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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士林派조선 초기 훈구파와 대립했던 정치 세력.
2. 역사
2.1. 사림 등장 전
한민족에 유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중국의 문물을 들여 올 때, 불교, 도교와 함께 함께 수용했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유교는 오직 지배층만의 학문이었고, 유불선 중에 한민족 내에서 가장 먼저 수용되고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불교였기에 불교에 밀려서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래도 삼국 중에서는 신라가 유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1]이후,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자, 신라의 한반도에서 유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왕실은 진골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독서삼품과을 시행하려고 하는 등, 왕권을 키우는데 유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6두품들은 진골귀족들에 의한 차별을 자신들의 학식수준을 높여서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신라에게 강대국 당나라의 선진제도인 과거제라는 좋은 본보기가 있었음으로 그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전역에서는 아직도 불교의 세가 강했고, 신라불교의 중심축이었던 교종이 신라귀족들 편을 들었으므로 왕실의 노력과 6두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라말에 6두품도 유교가 아닌 불교의 선종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를 불렸으며, 유교는 자신을 수양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6두품과 호족들에 의하여 유교가 한반도에 널리 퍼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선종 불교를 중심으로 세를 키운 호족들 중에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 고려가 세워진 이후, 고려의 왕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를 계속 들여오려고 했다. 고려 초중기에 유교를 들여와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대표적인 왕에는 광종과 성종이 있는데, 특히 광종은 쌍기를 받아들여서 우리민족사에 과거제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문제는 고려의 유학자들이 상당히 사대주의적이고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이고, 유교로 인하여 왕권은 안정화되었지만 유교가 강해질수록 고려의 상무정신은 파괴되어 갔다. 삼국 중에 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신라의 영향으로, 고려 초중기 유학자들 다수가 옛 신라의 지역[2]에서 유래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유학자들이 강해질수록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한반도에서 유학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신정권시기다. 무신정권의 원인이 되었던 문벌귀족들은 국교인 교종 불교를 믿으면서 대토지와 음서로 권력을 유지했는데, 문벌귀족을 박살내고 집권한 무신들 입장에서는 이게 참으로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의 힘을 줄이기 위하여, 교종을 탄압하고 선종을 우대하는 한편,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을 등용한다.
그리고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생기고 이 성리학을 고려의 유학자들이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사림이 생겨날 토대가 분명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대몽항쟁기에서 고려가 지고 무신정권 또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붕괴했지만, 무신정권기에 급속히 성장한 불교의 선종과 유교의 성리학자들은 고려말, 공민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함께 계속 발전했다.
2.2. 고려 말
고려말, 원간섭기에 권문세족이 고려인들을 착취하듯, 고려의 불교 또한 부패하여 국민들을 착취했다. 원나라의 국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원나라와 다루가치도 고려의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나라의 불교가 고려의 불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3] 그리고 불교는 대몽항쟁기에 원나라에 저항했던 것들을 잊은 듯이 권문세족들과 함께 백성들을 착취했다.불교를 믿을 수 없게 된 고려 왕실은 성리학자들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충선왕은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격상시켜 유학을 중시하겠다는 의중을 대놓고 드러냈으며, 공민왕은 유학을 국시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시도했다. 고려말의 성리학자인 이색과 정몽주는 훗날 조선 유교의 기틀이 될 성리학 공교육제도를 완비해 나갔다.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시해로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권문세족이 애국자들과 겨레의 공적이 된 이상 정권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고, 권문세족과 불교가 함께 그 위상을 잃으면서 자연히 유교세력이 강해졌다.
국가 중심의 관학파들이 훗날 훈구파가 되고 지방세력의 사학파들이 훗날 사림파가 된다. 이 관학파들의 근간은 기호지방이었고, 사학파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근간으로 했다.[4] 관학파들은 실리주의를 중심이었고 사학파는 원리주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원리주의자의 중심인 정몽주는 근왕적 성향이 강해서 고려를 존치하려는 성향이 강했고 관학파의 중심인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성리학국가를 새우는 것을 선호했다.
결국 이방원이 온건파 사대부로 분류되던 정몽주를 죽이고 급진파 사대부로 분류되던 정도전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것으로 관학파가 신생왕국 조선의 정권을 잡게 되었고, 고려 충성파 사대부는 지방으로 돌아가 사학에 힘쓰니, 집권자들은 훗날 훈구파가 되었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학파들은 사림파가 되었다.
2.3. 조선 전기
조선 초, 조선의 역사를 정치로 이해하려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공부하면 된다.고려 말의 정치투쟁에서 관학파가 승리한 뒤, 관학파는 새 나라를 성립시키는 것을 반대한 모두를 쫓아내고 조선을 성립했다. 고려가 멸망하는 것이 확정되던 무렵부터 관학파의 독주에 반감을 가지거나 고려왕조에 충성하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이 건국된 이후, 온건 관학파, 고려 충성파, 사학파 등 고려를 수호하는데 실패하고 정치권력을 모두 잃은 자들은 지방으로 퍼져 제자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들이 사림들이 된다.
조선 극 초기에 사림들 중에서는 아직도 고려왕조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조선정부에 협조하지 않고 제자를 육성하는데에 몰두했다. 지방으로 내려간 유학자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었고, 지방의 학품은 성리학으로 경도되었다.[5] 애초에 지방으로 내려가고서 제자를 양성할 여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지원없이도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후학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사림들이 지방에서 제자양성에 몰두하고 있을 때, 관학파들은 국가개혁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과정에서 절대왕권과 재상중심 정치라는 분명한 견해 차이로 서로 충돌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학파의 수장이었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숙청함으로서 관학파들의 중심을 잃기도 했다. 세종대왕이라는 겨레사상 최고의 명군 아래서, 관학파는 모든 역량을 다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전성기는 문종시기까지 이어졌는데, 성리학만 중요시해서 훗날 조선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깎아먹은 사림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여러 지식을 실용적으로 썼기 때문에, 국가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계유정난으로 극렬한 왕실 충성파들이 세조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다른 관학파들을 절멸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차지한다. 이 충성파들을 훈구파라고 부르며, 이 훈구파의 행태로 인하여, 관학파는 상당수의 인재를 상실했고, 이 여파로 '관학파'라는 파벌의 존속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이 시기부터 관학파를 훈구파라고 부른다.)
관학파가 약해진 덕분에 사림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온다. 훈구파는 다른 관학파가 있을 때는 왕실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했고, 세조 또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훈구대신들은 반정공신으로서 매우 부패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세조 이후의 왕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침 세대교체가 계속되면서 이미 사라져버린 고려 왕실에 끝까지 충심을 버리지 않는 학자들은 후학을 양성한 채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어느새 완전히 한반도에 정착한 조선 왕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자 후대 사림들은 조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양으로 올라와 출사하기 시작했다. 훈구입장에서는 이들이 권력적으로 위협을 한다고 느꼈고, 사화를 일으켜 사림들을 계속 박해했다. 하지만 관학파의 숫자는 계속 줄어드는 데 반해, 계속 쫓아내고 죽여도 지방에서 계속 제자를 양성해서 서울로 올려보내는 사림은 계속된 사화에도 물량을 유지했다.
결국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훈구파의 안하무인이 심해지자 중종대에서는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사림들을 직접 등용하니, 조광조가 조정에 출사한 것도 이 때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숙청당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후퇴하지 않았고, 훈구파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다.[6]
결국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에서는 숙청을 진행한 권신들 내에도 사림들이 섞여 있을 정도로 훈구파의 세력이 줄어들어 있었다. 결국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소멸[7]했으며, 선조시기부터는 사림들이 독주하게 되었다.
2.4. 조선 후기
자세한 내용은 붕당 문서 참고하십시오.훈구파를 절멸하고 집권하게 된 사림들은 자신들의 적수가 없어지자마자 분열한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는데, 양 진영 다 성리학 원리주의에 빠져 있었지만, 동인들은 서인들보다는 실리적이었고, 서인들은 성리학만을 추구했다. 임진왜란 이후, 동인들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고, 광해군시기에 집권한 북인은 사림 최고의 실용주의자였던 조식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는데, 이들이 인조반정으로 축출되자, 조선 조정에 실리주의 노선을 지지할 세력이 사라져서 조선은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한국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유교적 병폐는 인조반정 이후 심화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너무 완벽하게 그리고 너무 추하게 패배했기 때문에, 왕권과 사대부의 권위가 많이 무너졌고 이것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권좌가 불안정해지자, 내세울것이 성리학 밖에 없는 그들이 그렇게나 신봉하는 성리학을 끝없이 강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래 성리학 원리주의를 신봉해서 성리학 밖에는 없는 놈들이 성리학을 내세워봤자, 그렇게 설득력이 없기에 그들은 성리학과 유교를 보다 복잡하게 만들고 엄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필요없는 요식을 늘려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은 성리학 근본주의자 수준으로 퇴보하게 된다.
인조와 서인은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던 내내 유교를 교조화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로 성리학의 근본주의화는 정점을 찍었다. 자신들이 반정으로 집권할 당시 북인들을 일가에 친척까지 전부다 박살내버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권력을 잃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 배를 탄 인조와 서인은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고[8]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이 하기 위해 더욱더 교조주의적인 모습을 띄었다. 제사는 점점 더 호화롭고 복잡하게 지냈으며, 조선 전기에는 덜했던 가부장제도 이 때에 생겨났다. 인조 때를 기점으로 사림들은 산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옛날 사림들이 훈구를 이겼던 방식을 흉내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특정 사람들을 너무 추켜세우는 경향을 만들어서 폐해를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림들의 산림 중심의 체계는 북인들이 물리적으로 소멸하게 된 이후부터 한 개의 파벌도 물리적으로 완전 소멸당하는 일이 없어지도록 바뀌게 했다.
인조 이후, 조선의 성리학 교조주의적인 모습은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특히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사문난적이라고 못을 박아 버리면서, 조선의 성리학이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여지를 전부 없애버려서, 조선의 유교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으며, 세종때까지 발전시키고 이후 유지해왔던 조선의 과학, 기술들을 죄다 박살내어 버렸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펼치면서 과학과 기술을 가진 남인들을 중용해서 과학과 기술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고, 여러 인재를 널리 등용해서 국가를 발전시키려고 했었지만 바로 그 정조가 역설적이게도 김조순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성리학 교조주의자들인 서인들이 근본주의에 가깝게 변한 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노론과 소론이 권력투쟁을 한 끝에 노론이 승리하여 일당독재가 시작되고 일당독재가 시작된지 얼마 가지 않아서 안동 김씨가 노론에서 독주하게 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치 수준은 크게 퇴보했고, 조선의 정치는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교조화된 성리학을 제외한 일반적인 과학 기술과 지식은 실권한 남인, 소수 온건파 노론들의 사학으로 전승되었고, 이럼 사정으로 조선의 과학 기술과 지식은 퇴보만 거듭하고 발전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개화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2.5. 조선 말 / 구한 말
결국 노론의 일당 전제화와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같은 세도가문이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과두정에 가까운 꼴로 정치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경도되어서 다른 학문을 박해하였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교조화된 성리학을 국시로 국가로 통치하였다.결국 조선은 성리학 교조주의 때문에 건전한 학풍을 전부 상실했으며, 세종 시절의 과학 기술과 지식을 복원하지 못해서 인구가 늘어나는데도 세종 시절의 세금수입의 절반도 안되는 재정[9]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했다.[10]
사림들은 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상국이라는 청나라의 전체규모와 성(省)하나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1] 흥선대원군이 남인들을 등용하여 잠시 옛 과학 기술과 지식을 잠시 사용하여, 면제배갑을 발명하거나 실험형 증기선을 만들어 보기도 했으나,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이들을 다시 쫓아냈고 개화파가 자리잡을 때가지 사림 특유의 성리학 교조주의에 의한 기술적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대한제국이 성립할 쯤이 되어서야, 조선 정부도 성리학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조선이 성리학국가에서 탈피하자, 사림들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중종 대 이후, 한국사의 모든 유림들은 사림에서 나왔으므로 현재 존속한 유림들도 사림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3. 평가
주의: 해당 항목에 쓰여 있는 긍정/부정 평가는 현재는 모두 논박된 옛 학설들에 기반한 평가이며, 하단의 2000년대 이후 학설 문단에서 설명하는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다.3.1. 옹호
일단 고려 말의 공적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림들은 부패한 당시의 불교와 권문세족을 박살내는데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12] 지금 시점에서야 우리가 물려받은 성리학은 교조화된 성리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욕을 하지만 조선을 완전한 중앙집권화 시키는 명분을 제공한 것도 성리학자들이었고, 조선의 중앙집권제를 만들고 유지한 것도 성리학자들이었다. 이는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사라질 때까지 유효하게 기능했다. 실제로 유럽에서 조차도 시험을 쳐서 관료제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시기에 공정한 시험으로 관료를 뽑은 것도 성리학자들이 한 것이다. 성리학자들 덕분에 능력주의 학풍이 정착해서 음서제가 사장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사림파가 관학파와 훈구파에 비하여, 상당히 원리주의자들로 불리긴 하지만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물론 성리학 자체가 송나라 때 만들어진 학문이고 이미 송나라 말이면 문제점이 드러나서 원나라시기만 해도 중국 유교의 중심은 양명학이 대세가 되었지만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이야기이고 나라를 통치하는데에는 성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실 고려 말에 불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원리주의적인 모습이 필요하기도 했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누르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성리학은 융통성을 부리면 안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관학파가 단종 충성파와 세조의 훈구파로 나뉘어 싸우면서 자신들의 숫자를 줄여 버리는 바람에 조선 조정에 인재가 부족했기에 사림파가 조정에 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사림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던 시점은 단종을 몰아낸 훈구파가 방납의 권리(防納)를 얻고 이를 악용하는 등의 문제를 만들던 시점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분명 꺼림직하지만 성리학으로 만들어진 유교국가인 이상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것도 성리학자들 뿐인데, 당시 훈구파 대신들을 견제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림파 뿐이었다. 실제로 사림은 훈구파에 대한 견재를 확실히 하여, 훈구파의 독주를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그 예시 중, 하나가 사림이 주장한 수미법(收米法)인데, 수미법(收米法)으로 점점 사유지를 넓혀 대지주(大地主)로 커가는 관학파에게 제동을 걸었던 것은 큰 공적이다.
우리가 성리학의 부정적인 것만 물려받았다고 이미 서술했는데, 이 부정적인 것들은 전부 인조와 병자호란 패전 후의 서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이슬람의 교리 중 일부를 안좋은 시각으로 보고 특정 무슬림 집단들에 대한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지만, 제국주의시대 전, 그들이 유럽제국들에게 침략받고 착취당하기 전에는 매우 융통성있는 종교였었듯이 인조 이전의 성리학은 고려시대의 성 평등적 요소 등을 인정했다. 그 예시로 율곡 이이 남매 분재기를 꼽을 수 있는데[13], 이러한 자료를 확인해 본다면 우리가 성리학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14] 믈론 조광조가 청렴결백과 이상정치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만 옳다는 생각에 빠져 다른 세력이나 학풍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근본주의적인 면모가 있긴 했지만 조광조는 엄연히 공안개정(貢案改正),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한전제(限田制), 서얼허통을 주장하는 등 개혁가적인 인물이었다. 오히려 현량과 추진 소격서 폐지만 부각되고 수구꼴통 근본주의자로만 몰리는 것이 부당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는 게 일단 조선사의 대부분은 이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들이 만악의 근원이라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만약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자면 반대로 모든 공도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심지어 세도정치도 이들 탓이라 하는데 세도정치의 근본적 원인은 외척 세력의 강화인데 기실 이는 사림세력 이전의 문제다. 오히려 외척 세력이 힘을 얻는 과정에서 환국정치 등으로 많은 관료들이 죽어나갔으며 붕당이 무너져내린 결과 외척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즉 세도정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사림파의 문제로 몰아간다면 사림파가 들어서기 이전에 한명회 등이 외척으로 세도를 부린 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리고 실무 능력을 탓하는 것도 물론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등용한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으나 만약 이들이 정말 실무 능력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때 류성룡같은 이들의 활약이 일어날 리가 만무했을 터이다. 심지어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윤휴의 경우 그의 반대파이던 서인과 사문난적이라 지목한 송시열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등용되었다.
당초에 국력을 대폭으로 손실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을 다시 재건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과연 저 비판대로 실무 능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 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거꾸로 훈구파가 실무 능력 있는 인사들만 썼느냐 하면 그것도 문제인 게 이들 중에는 단종에게서 왕권을 빼앗는 패륜에 가담한 공신들이 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모두 관료 출신이라 하기 힘들다.[15].[16] 심지어 이들은 그런 패륜 과정에서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되려 학문적으로도 검증이 안된 인물을 공신이란 이유로 편익을 봐주는 훈구파쪽도 낙하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당초에 나라에서 정한 과거제를 통해서 관료가 되고 그 관료가 된 이후에도 능력이나 학연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와 패륜에 가담한 연줄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 것 둘중 어느 쪽이 낙하산인가? 얼자 출신이라 차별 받았다는 유자광이나 남이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의 총애를 받아 광속으로 승진하는 등 낙하산 문제는 훈구쪽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다 볼 수가 없었다.
잡학 부분에 대해서도 김종직이 그런 발언을 했었다곤 하나[17] 이후 조선이 정말로 무기 개발에 게을렀던가?[18] 되려 임진왜란 때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직접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패배도 많았지만 승리도 하였다. 북벌같은 명분으로 무기 연구를 무시하지 않았으며[19] 조엄 등은 일본에서 고구마 같은 작물을 들여오기도 했으며 잡학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도 근본은 사림이다. 거꾸로 비교 대상인 관학파와 훈구파를 보면 우선 관학파가 주류이던 세종 때엔 반박할 여지 없이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였으나 세조 때에 들어서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한 시점에서 관학이 쇠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20] 이후 홍문관 등으로 부분적으로 집현전의 역할을 부활시켰으나 완전한 부활은 아니었으며 이로인해 세조 이전 때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세조와 그의 공신들인 훈구파가 저지른 행적때문에 누명을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훈구파에서 잡학의 재능이 있는 인물이 있던 건 이들 중 일부가 관학파 출신인 것도 있으나 이 이후 선조에 이르기까지 잡학의 발전이 더뎌졌다 본다면 그때까지 남은 훈구파는 뭘 했던 건가? 심지어 총통위를 해체시킨건 세조 때다.[21] 즉 훈구파는 과학과 같은 분야를 권장하긴커녕 이들로 인해 이전 관학파의 다양한 학문이 손실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22]
무엇보다 세도정치 때를 사림 집권시기라 할 수나 있는가도 문제이다. 물론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김조순은 분명 사림이었으며 안동 김씨 일파들도 모두가 무능력자는 아니었고 개중엔 능력있는 인물도 있었다곤 하지만 당시에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이로인해 나라가 피폐해진 것을 생각하면 이는 사림 이전에 국가 시스템 붕괴의 문제이다. 특히나 이 세도 정치를 불러온 것이 붕당이 아닌 왕권 강화의 부작용이란 걸 생각하면 이것마저도 사림에게 문제를 전가하는 건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심지어 훈구파가 득세할 때조차도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이용해 세도를 누리려는 시도까지 했었다.[23]
명과의 사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부분인데 우선 조선 입장에선 명에게 반항할만한 국력은 없었다.[24] 그런 상황에서 이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큰 상황이었으며 이들에게 사대하는 것은 조선 입장에서 큰 손해도 아니었다. 이는 명청 교체기도 마찬가지였으며 청이 완전히 명을 이기리란 보장도 없던 상황에서 청의 편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자니 양쪽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은 그런 불안정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고 이로인해 굴욕을 당한 조선 입장에서 청이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으며 임란 등으로 빛을 진 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명, 청 양국에게 조그마한 빌미를 주더라도 이는 조선에 대한 압박에서 심하면 침공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건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다.
또한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서 그렇다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25]
신분 관련해서도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장본인은 성종이였으며 이는 그 훈구파들 조차 반대하던 것을 오직 성종 개인의 의지만으로 강행한 사례다.[26] 심지어 서얼 출신의 등용에 제한을 둔것도 경국대전에 실린 내용이며 장영실과 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은 사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문제였다. 되려 학문을 갖췄음에도 노비란 신분 때문에 능력을 발휘 못하는 것을 슬퍼하는 사례들도 훈구파가 사라진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이를 통해 사림이 신분제에 부정적이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이 없거나 이러한 천민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키만 해왔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단 걸 보여준다.
당초에 이 부분은 천민이란 존재를 남겨둔 조선의 신분제의 한계라고 밖에 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27] 서얼 관련해서도 서얼이 첩의 자식이란 걸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서얼을 차별하지 않게 되면 처와 첩의 차이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는 결혼 문화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서얼 차별에 대해서도 사실 유자광을 제외하면 훈구파에서도 특별하게 언급될만큼 능력있는 서얼에 대한 배려같은 건 등장하지도 않고 유자광마저도 훈구 내에서 지지를 얻어 올라간 게 아니라 왕의 총애가 큰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관학파는 세조 직전까지, 훈구파는 성종 때부터 밀려나서 선조 때에나 사라지는데 사림 세력은 성종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다. 즉, 이들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는건 그만큼 이들이 오랫동안 조선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며 이는 거꾸로 조선이 그만큼 유지되고 발전해온 것 또한 이들의 공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사림파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사림이란 한 단어로 묶을 수 있을만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그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훈구와의 비교를 위해 하나로 묶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28]
어떻게 보면 이런 논리는 노론 음모론과 약간 이어지기도 한다. 조선의 정치 모습을 비난하면서 처음에는 노론을 비난하다가 서인, 붕당으로 점점 비난하는 범위가 넓어지더니 이젠 사림파 전체로 확대되는 것.
그리고 군사력의 경우,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 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출처[29]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군인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으며[30]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31]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32],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33]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34]
3.2. 비판
시작이 그리 교조주의(敎條主義)적이지 않았든 어쨌든 간에, 사림파가 초반부터 가졌던 문제점이 결국 조선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문제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과 관련해 점차 시간이 흐르며 성리학이 변질되면서 점차 조선을 망가뜨려갔다. 그나마 견제 세력이 살아있던 훈구파 시절이나 붕당정치가 작동하고 있던 시기에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으나 순조 이후 노론 시파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사림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단 사림파가 전형적인 성리학 엘리트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이 엘리트의 판별 기준에서 실무 능력보단 학연 쪽에 기울어진 것이 문제이다.[35] 청요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자리만 잘 잡는다면, 현장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몹시 부족한 자가 관직에 앉으면 그 능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며,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는 가히 인재(人災)를 넘어 천재(天災)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 특히 사림파가 이전의 관학파에 비교하면, 실무 능력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폐단 때문이다. 물론 훈구파도 홍윤성 같은 인간 백정 양아치들이 패거리 잘 타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최항이나 신숙주 같은 일부 관학파 출신이 포함되어 있어 사림파보다는 조금은 낫다.[36]
사림파가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이념에만 치우친 것을 극명히 드러내는 유명한 예시가 또 있는데, 성종 시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 수통 사건이다.
통명전 옆 연못에 물을 대는 수통이 나무로 된 거라서 다 썩어버렸기에, 성종의 명에 의해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구리로 새 수통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림파 대간인 정성근[37]이 사치라고 간하는 바람에 구리 수통을 부수고 돌로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동재보다 석재 수통 제작비가 훨씬 비쌌다. 이 석재 수통은 지금도 창경궁 통명전지에 남아있다. 만약 공임비가 더 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임금의 이미지 메이킹을 강조하거나, 장기적으로 구리보다 석재의 유지보수 비용이 덜 든다거나, 포를 만드는데 필요한 귀중한 구리를 저런 곳에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면 납득할만한 하나, 실무능력이 전무해서 단순히 돌보다 구리로 수통을 만드니 사치라고 억지를 써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더 비싼 것으로 대체하게 한 것.[38] 이 때문에 사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조선의 정치가 점점 백성들의 현실과 이격된 채 뜬구름 잡는 정치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덕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덕치를 베푸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이 전무한 채 공자왈 맹자왈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세종대왕의 신밀레 덕분에 현실인식과 실무능력이 없는 무능아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던 관학파나, 그 유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훈구파와 달리, 사림파 집권기에는 현실인식, 실무능력은 전무한 도덕주의 교조주의자들이 학맥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실무경험 없이 청요직을 거쳐 고위직에 떨어지니, 당연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39]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제조업 회사인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에서 CEO와 임원진으로 전문적인 관련 지식이 있는 전화기, 재료, 컴공, 물리학과 졸업자들이 사내정치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 경험과 기술 전문 지식이 하나도 없는 법률자문, 영업부서 출신 인사들만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또한 비교적 과학기술, 경제, 법률, 신무기 개발, 국방 시스템 등 실학에 우호적인 관학파와 훈구파들에 비해 과학기술과 군사를 천시하여, 세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 조선 초중 때 절정을 이뤘던 조선의 과학기술과 군사력 발전을 저해시켰다.[40] 특히 사림의 사상적 시초인 조광조는 대놓고 실무에 필수적인 학문인 산학을 천시했다.[41]
권력을 잡은 사림은 점차 고려말 권문세족과 조선초의 훈구파처럼 새로운 기득권층으로써 사회개혁과 변화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피지배층의 신분상승과 신분상승한 피지배층에 대한 차별도 성리학적 명분을 이용해 훈구파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42] 위의 김종직 예를 보듯이 김종직도 유자광의 단지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외에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신분상승된 사람들을 배척하는 등 권력과 신분이동에 반대하였다.[43] 이후 박제가 같은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거나 거상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임상옥 또한 과거 신분에 의해 박해받는 등 문제를 남긴 부분인 건 분명하다. 그놈의 신분제 때문에 인재들만 쳐버린 격. 물론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있던 일이다만.
붕당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비판을 하자면 사림파의 시초라 할만한 김종직과 김일손 사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만 옳다는 태도를 보이고 주어진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광조의 경우에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데다가 자신이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들을 죄다 소인이라 몰아세우며 천민 출신의 공신을 옥사시키는 등, 신분 차별 문제마저 있었다. 이로 인해 별 문제없던 인물들마저 그들을 모함한 소인배로 후대에 알려지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문들이나 제자들, 그리고 유능한 관료들까지 말려들어 후대에까지 불이익을 당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가끔 무오史화라고도 하는 것도, 사림의 권력쟁취에 사실상 영수(領袖 리더) 역할을 했던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면서 일으킨 경솔함이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44] 근데 이걸로 끝나면 그냥 눈치 없고 일 더럽게 못하는 무능한 눈새 정도지만 사림의 영수 노릇을 한 김종직은 자신이 비판한 세조 정권에서 출세하고 봉록 먹은 작자다. 세조를 비판하는 의도에서 쓴 조의제문을 쓴 작자가 세조 정권에서 출세한 김종직이라는 것과 그 김종직은 누구보다 충의와 절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리고 그런 스승의 부끄러운 행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변명해댈 뿐이다.[45]
현대 한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특히 씹선비와 같은 비하가 생긴 배경에는 사림파들의 영향이 가장 컸다. 심지어는 사림파를 현대 한국의 운동권 출신 진보 진영(통칭 586 세대, 강남좌파)에 빗대어 비판하기도 한다. # 실용보다 이론/이상에 매달리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매도, 비하하는 공통점을 보였다는 것. 다만 지방 향촌 지주라는 사림파 배경은 강남좌파로 대표되는 우촌좌도의 배경이 강한 진보세력과 반대인 부분도 있으며, 반대파에 대해 종북몰이를 하는 보수 일각을 기득권 양반 전체로 보는 반론도 있다.
세도정치가 사림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림이 조선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실무 능력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조선의 주요 세력이었는데 유능한 사람이 그만큼도 없으면 그게 더 큰 문제다.[46] 사림이 실무 능력에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사림의 근본적인 사상부터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철학 ONLY 스타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47] 즉 사림의 기본 성향 자체가 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게다가 실학파도 근본은 사림이라곤 하지만, 정작 그 실학파는 당대엔 사림 내에서 거의 왕따 수준이었다. 실학파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계가 다수였고. 실학자들의 근본이 사림이었으니 사림도 실무적인 성향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성향이 사림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이 사림의 성향이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사림들이 잡학이라고 신나게 까던 실용적 학문을 지향한 후대의 실학자들도 당대의 고위급 인사들보다 현실 개혁쪽에 초점을 더 두었을 뿐, 근본적으로 성리학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리학이 태생적으로 현실지향적, 실용주의적 경향이 큰 학문인 만큼,[48] 이쪽이 되려 성리학의 본질로 되돌아간 셈이고, 사림파의 주류 세력이 이단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조차도 보수파 세력으로 알려져있던 서인이나 그 후신 세력인 노론보다도 오히려 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류 역사학계의 평가가 날로 박해지는 상황이다[49][50].
성종 시대의 문명적 퇴행에 대해서도 훈구파가 득세할 때라고 주장하였으나. 성종을 검색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건 즉위 초반의 일에 불과하고,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성종 때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변론이다. 성종 치세의 훈구파의 집권은 7년이지만 사림파는 그 나머지 기간인 18년으로 훈구파보다 2배 이상 집권했다.
특히 세조와 훈구의 트롤이 사림에게 누명으로 씌워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관학≠훈구다.[51] 훈구는 관학의 한 갈래였을 뿐 순수한 관학도 아니었다. 또한 훈구가 관학을 온전히 계승했고 아니고 여부를 떠나서 이는 완전히 논점을 흐리는 주장인 것이, 훈구의 공과(功過) 여부를 떠나서 결국 사림이 중점으로 삼던 기치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 탁상공론과 이념싸움에 매진하는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훈구가 못했고 사림이 그걸 밀어냈으면 사림이 잘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으니 나라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다. 훈구의 일부가 관학을 망친 것은 사실이지만 관학이 망가진 토대 위에 선 사림이 그걸 완전히 땅 밑으로 묻어버린 걸 비판하는 것이지 조선의 모든 잘못이 온전히 사림만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사림의 문제는 사림의 학자들 개개인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사림이 추구하던 가치관 자체가 국가의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재능 있고 유능한 누군가가 사림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할 수는 있어도 사림 자체가 유능한 실무진을 계속 배출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52] 물론 사림이 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가의 제도나 법에 관련된 것들은 트롤링도 많지만 성과도 지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제도적인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데 기술적이고 현장에 걸맞은 성과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장 사림 집권 이후 실학파가 내놓은 것들을 제외하고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결과물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얼른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결정적으로 세조 때 혁파된 총통위를 부활시켜야 할걸 끝내 하지 않아 조선의 군사력 보강에 영 도움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도 무기나 기술 연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초에 조선은 기술적 연구가 정체된 나라지 인구가 적거나 군대가 없었던 나라도 아니고, 의병들이 기술적인 우위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53]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도 조선군의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이 훌륭한 사수를 육성하여 사수의 실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게다가 나선정벌 활약의 계기가 된 북벌론은 평소부터 해오던 훈련이 아니라 청나라에게 복수하자는 명분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활동이었다.[54] 당시의 상황과 명분에 따라 촉발된 것이지 사림이 군대와 기술을 육성하는 데에 앞장선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사림이 세도정치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진 않았지만 결국 세도정치의 간접적인 계기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세도정치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게 개판이 된 붕당을 누르려는 영조의 탕평이었고 시초라 할 수 있는 건 정조 대의 홍국영이었다. 그리고 정조 사후 당대의 문제점들이 꼬이고 꼬여 결국 세도정치가 터진 것이다.[55] 물론 이에 앞서 숙종의 환국과 숙종 말년에 노론을 밀어준 것이 영조의 탕평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환국 자체가 그놈의 개판 붕당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56] 거기다 세도정치 시기에도 어디까지는 중앙권력에서 사림이 안동김씨에 밀려난 거지 지방권력까지 밀려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이들은 세도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대리인인 수령과 아전이랑 같이 농민들을 수탈하였고 그 중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에 민란이 빈번해지는 원흉이 되었으며, 대원군이 47개를 제외한 7백개 서원 전부 폐쇄하는 강경책을 내놓게 된다. 또한 5백년 넘게 군역에 면제된 양반층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이 실시되자 전국의 사림들은 반발하며 한양으로 집결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와[57] 서원 철폐 취소를 요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사대부들이 중시했던 재조지은의 경우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 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다.
즉 명나라와 만력제는 정작 조선 입장에서도 마냥 고마운 존재는 아니었음에도 조선은 일부 사례들을 제외하면 명나라와 만력제를 재조지은이라며 칭송했던 것이다.출처:#
3.3. 2000년대 이후의 학설
국사교과서에서 사림이라는 개념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한 온건개혁파 사대부의 제자 혹은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리학 사상에 전념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하다가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그리고 조정에 진출한 지방 출신 사림들은 언론 삼사에 포진해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국왕권 강화에 일조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는 관료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교적 이상 못지않게, 지배층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기존 연구에서 사림의 사회적 성격을 경제적, 혈통적 공통성을 이용해서 파악하고자 한 바 있으나, 사림을 단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도덕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집단’이나 학문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위의 기존의 학계 통설과 다른 시각을 내놓은 것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및 한국학 교수 에드워드 윌렛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58]로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훈구와 사림의 사회 경제적 배경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림의 성격에서 훈구와 사림의 차이는 정치적 이념 정도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문화유씨가정보와 같은 족보 분석, 토지 소유 등을 연구한 결과 등을 통해 훈구와 사림으로 대표되던 기존 세력이 사실 혈족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경제적으로도 기반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며 기존의 훈구-사림 대립 논쟁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훈구파의 존재 자체가 학계에서 사림과 대비되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사림의 등장은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불안정했던 왕위 교체로 인해 왕권의 위상과 정통성이 추락하면서 언론 역할을 담당하던 삼사 대간직의 위상이 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대부들의 여론이 결집이 되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훈척 또한 이러한 불안정한 왕위 교체기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척신으로 대표되는 왕의 측근세력이었고[59] 사림은 이 과정에서 대간에게 집중되던 언론 기능이 지역 유생들까지도 상소를 올리며 언로가 확되되면서 정체성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4. 사림파 인물
사림파 士林派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신진사대부(온건파) | ||||
고려말 ( ~ 1392) | |||||
길재 | 김진양 | 김충한 | 민안부 | 신덕린 | |
우현보 | 원천석 | 이색 | 이숭인 | 정몽주 | |
성종 - 중종 (1469 ~ 1544) | |||||
기준 | 김굉필 | 김식 | 김일손 | 김정 | |
김종직 | 정여창 | 조광조 | 권경유 | 안당 | |
인종 - 명종 (1544 ~ 1567) | |||||
신광한 | 서경덕 | 이언적 | 이황 | 조식 | |
성세창 | 성수침 | 류희춘 | 이언침 | 김인후 | |
대윤 | 소윤 | ||||
유관 | 윤임 | 권벌 | 류인숙 | 정순붕 | |
선조 (1544 ~ 1575) | |||||
기대승 | 노수신 | 성혼 | 이이 | 백인걸 | |
온건파 | 강경파 | ||||
박순 | 심의겸 | 김성일 | 김효원 | 류성룡 | |
윤두수 | 정철 | 이산해 | 정인홍 | 허엽 | |
▼ 서인 | ▼ 동인 | ||||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5. 관련 문서
[1] 고구려는 연개소문시기에 불교를 견제하기 위하여 도교를 선택했었고, 백제는 불교신앙이 강해서 다른 신앙은 유지되지 못했다.[2] 대부분은 경상도지역[3] 고려말에 새워진 석탑 중 10층 석탑들은 원나라양식을 받아들인 것이다.[4] 그로 인하여 기호지방, 경상도는 조선시대 내내 유림들이 강세였던 지역이 된다. 그리고 구한말에 조선과 유림에 실망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나 기독교도가 되었고, 6.25전쟁로 공산주의자가 일소되면서 개신교 강세지역이 된다. 다만 경상도 + 강원도는 불교 강세지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5] 이미 성리학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주류가 되고 있었다.[6] 개혁파라고 알려져있는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집착은 과히 광적인 수준인데, 사림의 패악질은 이미 예고된 사항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겠다.[7] 대부분 서인에 흡수되었다고 한다.[8] 반정을 일으킨 명문은 폐모살제였고 전쟁이 일어난 원인도 결국 친명배금 정책때문이었다. 성리학을 교조화해서 그 짓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면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9] 인구가 약 900만이었던 세종대왕 시기의 국가수입은 140만 결이었고, 인구가 1800만 명이었던 고종황제시기의 국가수입은 90만결이었다. 심지어 세종은 착취해서 얻어낸 성과가 아니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삼정의 문란 등을 해결하고 나서도 저 수치인 것이다. 인구는 약 2배 늘어났는데, 세수는 반토막이 난 걸 보면 사림이 얼마나 조선을 망쳤는지 알 수 있다.[10] 세종 시절에는 수학과 과학이 발전했기에 고등수학을 할 수 있었다.[11] 어린 고종이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모아놓고 청나라에 대해서 질문했는데, 조선의 신하들임에도 대답을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12] 관학파와 시림파들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한 배를 탄 같은 성리학자들이었다.[13] 율곡 이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이의 7남매가 모여 유산을 분배하며 작성한 문서. 알다시피 이이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태두(泰斗)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학자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성리학이 당시부터 굳은 학문이었다면, 그런 집안에서 이런 사료(史料)가 나오리라 생각하긴 힘들다.[60][14] 물론 조선 전기에도 성리학이 근본주의가 있었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림 초창기의 성리학자인 채수의 경우를 보면 초기라도 반드시 융통성이 있던건 아니다.[15] 조광조의 문제점 중 하나가 천민 출신이던 공신을 주로 죽게 만들었단 부분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천민이라고 모두 무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관료 능력이 있어서 관직에 오른 것인가? 천민 등 사림들에게 있어서는 기피되는 신분 출신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외에 다른 출세수단이 있었는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세조, 중종 때는 엄청난 공신을 제조했고 그러니 사림들 입장에서는 신분은 미천한데 벼락출세한 인물들이 나올 수가 있던 거다. 문제는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출세한 이들이 과연 실력도 검증되었는지 의문이라는 것. 더 처참한 건 세조, 중종은 원종공신까지 합쳐 수천 명이나 책봉했는데 그들 상당수는 공도 없는데 책봉된 이들이 대다수다.[16] 그리고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단순히 천민출신이라고 차별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조광조는 사람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성이 같다고 생각했으며 천민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실제로 사노비 여형의 인품과 능력이 뛰어나다며 여형을 바로 허통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면천 시켜 줄 것을 주장했다.[17] 심지어 김종직은 후대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18] 임진왜란 때의 졸전 행보를 보인 선조 역시도 무기 개발에는 뒷전인 왕이 아니라서 이순신이 그렇게나 잘 써먹은 천자총통은 바로 선조 때 개발되었고 일본군에게 털린 인상만 깊어서 그렇지 북방 여진족과의 분쟁에서는 나름 잘 대처했다.[19] 이는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20]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는데, 애초에 중화식 관료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송나라 이후 관학은 줄곧 쇠퇴 일변도였다. 애초에 관학은 국초에 매우 짧은 기간에만 유지될 뿐, 장기간 유지되었던 적 자체가 없던 것이다. 애초에 정치집단으로 자생적인 생명력이 없던 집단이 관학파이다. 역사적 사례를 참고할 때, 관학의 쇠퇴는 필연일 뿐이다. 참고로 세종 시절이라고 관학파가 멀쩡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세종의 하드캐리였을 뿐, 이 시기도 만만치않게 썩어돌아가던 시절이다. 황희 집안의 비리 하나를 덮어주기 위해서 관학파 중진이 총출동하여 세종 vs 관학파 올스타 전 빅매치를 치른 것만 봐도... 집현전의 연구기관으로서의 능력도 세종 후기로가면 시들해지고, 세종 사후 문종 와병이 시작되자, 이들은 정치적 적대세력인 고명대신을 쳐낸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에 적극, 소극적으로 협조까지 했었다...[21] 다만 총통위의 해체와 화기 기술개발의 정체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입증되기 힘들다. 총통위는 그 자체로서 화기를 연구하는 기구가 아닌, 화기의 운용과 일선 부대에 보급, 훈련을 담당하는 특수기구였고, 이들이 해체된 이유는 그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인지라... 일단, 세조 이후 화기 개발에 있어 이전과 같은 적극성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이유가 세조와 훈구파의 협소한 전략안 때문이 아닌,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화기를 개발하는 것은 비용 낭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이만주를 척살한 이후 대규모 정규전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군비라도 남아돌면 모르겠지만 조선의 군비는 이미 세종 시절부터 고갈된 상황이었다...[22] 단, 훈구파의 정의부터도 애매한데다 엄밀히 말해 세조의 독단에 의한 행위이니 훈구로 분류된 인물들이 어떤 성격이었다고 정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23] 반대로 세조같은 인물의 독단으로 만들어진 폐해와 공신들이 지나치게 큰 권위를 가져 만든 실책들을 훈구파로 분류되는 모든 인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24] 삼국시대처럼 중국이 남북으로 혹은 소규모 국가들이 자웅을 겨루던 시대라면 모를까 이 당시는 그런건 택도 없었다.[25] 상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출처: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8월 23일 무인 2번째기사[26] 교육과정에서는 훈구와 성종이 대립한 것처럼 가르치지만,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훈구는 기본적으로 근왕세력이었다. 그런 이들도 과부개가금지법의 실익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했던 것이다..[27] 이에 대해서 정도전은 천민도 없애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었다.[28] 이는 훈구파 또한 마찬가지인데 하다못해 고려의 학자로부터 이어진 학연에서 갈라진 사림과 달리 이쪽은 명백히 묶일만한 기준이 사림파와의 갈등 외엔 없다.[29]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개발하면서 해결되었다는 반론이 있지만 척계광은 왜구에 특화된 전술을 이용해 척가군이라는 정예병을 양성했을뿐 당시 명나라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30]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이 웅정필과 원숭환이다.[31]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보의 변이후 영락제 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32]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33]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34]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35] 애초에 이들이 등용되는 과거제도라는 것 자체가 유교 학문이 주된 과목이었고 실무를 검증하는 부분은 잡과라고 하여 기본적으로 문과보다 낮게 보았고 문과와 달리 오를 수 있는 관직도 제한되었으며 문과가 오를 수 있는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다. 과거제 자체에서부터 벌써 문제가 있던 것. 즉 과거제의 구조상 성리학 엘리트들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36] 홍윤성과 같은 사례는 정통성 없이 찬탈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신을 만들고 이들의 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비정상적인 사례다. 조선 초기만 해도 단순히 공자왈 맹자왈만 잘 한다고 고관대작에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역관이나 의관과 같은 실무직들도 나름의 대우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영실. 그는 노비출신에서 면천되어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세자인 문종과 함께 연구하여 측우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성종조차 사림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능력 있는 중인들을 문관 및 무관으로 등용했다. 또 황희나 조말생같은 조선 초 네임드 정승 판서급들의 실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이 조선 중후기 같으면 당장 탄핵되었을 법한 대형 부패 스캔들에도 버틴 건 이들 없이는 행정을 꾸리기 힘들다는 세종의 판단 덕이다.[37] 진주 정씨 공대공파. 부친은 훈구 대신인 정척인데 성향은 완전한 사림이다. 정척은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정분의 먼 친척(11촌)으로, 관학/훈구/사림을 가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예시중 하나다. 이 때문에 훈구가 사림을 쓸어버리고 싶어도, 아버지는 훈구인데 아들은 사림인 경우가 많아서 쓸어버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림을 강남 좌파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38] 참고로 이 사태를 만든 대간 정성근은 성종의 국상을 이일역월제로 치르는 것을 비판하고 혼자 삼년상을 치러 연산군에게 어그로를 끌었고, 이 바람에 갑자사화 때 세트로 사사된다.[39] 학맥 낙하산도 문제지만 실무 경험 없이 삼사와 대간 경력만으로 고위직이 되는 게 가능했던 조선의 승진체계가 수포자 조광조 같은 교조주의 무능력자들이 고위직에 진입할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원흉으로 꼽힌다. 대조적으로 후술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는 직책에 관계 없이 입사 직후 3개월 동안 생산라인 현장에서 업무를 체험 내지 직접 수행하도록 한다.[40] 사림의 시초중 한명인 김종직은 세조에게 "왕이 잡학에 집중해서 쓰나요?" 라고 말해 미움을 받아서 파직된 이야기도 있다.[41]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과학기술은 정체되어 있었고 조광조 처럼 수학을 천시한 이도 있었지만 천문학과 수삭부분은 꾸준히 연구를 이어갔다.[42] 조선에서 남녀차별과 서얼차별이 심해지고 가부장제가 강화된 시기가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이 교조화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남자는 남자의 할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일 뿐인 음양사상을 이상하게 왜곡해 남존여비라는 해괴한 원칙을 만들어냈다. 다만 남존여비적인 면모는 이미 태종 시절부터 보이고 있었다.[43] 한 보기로 노비에서 시작해 출세를 거듭해 형조판서까지 간 반석평도 사림들 등쌀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사관이 "사람을 능력보고 써야지 가문보고 쓰면 되나?" 라고 기록했을 정도.[44] 그들이 한 행위는 역모라 해도 할 말 없는 중죄였다. 더 큰 문제는 실무능력도 없고 현실도 모르지만 나는 대인이고 군자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답게, 처음엔 자신들이 한 짓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45] 예를 들어 무오사화가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적에 유생들이 난언을 하다 잡혀죽은 사건이 있는데, 이 때 유생중 1명은 김종직을 두고 충신이라 말했다. 세조의 밑에서 일했으면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고 그러면서 단종을 위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작자[61] 그 집단은 무능한 눈새 정도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너무 후한 평가다. 무능한 눈새로 끝나면 그래도 그들의 정체성 자체는 지킨 셈이므로 '그래 뭐, 무능하긴 한데 자기 길은 지키네...' 정도로 끝나지 이건 자기 정체성마저 제손으로 파괴해서 이도저도 아닌게 된다.[46] 사림이 독점적으로 집권한 300여년 동안 실무적 능력이 출중한 관료, 명재상으로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김육, 최명길, 윤휴, 채제공등이 꼽히는데, 사림 이전에 겨우 50년 동안 존재한 관학파 신료들 중 실무적으로 출중한 이들로 정도전, 조준, 하륜, 황희, 맹사성, 허조, 조말생, 윤회, 김종서, 황보인, 남지, 정분, 정인지, 최항, 신숙주 등이 꼽힌다. 사림 집권기가 관학파 집권기보다 6배 이상 긴데 사림 중에 실무능력이 우수하다고 꼽히는 사람의 수가 관학파의 것보다 적다. 심지어 앞서 기술한 사림출신 명재상 중 윤휴, 채제공은 후술하였듯이 남인 출신으로 사림 내에서는 거의 왕따수준이었다.[47]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주된 학문은 죄다 철학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같은 게 없었다. 물론 이 점은 서양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서양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논리학, 수사학, 문법, 음악, 산술, 기하학, 천문학, 신학, 법학, 의학이었다. 적어도 오직 성리학만 가르치던 조선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인 셈.[48] 이 점은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초기 개국공신들이 성리학에 기반한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49] 오죽하면, 임오화변의 원인을 사도세자가 노론의 주류 세력과의 돈독한 유대로 인해 진보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자, 이를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노론 자체를 박살낼 목적으로 벌였다는 가설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꼭 이것만 가지고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만, 노론과 함께 어울리면서 아들이 조선 사회의 기강을 흐트러놓는다고 생각한 게,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50] 실학자들보다는 정몽주, 정도전 등의 여말선초 때의 성리학자들이 진짜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아예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사회에 완전히 도입되지 못한 토지 공개념에 기반해서 계민수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혈통에 관계없는 공정한 인재 등용을 위해 과거 제도를 매우 중시하면서, 기득권 자체를 완전히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학자들 중에서 정말로 진보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는 인물은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 등 몇 사람 안 된다.[51] 훈구는 기존의 관학파 중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오며 권세를 쌓은 기존 고위 사대부 층과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공신남발로 인해 새로이 권세를 얻은 세력이 합쳐져 이루어진 세력이다. 당연히 모든 관학파가 훈구였던 것은 아니다.[52] 이는 현대의 운동권 세력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욕을 먹는 이유와 비슷하다. 운동권 역시 독재세력에 저항하면서 쌓은 논파력이나 철학적 지식은 뛰어나지만, 쌓은 지식이 그것뿐이라 막상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무적 지식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문제점을 '우리가 더 고등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더 우월하다.' 는 논리로 정신승리한다는 점에서 사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53] 의병의 승리 역시도 대부분 소규모 전투가 대다수지 대규모 전투는 관군, 명나라군과의 협동없이는 별로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이는 국가적 조직인 관군, 명나라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은 의병의 한계이기도 하지만.[54] 물론 현대의 평가는 실제로 청나라에게 복수하기보단 이걸 명분으로 조선의 군사적 제도를 정비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조선 전반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55] 정확하게는 이전까지 개판이 되었던 붕당을 영조와 정조가 자신들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왕권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 때부터 기미를 보이던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친 감이 많지만 붕당은 어찌되었든 특정 집단의 정치적 독점을 막는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갈수록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폐쇄화, 극단화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에 염증을 느낀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을 조지는 과정에서 근왕세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 두 왕의 눈에 든 것이 풍산 홍씨와 안동 김씨라는 외척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마저 죽자, 그동안 왕권 강화라는 명분으로 권력이 비대해진 외척세력을 막을 수 있는 집단이 하나도 없었고, 이후에 김조순에 의해 벽파가 숙청되며 붕당이 사실상 소멸하자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된다.[56] 다만 숙종이 환국을 시행한 것 자체는 정치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본인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붕당이 개판이라서 숙종이 그걸 정상화시켰다는 게 아니고, 왕이 나서서 손을 볼 때까지 개판이 정리가 안 되던 붕당 자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문제는 숙종의 성격이 워낙에 지랄맞았다는 것. 자기 딴에는 개판이었던 붕당을 손보겠답시고 환국을 시행했으나, 그 과정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인이 죽어나가고 수많은 서인과 남인들이 쓸려나갈 정도로 피바다였기에, 붕당이 개판이 된 원인 중 하나인 서로에 대한 증오를 오히려 증폭시키고 말았다. 송시열-윤휴 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여길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그의 능력만은 높이 평가해 윤휴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조때가 되면 소론 영수 이광좌에 대해서 노론가에선 아이들도 광이나 광좌라 부르는 꼴이다. 여기에 상대 당을 역당(역적의 당), 상대 당의 인물들을 소인으로 낙인찍어 비하하는건 덤.[57] 이때 호포법(戶布法)을 반대한 명분은 "선비들에도 세금을 거두면 반상의 구별이 어렵다"는 궤변이었다. 당시 대원군이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할 때 선비라 할만한 이들은 2010년대에 생긴 단어를 빌려 씹선비라 불러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자질이 없었으며(세도정치기 세도가에 맞서긴 커녕 세도가 문전이나 기웃대거나 아부하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이항로와 그 제자들은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을 닦아 명분상 꿀릴건 없었다만.) 세금 문제도 원래 세금은 양인(양반 포함)은 다 내는 것이다. 효종 때 호포법(戶布法) 실시 논의가 있었을 때 반대파들은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건 사대부들인데 그들에게 세금 거두라 하면 원망이 크지 않을까요?"처럼 궁색하긴 하지만 대원군 때처럼 뻔뻔한 주장은 하지 않았다.[58] 1924~2001,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시조격으로 불리며 자료 수집과 분석 등에서 한국사 연구 방법에 발전을 가져다 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59] 이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 중종으로 측근세력이 반정공신->조광조->남곤->김안로->윤임과 윤원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듯 측근은 훈구와 사림을 가리지 않았다.
[60] 또한 이이의 경우는 신사임당 문서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덕수 이씨 가문 자체가 원래부터 여자들의 힘이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신사임당의 영향으로 한때 승려가 된 적도 있는 인물이다. 불경공부 열심히 한 결과 성리학을 심성학으로 변천시키기도 했지만.[61] 오히려 성종실록 14년 7월 27일자 기사에서 대간이 송영이 난신(단종의 장인 송현수)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는데 성종은 이에 병자의 난(당시에는 사육신들이 세조 암살을 꾀하다 실패한 일을 말한다.)에 송현수는 가담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이 급제하기도 했으니 문제될게 없다고 하자 김종직이 송현수는 난신이라 말한다. 물론 사육신의 난과 관련되어 있으니 김종직이 어떤 의도에서(사육신이 세조를 죽이려고 한 행위가 옳았다고 여기는지 그르다고 여겼는지) 난신이라고 했는지에 따라서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