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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6:20:28

나혜석

<colbgcolor=#64564b><colcolor=#fff> 나혜석
羅蕙錫 | Na Hyes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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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사망 1948년 12월 10일 (향년 5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89길 24[1])
본관 나주 나씨 (羅州 羅氏)
가족 아버지 나기정, 어머니 최시의
첫째 오빠 나홍석, 둘째 오빠 나경석
이복 언니 나계석, 여동생 나지석
배우자 김우영, 장녀 김나열, 장남 김선, 차남 김진[2], 삼남 김건[3]]
조카 나영균, 나희균, 조카 손녀 나문희[4]
학력 삼일소학당 (졸업)
진명여학교 (졸업)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5] (서양화 / 졸업)
종교 불교
직업 화가, 시인, 작가
사상 한반도의 자유주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아호 정월 (晶月)
아명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과 세계 여행2.3. 불륜 그리고 이혼2.4. 말년
3. 평가
3.1. 긍정적 행보3.2. 부정적 행보
4. 논란
4.1. 독립운동가 미화 논란
5. 대중매체에서의 묘사6. 작품적 활동7. 어록8. 여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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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 운동가, 언론인.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았다.[6][7] 본관나주(羅州), 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여자미술전문학교[8]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했다.[9]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1대 페미니스트라고도 불린다. 그녀는 일본 유학 당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 계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남녀 평등과 여성의 권리,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투고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보가 극단적으로 여성우월주의적이고 과격하다는 비판도 있으며, 친자식에 대한 태도나 최린과의 불륜 행위를 비롯한 그녀의 사생활은 당대에 많은 비판거리가 되었다. 특히 자식들에게 행한 아동학대는 현대에도 상당히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독립 운동가라는 평가와 친일이라는 논란이 공존하고 있으나 대체로는 둘 다 부정되는 편이다.

여성임에도 이름에 '석'자가 들어가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북한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할 정도. 이름에 석이 들어가는 유명인 중 드물게 여성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10]

아버지였던 나기정은 보수적인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었으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을 일으켰다.[11] 그 덕에 나혜석은 당시 여성들 중에선 특출난 편이였고 고등학교까지 나와 미술을 익혔다. 특히 둘째 오빠였던 나경석은 나혜석을 특히나 챙기고 아꼈는데, 이후 그녀에게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곁에서 많이 도와주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유하고 명망높은 집안, 꽤나 진보적이고 좋은 가족들 사이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딸들에게 처음부터 정식 이름 대신 아명을 썼고, 나혜석은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 그녀의 여동생은 '나간난(=나 참판댁 갓난애기)' 등으로 불렸다. 이런 과거적인 아명 붙이기는 나혜석이 진명여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서 끝났다. 때문인지 나혜석은 이름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였다.[12] 아무리 집안이 어느정도 진보적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였기에 (사대부+여성)이라는 입장은 언제나 눌려사는 삶이었다.

이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아버지 나기정은 본처인 최시의 이외에 여러 여성들을 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까지 두기도 했었는데, 그녀가 첩인데다 기생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나기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걸 방패삼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하여 본처인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해댔다. 이는 절대 용납되는 일이 아니며 본래라면 칠거지악의 4, 6번에 따라 쫓겨나야 할 상황이건만 최시의는 남편에겐 하소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으며 고생을 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 첩을 여럿 두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어머니가 직접 이러한 사회적 피해를 입자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13]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이때부터 여성운동가로서의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삼일여학교, 진명여학교, 일본유학을 거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혀가던 나혜석은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향한 비판을 담은 글들을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이게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본국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

2.2. 결혼과 세계 여행

다양한 글들을 통해 당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던 나혜석은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해[14] 결국 일본 유학 당시 연인이었던 최승구와 약혼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최승구는 폐렴과 결핵에 시달리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낸 나혜석은 심히 슬퍼하며 집안에서 권유하는 모든 중매자리들을 거절하였다. 그러다 평소 가까웠던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교토에 있는 김우영[15]을 만나게 되었고 오빠의 강력한 추천으로 여러 번 만나게 된다. 처음엔 거절했으나 집안에서 계속 보채는 통에 결국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 결혼하기로 한다.

이때 나혜석은 결혼 전 4가지 조건을 들며 이를 허락해야만 결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게 뭔고 하니 아래와 같다.
1.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1.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1.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1.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16]

위의 4가지 항목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괴상한 조건이였다. 첫번째 조항은 겉보기에는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시에는 첩을 두는 게 합법이었고 재력가들은 첩을 두는 게 본인의 재력의 척도가 되기도 했던 시절이었는데, 자신과 결혼하면 첩을 두지 말고 자신만을 사랑해달라는 것으로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조항은 결혼한 여자가 집안일 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가 드문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역시 파격적인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 조항은 시집을 가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며 시집살이를 하는 게 일반적이던 그 당시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또한 첫사랑이던 최승구의 묘비를 세워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옆의 남자를 두고 과거의 남자에게 집착하듯 하여 약간 맥이는 듯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불길하게 여긴 주변인들이 "뭔가 좀 아닌거 같다" 라며 김우영에게 나혜석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이러한 조건들을 김우영은 모두 받아들이고 나혜석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 여자와 그 남자인 셈. 이 때문에 김우영은 주변으로부터 공처가, 애처가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이후 김우영과 나혜석은 꽤나 좋은 부부관계를 이어가며 후술할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다. 결혼때의 약속대로 나혜석은 큰 간섭없이 자유로이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항일운동, 독립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녀의 전시회에는 첫날에만 5,000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남편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이 주는 해외 위로여행 포상의 대상자가 되었다.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부부동반으로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아시아를 넘어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양의 다양한 국가들을 관광하며 그녀의 사상과 작품세계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2.3. 불륜 그리고 이혼

1928년, 해외여행을 하던 나혜석은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친일파 최린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최린을 보곤 한눈에 반하여 가까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여행 기간 동안 수십번씩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은 파리의 유학생들에게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이다." 라는 소문으로 퍼지게 되어 남편인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아내가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우영은 이 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끝내 나혜석과 최린이 만나 연애를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에 분노한 김우영이 자신이 있던 베를린에서 짐을 싸고 나혜석이 있는 파리로 오면서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은 끝나게 되며, 막내아들이 이 시기에 태어나게 된다.

사실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던 나혜석이지만 가장 유명한 최린 이외에도 유부남, 천도교 교령 등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크고작은 외도들을 일으키고 다녔었다. 허나 이전의 외도와 달리 이 사건을 시작으로 나혜석의 삶은 불행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국한 김우영은 나혜석의 바람에 복수라도 하듯 새로운 여성과 교제를 하며 신접살이를 시작했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나혜석은 결혼 전의 약속들을 언급하며 이혼을 피해보고자 하였으나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간통죄로 고소를 하겠다며 응수했고[17] 결국 둘은 1930년, 10년간 이어오던 부부관계에 막을 내렸다.

이혼 이후로 나혜석은 많은 것을 잃었다. 화가로써의 명성도 실추되었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남편 김우영이 가져가게 되면서 자식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해외에서는 여전히 명망있는 화가이지만 국내에서 만큼은 구설수에 오르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이미지 또한 큰 타격을 입었는데 평소에도 파격적인 주장과 크고 작은 외도들을 통해 말이 많던 그녀는 사건 이후 이혼고백서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펼치면서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에게조차 더더욱 욕을 먹게 되었다. 그럼에도 강의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며 어떻게해서든 재기해보려 해도 자신이 해온 것들이 있으니 매우 힘든 삶을 보내게 된다.

2.4. 말년

말년의 그녀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자 파킨슨병과 중풍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성운동을 위한 강연을 계속하였고 추후 사회와 멀어지기 위해 절에 귀양까지 해보려 했지만 같은 여성운동가 김일엽에게 자격이 못됨을 지적받고 포기했다.[18] 끝내 몸과 마음 모두가 쇠약해져 요양원에 신세를 지게 된다.

자식들을 악마라 칭하며 폄하하며 학대하던 그녀는 말년에 들어서야 자식들을 그리워해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파리로 떠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시댁과 현모양처를 비판했던 그녀는 말년에 시어머니의 사망소식에 애정에 시댁을 찾아갔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죽기 전에는 학대하던 자식들을 만나보고싶어해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지만 김우영은 이러한 나혜석의 자식상봉을 막았으며 모든 자식들도 어머니의 방문을 거부하였다. 김우영이 자식 상봉을 막은 것과 자식들도 만남을 거부했던 것은 여담 항목에 후술한 아동 학대 논란이 주원인인 것으로 점쳐진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보기 위해 요양원[19]에서 탈출까지 저질렀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3. 평가

학계로부터 신여성이라 불리며 계몽운동을 이끈 위인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녀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가 외적으로 보여준 부정적인 요인들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선 "정말 위인으로 삼을만한 사람인가?"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교과서나 tv프로그램 등에서는 그녀를 시대에 저항한 여성운동가로서 묘사하곤 있지만, 지금도 논란이 될 법한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과 말년에 보여준 본인의 내로남불적인 행태들로 인해 그녀를 신여성의 상징으로 치켜세워줄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20]

그녀에 대한 평가는 "남성중심사회에 저항한 신여성"이란 긍정적 평가와 "극단적이고 이중적인 위선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나혜석의 미화와 왜곡으로 유명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나혜석 편의 유튜브 댓글이 초기에 대댓글이 100개가 넘는 댓글들이 즐비했었을 정도로 그 극단성을 볼 수 있다.

즉 그녀의 사회적인 활동으로 보았을 때 긍정적인 면모가 보이지만, 반대로 인간적인 행보들로 보았을 때 부정적인 면모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주된 평가이다. 또한 후술한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어지는 그녀의 미화된 모습들은 그 편향성 때문에 나혜석에 대한 찬반여론이 더욱 거세지기도 하는 상황이다.

3.1. 긍정적 행보

당대 최초의 여성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으며, 신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여성인권 향상에 대한 목소리가 더 커진 21세기 현대에 더욱 고평가를 받는 편이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여자, 남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여기서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코올 의존증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21]

인권운동 및 여성운동을 전개하면서 당시 가부장제 사회의 부정적 요소와 모순을 꼬집고 이에 대항함으로서 다른 운동가들과 함께 시대를 변화하고자 하는 그녀의 행동은 지금도 존중받고 있으며 위인으로서 평가되도록 만든다.

3.2. 부정적 행보

- 정조는 취미이자 자유다.
- 불륜부부관계돈독히 만든다.
- 성적으로 자유로운 창녀가 부럽다. 여창을 넘어 남창을 만들자
- 남자는 바람을 피우고 아내를 괴롭게 만든다.
- 남자는 여자에게 정조를 강요하고 자신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다.
- 아이부모의 살을 좀먹는 악마다.
- 모성애학습과 세뇌의 결과물이다.
- 결혼여성의 지옥이고 임신은 불행이며 육아는 저주이다.
이혼고백서의 내용
예전부터 "기생이야말로 진정한 사랑꾼이다", "모성애는 본능이 아닌 강요이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등등 본래부터 과격한 주장들을 해왔으며 이곳저곳에서 비판이 있던 나혜석은 불륜사건 이후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게된다.

그녀는 이혼고백장을 통해 기존보다 더욱 과격한 성격의 내용들로 여성들의 권리향상을 주장하고 남성들을 비난했다. 허나 뒤에 서술하듯 남성들의 비난은 물론이요, 같은 여성들에게도 옹호보다는 비판이 거세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반응들은 과거 나혜석이 그랬고, 현대 그녀를 옹호하는 입장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가부장제에 세뇌당한 결과" 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로 이혼고백서가 자신의 불륜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쓰여졌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22]
-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남편이나 본부인을 어떻게 하지 않는 범위 한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 생각한다
-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 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다.
이혼고백서와 사랑의 자유 중
"사랑이 변치 않는다면 바람이 아니며 불륜은 정이 두터워지는 진보된 행위다." 라고 서술한 것. 나아가 최린이 자신을 먼저 유혹해서 일어난 일이라던가, 남자들은 첩을 들이면서 여자들에게 외간 남자를 사귀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불평등하다 주장했다. 이와같이 "조선 남자들은 이기적이며 정조를 강요한다." "남자도 정조를 지켜야 한다."라며 남성들의 모순과 외도를 비난하는 동시에 반대로 본인의 모순과 외도엔 "정조는 취미이다.", "혼외정사가 부부관계를 끈끈히 한다."며 오히려 옹호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에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사건이전 혹은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불륜행위를 정당화하고 반대로 남성들에게 책임을 묻는식의 주장들은 당시에 이혼고백장이 여성운동을 위해서라기 보단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 하기 위한 글이라는 시선이 강했다. 때문에 여성의 자립을 주장하는 글을 서술하였지만, 오히려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반발과 비판이 더욱 커지게 된다.[23] 나아가 그녀는 아동학대 논란이 있는만큼 평소 자신의 자식들을 악마라 칭했으며 육아를 저주, 임신은 불행이라고 표현했으며 더불어 아이들에게 자신을 사회의 피해자라 칭하고 자식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 하기도 했다.
사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한 나혜석은 크고작은 외도들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져야만 했다. 이후로도 "자식은 어미의 살을 파먹는 악마다." 또는 "내 살을 먹고 자란 괴물들" 등등 사상을 위해 자신의 자식들마저 부정하는 발언들을 지속했다. 그녀가 당시에도 유명인사다 보니 사 남매는 "제 엄마에게 악마소리 듣는 애들" 이라는 주변의 시선과 괴롭힘을 피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나혜석이란 사실을 숨겼으며 어머니가 자신들을 장애물 취급하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년의 나혜석이 친자식들을 찾아왔을 때도 자식들이 그녀를 보고싶지 않다 외면했다.[24]

어느정도였냐면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자신들과 아버지를 욕하는 친모보다[25] 새어머니를 더욱 좋은 어머니라 여기고 따랐다. 둘째 김진은 자서전에 나혜석이 그립지만 동시에 원망하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고 나혜석이 파킨슨병실어증에 시달릴 때도 어머니를 멀리했다.

4. 논란

4.1. 독립운동가 미화 논란

신사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불교를 믿는 불자임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래서 나혜석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26] 일제강점기 후반에도 나혜석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매우 드물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창씨개명만으로는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점이 재평가되어 수원시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객관적인 자료 및 증거가 부족해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점, 친일 논란과 관련하여 관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주류이다. 그녀가 독립운동가라고 얘기하기에도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고, 친일이라고 하기에도 불분명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은 판단 보류 중인 상태이다.

2020년 수원에서 나혜석의 '독립운동 미화' 논란에 대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장정희 수원시의원은 "이 자리에서 나혜석에 대한 논란을 끝내자는 것이 아니라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객관적인 의견을 나눠보자는 것"이라고 토론회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한동민 나혜석학회 총무이사와 김경호 전 뉴시스 기자가 발제자로 나와 나혜석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한동민 총무이사는 "나혜석은 수원에서 손꼽히는 가장 역사적인 인물"이라며 나혜석이 김마리아, 황에스더 등과 함께 3·5 이화학당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나혜석이 옥고를 치를 당시 '혐의를 부인했다', '동료를 밀고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무죄방면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독립운동가' 말고 뭐라고 해야하나"라며 "나혜석이 5개월동안 옥고를 치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도 옹호했다.
김경호 기자는 "나혜석이 투옥됐을 당시 검찰 신문조서에는 만세시위를 벌였냐는 질문에 '나는 안 했다'고 부인했다. 수원시는 나혜석 관련 책에서 그녀를 '독립운동가'로 미화하면서 이런 내용은 넣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나혜석을 명확하게 독립운동가로 볼 것이면 '팩트'가 있어야 한다. 옥고를 치른 이후 나혜석의 행보는 독립운동가라고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남편과 러시아, 프랑스 등 해외여행을 하고, 친일파와 어울렸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혜석을 '친일파'로 명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제로부터 '호가호위'했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라며 "인물의 양면을 다 기록하지 않고 한쪽만 보여주는 것은 왜곡이다. 수원시가 전시, 출판 등 예산을 써서 하는 활동에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팩트'를 검증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토론자로 나선 윤경선 수원시의회 의원은 "독립운동가라는 단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정부에서도 나혜석에 대한 독립운동가 평가를 보류했다"라고 설명했다. 윤 의원은 "수원시라는 공식적인 기관이 시민의 세금을 써서 인물을 기릴 때는 수원시민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나 여성운동가가 아니라 화가나 작가로 살아온 나혜석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며 "이미 나혜석은 작가이자 화가로서 분명한 자기정체성이 있었다. 굳이 논란 속에서 나혜석에게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라는 호칭이 과연 영예스러운 것일지 의구심이 든다"라고 말했다.출처

5.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현대에 들어 여성인권이 높아지고 과거의 신여성 운동이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면서 나혜석 또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은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여성들의 계몽을 이끌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보통 능력있는 여성화가, 시대에 저항한 여성운동가, 신여성의 대표자, 시대에 비판받은 피해자 등을 중심으로 잡고 표현되어지며 레디컬 페미니즘적인 발언, 아동학대 논란,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행보들 등은 최대한 배제하는 식으로 내용이 편성된다.

다른 위인전들도 그러하듯 tv나 교과서 등에서 그녀를 다룰때 최대한 부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녀를 순화하여 보여주고 있다.[27] 문제라면 나혜석이란 인물 자체의 논란과 지나친 왜곡들이 발목을 잡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사례들처럼 말이 많기도 하고, 단순 매체를 통해 나혜석을 접한 사람들은 자세한 사실을 모르다가 알고서 충격을 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

6. 작품적 활동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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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1928)
그의 작품 <자화상>.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나혜석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 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로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으며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경희>는 이러한 고백체 소설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7. 어록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디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인형의 가(家)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28]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경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하략)

8. 여담

9. 둘러보기


[1]서울용산경찰서 소재지[2] 2019년 9월 27일 작고.[3] 2015년 작고[4] 첫째 오빠인 나홍석의 손녀다.[5]여자미술대학[6] 차미리사와 나혜석은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전신인 조선여자교육회 설립에 참여한 적이 있다.[7] 나혜석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기독교계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시초는 바로 김활란이다. 나혜석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김활란의 회유를 거부했다.[8]여자미술대학. 일본의 명문 미술대학 중 하나로, 약칭으로는 '조시비'라고도 부른다.[9] 당시 여자미술학교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었던) 양재나 자수를 전공하는 학생이 많았다.[10] 나계석의 남편은 당시 수원부 유지였던 경주 최씨 기환.[11] 서녀인 나계석에게는 신교육을 시키지 않았다.[12] 후술할 결혼 뒤 임신 과정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으니 말이다.[13]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이화학당 등 여러 근대 여학교에서 금혼 학칙을 제정했다.[14] 여러 번 결혼을 얘기했지만 나혜석이 모두 거절하고 미뤄버리자 화가 난 아버지가 유학 자금을 끊어버리기까지 해서 1년간 휴학하고 다시 다녀야 했다.[15] 1920년에 결혼했다. 김우영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일본 외무성 관료가 된 인물로, 나혜석의 세계일주도 사실 남편이 일본 외무성에서 포상휴가로 받은 것을 부부동반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16]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는 신혼여행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소개되었고 결혼 후 이 조항에 따라 신혼여행을 최승구의 묘지로 간 것으로 소개되었다.[17]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러했듯 남성의 첩 소유나 불륜은 법적으로 처벌이 없는 반면, 여성의 경우엔 이가 불가하여 유부녀와 간통남의 처벌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18] 김일엽이 일본에 두고온 아들 송영업의 방문을 매정히 뿌리치는걸 본 나혜석이 자신이 자식들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19] 훗날 꼬꼬무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61세 노인 심영덕'으로 입소한 탓에 그 누구도 그녀가 나혜석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후 '나고근'으로 이름을 고쳐서 생활했다고 한다.[20] 신여성 운동을 나혜석 홀로 이끈 것도 아니고 단발머리를 시작으로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한 강향란이라던가, 나혜석과 같은 자유연애주의지만 비교적 온건적이었던 김일엽 등 다양한 사람이 많고 대표로 세울만한 인물도 많건만 굳이 왜 그녀여야 하는가라는 주장이다.[21] 이 당시에도 근대적 민사법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므로 이혼은 이론적으로 가능했으나 경제력의 부재, 가혹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스스로 주입된 가부장적 의식 탓에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다. 친정으로 가는 것도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때는 출가외인이며 지금도 미흡하지만 그 때는 보육시설 자체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이야 아이 돌보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혼자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를 돌보면서 생계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어린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방에 감금해 두는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망사건도 흔히 일어났다. 지금만 해도 부득이하게 어린 아기들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일하러 가는 제3세계 부모들이 흔하고, 우리나라도 80년대 화재로 방에 감금되어 있던 어린 아이들이 사망한 혜영 용철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소재로 정태춘이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22] 본인은 "억압으로의 해방"을 말하고자 하였을지 몰라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게 문제였다. 저 정도로 과격한 주장은 현대에도 논란이 되기 십상인데,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반사회적인 발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23] 서울의 한 인텔리 출신 가정주부는 나혜석을 음란하다며 그녀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고, 평양의 한 주부는 "필요없는 폭로는 악취미입니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나혜석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칼럼에 기고하기도 했다.[24] 한 번은 둘째아들 김진이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학교까지 찾아온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으며 이후 집에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 김우영은 절대 다시는 만나지 말라 전했다.[25] 반대로 자식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우영은 전처 나혜석에 대하여 크게 욕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그래도 마지막까지 사랑했기 때문이라고[26] 당시 일제는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심지어 투옥이나 순교시키기까지 했던 시절이다.[27] 보통 "시대에 희생된 안타까운 여성운동가" 라는 주제가 주이며 대표적인 예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있다. 항목에 서술되어있듯 고증오류가 심하고 사실여부를 왜곡하여 나혜석을 순수한 피해자로 묘사하여 방송으로 내보냈기에 초창기 유튜브 댓글엔 그녀를 찬양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이 어마어마한 싸움을 일으킬 정도였다.[28]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그 '노라'가 맞다.[29] 나혜석의 큰오빠 나홍석의 손녀. 나문희의 할아버지 나홍석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에게 입양되었다. 당시에는 자손이 없으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녀 많은 친척 쪽의 아이를 양자로 호적에 올리는 게 자주 있는 일이었다.[30] 이에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남자는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최대 의무인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반박글을 냈고, 나혜석은 ”당신이 능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고 분노하였다.[31] 영친왕이방자 내외의 경우는 일본 정부의 공무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다녔을 때 언론에서 "세금이 심각하게 낭비되고 있다"고 비난이 쏟아졌었다. 사실 세계여행이 말이 쉽지,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귀족이었던 걸 감안하면 여비로 사용된 금액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오늘날보다 교통비도 훨씬 비쌌을 것이고 숙소 역시 게스트하우스 같은 건 없었을 뿐더러 있었다 해도 왕공족(귀족은 커녕 화족보다도 높은 작위다.) 체면상 고급 호텔에서 묵었을 테니...[32] 훗날 꼬꼬무에 고모의 말년과 관련해서, 동생이자 서양화가인 나희균과 함께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33] 출처: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가갸날, 2018.[34] 원본: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에서, <삼천리> 1936년 1월.[35] 이외에도 주최사인 한국일보사 간부가 후보에게 돈을 받고 당선시켜주는 부정을 저지르는등 꾸준히 문제가 많았다.[36]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사생활의 평판이 업무와 직결됐으며, 부인이 바람났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진 김우영에게 아무도 소송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불륜 피해자는 남녀를 막론하고 그냥 안타깝게 여기지만 이 당시엔 아내가 바람을 필 정도면 남편이 어지간히 남자 구실을 못하니 여자가 바람이나 핀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불륜은 그 남편의 평판에도 어마어마한 직격탄이었다.[37] 프로그램 내에서는 '이야기 친구'라고 한다. 참고로 이날의 이야기 친구는 장현성 - 이미도, 장도연 - 이현이, 장성규 - 정성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