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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3년(숙종 39) |
사망 | 1779년 1월 21일 (향년 66세) (음력 1778년, 정조 2년 12월 4일)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산17-2 |
봉호 |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1899년(광무 3) |
시호 | 익정(翼靖) |
본관 | 풍산 홍씨 |
자 | 익여(翼汝) |
호 | 익익재(翼翼齋) |
부모 | 부친 - 홍현보(洪鉉輔) 모친 - 풍천 임씨 |
부인 | 한산부부인(韓山府夫人) 한산 이씨(1713 ~ 1755) |
자녀 | 슬하 8남 3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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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 정승을 역임한 문신.조선의 왕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영조의 바깥 사돈, 사도세자의 장인, 정조의 외할아버지이다. 노론의 척신이며 권신으로 후에 시파로 이어지는 북당(北黨)의 영수이다.
2. 생애
조선 선조의 5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4세손이며 수재 홍현보의 아들로 좌의정 홍인한의 형이다. 홍국영 일가 역시 그의 친족으로 8촌 형인 홍창한의 손자였다.음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 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뽑혔으며 1744년 문과에 급제해 사관이 되었다. 급제한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적당히 배려를 받았을 것이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45년 종2품으로 특진해 광주부윤이 되었다.
과거 급제 직후 종2품으로 승진하여 양사의 비판이 있었으나 왕이 특별히 무마시켰는데 이후 영조 연간의 최강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광주부윤을 비롯하여 어영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를 지낸 후 1752년 동지경연사, 1753년 비변사당상으로 <임진절목>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1754년 비국당상이 되어 청나라인들이 애양 책문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가 되었다.
1761년 사위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 사건 이후 승진해 1761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어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761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도세자와 관련된 왕실 내 분열이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결국 홍봉한은 영조의 뜻을 받들게 되는데[1] 사도세자는 1762년 5월 뒤주 안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처형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물'[2]을 바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홍봉한은 형식상 영의정 겸 세자사로서 세자의 스승이라는 직책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사도세자의 사후 사직서를 내고 보름 동안 나가 있다가 다시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이후 경외민의 이동법을 만들어 함부로 행동함을 금하였으며 여러가지 폐습과 관리의 협잡 등을 시정하는 한편 당습의 제거, 군사의 보충, 독봉의 폐해를 개혁하였다.
1768년 다시 영의정이 되어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하고 책을 만들어 일본인들의 점유를 미리 막게 하였으며 1771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청주의 한유의 '망국동 망정승'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한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다가 영조의 의심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은언군과 은신군의 유배로 종결되었다가 다시 봉조하에 이르러 은신군과 은언군의 사건으로 삭직되었다.
집권 말엽에는 경주 김씨(남당)와 화해를 주선했지만 경주 김씨들이 '망국동 망정승' 상소 등을 이용하면서 그를 탄핵하자, 이에 유화책을 접고 각각 삼왕손과 세손을 등에 업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나중에 영조에게 들키면서 경주 김씨들과 사이좋게 실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주 김씨가 더 타격을 받았는데 김귀주는 삭탈되고 김관주는 갑산에 유배되었으나 홍봉한은 세가 꺾인 것 외에 타격이 없었다. 그의 힘이 약해진건 사실로 빈 자리를 홍인한-정후겸 연합이 어부지리로 주워먹었다.
이 경주 김씨와의 권력 투쟁 때문에 실각한 후에는 그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조정의 실세가 되는데 이 때문에 홍봉한의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다. 또한 반대 세력에 의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과 은신군의 관작이 삭탈당하자 나아가 세손까지 그 권위가 위협되므로 홍봉한은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다.
영조 사후 정조가 즉위하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죄로 유배당하고, 이내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을 해치고 역모에 가까운 죄를 저지른 죄로 사사된다. 재기를 노리기 위해 경주 김씨의 김귀주와 김관주는 홍봉한도 홍인한의 형이기에 연좌의 율로 홍봉한도 처벌해달라고 요구한다.
김귀주는 자신의 아버지 김한구가 "생전의 영조가 건강이 좋지 않자 비싼 나삼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홍봉한은 "나삼은 나오지 않고 비싸서 안된다"며 거절했고, 이에 "그러면 송다를 진상하라"고 하자 홍봉한은 "금주령 기간이라 그것도 안된다"며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김귀주는 홍봉한이 선왕을 우롱한 죄인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며 그를 탄핵했다. 하지만 오히려 정조는
"봉조하(홍봉한)가 나를 시해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침입하고 날 비방하거나 독살하고 저주를 걸었는가? 김귀주는 왜 내 외조부를 건드려 내 생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냐"
라는 논지의 말을 하며,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홍봉한을 위로하며 은전을 하사했다. 이후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홍낙임을 친국의 형식을 빌어 석방하고, 홍봉한을 또다시 봉조하에 제수했다. 어떤 역사 만화책에서는 외손자 정조가 홍봉한을 임오화변의 주역으로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그런 기록은 없다. 동생 홍인한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66세의 나이로 1778년 한성부에서 사망했다. 정조는 그의 장례를 부원군의 장례에 준하여 장사케 하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게 했다. 1784년 '익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제사하였으며, 1843년 체천않는 은전을 베풀었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고 혜경궁 홍씨도 왕비로 추상되면서 '영풍부원군'에 추증되었다.
3. 여담
-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는 반대파들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충절의 결과이자 사도세자를 영조의 진노로부터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이 의리와 실리의 우선 순위를 뒤바꾼 결과라고 변호한다.
물론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이니만큼 본인의 주관을 담아 옹호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홍봉한이 자신의 사위 사도세자를 보호하는데 가장 앞장선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해 토로하며 이에 대한 약을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사도세자 역시 장인인 홍봉한에게 꽤나 의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편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사도세자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홍봉한은 사태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철저하게 함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의 언급대로 홍봉한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할만큼 했다고 봐도 되는 것.
하지만 사도세자는 궁궐 내에서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 행각이 드러난 상황이였으며 급기야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마저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폭로한터라 홍봉한도 더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 반 홍봉한파인 한유가 이에 대해 비판했다가 오히려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처형당한 것만 봐도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한 것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영조에게서 살기 위해서 한 것일 뿐 결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러한 골육상쟁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정조도 외조부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외가에 대해서는 모질게 굴지 못했다. 특히 정조는 "홍인한을 사사하라"는 대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물어보며 외조부의 형제에 대한 처분을 망설였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본인의 숙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지사"라고 했고 정조는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홍인한을 사사시킨다. 이것도 정조가 친모를 옹호하기 위해 과장해서 한 말이었는지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사실을 부인했다.
- 정조 입장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방관한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임오화변이라는 역대급 사태에서 홍봉한도 사위인 사도세자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국왕이자 사돈인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고 결심하였고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폭력으로 나왔는데 섣불리 사도세자를 옹호했다가는 사사된 현빈 조씨의 오빠인 조재호처럼 될 수 있었고 애초에 조재호의 사사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홍봉한이였다.
만약 소론의 핵심 인물인 조재호가 사도세자를 구하는데 성공하여 나중에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나주 괘서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지다 못해 역당으로 낙인찍힌 소론은 사도세자를 구한 공으로 재기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노론의 수장인 홍봉한의 입지도 좁아지기 때문에 조재호 제거에 앞장섰던 것이다.
또다른 견해로는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조재호를 제거했다는 견해도 있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면 정조의 외척은 홍봉한에서 조재호로 옮겨가며 권력이 이동할 염려도 있었다. 딸인 혜경궁 홍씨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조재호가 역률로 처단되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는걸 막을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당론서에서는 사도세자를 함께 보호하자며 조재호를 불러들인 것이 홍봉한이었다고 하는데 조재호는 이를 거절했다가 사건이 터지고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던 시점에 도성으로 들어와 틈을 봤기에 홍봉한이 그를 처분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 그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일물을 바친 것에 대해서는 모순이 있는데 《한중록》의 기록이나 정조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일물'이 들어올 때 홍봉한은 입궐도 안한 상태였기 때문. 홍봉한은 나경언 사건 이후 사도세자의 대명을 풀어주려다 파직당했기에 도성 밖인 동교에 나가 있었고 중간에 다시 벼슬을 내린 뒤에도 계속 도성 밖에 있었다. 그 날 영조의 창덕궁 거동령이 내려지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만난 시점은 이미 정오였으나 거동이 지체되어 오후 1시는 넘어야 영조가 휘령전으로 온다는 명이 다시 있었고 이후에야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 대처분을 내리게 된다.
홍봉한 역시 일이 터진 후에야 동교에서 대처분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들은 후 급하게 도성 안으로 들어와 궁 밖에서 대명했다. 죄를 지어 파직당한 몸이므로 영조가 대명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져야 궁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 그렇기에 정조가 말한 주방의 물건이 영조가 대명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지기 전에 들어왔다는 말이 나온 것.
이후 공홍파에서는 그러면 2번째 뒤주가 홍봉한이 바친 거라고 몰고갔지만 정조는 2번째 뒤주도 그 전에 이미 와있었다고 주장한다. 소론계 당론서인 <현고기>에도 당시 홍봉한은 동교에 나가있었다고 뒤주설을 부정한다. 이후 홍봉한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날 밤 영조를 독대한 자리에서 홍봉한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댔지만 오히려 영조가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그것을 용납하겠냐"며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영조에게 올린 상소이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받아들인건 세자가 뒤주에 들어간 날 밤이고 이 날 영조의 하교를 듣고 나온 홍봉한이 사가에 있던 혜경궁 홍씨와 정조에게 영조의 말을 전했다는 것.
4. 가족
- 종증조부 : 홍만형(洪萬衡) - 홍주원(洪柱元)의 차남, 홍국영과 원빈 홍씨의 5대조
- 증조부 : 홍만용(洪萬容) - 홍주원(洪柱元)의 장남
- 정부인 :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韓山府夫人 韓山 李氏) - 이집(李潗)의 딸, 여동생 중 하나가 김조순의 조모
- 적장남 : 홍낙인(洪樂仁)
- 며느리 : 여흥 민씨(驪興 閔氏) - 민진원(閔鎭遠)의 손녀, 민유중(閔維重)의 증손녀
- 손자 : 홍수영(洪守榮)
- 적장녀 : 풍산 홍씨(豊山 洪氏)[4]
- 적차녀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 사위 : 사도세자(思悼世子)
- 외손자 : 정조(正祖)
- 적차남 : 홍낙신(洪樂信)
- 적3남 : 홍낙임(洪樂任)[5]
- 적4남 : 홍낙륜(洪樂倫)[6]
- 며느리 : 청풍 김씨(淸風 金氏) - 효의왕후와 사촌지간
- 적3녀 : 풍산 홍씨(豊山 洪氏)
- 사위 : 이복일(李福逸)
- 첩부인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서장남 : 홍낙좌(洪樂佐)
- 서차남 : 홍낙우(洪樂佑)
- 서3남 : 홍낙동(洪樂洞)
- 서4남 : 홍낙칭
5. 대중매체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였지만 훗날 시파로 분류되며 동생인 홍인한과는 다르게 정조 등극 후 숙청되지 않고 노년을 맞이했기에 사도세자나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대중매체에서 악역으로 묘사되는 홍인한과 다르게 부정적인 묘사가 적다. 대부분 혜경궁 홍씨와 더불어 사도세자를 걱정하거나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는 역할.예외적으로 이덕일의 노론 사관이 깊게 반영된 <정조암살미스터리>에서는 홍봉한이 노론의 영수로 사도세자 모해 및 사사를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정조 등극 후 숙청을 두려워하여 한성부에서 살지 못하고 과천에서 사망하며 정조의 문상도 받지 못하고 박대받는 것으로 묘사.
- 2011년 웹툰 《타임인조선》에서는 미래에서 온 장준재가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밀서를 주나,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구명하지 않고 밀서를 불태워버린다.
[1] 사도세자가 이미 영조의 눈 밖에 난 이상 홍봉한이 그를 변호해봤자 영조가 들을리가 없을 뿐더러 여차하면 영조의 심기까지 거슬리게 하여 자신은 물론 딸과 손자까지 위험해질 것을 걱정해 이렇게 행동했다는 주장이 많다. 이미 영조는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죽은 정성왕후의 영혼이 세자의 역모를 경고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면서까지 처벌을 강행하는 등 사도세자를 살릴 마음 자체가 없었다. 광증이 너무 심각해진 사도세자를 죽여서라도 세손을 보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홍봉한도 사돈인 영조와 의견을 같이 하였다.[2] 一物. 뒤주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좋지 않은 일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일물'은 임오화변과 관계깊은 물건인 뒤주를 필터링한 표현으로 쓰였다.[3] 숙선옹주의 남편[4]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만약 이 장녀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생인 혜경궁 대신 사도세자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홍봉한이 요절한 장녀의 몫으로 해둔 혼숫감을 차녀인 혜경궁이 이어받아 간택장에 나아갔다고 한다.[5] 첫번째 부인이 임천 조씨인데 연암 박지원이 그녀에 죽음을 추모하는 시를 홍낙임에게 부탁받아 썼다 "만조숙인"[6] 정조의 한글편지에나오는 돌아재가 홍낙륜으로 정조와 2살차이 친구처럼 지낸 삼촌[7] 이산에서는 채제공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