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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25 00:04:55

온달

고구려의 대형
온달 | 溫達
파일:265484da-4a20-45af-a170-05c11935af02.jpg
서울 아차산성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상
<colbgcolor=#191970> 출생 불명
고구려
사망 590년
아단성[1]
관등 대형(大兄)
본관 봉성 온씨
가족관계 아내 평강공주
장인 평원왕
처남 영양왕, 영류왕, 고대양
처조카 보장왕, 고환권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평강공주와 만나다2.3. 사위가 되다2.4. 최후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3.1.1. 추측1: 하급 귀족 혹은 몰락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3.1.2. 추측2: 서역계 귀화인의 아들(소그드인 혼혈)
3.1.2.1. 비판
3.2. 전사지 논란
4. 기타
4.1. 관련 사적지4.2. 전설4.3. 그 외에
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

KBS 역사스페셜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고구려의 장수이자 봉성 온씨시조. 일반인들에겐 바보대명사 혹은 거기서 아내내조와 본인의 노력 덕분에 성공한 입지전적의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으며 영양왕 대까지 활약했다.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주인공이다.[2]

2. 생애

2.1.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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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 1970년대
]] 황순원(소나기 · 카인의 후예), 박경리(토지 · 김약국의 딸들), 최인훈(광장), 이청준(당신들의 천국), 김승옥(무진기행), 윤흥길(장마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현기영(순이 삼촌), 황석영(장길산 · 삼포 가는 길 · 황석영 삼국지), 오정희(중국인 거리 · 유년의 뜰), 이강백(파수꾼 · 결혼)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년대 ~ 2000년대
]] 조정래(태백산맥),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평역 삼국지), 최인호(고래사냥 · 상도 · 해신), 복거일(비명을 찾아서), 최명희(혼불),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 양귀자(원미동 사람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신경숙(엄마를 부탁해), 은희경(새의 선물), 윤대녕(은어낚시통신), 공지영(고등어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마광수(즐거운 사라),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영도(드래곤 라자)[1], 이우혁(퇴마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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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 2020년대
]] 조창인(가시고기), 김훈(칼의 노래), 귀여니(그놈은 멋있었다)[3] 이금이(유진과 유진), 한강(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김려령(완득이 · 우아한 거짓말) 김영하(살인자의 기억법), 박상영(대도시의 사랑법), 장강명(표백), 정보라(저주토끼), 정유정(종의 기원, 7년의 밤), 손원평(아몬드), 성해나(혼모노), 김호연(불편한 편의점)
파일:북한 국기.svg 김일성(꽃파는 처녀), 홍석중(황진이), 백남룡(벗)
산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윤오영(방망이 깎던 노인), 피천득(인연), 법정(무소유), 홍세화(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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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성 · 천재교육 교과서 등재[2] 중앙교육·대한교과서·지학사 교과서 등재[3] 귀여니 현상(대중문화사전, 디지털 다매체 환경과 문학의 새로운 유통 양상(인문콘텐츠, 이지원, 2017)), N세대와 인터넷소설의 논리-귀여니의 소설을 중심으로(대중서사연구, 최희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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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達 高句麗平原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 이라 했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온달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어 일을 하지 못하였고 때문에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해 먹고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나중에 평강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려고 산에 가 있었다.

온달이 추레하고 남루한 꼴로 매일 비럭질을 하고 다니다 보니 모습이 우스웠는지 평양성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 온달(우온달/溫達)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 우는 어리석은 우라고 보통 해석하지만, 우직, 어리숙, 고지식, 온순, 착한 정도의 의미도 내포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이후 지휘관까지 되기에 이 바보라는 의미가 발달장애인이나 저지능자를 뜻하는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진짜 저지능자라면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위직에 오를 순 없기 때문.[3]

바보를 허당 쯤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게, 본문에도 '마음은 순수하였다.'라고 쓰여있듯이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 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 요컨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손해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당시 평양 백성들뿐만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소문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면 온달의 소문이 지역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평원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汝常啼 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왕은 늘 이처럼 말하였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 적부터 자주 우는 울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귀족의 안사람한테는 도저히 시집을 못 보내겠다. 차라리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겠다!"라고 우스개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 적령기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부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温達之婦.’今何故攺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况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今大王之命謬矣. 妾不敢柢承.” 王怒曰, “汝不從我教,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冝從汝所適矣.”
공주가 말하기를, “대왕(大王)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찌하여 그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평범한 사내조차도 식언(食言)[4]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께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실없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네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진실로 나의 딸일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네 갈 곳으로 가거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평강공주는 "아버님께서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셨으니 저는 그에게 시집가겠습니다!"라고 폭탄선언을 했고, 이에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고 분기탱천한 나머지 밖으로 당장 꺼져버리라고 꾸짖었다. 물론 아버지 마음에 진짜 나가라는 것은 아니고 부친인 본인의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의도였겠지만, 평강공주도 독이 올랐는지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진짜로 궁을 나가버렸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물어물어 온달의 움막집을 겨우 찾아가서 온달의 모친에게 대뜸 절하고는 온달의 행방을 물었다. 이때 온달은 배가 고파서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평강공주가 산 위로 올라와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혼인하며 부부가 되었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집, 땅,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비루 먹은 을 사와서는 열심히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다.[5] 그 결과 어느 정도 집안 형편도 차차 나아지고 먹고 살 만해진 온달은 고구려에서 매년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2.3. 사위가 되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부(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6]

온달은 평강공주가 사와서 잘 기른 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중국 북주무제[7]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8]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의 벌판[9]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이 때, 후주(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삼국사기
참고로 현존하는 삼국사기 중에서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은 온달이 참전한 장소를 배산(拜山)으로,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암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주(周) 의 무제(武帝)가 지나[10]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조선상고사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마침내 평원왕은 "이 자가 짐의 부마이니라(이 사람이 내 사위다)!" 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2.4. 최후

이후 590년, 평원왕이 붕어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40여년 전 양원왕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4세기 광개토 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 58성을 차지한 고구려지만 551년에는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에도 잦은 신라의 침범이 이어지자, 마침내 온달은 총사령관이 되어 남정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온달,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이서(以西)[11] 땅을 되찾지 못하면[12]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했다.

그 후 전쟁 관련 기록은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다신 끝끝내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먼 훗날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잠시 회복했었다는 말이 된다.바보 온달, 전장에 나서다

다만 이 기간에도 신라와 수나라는 여전히 양국의 사신이 왕래했고, 수도가 동해 쪽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받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경주부터 한강 하류까지 남한강 루트가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온달이 수복한 지역은 적어도 죽령 이북 전체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작았을 것이다. 이를 죽령 이북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리를 강조하기 위한 약간의 과장이다.

또한 처남 영양왕과 아내 평강공주는 물론 많은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며 정중하게 장사를 지냈으며,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신을 담은 관이 마치 접착제를 발라놓은 것 마냥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다. 신채호는 이 부분을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비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사실성을 부정했다. 그는 운구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온달의 다짐이 생각나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13]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노했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의 사위 온달의 전사극(戰死劇)이 연출되어,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중략)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 · 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조선상고사

온달의 죽음으로 인해 가뜩이나 옛날부터 막장이던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은 더 나빠지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백제 두 나라는 손을 잡고 신라에게 협공을 가한다. 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등 온달 이후로도 고구려는 꾸준히 신라의 북측을 공격하며 괴롭혔으며, 이 때 고구려는 김유신이 충청도의 고구려의 성을 공략했을 정도로 강원특별자치도를 주 경로로 하여 충청도에도 세력을 투사하였다. 특히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끝내 수복한 걸로 보인다.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몰락 귀족? 평양 졸부? 다문화 가정 출신? 온달은 누구였을까

일단 삼국사기에 적힌 대로만 보면 평강공주는 유력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미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이런 식의 결혼은 이례적인 사례다. 물론 평강공주는 여성이 남성을 컨택하고 뒷바라지한 사례라 좀 더 특이하긴 하지만, 고대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면[14] 그만큼 평강공주가 시대적으로 앞섰다거나 신념형 혹은 고집이 센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온달의 정체에 대해선 지금도 학계에선 후술되어있는 설 등 여러 설왕설래가 있다. 물론 확실한 물증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추정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온달의 조상이 평민이든 하급 귀족이든 아니면 이민족 출신이든 간에, 그가 가난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에는 입신양명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공주와의 결혼과 내조, 교육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본인의 노력과 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경제적·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입지전적의 과정이 온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좀 더 본질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1.1. 추측1: 하급 귀족 혹은 몰락 귀족 출신의 신흥 세력

중앙 정계에선 존재감이 미미한 하급 귀족으로 북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 때 온달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에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큰 전공 대비 관직이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확률이 크므로, 온달은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설을 다루는 학자들은, 계층 등급은 비교적 낮았지만 온달이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는 것.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온달 외에도, 기존 기득권 세력이 신진 세력의 출신 배경 등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사례는 흔히 있다.

역사학자 이기백(1924~2004)은 1967년 '백산학보' 제3호에 기고한 '온달전의 검토'에서 온달이 받은 기록상 최초의 관등이 대형(大兄)임을 근거로 비슷한 추정을 내놓았다. 대형의 등급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제각각이라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형은 12~14개의 전체 관등 중에서 2~7관등 정도였다. 이를 근거로 이기백은 "대형이라는 관직을 차지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실과 자연스럽게 결혼할 수 있는 고급 귀족은 아니었더라도 하급이나마 귀족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추정이었다.#

박인호 한림대 박물관 연구원은 "온달을 통해 본 6세기 고구려 귀족사회"라는 논문을 통해 "온달이 처음으로 받은 관직은 '대형(大兄)'으로 고구려의 7번째 관직"이라며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 등도 대형을 거쳐 막리지에 오른 것을 고려할 때 온달의 신분은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6세기 전반 고구려에서 국내성파(옛 수도)와 평양성파(신 수도) 사이에 벌어진 내란 수준의 정계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잃은 국내성파 출신 귀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우하게 묘사된 환경도 정치적으로 몰락한 온달 가문의 신세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왕으로서는 외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력을 결집할 필요가 있었고 온달로 대표되는 국내성파에게 화해의 손길(국혼)을 내밀었다고 주장했다.#

3.1.2. 추측2: 서역계 귀화인의 아들(소그드인 혼혈)

2011년 조선일보 기사-바보 온달은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
2012년 중앙일보 기사-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2023년 JTBC 방영분-하얀 얼굴에 어눌한 말투.. 온달이 바보로 불린 이유는?

온달이 토착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로 귀화한 서역 출신 이민족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란계인 소그드인이었을[15] 가능성은 2011년도에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2011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16]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교수[17]가 백산학회의 백산학보 제89호에 기고한 논문 '사마르칸트(康國)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 - 고구려 사신의 康國 방문 이유 -'에 제시된 주장이다.
3.1.2.1. 비판
중앙일보의 기사를 보면 지 교수는 명백히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씨는 오로지 소그디아에만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온씨는 고구려 바로 옆의 중국에도 존재하던 성씨였으며, 그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늦은 시기를 기준으로 봐도 최소한 주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매우 유서깊은 성씨이다.[18] 게다가 지 교수가 참고했다는 사서 중 하나인 위서(魏書)의 관씨지(官氏志)를 보면 북위의 신명황제(탁발역미)의 시대에 선비족에 올분씨라는 씨족이 존재했고 '올분씨는 이후 온씨로 개명했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오히려 이건 온달 사마르칸트 왕족설과 반대되는 내용이다.

즉 사마르칸트의 왕족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기 이전이나 동시대에도 이미 한족과 선비족에 온씨라는 성씨가 존재했으며, 사마르칸트인이라는 주장의 근거인 '고구려인들과 말이 같지 않아서 어눌하게 들렸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한족과 선비족에도 해당된다. 애초에 온달이 외국 출신이라고 추론할 만한 근거도 없지만, 설령 외국 출신이라고 해도 당시 고구려의 영토와 4500km 이상 떨어져 있던 사마르칸트의 왕족보다는 바로 옆의 한족이나 선비족 출신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근거가 부족한 가설이 뜬금없이 나온 이유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는데 2010년대 초반 당시는 이민자 2세나 혼혈 가정들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이민자와 사회통합 일환으로 한국사 인물들 중에 외국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가설이 처음 대중에 공개된 2011년 조선일보 기사나 2023년 JTBC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온달이 다문화 가정이라는 걸 유독 강조하고 있다.
현재 온달이 사마르칸트 출신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는 연세대 역사문화학과의 지배선 명예교수가 유일하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주장이다. 애초에 이 논쟁의 시작점인 지교수의 논문부터가 고구려의 중앙아시아 외교에 관한 논문이고, 논문 속에서 온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은 끝부분의 일부에 불과하며, 영문 초록 제외 40쪽에 달하는 논문에서 온달의 이야기는 두 쪽이 전부이다.

현 시점에서 온달의 소그드인 설은 검증되지 않은 단순한 가설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3.2. 전사지 논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 현 조령 인근[19])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20])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아차산성충청북도 단양군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죽령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근성의 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 만약 단양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인천에서 바로 단양을 점령하고 송파구에 있는 백제왕을 압박하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송파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뒤죽박죽인 동선이 나온다.

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단순히 그 인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한강 유역 전반'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참조 서울이 해당될 수도 있다.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그러나 아차산성의 발굴조사성과와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발굴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쉽게 아차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둘 다 고구려 유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차산성 출토 유물은 일부 백제 유물을 포함한 신라 유물 일색이었고, 아예 신라에 의해서 축조된 산성으로까지 추정되고 있다. 즉,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아신왕대의 기록이랑은 맞지 않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었으나 2016년에 고구려 와당이 아차산성에서 확인되면서 이것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온달산성 자체도 신라가 세운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게, 일단 남한강 남쪽에 있어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공격을 남쪽에서 막는 데 유리한 위치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인근에 있는 신라가 세운 단양 적성비와 함께 축조된 단양 적성, 보은 삼년산성과 거의 같은 구조, 같은 입지이다. 수구문지를 비롯하여 체성부의 외견상 구조 등 모든 것이 틀림없이 신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시설 및 수구문지의 구조가 전형적인 신라 스타일이거니와, 성벽 전체가 신라 스타일이라 후대에 개축으로 바꾸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 자리에 만약 원래 고구려 산성이 있었다면, 거의 성 전체를 뜯어고친 셈이다. 고구려 산성에도 배수시설은 있었을 터인데...

이처럼 복잡한 온달의 격전지에 대한 쟁점은 서울교대 임기환 교수의 기고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4. 기타

4.1. 관련 사적지

4.2. 전설

4.3. 그 외에

5. 대중매체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 주도적인 여성상, 평민에서 귀족이 되었다가 전사하는 파란만장한 생애 등 여러모로 사극에 어울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인물. 아무래도 초창기 대한민국 사극이 조선 시대 위주로 다루다가 고려 시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효(1986) 정도를 제외하면 삼국기태조 왕건처럼 왕이나 그에 권하는 권력자(연개소문, 김유신 등)가 주로 조명되는 탓인 듯 하다.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도 외면받는 것과 마찬가지. 1976년 인형극 온달은 방송되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서 온달과 평강공주를 주제로 한 창작물들이 꽤 나오고 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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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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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한 사항은 이하의 전사지 논란 문단 참조.[2] 비슷한 예시인 서동의 사례와는 달리 정사삼국사기에 온달열전으로 수록된 이야기라 완전한 전래동화나 설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3] 무관직은 단순히 무술 실력만 좋아선 한계가 있다.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개인의 무예보다는 오히려 군대를 지휘하고 전략을 짜는 능력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더 학문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4] 한번 입 밖에 낸 말을 도로 입 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약속한 말대로 지키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5] 말 중에는 정말로 늙어빠져서 털이 빠져가는 재기 불능의 말도 있었지만, 단순히 먹을 걸 못 먹어서(말 주인이 키울 능력이 없어서) 싸게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을 보는 눈도 좋은 단순히 온실 속에서 자란 공주님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애초에 고구려 태생이 기마 민족 국가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명색이 왕족으로서 이 정도의 소양과 지식은 갖추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장 고구려의 국조(國祖) 주몽부터가 겉보기에는 비루먹은 준마를 미리 알아보는 재능을 지녔었다.[6] 즉, 나라의 주요층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는 뜻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왕실에서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7] 정황상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한 시기.[8] 북제 멸망이 577년이고 우문옹은 578년에 사망하니 대략 577년~57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9] 배산(拜山)이라고도 한다.[10] 중국.[11] 사실상 이 지역은 죽령 이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에, 죽령 이북이라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죽령은 당연히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12] 온달의 최종 목적지는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는 단양군과, 단양과 같은 생활권인 제천시 지역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실제로 남한강 상류인 제천-단양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 일대에 있던 신라 영토는 신라 본국과 월경지로 절단 당한다.[13] 그러면서 신채호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며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공주가 전투 현장에서 졸도해 온달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좀 낮긴 하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 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고 신채호는 기재했다.[14] 고대 사회는 신분제가 강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오히려 성별적으로는 비교적 현대인 조선보다 평등했던 부분도 거론되기도 한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처가의 힘이 강했다고 추정되는 데릴사위제가 시행되는 나라였다. 신라에서도 온달 사망 42년 후 선덕여왕이 즉위했다.[15] 여담으로 이 때문에 미남 이란계 배우의 사진을 게시해놓고 평강공주가 이래서 결혼한게 아니냐고 주장하는 인터넷 유머가 있었다.[16] 명칭이 미래캠퍼스로 변경되기 이전이다.[17] 2012년 퇴임[18] 한고조가 한나라를 세울 때에도 온개라는 공신이 있었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온회 역시 온달과 같은 한자를 쓰는 온씨이다.[19] 정확히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라는 고개다. 참조[20] 아단성의 '단(旦)'과 아차성의 '차(且)'의 한자 모양이 비슷해, 두 이름이 동시에 전해진다. 그래서 고려시대까지 병립되어 쓰이던 것이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의 휘 '단(旦)'을 피휘해야 해서 그때부터 완전히 아단성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아차성으로 고정시킨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21] 미륵대원지 바로 옆에 있다.[22] 신라와의 전쟁 중 군사들의 두려움을 없애고 사기를 돋구기 위해 공기놀이를 했다는 설도 있다.[23] 사실 꼭 이들만 그런 게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3대는 정말 소위 말하는 삼국시대의 영웅호걸들과 설화의 주인공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다. 신라는 진흥왕,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자장법사의 시대였고, 백제는 무왕, 선화공주, 계백, 의자왕, 흑치상지,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안시성주, 평원왕, 평강공주, 온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도 없다.[24] 단 사극에서 온군해가 온달의 아들로 나온 적이 없다. 연개소문에서 온군이라는 캐릭터가 온달의 아들로 서술된 적은 있었다.[25] 조선시대 불탑의 다른 형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양말고도 안동이나 경북 북부에도 이런 시설들이 있다. 전 구형왕릉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다.[26] 신라를 남한으로 의식했는지, 평양성파와 국내성파의 내분 소재로 타임슬립을 하였다.[27] 딱 삼국시대 금관이다.[28] 유니크 메이스[29] 앞에 귀면와 무늬가 새겨져 있는 유니크 워드[30] 삼국시대풍 갑옷[31] 작중에선 부친 때 서양 세력의 압력을 받다가 부친 사후 평강이 문수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신을 추슬러 서양 세력을 내쫓고 ‘고구려’를 건국(!)한 뒤 ‘신라’의 왕과 혼인하여 공동 군주가 된 것으로 나온다.[스포일러?] 한 게 아니라 여자로 환생했다. 이름은 해원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임무 때문에 남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