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권정생 權正生 | Kwon Jeong-saeng | |
아명 | 권경수 權慶秀 |
출생 | 1937년 9월 10일 |
일본 제국 도쿄도 시부야구 혼마치 | |
사망 | 2007년 5월 17일 (향년 69세)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 |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안길 57-12[1] |
직업 | 동화작가 |
데뷔 | 1969년, 동화 〈강아지똥〉 |
학력 | 일직국민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예장통합)[2][3] |
링크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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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동화 작가.2. 사상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이고,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도 평가받는다. 다음은 그러한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시다.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3. 일생
일본 제국의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4],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조선인연맹[5]에 가입해있던 친인척 둘은 나중에 뒤따라 오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아 평생 생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6] 귀국 후에도 살림이 무척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또한 바로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임노동자 등의 궂은 일을 하며 성장했다.19세 때 그는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 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을 했다.
1981년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7] 사실 여기엔 어두운 뒷 이야기가 있다. 출판사에서 지급한 권정생의 인세가 작가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 것. 출판사와 권정생 사이에 있던 아무개가 착복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아무개는 "권정생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돈이 있어도 쓸 줄 몰라 주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금전에 무지한 권정생이 훗날 유언장에 유산에 관한 부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선생께서 정말로 모르셨을까?[8]
사망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9]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낭만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췄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것은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
그리고 타계 직전에 쓴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남북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
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권정생 작가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 사망원인이 결핵이 아니라 의료사고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관련 기사) 방광 조영술을 하던 중,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고 진행한 탓에 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4. 주요작품
-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 훨훨 간다 (2003.4)
- 사과나무밭 달님
- 슬픈 나막신 - 1930~1940년대 재일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새벗문고에서 '꽃님[10]과 아기양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 처음 쓸 때는 1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으나 아이들에게 차마 읽힐 수 없는 부분들을 삭제하다 보니 지금의 분량이 나왔다고 한다.
- 하느님의 눈물
- 무명저고리와 엄마
- 몽실 언니
-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 권정생 선생님의 종지기 시절에 모티브.
- 달맞이 산 너머로 날아간 고등어
-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바닷가 아이들
- 길 아저씨 손 아저씨 (2006. 2)
-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 짱구네 고추밭 소동
- 내가 살던 고향은
- 우리들의 하느님 - 2008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에 있는 책이다. 좌우 이념을 선동하는 내용은 전혀 없고 자연과 벗하여 사는 가난한 삶에 관한 이 책이 불온서적으로 오르자, 독자 및 네티즌들은 "오히려 필독서를 권해줘서 고맙다", "국방부는 제대로 읽어보기나 한 거냐? 독후감 좀 써봐라"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 엄마 까투리 - 그의 유작. 애니메이션화도 되었다.
- 랑랑별 때때롱 - 이 작품은 200 페이지가 넘는데 영어 혹은 일본어식 번역체인 "~의"를 단 3번만 사용한 일화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번역체 문장/영어·일본어 공통 번역체 참조. 그리고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되었다.
- 한티재 하늘 - 지병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완결을 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출판은 2권까지 되어 있다.
- 점득이네
- 열여섯 살의 겨울(수필형식의 소설, 수필에 가까움)
- 강아지똥
- 황소 아저씨
5. 어록 및 발언
- 유언으로 북한 어린이들에게 "3천달러 상당의 우유를 지원하라"와 "지금껏 나의 재산은 모두 어린이들 덕분에 번 것이니, 나의 인세를 북한 어린이를 위해 전부 다 써달라"고 부탁했다.
-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과 함께 미군 반대 구호를 외쳤다.
-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6. 관련 문서
[1] 일직면 조탑리 1.[2] 생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 소재 일직교회의 집사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안수집사는 되지 못하고 평생 서리집사로 머물렀다. 교회에서는 호적상의 이름 권정생이 아닌 어렸을 때 불리던 '권경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3] 다만 개신교 신자임에도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을 칭할 때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배타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또한 우리나라 개신교가 부패하는 광경과 교회가 들어서면서 서낭당같은 토속 종교 시설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4] 이 시절 만났던 이웃들의 모습이 소설 몽실 언니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5] 재일본조선인연맹. 1945년 일본에서 결성된 재일 조선인 단체로, 결성 시 좌익이 주도했기 때문에 1946년 재일한국인거류민단(민단)이 별도로 출범하는 계기가 된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은 결국 일본 점령통치 중이던 미군 GHQ에 의해 해산당했다. 이후 일본 내에서 조총련이 비슷한 역할을 이어받았다.[6] 연맹 출신은 사실상 조총련, 즉 북한 2중대 취급받았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는 대한민국으로의 입국 자체가 힘들었다. 특히나 1974년 육영수 피살 사건 당시 문세광이 조총련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 한국에서는 더더욱 악의 축 취급을 받기도 했다.[7] 90여편의 작품에서 들어오는 연간 인세 1억원과 10억원 자산이 있었고 유언에 따라 이를 굶는 어린이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8] 자전적 소설 열여섯 살의 겨울에서 보면 권정생은 시장에서 고구마 장수 밑에서 장사를 했던 경험이 있었고 생각보다 수완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마 무게를 재는 저울을 가지고 사기를 쳐 가난한 사람에게 정가보다 더 비싸게 파는것을 보고는 장사를 그만두셨다고 한다. 이런 분이 과연 금전에 무지하셨을 지는 의문이다.[9] 천주교 안동교구 소속. 세례명 루도비코. 2012년 사망.[10] 슬픈 나막신에서는 '하나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