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가문의 가몬인 오우치 마름모([ruby(大内菱,ruby=おおうちひし)]).
1. 개요
大内[1] 일본의 성씨 중 하나.중세 일본에서는 주고쿠 지방에서 자리잡고 세력을 떨친 다이쇼 가문이였다. 센고쿠 시대에도 독자세력화해서 패권을 다퉜으나 모리 모토나리에게 본가가 멸망했다. 다만 방계는 이어져오고 있다.
2. 내력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 중의 하나이다.오우치씨가 자리잡은 주고쿠 지방이 한반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많이 나온다. 조선과 교류를 시도했던 다른 다이묘들보다 뚜렷하게 기록이 많으며 조선 전기~중기 내내 오우치 가문과의 교류 기록이라든지 오우치에 대해 의논하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수백건에 달한다. 외교적으로는 대내전(大內殿)이라는 표현[2]을 썼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대내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임성태자 문서도 참조. 다만 오우치(大内)라는 성씨를 쓰기 이전 본래 성씨는 多々良(타타라)라는 가야계 성씨였다. 多々良라는 성씨는 칭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성씨였고 즉 임성태자의 후손을 칭하기 이전 한반도 도래인으로 인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무역을 하면서 백제의 후손이라 칭하고, 조선 초기에 친조선 정책을 취했다. 조선에서도 오우치씨를 백제의 후예로 인정하고, 다이묘들 가운데서 특히 우대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종 1년(1399)에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며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조상들이 묻혀있는 옛 백제의 땅을 봉토로 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세종 시기 300결[3]을 주는 것을 잠깐 진지하게 논의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였는지 대신들의 반대로 흐지부지 되었다. 단종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몇 번 거절당해서인지 이때는 "계보만 적어주시면 영지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로 일종의 봉건체제하에 있었던 당대의 일본인과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당시 조선인의 인식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팔만대장경》을 달라고도 했는데 당시 여전히 불교가 유행하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대장경》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잘하면 득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조정에서는 《대장경》의 가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 번 주면 자꾸 달라고 할 것이므로 그냥 주지 말자고 해서 몇 차례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오우치씨가 수차례 《대장경》을 청구하자 세종이 그럼 대장경판이라도 넘겨줄까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하기도 했다.
물론 일방적으로 달라고만 요구한건 아니라, 몇 차례 선물 러쉬를 하였는데 그 선물들 중에선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선물 받은 코끼리도 있었다. 다만 코끼리라는 것이 유지비가 여간 많이 드는게 아닌데다 코끼리가 뭘 먹는지 자세히 듣지 못해 값비싼 콩만을 지급하였는데, 유교사상을 중시하여 세금을 별로 안걷는 조선 입장에선 여간 관리하기 골치 아픈게 아니었던 모양. 그래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오우치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주고쿠와 규슈 북부를 제패[4]한 강력한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존속했지만, 센고쿠 시대 때 스에 하루카타의 쿠데타로 사실상 멸망하고, 허울만 남은 오우치 가문도 모리 모토나리에게 본가가 멸망하고 만다.[5]
다만 방계가 이어져 다이묘 지위는 상실했지만 가문의 혈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 실존 인물
- 오우치 요시오키 - 스오 오우치 15대 당주.
- 오우치 요시타카 - 스오 오우치 16대 당주.
- 오우치 요시나가 - 스오 오우치 17대 당주이자 마지막 당주.
- 오우치 기미오 - 임성태자 45대손. 일본의 인쇄소 디자이너로 일하는 일반인이다. 이전부터 내려오던 족보와 학교에서 배우던 고대사를 통해 백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충청남도 부여군에 방문하여 지역 발전에 써달라며 그간 모은 재산 일부를 기부한 것을 시작[6]으로 매년 백제 문화제 및 백제 관련 행사에 참여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의 원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1400년만에 조상의 땅을 밟게 된 것이 매우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익산시는 감사의 의미로 오우치 기미오를 명예홍보대사로 임명하였고 2017년 그의 아내 오우치 다카코가 지병으로 별세하자 익산시에서 조문단을 보내어 위로를 표하였다. 오우치 기미오의 적극적인 행보는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 종종 소개되면서 한국에서도 오우치 가문의 역사, 업적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오우치 히사시(大內久)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피해자 중 한 명.
[1] 이 한자에는 '대궐', '궁전'이라는 뜻도 있다. 교토의 황궁을 대내리(大内裏)라고도 부른 것이 그 예.[2] '전'의 일본식 발음은 '도노'였다. 다른 다이묘들도 '00전'이라는 표현을 썼다.[3] 세종조에 고친 '결'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90만평, 고려말 기준으로는 110~120만평쯤 된다. 조선 건국 이후로는 1결을 1헥타르, 또는 3천평 정도로 계산하면 얼추 맞다.[4] 주코쿠의 스오, 나가토, 아키, 이와미와 규슈의 지쿠젠, 부젠 6개 국을 장악한 서일본 최대의 다이묘 세력이었다. 한 때 수도 교토로 상경하여 무로마치 쇼군을 대리하는 칸레이 자리에 오른 적도 있었다.[5] 재미있는 것은 모리씨의 조상은 임성태자를 따라온 종자였다는 설이 있다(《간양록》). 즉 모리씨의 조상은 원래 오우치씨의 조상을 주군으로 섬겼다는 것.전형적인 하극상 루트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모리씨의 선조는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 공신 중 하나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 참모였던 오오에노 히로모토였다. 오오에씨는 도래인 가계가 아니었다.[6] 이 때 일본어로 기부 의사를 밝혔는데 오우치 가문을 몰랐던 구청 직원들이 부여와 연고 없는 외국인이 지역발전을 위해 기부를 한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