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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콘피라산(金比羅山) 신사[1]에 소장되어 있는 임성태자의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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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백제의 왕족으로 전하는 인물. 일본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으나, 《일본서기》 등의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아 실존 인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2. 일본 전승
일본 야마구치현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지역은 한반도와 가까워 백제계와 신라계 도래인에 관한 전승이 여럿 남아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임성태자의 전승이다. 백제 성왕의 3남인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야마구치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오우치(大内)씨는 그의 후예라는 것이다.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아들로 위덕왕이 되는 부여창과 혜왕이 되는 부여계 두 명의 아들만 나타나지 3남에 관한 기사는 없다. 일본의 사서에도 임성태자라는 인물이 건너왔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 고위층이 당시 일본의 수도권인 기나이 지방에 정착한 것과 달리, 임성태자만 유독 야마구치에 정착한 것도 이례적이다. 조선의 학자인 서거정은 오우치씨에 대해 “일찍이 널리 전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아도 그 출처를 알 길이 없다”면서,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을 거론했다.
일본의 대내전(大內殿)[2]은 그 선대가 우리나라로부터 나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과 다르다 한다. 내가 일찍이 널리 전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아도 그 출처를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라의 《수이전(殊異傳)》에 이르기를, “동해 물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라 하고 아내는 세오(細烏)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해변에서 수초를 따다가 홀연히 표류하여 일본 나라 조그만 섬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다가 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자 그를 세워 왕비로 삼았다...(중략)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의 임금이 된 자는 이 뿐이나 다만 그 말의 시비는 알 수 없다. 대내의 선조란 혹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서거정,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
서거정,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
최근 한일 학자들도 임성태자를 가공의 인물로 보고 있다. 타타라(多々良)라는 성이 《신찬성씨록》에도 보이는 오래된 성씨임은 사실이지만 이 전승은 남북조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성태자 전승은 오우치씨가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우치씨가 스스로를 백제왕손이라고 하면서도 백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냈다거나, 중앙에 진출했을 때 이미 백제 왕의 후손으로 공인되어 있던 백제왕씨들과 접촉한 흔적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성태자 이야기는 오우치씨의 시조 신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임성태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89년의 《녹원원서국하향기(鹿苑院西國下向記)》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오우치씨의 시조인 임성태자는 백제 제명왕의 3남으로 쇼토쿠 태자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는 쇼토쿠 태자를 만나 그에게 타타라라는 성씨를 받아 야마구치 지방에 살다가 죽었으며, 백제에서는 여씨였다. 사후 임성태자는 타타라미야라는 신사에 묘견대보살, 쇼토쿠 태자와 함께 신으로 모셔졌다. 그가 가져온 불상들은 각지의 사찰에 모셨다고 한다.[3]
백제 성왕의 다른 이름인 성명왕을 제명왕으로 표기한 것, 부여씨 대신 여씨라고 한 것 말고는 임성태자 전승이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단종 때 조선에 보낸 글에서는 이 전승이 크게 달라진다. 임성태자는 쇼토쿠 태자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불교 수용 여부를 놓고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씨를 받아 야마구치에 정착한 것 역시 반대파를 물리친 공적의 보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사이 시조 신화가 수정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기록을 잃어버린 탓에 구전으로 전해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오우치씨가 밝히는 시조 신화는 계속해서 내용이 바뀐다. 여경-여창-여장-임성이라는 계보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에 이미 신령이 예언했다고도 했다. 일본에 건너간 동기는 다시 수정되어 쇼토쿠 태자를 만나기 위함이라고 했다. 임성태자 이야기는 재생산을 거듭하면서 불교적인 색채가 더욱 가미되어 묘현신앙[4]의 교조와도 같은 인물이 된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를 도와 일본의 직제를 고쳐 12계 관위와 의복을 정하게 하기도 하고, 천황상과 태자상 등의 조각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임성태자는 야마구치의 지명에 얽힌 전설에 등장하기도 하고, 불교 사찰과 신사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성태자가 처음 상륙한 곳에 대한 전설도 다양하다. 규슈에 도착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에는 임성태자가 이곳에 도착해 묘현신앙을 전했다는 전설이 있다.
서일본의 다이묘였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사신을 보낸 예가 많다. 오우치 가문의 당주가 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는 자신이 백제 왕실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받으려고 시도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오우치씨가 백제 왕가의 후손이라는 점은 인정했고 우호적으로 교류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종 1년(1399)에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사자를 보내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그가 '충청도에 있는 조상님들의 영지를 주세요'와 '《팔만대장경》판도 덤으로 같이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여서 조선 대신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5] 땅 300결(結)을 주자고 구체적인 논의까지 있었으나 결국 무산됐다. 오우치씨의 계보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밝힐 수가 없었다. 정종은 오우치 요시히로를 잠정적으로 백제 온조왕 고씨의 후손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단종 때에도 오우치 노리히로(大內敎弘)가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는데, 조선은 정종 때 주었던 글을 그대로 베껴서 무역을 허가하는 통신부(通信符)라는 인장과 함께 주었다.[6] 이로써 오우치씨는 가계의 기원을 밝히는 동시에 조선과의 무역 특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휘원(輝元)이란 사람은 경서(京西)의 대수(大帥)로서 임진년 전역에 원수가 되었던 자다. 안예 중납언(安藝中納言)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모리중납언(毛利中納言)이라 칭하기도 한다. 당초에 백제가 망하자 임정태자(臨政太子)가 배를 타고 왜국에 들어가 대내 좌경대부(大內左京大夫)가 되어, 주방주(周防州)에 도읍을 정했다. 그 자손이 47대를 내려오며 대대로 왜의 관리가 되어 그 토지를 이어받았는데, 휘원의 선대는 바로 그 종자(從者)였다.
강항, 《간양록(看羊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이름이 비슷한 '임정태자(臨政太子)’라는 인물이 나온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대부가 되어 '오우치도노'라 불리며 그 후손이 47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만 실제 오우치씨는 31대인 오우치 요시타카때 멸망했다.[7] 종손 가문은 31대에서 전멸했지만, 분가의 자손들이 토요타씨로 성을 바꿔서 살아남았다.[8] 강항, 《간양록(看羊錄)》#
당시 다이묘 가문들은 일본의 주요 명문가 '우지'(씨)를 참칭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오우치 가문이 다른 다이묘 가문들과 같이 겐지, 헤이케, 후지와라시 기타 등의 흔한 '우지'(氏)를 택하지 않고, 드물게 백제계 조상인 '타타라'(多々良)를 택한 것은 경제,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대륙과의 감합무역에서 오우치 가문은 아시카가 쇼군가 및 호소카와 칸레이(관령) 가문과 함께 활동했지만, 쇼군가인 아시카가와 막부 관료 가계인 호소카와에 비해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름이 부족했다. 따라서 한반도와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임을 자칭했던 것이다.
실제 일본의 유력 영주들은 오우치 가문에 대해 본국 사람이 아닌 고려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우치씨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은 후손들은 선조가 백제 출신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던 것이다.
○抑先祖ハ百濟國ノ始祖都慕大王ニ始マリ其第拾參代威德王第三王子琳聖太子推古天皇之十九年日本ニ移リ山陽八箇國ヲ賜ハリ子孫相嗣ギ(…)
높으신 선조는 백제국의 시조 도모대왕에서 시작하여 그 13대 위덕왕 제3왕자 임성태자(이다.)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에 옮겨 와 산양 8개 나라를 주어 자손이 서로 대물림하고(…)
《오우치-타타라씨 족보》
족보에 따르면 이름은 임성태자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大內)씨와 토요타(豊田)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높으신 선조는 백제국의 시조 도모대왕에서 시작하여 그 13대 위덕왕 제3왕자 임성태자(이다.)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에 옮겨 와 산양 8개 나라를 주어 자손이 서로 대물림하고(…)
《오우치-타타라씨 족보》
3. 참고 문헌
- 이상남(2012), 모리박물관 소장 한국 유물을 통해 본 초기 조선왕조의 물질문화교류: 오우치씨와 모리씨를 중심으로, 미술사논단 제35호
- 노성환(2015), 백제 임성태자의 일본이주전설에 관한 연구, 일어일문학 제67집
4. 여담
- 2009년 KBS 역사스페셜에서 임성태자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었다.
- 2010년 3월 30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임성태자의 45대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 公夫)씨 부부를 익산명예흥보대사로 임명하였다. 2009년에도 익산에 온 적이 있다. 위의 역사스페셜 영상도 참고. #
- 사료가 부족한 것과 별개로 일단 사극의 소재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는 인물이지만,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임성태자가 주인공은커녕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조차 단 한 편도 없다.
[1] 또한 이곳에는 임성태자의 투구와 말타는 상도 같이 소장되어 있다.[2] 조선에서는 오우치씨를 주로 대내전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오우치도노가 되며, ‘도노’는 높여 부르는 말이다.[3] 타타라는 고대 일본 일본의 제철기술(타타라 제철)에서 쓰인 풀무를 말하기 때문에 타타라라는 지명이나 성씨가 일본에 제철기술을 전해주었을 도래인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4] 인도의 보살이 중국 도교의 북극성, 북두칠성 신앙과 습합된 묘현보살을 모시는 신앙. 우리나라에는 칠성신앙 등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5] 《팔만대장경》판은 훗날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오우치 요시히로에게 했듯이 영인본을 대신 넘겨주었다.[6] 이 통신부는 현존 유일의 조일무역 감합 인장이다. 야마구치현 호후시의 모리박물관(毛利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7] 32대 당주인 오우치 요시나가는 오토모 가문에서 들여온 양자로 파양되었다가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당주 요시타카를 살해한 후 당주로 앉힌 인물이었다.[8] 토요타 가문의 족보에도 백제 부여씨 왕가 족보가 표시되어 있다. 링크 연결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