 김달순, 김관주 등 벽파 지도부가 사라졌으며 8자 흉언 사건으로 아예 벽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심환지, 김귀주가 역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여기에 벽파의 원조(?)인 김종수까지 일망타진되었다. 이후로는 사실상 계보가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5]
3. 벽파의 주요 인물
3.1. 영, 정조 시기
- 김귀주
- 김치인
- 김종수
- 심환지
- 윤시동: 영조 시기 김종수와 함께 재야 청명당의 핵심 일원 출신으로, 정조 대에도 김종수와 함께 벽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여러번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으나 지속적으로 등용되어 끝내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 유언호: 마찬가지로 영조 시기 재야 청명당의 일원으로, 정조 시기에도 신임을 받아 벽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정조의 탕평책이 의리에 어긋난다며 자주 직언하다 여러번 유배를 갔으나 지속적으로 등용되었고, 끝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 서명선, 서명응:소론이지만 벽파와 함께 행동하였다. 서명선의 경우 실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실제로 실학자인 서유구의 조부이다.
- 위백규: 서유구, 김정희와 함께 대표적인 벽파 출신의 실학자로, 과격한 전론[6]을 주장했으며 지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 (재야영수)김한록: 한원기의 제자이자 김관주의 아버지. 호론의 도통을 이었으며 정조 시기 벽파의 막후에서 산림으로서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지대하게 발휘했다. 병인갱화 이후 역적으로 추탈당했다
3.2. 순조 시기
노론 벽파- 심환지
- 정일환: 심환지와 함께 소위 양환으로 불렸으며, 신유박해에 적극 동조했지만 정약용을 죽이는 것을 반대해 정약용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정순왕후의 재수렴을 반대한 죄로 김관주가 일시적으로 나가리되자 그 자리를 차지했으나 병인갱화가 일어나면서 삭탈관직된다. 역적의 수괴로 지목되어 시파에 의해 연일 토죄가 청해졌으나 순조가 끝내 무시했다. 고종 1년인 1864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 권유: 순조의 대혼을 방해하려는 목적의 소를 올렸다가 병인갱화의 원인을 제공했다.
- 이안묵: 권유와 같이 상소를 논의했다는 죄로 정법당한다.
- 김관주
- 김일주: 벽파의 재야 영수이자. 김관주의 동생으로 형이 역적으로 몰릴 때 같이 역적의 수괴로 몰려 정법 위기에 몰렸으나 순조가 끝내 물리쳐 살아남았다. 유배중에도 몇 번이나 벽파는 억울하다고 상언했는데, 묘하게도 순조는 김일주의 상언을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지만 김일주에게 추가로 죄를 주지도 않았다.
- 김달순: 벽파의 중진이지만 병인갱화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벽파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 이노춘: 정조시절 채제공을 탄핵했다가 유배를 간 전적이 있으며, 순조 즉위 후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병인갱화 당시 김달순의 배후로 지목되어 거제로 정배되었다.
- 이익모: 정조실록에 참여했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지만 임명되자마자 김달순과 친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정배되었다.
- 민명혁: 민유중의 큰형 민시중의 고손자로, 순조 즉위 이후 간관으로서 홍낙임, 심노숭, 김희, 박종악, 체제공 등 시파의 핵심인물들을 연이어 탄핵했고 그 공으로 대사간까지 올랐다. 그러나 병인갱화 당시에도 무사해 오히려 1807년 이조 참의로 승진했고, 최종적으로 정2품 지중추부사까지 올라 편하게 살다 죽었다. 다만 벽파라 그런진 몰라도 그의 자손들은 순조조 내내 등용되지 못하다가 안동김씨 견제를 천명한 헌종조에 이르러서야 중용되었다. 증손자인 민명혁은 고종조에 명성왕후의 척족으로서 고종의 정치에 적극 참여하다 갑신정변때 살해당한다.
- 이인채(李寅采): 사헌부 간관 출신으로 순조 초기 시파 인사들을 연이어 탄핵해 그 공으로 관직이 높아져 사간원의 종3품 관직 사간에 이르렀으나 병인갱화 당시 김달순의 상소를 적극 옹호했다가 그 죄로 정배당했다. 순조 12년에 석방되기는 했다.
- 황기천, 김처암: 순조 초 간관이었지만 김달순 탄핵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정배되었다.
- (재야영수)송환기: 송시열의 현손으로 관직에 진출해 좌찬성을 지냈지만 재야 영수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노론 호론의 도통을 이었다.
- 서용보
- 윤제홍: 지두화라는 화풍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관직에 나아간지 얼마되지 않아 김관주와 함께 엮여 탄핵당해 유배를 갔다. 이후 암행어사, 지방 군수 직을 지내며 복귀했지만 다시 탄핵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사간에까지 이르렀다.
- 김기서: 역시 화가로 단발령도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병인갱화 당시 권유의 상소에 같이 참여했다는 참소를 받아 정배되었다. 이후 청도군수로 복귀했으나 이번에도 탄핵을 당해 삭직되었다.
- 김노경[7]
남인 벽파: 주로 천주교 문제로 벽파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공서와 인원이 겹친다.
- 목만중:남인 벽파로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이 다수 인 남인 시파를 탄압하였다.
- 채홍리: 남인으로 채제공과 같은 집안이지만 벽파로서 채제공을 공격했으며, 순조 대에도 목만중 등과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병인갱화가 일어나 벽파 숙청의 막이 오르자 자진해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얼마 안가 사망했다.
- 이기경: 남인 벽파로 정약용과 친우였다가 천주학의 견해 차이로 같은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다. 병인갱화 이후에도 시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여러번 탄핵되었다
- 박장설(朴長卨): 대표적인 남인 벽파로 정조조에 주로 활동했으며, 순조 조에도 신유박해 당시 남인 중 가장 먼저 나서 천주교도 탄압을 주장해 그 공으로 참판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바로 사망하여 나쁜 꼴은 안보고 죽었다.
- 윤필병: 순조 시기 고위 무관인 호군으로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이가환과 정약용 등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한 대책을 주장[8]해 때문에 파직당했다.
- (재야영수)황덕길: 안정복의 제자로 성호학파를 이었으며, 공서파로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아 성리학적 도통론과 천주교 문제에 대해 강경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남인 산림들 중 거의 유일한 벽파였다.
소론 벽파
- 서형수: 서명응의 아들로 소론 벽파. 벽파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소론 벽파 대신이었던 관계로 병인갱화 때 같이 엮여 유배를 가 무려 18년 동안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 서유순, 서기수: 서형수의 5촌 조카로 서형수가 정배될 때 간관이었는데 서형수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탄핵당해 정배되었다. 서기수는 6년 뒤에 풀려나 이조참의 대사성에까지 관직이 이르렀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그사람이다. 병인갱화 당시 친척인 서형수가 탄핵당해 정배되자 자진해서 관직을 때려치고 낙향했다.
[1] 일단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는 김귀주와 친한 사이였지만 본디 그는 척신 정치 청산을 외친 사람이었고, 정조의 사부였으며,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동덕회의 일원이었다.[2]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즉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 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파는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였다.[3] 정조가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한거 아니냐는 식의 드립도 있지만, 사실 저 표현만으론 정체성까지 따지기엔 너무 근거가 빈약하긴 하다. 벽파 수장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라 정치적 목적의 립서비스도 있었을테니 더 그렇다.[4] 핵심 요지는 벽파의 주장을 옳다고 못박자는 얘기다.[5] 일단 이후 세도정치를 펼치는 풍양 조씨가 벽파 계열이긴 하지만 벽파로서의 정체성은 겨의 없다. 어차피 이 점은 시파 출신 안동 김씨도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풍양조씨 일족 인 조득영은 김달순을 공격해 벽파를 멸문 시키는데 가담하였다 순조가 풍양조씨 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도 벽파를 몰락시킨 조득영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6] 토지개혁론[7] 추사 김정희의 친아버지[8] 특히 정약용을 죽이고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