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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점령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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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 군정청 설치 지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연합군 점령하 독일 상선기.svg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이탈리아
(1943~1945)
독일
(1945~1949)
오스트리아
(1945~1955)
일본
(1945~1952)
{{{#fff {{{+1 일본국[1]미군이 제작, 공포에 참여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日本国[2] | Japan}}}
연합국(미군 주도)의 군정청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상선기[3]
(1945 - 1949)
국기[4]
(1949 - 195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ted_States_Army_Forces_Command_SSI.svg.png 파일:일본 황실.svg
최고사령부휘장 국장[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Occupied_Japan.png
지도의 ①[6]
1945년 10월 2일 ~ 1952년 4월 28일
태평양 전쟁 종전 이전 주권 회복 이후
대일본제국 일본국
<colbgcolor=#808080> 국호 대일본제국 (1945년 10월 2일 ~ 1947년 5월 2일)
일본국 (1947년 5월 3일 ~ 1952년 4월 28일)
위치 일본 열도 일대[7]
수도 도쿄도
정치체제 군정,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8], 양원제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1945년 10월 2일~1951년 4월 11일)
매튜 B. 리지웨이 (1951년 4월 12일~1952년 4월 28일)
천황 쇼와 천황
내각총리대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제43대)
시데하라 기주로 (제44대)
요시다 시게루 (제45, 48, 49대)
가타야마 데츠 (제46대)
아시다 히토시 (제47대)
언어 일본어, 영어
주요사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 공포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시행
1950년 7월 26일 경찰예비대 발족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통화

1. 개요2. 설립3. 막강한 권한4. 연합군 군정의 정책들5. 제국 해체
5.1. 군정청5.2. 점령지 반환5.3. 영토 할양5.4. 독립
6. 기타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The authority of the Emperor and the Japanese Government to rule the state shall be subject to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who will take such steps as he deems proper to effectuate these terms of surrender.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이 항복 조건을 실행하는 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
항복 문서(Instrument of Surrender)의 일부, 1945년 9월 2일[9]
연합군 최고사령부(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또는 GHQ(General Head Quarters)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7년 동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부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이며 'SCAP'이라는 약자를 사용하고 당시 일본에서도 스캬프(スキャプ)로 불렀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로, 대신에 'GHQ'로 지칭한다.[10] 'GHQ(General Head Quarters)'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총사령부'이다. 본래 미 육군의 본토 주둔 병력 지휘와 교육, 훈련, 병참 등의 업무를 맡는 사령부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육군 제101공수사단의 제506공수연대도 101사단 편성 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연대였다.

2. 설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HQ_building_circa_1950.jpg
1950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본부 건물로 징발되어 사용되었던
도쿄도 치요다구의 '다이이치 생명관'
[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DN_Tower_21.jpg
2008년, 'DN Tower 21.
기존 건물 뒤에 신축 고층 빌딩을 이어 붙여 증축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전쟁을 버텨낼 수 없었던 일본 제국무조건 항복으로 미국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일본 점령과 통치를 위한 미군의 신속한 전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전[12]을 발동했다. 그 후 아시아-태평양 전선의 최전선 곳곳에 있던 미 육군미 해병대의 사단들은 신속하고 재빠르게 일본 본토로 공수 및 상륙한다. 오키나와섬에 머물던 미 육군 제11공수사단[13]이 수백대의 수송기, 폭격기에 분승하여 가장 먼저 일본 경내의 아츠기 비행장으로 공수되었고, 이후 제1기병사단이 전개되어 도쿄에 배치되었다.

그 뒤로 미 해병대의 제6사단의 제4해병연대[14] 요코스카일본 제국 해군 기지에 상륙하여 기지 주변을 접수하고 제5상륙군단은 규슈에 상륙하여 점령군으로 배치된다.[15][16] 그 뒤로 1945년 연말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 사단 16개 이상[17] 미군 총 500,000명 이상[18]이 후속 부대로 상륙하여 일본 곳곳에 배치되어 일본 제국 경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집행하고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영국군을 비롯하여 호주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등으로 구성된 영연방 군대들도 시코쿠와 주고쿠 지역을 점령군으로서 통치했다. 장제스의 중국 국민혁명군의 경우 주부 지방을 군정 지역으로 배정받아 제67사단을 보냈으나, 선견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공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파병이 중지되었다.

한때 최대 4만 명까지 달했던 영연방군은 한국 전쟁에 배치되는 등의 이유로 1951년까지 일본 본토에서 모두 철수하고 미군만 남았다. 미군도 전후 군축으로 1946년 여름까지 많은 부대들이 순차적으로 미국으로 복귀함에 따라 6.25 전쟁 발발 시점에 주일미군의 규모는 약 8만 5천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19]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부를 통해 간접 통치를 실행했고 쇼와 천황을 처벌하지 않았기에 부담을 덜고 주둔군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시점에서 미군 4개 사단(제1기병, 제7/24/25보병)이 여전히 주둔했으나, 이들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훗날 자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3. 막강한 권한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명목상 천황의 조정에 대응되는 정부는 존재했지만[20]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은 헌법과 법률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즉 이 당시 내각총리대신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일개 과장보다도 권한이 없는 존재였다.

일례로 토지 개혁과 재벌 해체를 규정한 법률안이 일본 국회(중의원)에서 12월 31일에 회기종료와 함께 폐기되자 법안을 당장 성립시키라는 명령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내려왔다. 이 '명령'을 전달받은 여야의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의 시곗바늘을 몇 분 뒤로 돌리고 회기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임시국회 소집 같은 절차를 시행할 기간도 주지 않은 셈이다.[21] 이는 일본인들에게 굴욕이었지만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불평하지 못했다.

또한 대일본제국 헌법을 대체하는 일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도입시킨 것도 GHQ인데 이 헌법이 도입된다면 기존에 상원 역할을 하던 귀족원이 폐지되는 구조인지라 귀족원은 헌법 개정안을 내심 반기지 않았고 원칙적으로는 귀족원이 개헌안을 부결시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귀족원에서 GHQ에서 만든 헌법을 부결시킨다면 천황도 폐위될 수 있다는 분위기였기에 귀족원이 폐지되는 헌법을 스스로 가결시켰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쟁을 최종 승인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직접 묻지는 않았으며, 천황과 황실이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20세기에 만들어진,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막부에 비유된다.[22] 게다가 군대를 기반으로 한 정권이라는 점에서도 막부와 일맥상통한다. 일본에서 이 시기의 역사에서 농반진반으로 이 기구를 말할 때 비유적인 의미에서 ジーエイチキュー 幕府(GHQ 막부)라고도 부른다.[23]

4. 연합군 군정의 정책들

강력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제에 따라 일본 제국 시기의 중범죄 피고(반평화범죄)들이 대부분 처벌되고 협력자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각종 근황파, 일본군[24] 거대 재벌들이 해체되었다. 일본군의 육군성해군성도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해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병력들의 귀국과 무장 해제 업무를 연합군 최고사령부 감독하에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어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제1복원대신과 제2복원대신도 모두 다른 사람을 별도로 발탁하지 않고 그 당시의 총리들인 시데하라 기주로요시다 시게루가 직접 겸직하여 내각에서 철저히 관리했다.[25]

그리고 화족 제도가 폐지되고 천황의 직계를 제외한 방계 황족들은 모두 신적강하되어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으며 화족들의 권력의 근간이었던 귀족원 또한 귀족원에서 가결하여 해체되었다. 신적강하의 경우 원래는 전범에 해당하는 가문만 신적강하될 예정이었는데,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다른 황족들에게 앞장서서 모든 방계 황족의 신적강하를 부추기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직계가 아닌 모든 방계가 신적강하되었다.

한편으로 골수 보수주의자였던 맥아더의 성향과는 별개로, 급진적인 정책도 동시에 도입되었으며, 어떤 면에서 당시 미국보다도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우선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전쟁기까지 농토의 다수를 독식하던 지주 계층이 해체되었고, 농민들의 다수는 토지를 배분받게 됨에 따라 자영농으로 전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언론의 자유와[26] 치안유지법 폐지를 계기로 한 좌익 탄압 중단, 여성참정권 부여 및 선거권 연령 하향, 다당제 재도입을 통한 보통선거 및 민주주의 시행, 지방분권화[27]가 도입되었고, 사법 역시 대법관 재신임 제도(최고재판소 재판관 국민심사)를 도입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로써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3S정책 포함)가 일본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더해서 대일본제국 헌법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노조 활동이 인정되어, 노조가 결성되었으며, 일본 제국 시절 각종 탄압의 도구로 쓰이던 치안유지법특별고등경찰 역시 전면폐지되었다.

그 외에도 의료 개혁이 실시되어 의약분업 정책이 취해졌다.

교육제도 역시 일변하여 국가신토 해체, 교육칙어 폐지, 천황 신격화 금지, 각종 군국주의적 교육 금지 등이 시행되고 구제중학교도 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 되어, 미국식 6 · 3 · 3 · 4 학제가 도입되었고, 학교의 자치권한도 강화되었으며, 교원노조의 설립도 허가되었고, 미국 본토에서도 일부지역에서나 시행하였던[28] 체벌금지 법안이 전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교복 역시 초등학생과 대학생은 자율화되었고, 중, 고등학교에서는 1950년을 기점으로 국민복몸빼 교복을 폐지하고,[29] 1941년 이전의 가쿠란세일러복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체벌금지 법안이 도입되었다해도, 실제로는 지도의 효율성을 이유로 교육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체벌금지가 교육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것은 빨라봐야 1990년대의 일이었다.[30] 그래서 이 당시에도 두발과 복장단속은 여전하였다.

어문정책도 개편하여 일본어의 표준 문체를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이 짙은 표준 문체를 보다 구어체를 반영하도록 권장, 개편하였고, 그 일환으로 만화책, 소설책같은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공문서와 신문과 시사잡지에서도 히라가나를 가타카나보다 우선시하여 쓰기 시작했다.[31] 신자체를 제정해서 표기체계를 보다 간편화하였다.[32] 미군은 또한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여 전리품과 연구용으로 챙긴 것을 제외하고 개인화기부터 전차, 비행기 등의 군 장비를 곳곳에 모은 뒤에 불도저 등의 장비로 파손시킨 후 기름을 붓고 소각했다.[33] 연합군 최고사령부 통치 초기를 다룬 2012년작 영화 <맥아더: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의 작중 묘사에 따르면 도쿄만에서 비무장의 구 일본군들이 미군의 감독하에 온갖 병기들을 바다로 수장했다.[34]

또 일본인의 항공 운영이 금지되었고[35] 이 때문에 당시 일본항공은 조종과 정비를 모두 외국 항공사에 외주를 줘야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구세대적인 제도와 관행들이 어느정도 사라지는 효과가 있었고, 특히 전쟁전에 큰 사회적 문제였던 빈부격차가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에 전후 사회안정에도 기여했다는 평을 듣고있다.

다만 이러한 개혁이 실시된것과는 별개로 전후 일본 경제는 궁핍하였다. 우선 금엔화 블록 붕괴에 종전 직전 일본 정부의 통화 남발로 인해 시작된 물가폭등이 1949년까지 지속되었고, 1946년에 전쟁 당시 발행한 국채의 만기가 다가오자,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들의 예금을 몰수해서 국채를 갚았으며, 일반인들은 일할곳이 마땅치 않아서 암시장에서 장사하는것으로 부업을 꾸리고, 미국에서 싸게 나눠주는 밀가루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대로면 1950년대에 화폐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1949년에 물가를 잡기 위해 닷지플랜이라는 정책이 도입되었지만 물가는 잡힌 대신에 실업률이 급속히 올라서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도 이때 일어나서 흉흉한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또한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로 추방된데다가, 1947년부터 195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후 베이비붐이 일어남에 따라(이 당시 태어난 세대들을 단카이 세대라고 부른다.) 인구는 매년 2% 이상씩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 시기가 일본에서 가장 인구증가율이 높았던 시대로, 인구급증으로 인한 사회인프라의 부족이 큰 문제점이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이 시작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1948년부터 이른바 역코스라 불리는 점령정책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쟁을 일으킨 구 일본 제국의 엘리트들을 견제하고자 좌익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두었으나, 이 때부터 레드 퍼지(Red Purge. 빨갱이 숙청)[36]라고 해서 공직추방 및 공민권 제한을 실시했다.[37] 그 결과 좌익 관련자들도 공직과 사회 각층에서 추방 또는 활동이 제한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나 좌파 인사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일본의 재무장과 재부흥을 전면적으로 막고자 했던 방침도 바뀌어, 국공내전6.25 전쟁 이후 공산권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과 경제력 향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일본에 대한 해체 정책 및 경제 억압을 능동적으로 해제하여 일본 기업들에 대한 정책들을 폐지하였고, 제한적인 재무장을 허용하면서 경찰예비대가 출범하였고 이것은 자위대로 발전한다. 이 때 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 제국의 엘리트들이 6.25 전쟁 이후 매카시즘이 강성해지자 이 틈을 타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38] 이 민권 제한조치를 영구적 추방으로 안 사람들은 황당하게 자기 자식들을 자기 자리에 앉히는 등 수많은 음모를 꾸몄다. 6.25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으로 수많은 외화가 유입되면서 일본의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0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110달러로 한국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1955년에 270달러로 급속히 상승하였으며, 이때부터 오일쇼크 직전까지 일본의 경제는 고도성장 기조를 유지하여 1970년대에는 세계 3대 경제대국으로 진입하기에 이를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은 국권을 회복하였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주일미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본군 출신들 및 일본 제국 시기의 수뇌부 인사들은 국권이 회복되자 정부 요직을 비롯한 사회 각층에 복귀했다.

5. 제국 해체

5.1. 군정청


5.2. 점령지 반환

5.3. 영토 할양

5.4. 독립

6. 기타

[navertv(59901955)]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9부 - 도쿄 · 파괴와 창조의 150년中[45][46][47]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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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정기 마지막으로 쓰인 국호로[2] 1949년 문부성 국어심의회에서《당용한자자체표》를 발행하며 신자체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3] 점령 초기 일장기는 제한적으로만 게양이 허용되었다. 1949년 1월 1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장기를 전면 허가하기 이전, 제한적으로 사용될 때는 국제법상 깃발을 달아야 하는 일본 선박에 이 깃발을 게양하도록 승인하였다. 이 당시 학교 교과서 삽화에 일장기가 있으면 삭제 대상이 되었고 아동의 문방구에 일장기의 디자인이 붙어 있는 경우, 학교에 감시하러 온 군사경찰에 몰수되거나 지울 것을 명령받았다.# 한편 금지 기간 동안 영국군이나 미군의 점령 지역에서는 각국의 국기가 게양되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경찰서장이나 시장을 통해서, 일본 국민들에게 경외심을 담아 성조기에 경례하도록 명령한 사례가 전국 각지에 있었다.(출처: 『에히메 신문』 1945년 11월 22일 기사 등)[4] 1949년 1월 1일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전면 허용되었다. 허용 반년 전인 1948년 6월, 국기 게양 제한령을 모르고 요코하마에서 국기를 게양한 남성이 미군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6개월의 판결을 받는 등의 판례(출처: 『日本の百年』1967年、他)가 있었기에, 형벌을 받거나 "군국주의자" 딱지가 붙을 것을 두려워하여 1952년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실제로 일장기를 게양한 일본인은 매우 적었다. 일본어 위키 문서[5] 일본 황실은 더글러스 맥아더 등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전략적 판단 및 시데하라 내각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그 조직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쇼와 천황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The Diplomatic History of Postwar Japan", Makoto Iokibe. 1999 참조.)[6] 당시 일본이 통치하고 있던 영역들을 나타낸 것이다. 2는 타이완 섬, 3은 사할린 섬의 북위 50도 이남 지역쿠릴 열도, 4는 조선, 5는 관동주, 6은 만주국, 7은 남양 군도.[7] 부속 도서의 경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그 지위와 범위가 불분명했다.[8] 1946년까지는 천황이 임명하는 인사가 귀족원과 중의원을 망라해 각료를 선임하는 거국일치내각을 유지하고 요시다 내각 출범 이후부터 의원내각제가 복원되었다.[9] 사실 이 문구는 주권이 없을 뿐, 천황과 정부가 형식상으로는 존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조정이 기유각서 이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형식상으로 존재한 것과 같이 연합군 최고사령부 아래의 일본 정부 또한 존재할지언정 그저 꼭두각시 신세였다. GHQ가 허락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 자치를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GHQ가 정한 것을 일본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0] 요시다 시게루 내각총리대신은 이에 대해 'Go Home Quickly(얼른 집(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농담을 했는데, 지금은 방과 후 클럽(동아리)활동 같은 걸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른바 '귀가부' 혹은 '귀택부')을 일컬어 'GHQ'라 부르기도 한다.[11] 본래 1933년 농림중앙금고 사옥으로 건축되었고 1938년에는 다이이치(第一) 생명보험 회사가 입주하였다. 지금도 농림중앙금고(農林中央金庫)와 다이이치 생명보험의 공동 소유이다. 오늘날까지도 증축을 거치면서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DN Tower 21'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다이이치 생명관 앞의 강처럼 보이는 것은 황거해자다. 일본 정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천황의 거처인 고쿄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12] 이 작전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1945년 6월에 미군 참모본부의 협업 (합참, 맥아더, 니미츠) 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했다는 가정 하에 일본과 남한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담긴 우발 계획이었다. 몰락 작전과 병행으로 기획하면서 작전의 세부 요소는 상당한 수준으로 공통되게 짰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 변형이 되어 시행되었다. 이때 남한에 배치된 미 육군 제24군단의 전개에 대한 작전은 "베이커-포티"(블랙리스트 포티)라는 코드네임이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 정확히는 아직 소련군이 도달하지 않은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으로 일본 본토 뿐만이 아니라 남한과 중국 북부에도 미군이 배치되었다.[13] 사단은 일본의 항복이 발표된 8월 초에 필리핀에서 오키나와로 이동해서 대기하다 8월 30일에 일본으로 재이동한다. 종전 후 1949년 5월까지 점령군으로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에 주둔, 이후 남한 미 군정 종료로 한국에서 철수해온 제7보병사단에게 교대받고 미국 본토로 철수, 6.25 전쟁 이전에 일본에서 철수한 마지막 사단이었다. 6.25 전쟁 시점에 사단은 본토 예비부대로 지냈고 예하 부대인 제187공수연대가 참전함[14] 일본의 항복 직후 제6해병사단의 주요 부대는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연대는 후술된 임무에 배정, 사단에서 분리되어 일본으로 향했고 45년 연말까지 점령군으로 지내다 연대장병의 70%은 전역점수 및 인사이동 기준을 충족하여 미국 본토로 돌아갔고, 이 과정에서 연대 본부와 제1, 2대대는 해산, 제3대대는 현지에 잔류, 해군 시설 경비대로 개편되었다.[15] 미 해병대의 제2,5 해병사단으로 전후 군축의 영향으로 45년 11월에 사단 간 인적 교환작업을 통해 베테랑 장병들은 본국으로의 인사이동과 전역을 위해 제5해병사단으로 전출되어, 제5사단은 12월 초에 미국으로 귀국하여 해산되었고, 군단사령부와 직할대는 연말에 점령임무에서 해제되어 46년 초에 귀국 후 각각 해산 및 재배치가 되었다. 제2해병사단은 46년 6월까지 잔류 후 제24보병사단에게 교대받아 미국으로 재배치되었다.[16] 제3상륙군단(1,6해병사단)은 중국 북부(베이징톈진, 산둥성)에 상륙하여 47년까지 점령군으로 지내고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17] 일본에 배치된 미 육군의 주요부대는 사단급으로는 제1기병사단, 제11공수사단, 아메리칼사단, 제24, 제25, 제27, 제32, 제33, 제41, 제43, 제77, 제81, 제97, 제98보병사단과 독립연대로 제112기병연대, 제158보병연대가 있었고, 군단급으로는 제1, 9, 10, 11, 14 군단이 진주했다.[18] GHQ, 미 육군 제6군과 제8군 + 육군 항공대 극동 공군 부대 + 주일 미 해군 + 미 해병 제5상륙군단과 주일 미 해병 항공 부대들을 도합한 수치이다.[19] 1946년 여름부터 주일 미군의 사단 수는 4개로 고정되었고 (상급부대로는 제1, 9 군단과 제8군), 군축과 평시 편제로의 전환으로 사단의 각 보병연대와 포병대대에서 1개 대대/포대를 삭제했다. 제8군은 야전군임에도 한 때 병력 수가 5만명 미만으로 감소했고,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엔 주일 미군에 군단 편제가 불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제1, 9 군단을 해체하고 제8군이 사단을 직접 관할하다 전쟁 발발과 본토에서 증원된 미군이 증가해서 낙동강 전투 후반에 군단을 재창설했다. (제1, 9, 10 군단으로 이들 숫자 부호의 부대가 선정된 것은 모두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20] 미국은 원래 독일의 경우와 같이 일본 정부를 해산하여 직접 통치를 실시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한 다수의 군정부대(역할은 민사여단과 비슷)도 준비했으나, 이후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로 방향을 바꾸면서 필수적인 정부 조직도 유지했고 각료들도 전범이 아니면 현직에 유지시켰다. 반면 일본 직접 통치를 위해 준비한 군정부대들이 남한으로 전개되었다. 방향이 바뀐 이유는 소련과 이미 합의가 끝나 안정되었던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국공내전, 6.25 전쟁 등으로 너무 혼란스러워 그나마 체계를 갖춘 일본 정부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21] 이 '시계 돌리기' 기술은 2009년 멕시코 국회에서도 선을 보였다. #[22] 둘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간의 막부는 형식상 천황이 군권을 내린 쇼군이 통치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권한이 강했지만 어디까지나 천황이 계통상으로는 그 위에 있었으며 조정의 권위는 어느정도 인정하긴 했고, 천황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시도는 했다. 하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관념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문서상으로든 천황을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래에 '종속'시키고 그 위에서 통치하였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태였다.[23]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 같은 뉘앙스로 "외국인 쇼군 맥아더"라는 표현이 있다.[24] 1차 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군 규모가 10만 명 선에서 엄격히 축소되었지만 독일 군대의 존재 자체는 인정되었다. 반면 나치 독일의 항복 직후 체결된 포츠담 의정서는 독일군과 일본군 해체, 이들 국가의 비무장화 및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시했다.[25] 다만 일본 해군이 영해에 깔아두었던 수많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해군의 소해부대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이렇게 잔존한 해군 인원을 기반으로 해상자위대가 창설되었다.[26] 물론 반미, 반서방적인 보도는 엄격히 검열되었다.[27]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에서도 제한적인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1947년에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본래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던 지자체장을 주민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는 등 지방자치를 강화하였다.[28] 이 당시에는 뉴저지주만 학교체벌이 금지되어있었고, 나머지 주에서는 합법이었다.[29]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몸빼와 국민복 의무 착용은 전후기때 일괄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일선학교에서는 교복을 새로 지정하기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미뤄진것이다.[30] 비슷하게 북한과 중국 역시 학교 체벌금지법안은 이미 정부수립 직후에 도입되었지만, 마찬가지로 실제 체벌금지가 교육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한것은 21세기에나 들어서의 일이었다.[31] 물론 이후로도 옛 문어체는 1970년대 무렵까지 일상적으로 계속 쓰여왔기는 했다.[32] 원래는 일본어의 문자체계가 불편하기 때문에 문맹률이 높을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가나문자 혹은 로마자 위주로 표기를 개편하려다가, 생각보다 문맹률이 낮자, 문자개혁을 취소하고, 대신 문체와 한자를 간략화하기로 한것이다.[33] 미군은 일본군의 살상무기는 철저히 폐기했지만, 그 외의 비전투, 비살상 물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처분에 관여하는 부분은 많지 않았고 구 일본군이 귀향하면서 갖고 가거나, 민간에 풀린게 많다.[34] 무기들은 일단 바다에 빠지면 바닷물의 염분으로 인해 쉽게 녹이 슬어 삭아버리기 때문에 설령 다시 인양해도 무기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고철덩이에 불과하고 무기의 철 성분이 바다 생태계에 영양성분을 추가해 인공어초가 조성될 수 있다.[35] 즉 일본인은 항공기 조종과 정비가 불가능했다. 다만 일본인 객실 승무원은 허용되었다.[36] 전범들의 공직추방과 레드 퍼지는 다르다. 레드 퍼지는 어디까지나 좌익계 인물들을 공직 등에서 추방한 것을 말한다. 종전 직후 미쳐 날뛰었던 일본 내 우익(극우)의 전쟁책임을 물은 것이 전범 공직추방이라면 우익의 거물들이 전범혐의로 공직에서 대거 추방당하고, 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자행했던 좌익 탄압이 중지되면서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여 연합군 군정이 일본을 통제하기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 레드 퍼지이다.[37] 이른바 일본의 밤과 안개. 동명의 소설도 있다.[38] 한국전쟁에 반대한 사람도 체포되었다. #[39] 1952년 토카라 열도 반환, 1953년 아마미 군도 반환, 1972년 나머지 류큐 열도 최종 반환.[40] 1968년 반환.[41] 원래 프랑스에 반환되었지만 공산게릴라였던 베트남독립동맹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와 1954년 7월 공산권 수장 소련의 항의, 그리고 베트남에 영향권을 뻗치고자 했던 미국의 압박에 따라 완전독립을 이루었다.[42] 남부 베트남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구시대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뿌리뽑고 새로운 반공자유진영 구축을 원했던 미국에 의해 남부 베트남에 대한 독립선거가 실시되고 1955년 베트남 공화국이 설립되었다.[43]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원래 주인이었던 네덜란드에 반환되었고 4만의 네덜란드 병력이 다시 인도네시아에 돌어갔다. 무기가 빈약했던 인도네시아 독립군들은 밀리기 시작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를 뿌리뽑고 새로운 자유진영의 구축과 영향권 확대를 위해 미국이 2차 대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네덜란드에 경제원조를 빌미로 압박한 결과 결국 1949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44] 독립운동가인 이상화 시인의 형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 여성 조종사인 권기옥 여사의 남편이기도 하다.[45] 2021년 3월 29일 방송[46] 01:09:30 부분부터 연합국 점령하의 도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마루노우치에 GHQ 각 부서의 설치와 각종 호텔과 일본군 관련 시설이 접수되어 연합군에게 불하되는 과정과 일본의 재무장을 견제하기 위한 재벌 해체에 관한 내용도 다루고 있다[47]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대략 1890년대부터 연합군 점령하의 1952년까지 관동 대지진과 도쿄 대공습이라고 하는 두 번의 괴멸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도쿄의 파괴와 창조의 150년을 다룬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