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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3:38:07

임해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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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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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파 초대 종주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왕자
임해군 | 臨海君
파일:임해군묘.jpg
임해군묘 전경
출생 1572년 9월 20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609년 6월 3일 (향년 36세)
조선 경기도 교동면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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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진국(鎭國) → 진(珒)
부모 부왕 선조
생모 공빈 김씨[1], 양모 의인왕후
형제자매 14남 11녀 중 장남
배우자 군부인 양천 허씨
자녀
슬하 1녀 (양자 1남)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요절
양자 -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 1616 ~ 1644)[2]
작호 임해군(臨海君)[3]
시호 정민공(貞愍公)
}}}}}}}}}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후손5. 평가6. 기타7. 대중매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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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선조의 서장자이며 공빈 김씨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친형이다.

2. 생애

선조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5살 어린 나이에 친모 공빈 김씨가 사망하면서 적모 의인왕후 손에서 자랐으며, 동복동생 광해군과는 달리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는 탓인지 의인왕후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친모의 라이벌인 인빈 김씨가 공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던 총애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임해군을 위태롭게 여겼다고 한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인빈이 궁중에서 힘을 씀으로서 인빈 김씨의 아들들인 정원군과 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임해군과 인빈 김씨 집안은 악연으로 끝났다. 다만 그렇게 미워한 인빈의 손자인 인조의 손으로 복권되었으니 아이러니 한 일이다.

이복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차반이자 인간 말종 삼인방으로 악명이 높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자 시절부터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인간쓰레기 왕자이다.

개차반 인간성을 보여주는 예로 임진왜란 중 이복동생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4] 병력을 모으는 임무가 내려졌지만, 임무는 뒷전이고 순화군과 함께 탱자탱자 놀기나 하면서 술타령이나 하거나 관리들과 백성들한테 온갖 행패나 실컷 부리고 다녔다.[5] 결국 참다 못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기고 말았다. 즉, 왕자들을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저지른건데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해 주고 이 두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6]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났다. 《선조수정실록》,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던 가토 기요마사 측의 기록에 의하면 포로로 잡은 조선 왕자들을 잘 대접했지만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성격이 완전히 더 망가졌다.[7]

사실 왜군 입장에서야 적국의 왕자라면 협상 카드로 충분히 쓸 수 있으니 잘 대해주는 게 당연지사이다. 둘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긴 백성들은 온갖 갑질과 횡포를 당하다가 이판사판식으로 왕자를 적군에게 넘기는 대놓고 반란을 한 셈인데, 이건 당연히 뒷일을 생각하고 한 행동이 절대로 아니다. 나라가 이대로 희망이 없다고 여기거나 저질러 놓고 도망칠 작정으로 한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원수같은 '왕자놈'들을 과연 곱게 대했을까? 백성들에게 대놓고 갑질할 정도로 포악하고 개같은 임해군 입장에선 백성들이 '감히' 자신을 붙잡아 적에게 넘긴 행위 자체가 엄청난 굴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에도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깽판만 치고 다녔는데, 그래도 명색이 왕자라고 정문부가 난리통 속에서 그를 구했지만 전쟁 중에 반란을 도모한 국경인을 척살하기 위해서였지 임해군을 위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일단 임해군은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폭행,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 코스고, 공물 약탈[8],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9]를 살해[10]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임해군의 부하 김덕윤이 지시를 받고 유희서의 살해에 가담했기에 체포당했는데, 감옥에서 의문사했기에 범인으로 지목받았다. 이때 한음 이덕형의 상소를 받은 선조는 임해군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조는 임해군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혈육이자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며 임해군을 질책하기만 하고는 아무 처벌도 내리지도 않고 유야무야 넘겼다. 또한 임해군을 수사한 포도대장을 파면하여 징역을 살게 했으며, 임해군을 고발한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게도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형에 처했다. 이것도 처음엔 괘씸죄로 사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유희서의 어머니가 부디 손자만은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해서 특별히 선처해준 것이다. 한 마디로 피해자들과 수사관을 처벌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과 처리가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대북 시각으로 작성된 선조실록과 서인 시각으로 작성된 선조수정실록에서 공통적으로 선조에게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할 정도였다. 이 일을 기록한 선조실록 사관은 아예 기가 차서
임해군 추존(推尊)운운의 말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게 하였고 또한 '임해군이 와서 부복(俯伏)하기에 위유(慰諭)하여 보냈다.'는 대목은 자애(慈愛)하는 은덕으로 보면 지극하다 하겠지만 아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방도는 아니라고 하겠다. 이런데도 과연 임금의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귀근(貴近)들의 방자함을 단속하고 이미 흩어진 인심을 수습할 수 있겠는가. 곧게 간한 것 때문에 충성을 다한 대신을 배척하고 자애(慈愛) 때문에 조종(祖宗)들이 부여한 책임을 망각하였는가 하면, 언로(言路)를 막고 구차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을 장려함으로써 사론(士論)을 위축되게 하고 국세가 날로 깍이게 하였으니, 신(臣)은 오늘날 국가가 필경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신은 연초(年初)의 흰 무지개[白虹]가 큰 재변이 아니라, 오늘의 비망기가 곧 나라를 망칠 분명한 증거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수정실록의 사관도 어이없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악을 모르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 그리하여 임해군 진으로 하여금 횡포를 부려도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고 악을 행해도 징계받는 일이 없게 만들었으니, 이는 실로 성조(聖朝)의 실덕(失德)이다. "상의 도량이 넓지 못해 갑자기 노여워하는 빛을 보여 엄한 비답을 내리고 잇따라 영상을 체직하였으니, 자식을 바른 방법으로 가르치는 도리에 어긋났고 대신을 공경하는 예의에 있어서도 끝맺음을 잘하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라며 선조를 디스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임해군은 형제간의 우애도 나빠서 친동생 광해군 때문에 본인이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해군을 평소에도 미워했다고 한다. 이는 적반하장보다는 광해군에게 임해군이 품은 일방적인 열등감에 가까울 듯 하다. 광해군도 그런 형 임해군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명색이 친형이라는 작자가 왕실의 모범을 보이고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힘을 써서 왕족에 대한 여론을 계속 깎아먹고있으니 어떻게든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다시 세우고 세자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친형제가 아니라 웬수 그 자체였을 터이다. 임해군이 평소에 행실도 올바르고 처신과 자기관리에도 뛰어났던 사람이었다면 장자로서 유력한 세자 후보가 되었을 터이니 광해군을 질투할 이유도 없을 일이었고, 광해군도 이런 형을 잘 존중하고 존경해 주며 다정하게 지냈을 것이다.

이렇게 임해군은 백성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형제마저 학을 뗄 정도로 인격과 행실이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부친 선조도 명색이 장남인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개막장이라 불러도 할 말 없는 임해군의 더러운 인간성을 보면 그가 왕이 될 경우 연산군보다 심한 암군이자 폭군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11]

다만 선조는 임해군을 세자로만 안 삼았을 뿐이지 거의 모든 조정 대신들에게서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데도 계속 자기 아들을 감쌌으며 임해군도 기고만장해졌는지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당연히 광해군도 이렇게 만행밖에 저지를 줄 모르는 동복형 임해군을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고[12],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가 번번히 감싸고 돌아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임해군을 거의 유일하게 비호해주던 선조가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훗날 영창대군을 지키기 위해 사실상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서인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 당파를 초월한 모든 곳에서 임해군을 하루빨리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13] 이 임해군 옥사에 연루되어 임진왜란의 전쟁영웅들로 제흥군 연창군등으로 봉해진 고언백(高彦伯)[14]과 박명현이 임해군의 일파로 몰려 고문을 받다 억울하게 사망한다.

물론 옥사 과정이 한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변을 들은 직후에는 "내 형이 그럴 리 없다."라고 광해군이 일단 쉴드를 쳐줬지만[15],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16]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이걸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부터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황당한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도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문제가 생기고 만다. 명나라에서 형 임해군이 있는데 아우인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은 석연치 않다며 문제 삼았고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건강이 좋지 않아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해 광해군이 왕위를 이었다고 보고하였고 이에 명나라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사신을 파견 하였다. 광해군은 형조 정랑 정호관(丁好寬), 선전관 신경원(申景瑗)을 보내 임해군을 데려오게 하였고 외숙부 김예직(金禮直)을 보내 임해군에게 명나라 사신을 만났을 때 답할 말을 잘 타일러주게 하였다. 임해군은 외숙부 김예직을 보고는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이후 임해군이 서강으로 나와 명나라 사신 엄일괴와 만애민을 만나고 병에 걸린 척 연기를 하였다. 엄일괴는 의문을 품었지만 광해군에게 뇌물을 받고 돌아갔고, 이후 임해군은 교동도로 다시 유배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제기될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17] 훗날 인조 때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는데, 정작 이건 이것대로 '반정 세력의 권력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사실 임해군도 본인의 살 길을 단단히 망각한 채 맨날 무사들과 어울리고[18] 자신이 잡힐 것 같자 여장을 하고 도망쳤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마당에 도망까지 쳐서 아예 역적 인증을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광해군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임해군이 외숙부 김예직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통곡했다는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그 임해군을 불쌍하게 여길 정도로 막장이었다. 심희수는 임해군의 역모를 막는데 공을 세웠다며 익사공신 2등에 녹훈되자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으나 결국 공신에 봉해지자 계사나 차자가 아니면 공신 호칭을 쓰지 않았으며 이항복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무신년(1608) 초정(初政)에 민간에는 임해군(臨海君)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그 후 일찌기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伸冤)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그는 편당을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세류를 따르다 화를 만났으니 사론 중 혹자는 그의 익살과 구용(苟容)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론(大論)을 수의(收議)할 때에는 마침 교외에서 대죄할 때이고 국사를 듣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의견을 적어 내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큰 절개를 빼앗을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1618) 5월 13일자 6번째 기사 링크

임해군의 죽음은 다른 의미로 큰 부작용을 초래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본디 조선은 명나라에게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 원군을 요청했을 때도 뇌물을 쓰지 않았으나 광해군이 임해군 옥사를 덮기 위해 명나라 사신에게 최초로 뇌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호구 잡혀 뇌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환관이 사신으로 오면 은을 10여만 냥이나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광해가 많은 은과 인삼으로 중국 차관에게 뇌물을 먹여서 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계(宗系) 변무(辨誣)할 때와 임진ㆍ정유년 왜란에 두 번 청병(請兵)할 때에도 모두 중국에 뇌물을 쓰지는 않았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뇌물을 먹이는 길을 틔웠다.이후로 사소한 일이라도 우리나라 역관이 그 사이에서 농간을 부려 뇌물이 아니면 일이 되지 않았고 중국 사신은 우리나라를 뇌물 먹는 곳으로 알아서 뇌물을 요구하기를 욕심껏 하였고, 환관이 사신으로 오면 은으로 10여만 냥까지 사용하였으니, 선조조(宣祖朝)에 홍순언(洪純彦)의 말 (순언에 대한 말은 종계 변무조에 적혔다)이 이제와서 맞았다.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하담록》링크

3. 가족 관계

4. 후손

군부인 양천 허씨 사이에서 딸 한 명을 두었으나 딸은 요절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친아들은 없다. 그런데 KBS 〈역사스페셜〉에서 '임해군의 아들이 일본의 어떤 영주(다이묘) 밑에서 자라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도한 에도 시대의 저명한 일연(日延) 스님이 되었다고 하며 딸은 도가와 다츠야스의 (측실)으로 살다 죽었다'는 내용의 방송을 한 적이 있다. 해당 방송은 임해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과연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처럼 생포된 사람들의 이름이나 직책도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지만 임해군의 자식들의 이야기는 없다. 왕릉 도굴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임해군 자녀들의 이야기는 일종의 야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에는 가쿠린지(覚林寺)라는 일연이 창건했다는 일련종의 이 있다. 이 절에서 모시는 신은 세이쇼(清正) 공이라는 신으로 바로 가토 기요마사를 신격화한 것이다.[19] 주지하다시피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을 납치한 사람이며 해당 절의 자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 번의[20]에도 저택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경창군의 차남 양녕군이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현재 전주 이씨 계파 중에 임해군파가 존재한다.

양녕군은 독자 익풍군을 낳았고, 익풍군은 아들 임원군과 임흥부수, 딸 1명(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업의 부인)을 낳았다. 임원군과 임흥부수는 각각 아들 2명을 두었으나, 이들도 아들이 1명 내지 2명인데다, 이들의 자손들마저도 대부분 아들을 1명 내지 2명 낳아서[21][22] 그나마 명목상으로 남아 있는 후손들의 수도 굉장히 적다.

5. 평가

장남이면서도 일찌감치 세자 경쟁에서 배제되었고, 명색이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그 누구도 선조가 임해군을 세자 책봉에서 배제한 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을 보면 불량하고 추악한 인성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장남도 우수하고 차남도 우수한데 차남이 부왕의 편애를 받아 세자가 되었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있겠지만 임해군은 비길 데 없는 인간 쓰레기였다. 책봉 당시 선조에겐 적장자가 없었고 임해군도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서자였기 때문에, 광해군과 임해군의 지위적 차이는 당연히 임해군이 압도적이었다.

적장자가 없으면 서장자가 세자가 되어야 하는게 당연한데, 임해군은 국왕이고 신하고 그 어느 누구도 세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별다른 논의도 없이 세자 자리 경쟁에서 배제된 소위 '종법에 심하게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어떤 대소신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부왕 선조는 물론이고 신하들 사이에서도 임해군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선조실록》에서도 당대의 사관이 평한 글을 보면 온통 악평 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역대급 막장 왕족이다. 저지른 악행이 많다보니 임해군이 살아있을 때 무뢰배들과 종실의 망나니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해서 배흥립의 집을 습격해 강도질을 저지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만큼은 임해군이 직접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관이 "자업자득이다"라고 평할 정도. 실록의 기사. 오죽하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과 인조도 임해군을 죽인 일은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폐위 명분으로 잘 알려진 폐모살제라는 표현에 '살형'은 포함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문제 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해군의 옥사 때 수문장이었던 정승서(鄭承緖)가 김위(金渭)에게 "임해군이 거적으로 병기를 싸고 있다."라고 상변(上變)하게 시켰다는 이유로 그를 국문했고, 마찬가지로 임해군에게 곤욕을 준 교동 현감(喬桐縣監) 이직(李稷)을 죽였다.[23] 그리고 이정표(李廷彪)의 관작을 삭탈하고 아들들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개막장인 인물이지만 인조반정 주도 세력들의 광해군 깎아내리기와 후대의 인지도 부족 및 동정심 등으로 인해 한동안 상당히 충공깽스러울 정도로 미화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양녕대군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

6. 기타

7. 대중매체

사극에서는 입체성이 필요해서인지 마냥 미화하거나 사이코로 묘사되지는 않고 음모에 휘말린다거나 양녕대군처럼 위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7.1. 드라마

7.2. 영화

7.3. 만화

7.4. 소설

8. 둘러보기

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임해군파의 종주
임해군가 역사 시작 1대 임해군 이진 2대 양녕군 이경

[1] 선조의 후궁으로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시호가 삭탈되었다.[2] 이복 동생인 경창군의 차남.[3] 봉호는 경남 김해의 옛 지명인 임해(臨海)에서 유래했다. 여담으로 고려 후기 인물인 익재 이제현의 아버지인 이진(李瑱)의 봉호도 임해군이다. 심지어 이름의 음인 "진"도 같다.[4] 정확히는 순화군의 퀘스트는 강원도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지만, 강원도는 이미 가토 기요마사의 수중에 넘어가버린 뒤여서 대신 함경도로 향했고, 거기서 임해군과 합류했다.[5] 함경도는 세조 이후로 조선 조정에서 천대받은 북방 지역 중 하나이자 거의 방치하던 변방의 낙후지역이었다.[6] 다만 함경도에서도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7] 나중에 명나라에서 "장남 임해군이 엄연히 있는데 어째서 차남 광해군이 즉위한 거냐?"라고 딴지를 걸자 "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미쳐버렸소이다."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차마 "타고난 미친X이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핑계로 둘러댄 명분일 공산도 있다.[8] 당시 공물은 조정으로 가는 중요한 물품인 터라 멋대로 강탈한 것 자체가 당시에도 중범죄였다.[9] 영의정 유전의 아들로, 한음 이덕형과 외종지간인데, 형제보다도 더 친해서 이덕형이 사건에 특히 분개했다. 정작 유희서도 당시에 탐관오리로 악평을 듣는 등 평판과 질이 그리 좋지 못한 인물이었다.[10] 도승지는 현재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요 신하로서, 왕의 최측근이자 심복에 속한다. 승정원의 승지 6명은 서로 품계는 같지만 그 중에서도 도승지를 가장 높게 쳤다.[11] 사실 연산군은 임해군과는 달리 세자 때 말썽을 전혀 부리지 않았고 왕이 된 이후 10년 동안 통치를 나쁘지 않게 했다. 그러다가 모친 폐비 윤씨 사사를 명분으로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면서 폭군으로 타락해서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을 고통받게 했다.[12] 임해군이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범죄만 저지르고 다닐 때 광해군은 정반대로 조선의 피해 현장들을 목숨걸고 찾아다니며 문제들을 수습하는 행정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세자(광해군)를 칭송하는 조선 백성들이 많았고, 선비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현대 학계에서 임진왜란 초기 세자(광해군)의 훌륭한 태도와 노력 덕분에 당시 자발적 의병 지원자들을 확 늘었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다.[13] 다만 북인, 서인, 남인 등 모든 당파가 임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남인 내에서는 이원익, 이덕형, 정구, 홍가신, 심희수, 서인 내에서는 이항복, 북인 내에서는 정온 등이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제가 뭘 잘 몰라서 역적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라고 납작 낮춰야 했다. 남인 내에서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른 당파보다 많았기에 《하담파적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은 남인이 역적을 비호하였다며 공격해 남인들 중에 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안방준의 《혼정편록》의 기록에서 나온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대북파가 소북은 류영경의 당, 서인은 김제남의 당, 남인은 임해군의 당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파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14] 향리 출신으로 종2품 병마절도사로 출세할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임진왜란때 도합 257회에 전투에 참여했고 병자호란 때 한명련과 함께 이름이 언급된 용장이다.[15] 이후의 전개를 보면 마음에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해본 말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왕에 가까운 왕족의 처벌은, 왕의 본심은 어떻든 신하들이 간청하면 마지못해 허락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게 미덕이었다.[16] 사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수순이다. 조선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가 역모 사건에서 형식적인 말조차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17] 사실 원래 계승 경쟁에서 밀려서 왕족을 죽인 경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게다가 암살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들은 '사망자들이 불행히 혹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식으로까지 기록된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자기가 찝찝해서 죽였다고 그대로 대놓고 보여지기 식으로 기록되었다가는 자신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윤국형이 광해군 당대에 쓴 갑진만록의 기록에서는 광해군이 임해군을 걱정하여 유배지에 있는 임해군의 안부를 계속하여 묻고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내려보냈지만 임해군이 병사했다며 광해군이 임해군을 걱정했다는 식으로 광해군을 미화하는 서술을 하였다.[18] 이 때문에 초반에 임해군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19] '清正'는 훈독으로 "기요마사"인데 훈독으로 읽을 이름을 음독으로 읽으면 해당 인물을 좀 더 공경하여 부르는 것이었다. '기요마사'를 음독으로 읽어 '세이쇼'다.[20] 가토 기요마사가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改易)당하여 호소카와 가문이 구마모토 번의 영지로 들어온 것은 1632년의 일이고 해당 절의 창건 연도는 1631년이다.[21] 오죽하면 임원군의 아들 대 이후로 아들 3명 이상 낳은 경우를 찾으려면 헌종, 철종 시기까지 가야 한다. 임흥부수 계열에서는 고종 때까지도 독자 아니면 2남을 유지했다. 출처: 《선원속보 - 선조대왕자손록 권1: 임해군파보》[22] 임흥부수의 자손들은 그마저도 대한제국 멸망 이후로 후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23] 실록과 계해정사록의 기록에는 신하들의 요청대로 인조가 국문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죽였다고 한다.[24] 심지어 태종조차 양녕대군이 나라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25] 다만 양녕대군은 임해군처럼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이거나 남의 집과 전답을 부수고 애먼 백성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싸이코스러운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양녕대군이 아무리 개판이었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면서 살았던 양아치리면, 대놓고 연쇄살인마인 임해군은 더더욱 쉴드가 불가능한 인간이다.[26] MBC 〈여인열전〉 2번째 시리즈.[27]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추동궁마마 편에서는 이성계 역.[28] 이 때 주인공이 한 말이 걸작인데 주인공 왈 "그따위 개같은 쓰레기를 묻을 땅은 1평이라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