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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0:43:20

벽파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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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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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선조
(1575 ~ 1608)
이황 정개청 이덕형 김성일 류성룡
우성전 정구 김응남 이원익 심희수
허성 윤승훈 신식 이광정 신용
정경세 이성구 이준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근기남인 (북인) 영남남인
정구 장현광 윤선도 윤휴 이현일
이하진 이수광
효종 - 숙종
(1649 ~ 1720)
윤선도 허목 민희 민점 윤휴
목내선 류형원 이서우 김덕원 민암
이의징 신경제 이운징 신필청 장희재
청남 탁남
허목 홍우원 윤휴 허적 권대운
이원정 오시수 오정창 류혁연 허견
경종 이후
(1720 ~ )
실학 (중농학파) 탁남
이익 이중환 류득공 정사효 이인좌
청남
신서 공서(벽파)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신후담 안정복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홍낙안 목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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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벽파의 주요 인물
3.1. 영, 정조 시기3.2. 순조 시기

1. 개요

僻波

조선 후기,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僻)은 '편벽되다'라는 뜻이다.

2. 역사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경주 김씨) 및 정조의 사부였던 김종수,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청명당의 일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로 영조 재위기의 척신이었던 홍인한홍봉한풍산 홍씨 가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김귀주는 또다른 척신을 우려한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지만 노론 청명당은 그대로 정조에게 등용받았다.[1]

대중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서고 정조의 즉위에도 반대한 적폐 무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벽파라는 이름의 명칭은 사도세자와는 관련이 없다. 정조 초기 정국을 주도하던 홍국영이 탄핵되어 나간 이후 소론서명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는 노론 세력이 자신들의 궁벽한 처지를 빗대 벽파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벽파는 소론의 서명선이 주도하던 체제 내에서는 할 일이 없었지만 1788년 정조의 반 시파 정책에 따라 영의정에 김종수의 당숙 김치인이 오르게 되면서 정권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론과 남인이 시파였긴 하지만 남인과 소론내에서도 벽파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서명선은 소론이면서도 벽파로 활동했고 순조 시기에 목만중 이기경등은 남인 벽파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추숭을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고, 왕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이루어 시파가 되자 벽파는 자연스레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2] 그랬음에도 정조는 준론탕평의 자기 원칙에 힘입어 그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고 말년엔 벽파 심환지를 기용, 어찰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3] 당시 야당 컨셉이던 벽파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연립정부?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을 제거하고, 시파를 조정에서 내쫓으면서 벽파가 원내 제 1당이 되었으나, 1805년 정순왕후 사후 1806년 다시 시파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미 영수 심환지가 순조 3년에 사망했고, 정순왕후가 순조 4년에 물러났으며 이듬해 사망했다. 또 대혼 저지 기도 사건으로 인해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명망있는 인사들이 제거되고, 우의정 김달순의 발언[4]으로 인해 김달순, 김관주 등 벽파 지도부가 사라졌으며 8자 흉언 사건으로 아예 벽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심환지, 김귀주가 역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여기에 벽파의 원조(?)인 김종수까지 일망타진되었다. 이후로는 사실상 계보가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5]

3. 벽파의 주요 인물

3.1. 영, 정조 시기

3.2. 순조 시기

노론 벽파
남인 벽파: 주로 천주교 문제로 벽파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공서와 인원이 겹친다.
소론 벽파

[1] 일단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는 김귀주와 친한 사이였지만 본디 그는 척신 정치 청산을 외친 사람이었고, 정조의 사부였으며,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동덕회의 일원이었다.[2]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즉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 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파는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였다.[3] 정조가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한거 아니냐는 식의 드립도 있지만, 사실 저 표현만으론 정체성까지 따지기엔 너무 근거가 빈약하긴 하다. 벽파 수장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라 정치적 목적의 립서비스도 있었을테니 더 그렇다.[4] 핵심 요지는 벽파의 주장을 옳다고 못박자는 얘기다.[5] 일단 이후 세도정치를 펼치는 풍양 조씨가 벽파 계열이긴 하지만 벽파로서의 정체성은 겨의 없다. 어차피 이 점은 시파 출신 안동 김씨도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풍양조씨 일족 인 조득영은 김달순을 공격해 벽파를 멸문 시키는데 가담하였다 순조가 풍양조씨 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도 벽파를 몰락시킨 조득영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6] 토지개혁론[7] 추사 김정희의 친아버지[8] 특히 정약용을 죽이고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