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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의 어진[1] | |||
출생 | 1580년 8월 12일(음력 6월 22일) | ||
한성부 경복궁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사망 | 1620년 1월 23일 (음력 1619년 12월 29일) (향년 39세) | ||
한성부 회현방 송현궁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 |||
능묘 | 장릉(章陵)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부(琈) | ||
부모 | 부왕 선조 모친 경혜인빈 | ||
형제자매 | 14남 11녀 중 5남 | ||
배우자 | 인헌왕후 | ||
측실 | 김씨(金氏) | ||
자녀 | 4남[2]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봉호 | 정원군(定遠君) →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3] | ||
묘호 | 원종(元宗) | ||
시호 | 조선: 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명: 공량(恭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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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4대 선조의 5남이자 16대 인조의 친아버지로, 추존된 묘호는 '원종(元宗)', 휘는 부(琈), 생전에 받은 봉호는 정원군(定遠君). 생모는 인빈 김씨이며 적모는 선조의 정실인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이다. 인목왕후 소생의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선조의 또 다른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임해군과 광해군의 이복형제이다. 인조부터 모든 왕통은 그의 직계 후손들이다.임진왜란 뒤에 호성공신[거의] 2등에 올랐다. 정원군은 1620년(광해군 12년)에 사망했지만, 3년 뒤 장남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자동으로 '군'에서 '대원군'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대원군들과 달리 인조가 추존에 성공함으로써 원종이란 묘호로 통한다.
2. 생애
선조의 5남 서자이자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3남으로 태어났다. 동복 형제이자 셋째 형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하고 넷째 형 신성군도 임진왜란 초기 요절하여[5] 실질적으로 선조의 셋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임해군과 순화군 못지않게, 아니 이들보다 더욱 행실이 포악했다고 하며 사관에게 "그 임해군, 순화군이 선녀로 보일 정도로 답이 나오지 않는 최악의 인간말종."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대단히 악명 높았다.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구굉)을 합격시키는 부정을 저질러 사헌부[6]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을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고, 1602년(선조 35년) 9월 13일 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 즉 임금 선조의 형수[7]를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 노복들과 창기(娼妓) 5~6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 것. 혈연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이 납치된 사건임에도 오히려 자기 집 노비들의 말을 듣고 말리는 종친들을 되려 나무랐다가 하원군의 아들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익성군 이향령(益城君 李享齡) 등이 울면서 애걸복걸하자 새벽이 돼서야 겨우 풀어줬다고 한다. 당연히 하원군네 종들은 그 과정에서 죽이 떡이 되도록 아주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정원군은 탄핵을 당했다. (실록의 기사)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는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壺患)을 피하듯 했다’는 부분이 있어, 1년에 10명씩은 무고한 사람들을 이유없이 갖은 핑계대며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이코패스인 순화군[8]이 정원군보다는 덜하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순화군 '졸기'라는 출처에서 볼 수 있듯 이는 고인이 된 마당에 조금이라도 좋은 말 좀 써주자 해서 내려치기된 것이다. 혹은 순화군이 주로 비행을 저질렀던 쪽은 평민이나 노비 등 하위 계층이었으니 당시엔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 그 경중이 낮게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들과 싸잡아 언급될 만큼 개차반이었다 식으로 생각하면 되겠다.[9]
어머니 인빈 김씨가 신성군 사후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아 사이가 좋았기에 광해군 집권 중기까진 왕실 종친으로 합당한 예우를 받았다.
선조의 맏이 임해군이 광해군 즉위 2년차인 1609년(광해군 원년)에 처형되었고 3남 의안군과 4남 신성군은 선조보다 먼저 어린 나이에 요절해 세상을 떠났기에, 정원군은 광해군 바로 밑 아우로서 주로 의전 행사[10] 때 왕실의 종친 대표로 잔치에 참석하거나 1611년(광해군 4년)에는 사옹원 도제조(司饔院都提調)의 직책을 맡아 명 사신 행차시 접대를 대신 수행했다. 광해군이 각종 옥사(獄死)를 일으킬 때마다 종친들이 지금으로 치면 관제데모에 자주 동원당했는데, 이때 역시 종친의 대표로 누구 누구를 빨리 작살내라며 거들거나 옥사가 끝나고 나면 역적 평정의 공로로 존호를 올리는 데 총대를 메고 이복형 광해군에게 가서 받아주라고 하는 그런 역할을 했다. 1616년(광해군 8년) 5월에도 5월 17일부터 5월 29일까지 그는 백관들을 앞세워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려야 한다는 여론에 앞장섰다.
또한 정원군의 노비들과 하원군의 노비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때 정원군의 노비들이 하원군의 집에 침입해 철거 수준으로 닥치는 대로 때려부순 뒤 어떤 귀부인을 머리끄댕이를 잡고 개끌듯 끌고 나왔다. 그 귀부인이 바로 남양군부인 홍씨였으며, 정원군은 그렇게 자기 큰어머니를 개끌듯 질질 끌고 나왔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는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복형이었던 광해군의 즉위 이후, 그는 모후 인빈 김씨가 생전 광해군의 모후 공빈 김씨의 숙적이었던 탓에 관제 데모를 제외한 일체의 정치적인 활동을 삼가고 극도로 조용히 근신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후일 인조 즉위 후 편찬된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그는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1619년,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9일(무인) 6번째기사 "정원군의 졸기"
-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1619년,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9일(무인) 6번째기사 "정원군의 졸기"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先王)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1619년,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9일(무인) 6번째기사 "정원군의 졸기"
-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元宗故事本末)"
이는 《월사집》(月沙集)과 《흥경원지》(興慶園誌), 연려실기술 등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11]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先王)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1619년,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9일(무인) 6번째기사 "정원군의 졸기"
-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元宗故事本末)"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심해진 광해군의 의심병[12]은 그조차도 피해가지 못했다. 3남인 능창군[13]은 정원군 생전에 후사 없이 죽은 형 신성군의 양자로 보냈지만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고 살던 집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14][15]
자신도 술병과 홧병으로 얼마 못 가 1619년(광해군 11년), 사망했다. 이후에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장남 능양군(인조)이 아버지와 동생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광해군의 이복조카였던 자신이 새로운 왕이 되었다.
3. 사후 추존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 조선 제16대 왕 인조가 되자 그의 아버지 정원군도 대원군(大院君)으로 격상되었다.공식적으로는 선조의 뒤를 이은 인조였지만 선조의 계비 소성왕대비(인목왕후) 김씨에게 후계자로 추인을 받았고 민생 파탄내고 사대부 사이에서 패륜아[16]로 찍힌 광해군을 쫓아낸 것 자체는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인조의 정통성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17] 그러나 인조는 좀 더 나아가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추숭해서 정통성을 더 강화하려고 하는데, 흔히 이것을 '원종 추숭 논쟁'(元宗追崇論爭)이라 부른다. 이귀, 최명길 등 외에는 거의 모든 신하가 전교를 거두어 달라며 크게 반대했지만 선조의 왕비이자 대왕대비 인목왕후도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라[18] 결국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관철시킨다. 당시 집권 서인들의 주장은 대원군은 왕세자인 적이 없기 때문에 왕으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인조는 대원군도 선조의 아들이었으니 가능하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러한 인조의 주장에 당시 사대부들은 대통(大統)과 소통(小統)도 구분 못 한다고 인조를 깠다. 당시 조선에서는 혈연보다 종통(宗統)을 누구에게 이어받았느냐가 중요한데[19] 유교 종법상 후임자는 전임자의 아들로서 물려받는다고 여겨졌으므로 광해군은 흑역사 처리되고 선조에서 인조로 직통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로 치면 가문을 물려받는 것이고 왕실은 종묘와 사직을 물려받는 사람을 아들로 치는데, 인조는 선조의 혈연상으론 손자지만 종법상으론 아들이란 것이다. 어쨌든 인조는 자신만의 논리를 위해 이귀, 최명길 등 찬성한 소수의 대신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거의 어거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생전에 세자였던 적도 없는 듣보잡, 후궁 소생 출신 왕자가 왕에 추증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20]
조선이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한 성리학의 나라였기에 이런 절차가 없으면 권력 기반도 흔들렸던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줄 필요가 있겠지만, 이미 반정은 사대부들의 지지와 대비의 추인, 명나라 책봉까지 받아서 정통성 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명 청 교체기로 병자호란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쓸데 없는 짓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조는 대외 문제보다 이 문제를 훨씬 중시했고 이때 총애를 받던 김류가 세력을 잃고 이귀와 최명길이 전면에 나서게 되나, 이귀는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대신 그 아들 이시백이 총애를 받았다. 결국 선조 - 정원대원군 - 인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으로 격상되어 추존왕으로서 원종(元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아내와 함께 결국 종묘 영녕전에 모셔지게 된다. 그리고 아내 연주군부인 구씨 또한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결국 문제는 서자라서 추존한 게 그른 것이 아니고, 왕세자 자리에 한시도 있던 적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21] 성종이 자기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한 것은 자신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일단 의경세자는 세조의 세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애초에 세자의 지위는 다른 왕자와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다른 왕자는 대군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국왕의 혈육에 불과하지만 세자는 책봉받은 이상 신하들과 백성들에겐 두 번째 임금[22]이다. 다른 형제 종친 및 손위 항렬이라도 세자와 '군신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왕이 되면 추존하는 것이다. 생전에 세자와 부자 관계이며 군신 관계인 세손이 임금이 되면 임금의 아버지[23]인 세자가, 아들도 임금인데 아버지가 고작 세자에 머물러야겠냐 해서 하는 것이 추존이다.[24] 따라서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아무나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대원군의 추존에 찬성하는 신료들의 주장 중 명분이 있었던 것은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이었다. 조선 왕조에서 추숭된 9명의 추존왕을 빼고 보면 딱 한 항렬에서만 실제 임금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영조와 정조 사이의 대(代)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정조가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에 입적되고 등극 후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해결되었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고종 때 당시 의리보다 인정상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도 장종으로 추존되어 같은 항렬에서 2명의 추존 왕이 나왔다. 순조와 헌종 사이에도 조손 관계로 대통이 이어져 추존왕인 익종만 있었으나 헌종이 급사하고 아저씨뻘인 철종이 즉위해 해당 항렬에 실제 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항렬을 비우지 않고 왕통을 잇는 것은 나름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고 선조에서 인조 사이에는 실제로 즉위했던 광해군이 있었으나 폐위되었으므로 해당 항렬에는 시호를 받은 왕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조의 아들들 중 임해군,[25] 광해군,[26] 의안군, 신성군 등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상황에서 후손을 남긴 왕자들 중에서는 정원군이 가장 맏이[27]였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 항렬이 종묘에서 비게 된다는 것과 선조의 후손들의 실질적인 맏이라는 점이 그나마 추숭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은 이어졌고, 특히 장유(張維)[28]는 《전례문답(典禮問答)》을 지어 반박하였는데, 노희공이 형으로서 민공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민공을 고위로 삼았던 《춘추(春秋)》의 기록을 증거로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앞 사람 이어서 바톤 터치 하면 그만이라는 소리. 결국 '대통'(大統)을 중히 여기는 게 당시 중론이었던 것이다. 단, 이 경우도 형제 계승이라서 아버지 항렬이 비는 건 아니며, 이전에 옆집 명나라 가정제 즉위시에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갈 여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황제로 추존한 사례가 있어서,[29] 아버지 항렬이 아예 없는 인조의 경우는 명분이 조금 더 있었다.
전대인 선조, 후대의 철종과 고종도 각각 자신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과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지 않았다.[30] 이는 당연히 법적인 아버지가 생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큰아버지 가문으로 입적되면 생부를 삼촌으로 불러야 했으며, 다른 먼 친척의 양자가 되어도 그에 따른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 사대부의 대표격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조는 유독 이 문제에 혼자 집착해 열을 올렸다. 이는 앞서 나온 대로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 때문인데, 쉽게 말하자면 대원군의 추존 없이는 인조는 역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왕의 아들이 아닌 자가 되기 때문이었다.[31] 이 때문에 정원대원군은 방계 종친이자 후궁 소생의 서자로서 조선의 왕으로 추숭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호란으로 떨어진 권위를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서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으나, 병자호란(1636) 당시에는 이미 추존이 끝나 있었으므로 선후가 맞지 않는다.[32] 결국은 인조 본인이 계승 방식이 아니라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았다는 점 때문에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 결여와 자격지심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조의 이런 행위는 이후 소현세자 죽음 문제까지 겹치면서 더더욱 정통성 논란이 생겼다. 이로 인해 손자 현종 때 터진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덕흥대원군과 달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33]에 있는 이 사람 무덤은 어엿한 '능(陵)'으로 명칭은 장릉(章陵)이다. 장릉 검단신도시 아파트 불법건축 논란이 발생한 그 장릉 지역 맞다. 참고로 아들 인조의 무덤도 똑같이 '장릉(長陵)'으로 불리며, 다른 장릉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에 소재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다. 물론 잘 알려진 곳은 단종의 능. 이전에는 흥경원(興慶園)으로 불렸는데, 원래 그 자리는 부인 연주군부인 구씨의 원인 육경원(毓慶園)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성 초기에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가 육경원으로 천장, 앞에서 서술한 이름으로 바꾸고 추존과 동시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고 왕릉 제도에 맞게 '능(陵)'의 형식에 정식으로 새로 조성하였다.
4. 기타
- 한편 정원군은 생전에 대북의 감시를 받았다.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는 '왕기(임금이 날 조짐)가 서린다'는 소문과 '그의 셋째 아들 능창군의 기상이 비범하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후 1616년(광해군 8년)에는 이복형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을 계속 듣자 정원군의 집터를 강제로 빼앗아 궁궐을 지어 버렸다. 이때 지은 궁궐이 지금의 경희궁이다.
- 남연군의 가계는 인평대군에서 시작되지만 인평대군이 인조의 명으로 능창대군의 사후양자가 되면서, 남연군의 생가 가계는 능창대군부터 시작된다. 조선 말과 대한제국 때까지도 남연군의 생가는 호적상 능창군의 후손으로 등재되었다.
5. 가족 관계
구사맹의 딸 연주군부인 구씨에게서 3남, 측실 김씨에게서 1남을 얻었다. 첫째가 인조(능양군), 셋째가 능원대군[34], 넷째가 능창대군[35]이며 측실 김씨에게서 둘째 능풍군을 얻었다.(능풍군은 일찍 사망) 연주군부인은 아들 인조가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으로 봉작되고 '계운궁(溪雲宮)'이라 불리었으며, 정원대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왕에 추존되자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왕비·후궁 / 자녀
6. 어진
우측 부분이 소실된 1936년본 원종(정원군) 어진 | 좌측 부분이 소실된 1872년본 원종(정원군) 어진. | ||
얼굴을 확대한 모습 |
선원보감에 실린 원종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원종 초상화 |
7. 대중매체에서
인조의 부친이다보니 역사적으로 미화된 데다 광해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경우가 많다보니 폭군으로 묘사되는 광해군과 달리 선량한 성품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막장성 짙은 행각이 드러나서 막장인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형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자가 될 야심에 차 있다가 이순신의 반정으로 인해 왕실이 함흥으로 파천하게 되자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에 대해 가진 의심을 이용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군사를 용병으로 쓰자는 의견을 내고 직접 청 태조 누르하치를 만나러 간다. 회견장에서 술에 취해 누르하치의 야망에 대해 찬동하면서 "내가 조선 왕이 된다면 건주여진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함께 공격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누르하치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누르하치는 정원군의 어리석음을 간파하고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삼아 조선을 지배하려는 계획하에 정원군의 아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 왕실 가족들을 살해한다. 결말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건주여진으로 가서 꼭두각시인 자칭 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서현석[36]이 연기했다. 정작 실제의 막장성보다는 주인공인 광해군과 대립하는 포지션 정도로 묘사되었다. 아역은 박준목이 맡았다.
8. 참고 문서
[1]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최종 복원한 어진이다. 복원 전과 살짝 다른 걸 볼 수 있는데 이유는 1872년 본 어진과 1935년 본 어진 두 개를 합쳐서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고궁박물관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정원군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 선조, 어머니 인빈 김씨, 이복 형 광해군, 아들 인조의 모습을 어느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2] 3남은 정실이었던 연주군부인 인헌왕후에게서, 1남은 측실 김씨에게서 후사를 보았다.[3] 봉호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유래했다.[거의] 한 달 만에 한양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하자 선조는 왕이라도 살아야 왕위 대통을 이을 수 있다면서 의주로 파천(피란)하면서 따라 나서고 호위한 신하, 종친, 왕자들로 하여금 '호성(扈誠)'이라는 공신을 책봉하곤 했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와중에 피난가는 곳마다 행패나 부리고 다녀서 툭하면 탄핵까지 당했던 만큼 전란 극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민심 악화나 시켰기에 공신이 될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5] 신성군의 사망 당시 13세였고 정원군은 신성군보다 1살 어렸다.[6] 부정부패의 관리를 조사 또는 감찰하여 탄핵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검찰청 역할.[7] 선조는 명종의 양자이기 때문에 하원군 부인은 정원군에게 법적으로는 당숙모가 된다.[8] 정원군과는 동갑내기 이복형제다. 그나마 순화군이 늦게 태어난지라 정원군에겐 동생이 되긴 한다.[9] 사실 굳이 순화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임해군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인성이 개차반인 왕자다. 정원군의 행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셈. 신성군 생전까지는 광해군과 대립했던 인빈 김씨가 신성군 사후 광해군을 돕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것도 아들의 개막장 인성이 한몫했고.[10] 세자 이지의 가례식과 같은 중요 의전행사를 말한다.[11] 광해군일기에 있던 그의 졸기는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사후 아들 인조의 즉위 후에 편집되어 원종대왕 훙(薨)이라고 지어졌다.[12] 이 병을 현대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편집증(遍執症)의 형태를 띄고 있는 정신병 중 하나다.[13] 대군으로 불리는 것은 사후, 형이었던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성공, 즉위하여 나중에 붙여준 것이므로 옥사 당시에는 '능창군'으로 불리었다.[14] 이때 빼앗긴 집을 허물고 광해군이 지은 궁궐이 경희궁인데 결국 인조가 왕이 되면서 집을 되돌려받은 모양새가 되었다.[15] 야사에는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있어서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16] 계모인 소성대비를 서궐(경운궁 석어당)에 유폐하고, 왕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복형 임해군은 사약을 먹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초가집 가마불로 증살하는 방법으로 쪄죽였다.(단, 임해군은 막장행동으로 더이상 쉴드가 불가능한 수준까지의 인성이었고, 영창대군이 쪄죽은 게 확실하지 않은 게 기록마다 영창대군이 죽은 이유가 다르다.) 특히 임해군은 반대파 서인 세력마저도 죽이자고 모두 찬성했고, 임금이 동생이나 종친을 죽이는 건 당시 왕정 시대에 큰 문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손위 대비를 (공식적으로 폐위는 아니지만) 폄손절목이라는 형식으로 후궁급으로 대우를 낮추고 감금한 건 당시 유교 윤리로는 심각한 패륜 행위였다. 왕실은 사대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계모라 하더라도 아들이 어머니를 박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불효였기 때문이다.[17] 반란은 있었어도 광해군을 다시 추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위기였던 이괄의 난도 어디까지나 이괄 책임이었고, 광해군을 핑계 삼아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다른 이를 광해군에게 양위를 받아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하진 않았다.[18] 사실 추숭을 진행한 원인은 인목왕후의 사망이 컸다. 인목왕후의 존재 자체가 인조 본인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기에 추숭이라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다. 혹 추숭 얘기를 꺼냈다가 인목왕후가 반대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답이 없어지는 꼴이 되기도 하고.[19] 비슷하게 고종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지만 익종(효명세자)의 후사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 아버지는 익종이다. 정조도 진종(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가서 근본이 둘일 수 없다는 논리 때문에, 더 정확히는 영조가 생전에 네 법적 아버지는 효장세자라고 못을 박고 엄명을 남겼기 때문에, 당대에는 친부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못했다.[20] 조선의 추존왕은 총 9명이다. 그 중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왕조 창건자 태조의 직계조상의 추존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다. 그리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는 생전에 세자로 책봉된 세조의 적장자로서 확실한 정통성을 지녔고,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도 서자라는 점만 빼면 마찬가지였다. 장종으로 추존된 사도세자도 왕세자로 책봉된 기간이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익종으로 추존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도 10년 넘게 세자였고 특히 3년간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까지 하였다. 태조의 4대조를 제외한 추존왕 5명 중 중 서자 출신은 있었으나(진종, 장종) 정원대원군만 유일하게 세자로 책봉받지 못했다.[21] 태조의 조상들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유일하게 세자에 오른 적이 없었던 추존왕이다. 게다가 태조의 직계조상들도 비록 원나라 벼슬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세습을 받아서 가문을 승계한 우두머리들이다.[22] 왕과 세자는 군신 관계이자 부자 관계이다. 그러나 세자와 다른 이의 관계는 군신 관계다. 옷부터 다른 왕자나 가까운 종친들은 대신들과 같은 자색(보라색) 관복을 입는데, 세자는 아청색 곤룡포를 입는다. 또한 대리청정할 때 한정이지만 왕과 세자를 '대조(大朝)' '소조(小朝)'로 병칭하기도 한다.[23] 유교에선 부자 관계가 군신 관계보다 중하다. 송 고종이 금 황제를 큰아버지로 불렀지만 그게 부자 관계보다 나은데, 부자 관계가 되면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어야 한다.[24] 당연히 종법상 아버지만 추존되고 생부라고 추존되는 게 아니다. 정조가 사도세자 대신 효장세자를 추존한 것은 사도세자 대신 영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기 때문이다.[25]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려가 되어 출가했기 때문에 후손은 없을 듯하다.(임해군 아들 일연 스님에 관한 기사)[26] 세자가 있었으나 반정 후 유배갔고 그 후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어 자결을 명받아 죽었다.[27] 선조가 당시 살아있을 때 유일하게 먼저 정원군의 자식(선조한테는 손자)을 보았기에 정원군의 자식이었던 능양군은 할아버지 선조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의 이름과 자를 직접 지어주는 등 애지중지했다.[28] 인조의 차남인 봉림대군(효종)의 장인이다. 즉 인조에게는 사돈.[29] 다만 이 경우도 엄청난 반발과 논쟁, 대규모 사직 사태 끝에 추존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황실의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파 관료들은 가정제가 큰아버지 홍치제를 양부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내키지 않아한 가정제가 부모를 바꾸어서는 안 되며 본인이 황제이니 아버지인 주우원도 역시 황제여야 한다며 추존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 자세한 내용은 가정제 문서 참고.[30]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 흥선대원군이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왕국 체제에서의 왕은 그 위에 무엇도 없는 가장 높은 지위이지만, 황제국 체제에서의 왕은 제후(왕작)이라서 개념이 다르다. 단적으로 고종의 친형 이재면 또한 흥친왕이 되었고, 고종의 아들들 역시 군이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 등 친왕의 작위 등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추락하면서 공이 되었다.[31] 건국왕이자 조상 4대를 추숭한 태조를 빼놓고 보아도, 당시 시점에서 공정왕(정종), 태종, 세종, 문종, 노산군(단종), 세조, 예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광해군은 국왕의 친아들이었고, 선조는 명종의 양자였으며, 성종은 추존왕인 덕종의 아들이었다. 후대까지 보아도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순조, 순종은 국왕의 친아들이었고, 정조와 고종은 각각 추존왕인 진종와 익종의 양자, 헌종은 추존왕인 익종의 친아들, 철종은 순조의 양자였다.[32] 정묘호란(1627)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시기상 맞지 않다. 그 이전인 1623년(인조 즉위년)부터 이미 이미 친부모에 대한 호칭 문제가 불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묘호란 시기까지는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추숭을 못한 것이고 실제로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난 1632년 이후 추숭을 진행한것이다.[33] 조성 당시에는 경기도 김포군 고현내면 당곡리.[34] 적자 중에선 2남. 추후 대군으로 진봉.[35] 적자 중에선 3남. 추후 대군으로 진봉.[36]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정진영의 아역.[37] 2016년 SBS 드라마 <내 사위의 여자>에서는 최재영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