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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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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징병은 1944년부터 실시됨

1. 개요2. 일제가 조선에 세운 신사들3. 상세4. 최고의 피해자 기독교
4.1. 기독교 내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논쟁
5. 해방 이후 세워진 신사들을 운명
5.1. 들어가기 앞서5.2. 본론
6. 국내에 남아있는 신사7. 현대 한국인들의 신사에 대한 인식8. 참배법 차별?9. 출저

1. 개요

神社參拜.

신사(神社)는 일본 민속신앙 신토(神道)의 을 모시는 종교 시설이다. 일제는 조선에도 신사를 세운 다음, 조선인들에게 여기를 찾아가서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2. 일제가 조선에 세운 신사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사(신토)/목록/외지/조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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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반도에도 신사가 지어졌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이다. 그 외에도 충청도에 세워진 부여신궁, 전라도에 세워진 광주신사, 경상도에 세워진 대구신사 등이 있었다. [1]

3. 상세

일제는 먼저, 조선인 학생들에게 강제로 신사참배를 시킨다. 1937년부터는 대상을 확대하여 일반인들에게도 이것을 시켰으며, 신사참배하는 빈도를 높이기위해 매월마다 "애국일 행사" 라는 것을 열기도 하였다. [2]

4. 최고의 피해자 기독교

더군다나 특히 기독교인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는데, 이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거나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5월 18일에 가톨릭이 먼저 신사참배를 허용했는데, 교황청은 일본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훈령을 내렸고,[3] 일본 주재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에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통첩을 내리고 신사참배를 직접 권고하였다.

이후 1938년 2월부터 총독부 경무국에서 기독교지도대책을 마련하고 친일화를 독려함에 따라 9월 10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차원에서 개신교 역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이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는 국가신토의 신토 비종교론에 근거해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하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혀 어긋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교계 차원으로 신사참배 의결을 강제로 밀어붙였다.##

실제로 한국의 개신교 교파 기준으로[4]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은 교단은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5]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교단들은 진짜로 교단 자체가 사라진 경우가 많은데, 전체 기독교 비율로 보면 이들은 결국 소수였다.

4.1. 기독교 내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논쟁

민족 감정을 거르고 보자면, 이 시기 신사 참배에 대한 해석은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인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과 유사한 면이 있다. 누군가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해석할 것이고, 누군가는 종교성이 없는(혹은 희석된) 문화이지 우상숭배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비슷하게 신사참배에 대한 논쟁은, "신사참배는 종교성이 없는(혹은 희석된) 문화인가?"라는 물음에 그 본질이 있다. 조상제사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한 가톨릭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그러했다는 점, 신사참배를 거부한 계열인 예장고신은 조상제사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순수하게 신학적 관점만으로 보자면, 조상제사와 신사참배는 세트로 붙어다니는 논쟁거리이고, 설득력 있는 답변은 둘 다 수용하는 것이나 둘 다 거부하는 것이지, 하나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물론 신사참배가 허용된 이유에는 국제정치적인 맥락이 당연히 존재하지만[7], 이러한 국제정치적인 맥락이 '신사참배 허용'이라는 실제 결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17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중국의례논쟁까지 연결되는 신학사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고, "조상제사가 허용된다면(혹은 앞으로 조상제사를 허용해야 한다면), 국가신토의 신사참배를 막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신학적 논쟁'도 '신학과 무관한 단순 정치적 협잡'도 아니다. 국제정치적 맥락, 그리고 동아시아 선교에서 신학적 일관성을 찾고 이중잣대를 피하려는 신학사적 맥락이 둘 다 있는 것이다.

문제는 민족감정이다. 일본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만 파고들어도 그걸로 족하지만, 조선 그리스도교에서는 종교성 여부뿐만이 아니라 민족 감정도 고려해야 했다. 신사 참배는 일본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국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와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관용'의 문제였다면, 조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질적인 해외 문화를 강요당하는 '억압'의 문제였던 것이다.[8]

결국 신사 참배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조선인에게 '억압'의 상징이었고, 광복 직후에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는 스스로 승신식을 열고 철거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신사는 광복 직후 빠르게 민중들의 손에 파괴되었다.[9] 현재 대한민국에는 소록도와 목포시에 부속건물·반석·기단 등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인데[10], 어디까지나 신사였던 흔적이 남은 정도이다. 종교시설로서 활동하는 신사나 건물이라도 온전히 남은 신사는커녕,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는 여러 채 남아있는 토리이 하나 남아나지 못했다.

5. 해방 이후 세워진 신사들을 운명

5.1. 들어가기 앞서

군산 동국사나 대구 관음사 등 일부 일본식 사찰 건물들은 '불교시설'인 덕에 아직도 현지에서 종교시설로서 건물과 형식을 보존했지만[11], 신사는 확연히 일본색이 강한 종교시설인 데다가 조선인 사이에는 광복 전부터 기저에 강한 반일감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떠난 뒤에는 파괴를 면할 길이 없었다.[12] 식민지 당국 또한 광복 후 신사와 신사에 모신 신체(神體)가 조선인의 손으로 불경하게 파괴될 줄 짐작하고, 광복 당일 조선신궁의 궁사(宮司)가 조선 전역의 신사에 승신식, 즉 신체에 깃든 신령을 되돌려보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를 제외하면 대다수 신사는 미처 스스로 철거할 틈도 없이 현지 민중에 의한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

5.2. 본론

1945년 8월 미국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참전하자 쇼와 덴노와 항복파 장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발표, 한반도 또한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다음날 16일, 당시 조선신궁의 궁사 누카가 히로나오는 권궁사 다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경성신사의 궁사와 함께 총독부 지방과장 혼다 다케오(本多武夫)와 협의하여 한반도의 각 신사·신궁들은 저마다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13]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신령을 돌려보내고 남은 신체(미타마시로)는 일본으로 가지고 가거나 한국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처분하라"고 했다 한다. 각 신사들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침을 알렸다고. 각 신사의 신체와 거기 깃든 신령이 한국인들의 손으로 파괴되고 모욕받느니, 차라리 일본인들의 손으로 경건하게 돌려보내고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광복 직후에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는 스스로 승신식을 열고 철거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신사는 광복 직후 빠르게 민중들의 손에 파괴되었다. 심지어 평양신사는 광복절 당일 밤에 방화로 파괴되었다. 이는 평양이 개신도 세가 가장 강하던 평안도 지방의 중심 도시였고, 심지어 일부 개신교 미션스쿨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다 교사와 학생 일부가 끌려가서 모진 고문까지 당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특히 신사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사실상 예견된 수순이었다.

부여군에서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식도 하지 않았으므로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오늘날 부여군 부소산 삼충사(三忠祠) 터가 부여신궁을 짓던 자리이다. 현 부산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던 용두산신사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눈치 빠르게 승신식을 하고 신체를 바다 속에 던졌으며 본전 건물을 해체했으나, 남은 건물들은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하려는 조선 잔류 일본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몇 달 더 존속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17일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앙심을 품은 개신교(장로회) 신학생이자 집사인 민영석이 방화하여 완전히 전소되었다.

서울에서는 아직 행정력이 유지되었으므로, 누카가 궁사는 자신이 뜻한 대로 조선신궁 해체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승신식 결정을 내린 당일(1945년 8월 16일)에 승신식을 거행하고 밤에 비행기로 (신궁이 보물로 간직했던) 하사품 '메이지 천황의 검'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황실에 반납했다. 24일에는 조선신궁에서 경배의 대상이었던 미타마시로를 비행기에 실어 궁내성(宮内省)으로 반납했다. 다른 보물, 제문(祭文), 도구 등은 19일 밤부터 25일 밤 사이에 모두 불태웠고, 9월 7일부터는 일본인들 손으로 건물을 해체했다. 해체 도중에 미군정이 작업중지를 명령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대로 진행하여 10월 6일에 신사의 시설들을 철거하고 7일엔 남은 시설을 소각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모든 시설을 남김없이 철거하진 않아서, 1952년에 찍은 사진에 아직도 건물 상당수가 남아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신전과 배전 등 중요하다고 생각한 본전 건물만 없애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둔 듯하다.
파일:SSI_20040726161819.jpg 파일:1952조선신궁.png
1948년 1월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사용한 장면을 찍은 사진. 1952년 조선신궁 터.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 건물이 남아있었다. 우측 멀리 서울역이 보인다.
파일:전경_(보수_전).jpg
보수 전 소록도갱생원 신사

식민지 당국 또한 광복 후 신사와 신사에 모신 신체(神體)가 조선인의 손으로 파괴될 줄 짐작하고, 광복 당일 조선신궁의 궁사가 조선 전역의 신사에 승신식, 즉 신체에 깃든 신령을 되돌려보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파괴를 피하지 못했고, 평양신사 등 일부 시설은 승신식조차 하지 못한 것 같다.

6. 국내에 남아있는 신사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사 건물로는 1935년 건립된 소록도갱생원 신사가 있는데,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처음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적에 일본 신사를 문화재로 보호한다고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이나 다른 일부 지역에는 부속건물·반석·기단 등 신사의 흔적이 남았을 뿐인데,[14] 어디까지나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도이고 종교시설로서 활동하는 신사는커녕 건물조차 제대로 남은 신사도 없다. 대만이나 동남아시아에는 여럿 있는 토리이 하나까지 싹 사라졌다. 군산시 동국사대구시 관음사 등 일부 일본식 사찰 건물들은 '불교시설'인 덕에 아직도 현지에서 종교시설로서 건물과 형식을 보존했지만[15], 신사는 확연히 일본색이 강한 종교시설인 데다가 조선인 사이에는 광복 전부터 기저에 강한 반일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떠난 뒤에는 파괴를 면할 길이 없었다.[16]

7. 현대 한국인들의 신사에 대한 인식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 중에는 신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요즘엔 그런 시각이 상당히 감소해서 특별히 문제 되는 신사만[17] 아니면 일본 관광 나갈 때 일본인들 따라서 재미삼아 참배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특히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의 옥산궁[18], 사이타마현고마 신사[19], 교토야사카 신사[20]후시미이나리타이샤[21], 야마구치현의 기시즈 신사[22], 카가와현의 콘피라산 신사[23], 시가현 온조지의 신라선신당[24], 나가노현의 호타카 신사[25], 아오모리현후쿠이현신라신사, 사가현스에야마 신사[26] 같은 한국사와도 연관이 있는 신사들에는 일부 역덕들이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며, 일부 애니메이션에 나온 신사의 경우 성지순례 식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근래까지도 한국인이 신사에 찾아가면 공인이나 연예인의 경우에는 구설수에 오르며[27] 일부 애니메이션 팬들은 에마를 신사에 이타샤풍으로 남겨서 한국 인터넷에서 비판받은 사례도 있다.

8. 참배법 차별?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학생들을 강제로 신사참배 시킬 적에 박수 1번은 제대로, 2번째 박수는 오른손을 반 내려서, 왼손 손바닥에 오른손 손가락 끝을 대어 박수를 치게 함으로써 신사예법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항목의 구판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정말로 차별인지, 또는 차별이 아니지만 조선인들이 차별로 받아들인 것인지 의문스럽다.

일본 신사 예법에서는 오른손을 살짝 내려 오른손 중지의 끝이 왼손 중지의 첫 번째나 두 번째 마디쯤에 닿도록 하여 박수를 2번 침이 일반적이다. 신사의 신령 앞에서 박수치는 행위를 카시와데(拍手)라고 부른다. '카시와데'의 사전적인 의미는 당연히 두 손을 맞추어 치는 것이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크게는 신사본청에서부터 공영방송, 신사나 신토에 관련한 소규모 사이트까지 오른손을 내려서 두 번 친다고 설명함이 대부분이다. 신토 관계자에 따르면 왼손은 신령을, 오른손은 인간을 상징하기 때문에, 오른손을 내려서 박수 침은 신령에게 경의를 표하고 신령과 인간이 일체가 아님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신사참배에서 조선인 차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로 두 손의 높이를 똑같이 하여 첫 번째 박수를 치게 했을지 의문스럽다. 당시 조선에 있던 신토 관계자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달리 신사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 불경하게 무례를 저지른다.'고 개탄했다. 안 그래도 조선인들이 불경하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조선인에게 일부러 틀린 예법을 요구했다면 많이 이상하다. 더구나 오른손을 맞추지 않음은 신령과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고 경의를 표하기 위함인데, 하필 그런 부분을 수정하여 신령 앞에서 무례를 저지르게 했을 가능성은 낮다. 설령 조선인과 일본인의 예법을 다르게 했다 하더라도, 신토가들이 바라보기에 신령 앞에서 불경하지 않은 방법으로 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첫번째 박수를 손을 맞추어 치는 행위가 불경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신을 낮추는 행위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필요하고, 일본인들이 오른손을 낮추어 2번 치는 이유와 배치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질적인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二礼二拍一礼가 태평양전쟁 후 미군정 시대에 미국의 압력 하에 정립된 것이고 본래는 다른 예법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인들 중에서도 본래의 예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거나 미국 때문에 피치 못하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二礼二拍一礼가 오래된 일본의 전통을 다듬은 예법이라고 인식한다. 만약 외세 때문에 전통이 변해버렸다면 그런 부분에서 가장 일본에서 반발이 심해야 할, 지금은 미국의 눈치조차 볼 생각도 없이 줄기차게 총리와 천황이 참배 오기를 요구하는 야스쿠니 신사마저도 신사참배 중 박수는 2번 모두 오른손을 내려서 친다고 홈페이지에서 설명한다.

일본 위키의 카시와데 목록의 서술에 따르면 한 번은 두 손을 맞추어 한 번은 엇맞추어 치는 예법이 있다는 소리도 있다. 이런 설명은 일부러 손을 엇나가게 치는 예법 중에는 도중에 엇나가는 예법도 있다고 한다. 이는 '차별을 위한 예법'과 동일해보인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표준형 참배 예법'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조선에 소수의 예법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을 일본인은 과연 조선에서 어떻게 박수를 쳤을까? 조선인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려면 일본인들은 일괄적으로 조선인들과 다른 예법을 취했어야 자연스럽다.

신사에 가서 유심히 관찰해보면 일본인들도 저마다 예법이 미묘하게 다르고, 이런 불일치를 신토의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이 많다. 그렇다면 당대 조선인이 애초에 원치 않았던 신사참배를 일방적으로 배우고 실시하도록 강요받은 조선인들이, 별 생각 없이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이나 가정의 습관대로 참배하는 일본인과 비교되어 차별이라고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카시와데'라 하는 손을 내려서 박추 치는 종교적인 풍습은 일본의 고유한 것이라고 하니 더욱 이상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9. 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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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이걸 지으면서 당시 한국의 토속신들을 모신 서울 국사당이 자기들보다 높이 있다면서 트집을 잡았고, 결국 국사당은 원래 위치인 현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지금의 위치인 인왕산으로 이전됐다.[2]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도 보통학생에게 강요된 신사참배가 항일 운동의 주된 요인이었다.[3] 이후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동양의 조상 제사는 그들의 조상을 기리는 민속적인 관습일 뿐 종교적인 의미가 없고 우상숭배가 아니다"라는 칙서를 발표.[4] 감리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신사참배를 시작하였고, 1938년 장로회마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이 중 성결교는 일본 교단부터 순교자 6명을 내며 조선의 교단에도 저항을 독려하였으나 끝내 수용했다.[5] 침례회는 교단이 폐쇄되고 목사 32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는 개신교에서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유일 사례이다. 장로회는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나온 장로회 교인들이 고신(고려신학)이라는 분파로 나누어졌다. 예장고신은 광복 이후 신사참배를 회개하라고 주장했다고 오히려 쫓겨났다. 그리고 루터교는 일제강점기 후에 들어왔기에 신사참배 논쟁과는 무관하다.[6] 다만 이 설명은 어디까지나 국가신토에 해당하는 것이며, 가톨릭 신자의 전후 신사참배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위에서 링크한 가고시마 교구장의 논편을 참고할 것.[7] 링크1 링크2[8] 극단적으로 말해서, 만약 조선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유교 문화 바깥에 있는 나라를 침략하고 조상제사를 강요했어도 피해국 그리스도교에서는 비슷한 논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 경우 조선 그리스도교에서는 조상제사가 자국 문화와 그리스도교가 공존할 수 있냐는 '관용'의 문제가 되지만, 피해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억압'의 문제가 된다. 같지는 않지만 역사상 비슷한 사례로, 만주국이 국민 단결 목적으로 공자숭배를 의무화하자 교황 비오 11세가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한 역사가 있다.[9] 심지어 평양신사는 광복 당일 방화로 파괴되었다.[10] 이외에도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옥구공원에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도리이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은 상태.[11] 서양으로 치면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러시아 제국의 주도로 세워진 정교회 성당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경우가 많은(파괴된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간에 똑같이 야훼를 섬기는 기독교니까.[12]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절에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로부터 전파된 칼뱅파 개신교는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도 인도네시아 소수민족들(화교 포함) 사이에서 나름 강세를 보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신토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더더욱 처절하고 완벽하게 몰락한 셈이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한반도에 잔류했던 극소수 일본인(주로 한국인과 결혼한 이들이나 광복 전까지 일본인 정체성을 가졌던 한일혼혈)들 또한 신토 신앙은커녕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도 급급했기 때문에 자연히 신토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13]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이란 뜻이다. 일본 신토에서는 신령의 본체가 따로 있고, 각 신사에서 모시는 신체나 부적 등에 그 영위의 일부가 강림한다고 여긴다. 승신식은 강림한 영위를 본체로 돌려보내는 의례이다.[14] 이외에도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옥구공원에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도리이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다.[15] 서양의 경우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러시아 제국의 주도로 세워진 정교회 성당들을 파괴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절에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로부터 전파된 칼뱅파 개신교는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도 인도네시아 소수민족들(화교 포함) 사이에서 나름 강세를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신토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더더욱 처절하고 완벽하게 몰락한 것이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한반도에 잔류했던 극소수 일본인(주로 한국인과 결혼한 이들이나 광복 전까지 일본인 정체성을 가졌던 한일혼혈)들 또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도 급급했기 때문에, 자연히 신토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다.[17] 야스쿠니 신사처럼 A급 전범들을 모아둔 신사 혹은 한국에서 반감이 큰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을 호국 위인으로써 모시는 신사.[18] 임진왜란 때에 선에서 끌려온 도공의 후손들이 단군을 모시려고 지었다는 신사인데, 신사의 마쓰리에서 불리는 "오나리 오나리쇼셔" 하는 말로 시작하는 축가가 한국의 청구영언에 실린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시조와 거의 닮아 있어서 주목되기도 했다.[19]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고구려 왕족의 후손으로 일본에 귀화했다는 현무약광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20] 고구려에서 사신으로 온 이리노사주라는 인물이 고구려로부터 모셔온 신격인 우두천왕을 모실 사당을 지었다는 데에서 기원한다.[21] 해당 신사의 기원이 된 하타씨가 신라계 도래인으로 알려져 있다.[22] 임성태자를 모신 신사다.[23] 임성태자의 조각상(좌상과 기마상)과 투구를 소장했다.[24] 천태종 승려 엔닌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신라 남해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앞에 나타나 풍랑을 가라앉히고 귀국길의 안전을 약속했다는 '신라명신'이라는 신령을 모신 사당. 한국에는 신라명신이 장보고나 그의 휘하 신라인 해상 세력가를 신격화했다고 보고 주목되었는데, 신라명신 앞에서 관례를 올려 이름에 신라사부로가 들어간 미나모토노 요시미츠가 엉뚱하게도 신라계로 몰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25]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백강 전투에 참전한 왜군을 기리는 곳이며, 당시 왜군 장수로서 참전했던 후장군 아즈미노 히라후노 무라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26]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다.[27] S.E.S.가 일본활동 당시 참배가 아니라 그냥 신사를 구경한 것조차도 크게 문제가 되었다. 고마 신사의 경우 주일대사가 관례적으로 방문하기는 한다. 아직까지 그러한 예는 없지만 만약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신사 참배를 했다가는 한국에서 사실상 사회적 매장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심지어 재일(在日) 미국인들조차도 외교관 등 공인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