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몬([ruby(家紋, ruby=かもん)], 카몬[1])은 일본에서 어떤 가문이나 혈통, 그 밖의 지위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발달한 문장이다. 줄여서 몬(紋)이라고도 한다.2. 특징
서양의 문장학에서 투구장식으로 쓰인 크레스트와 비슷하나, 일본의 가몬은 자연 사물이나 불교적 상징을 토대로 극도로 추상화, 심볼화(symbolized)되어 있으며 대칭성과 명료성의 미학을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2]서양에서는 각 가문의 소속 인원들의 직책 등에 따라서 코트 오브 암즈(Coat of Arms)[3]의 구성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으나, 일본의 가몬은 집안 자체를 나타내므로 개인을 나타내는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 다르다. 영어로 번역할 경우에도 Japanese Coat of Arms가 아니라 Japanese Crest라고 한다.
또한 일본의 경우 한 집안에서 한 가지 가몬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서로 가몬을 선물하거나 하사받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몬을 병용하였고, 다테 가문만 해도 유명한 참새 가몬부터 구요몬, 눈을 형상화한 가몬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모리 모토나리는 신사 참배, 공가 알현 등 상황에 따라 다른 가몬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문장인 대표문과 그 외에 사용되는 체문, 이문, 별문 등 기타 문장 등의 구분은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 그림 |
노보리(幟)라고 해서 일본 중세에 병사들이 등 뒤에 꽂아넣은 깃발에 새겨넣기도 했다. 가몬을 새긴 노보리는 군기로 사용했다.
3. 역사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중앙집권적인 성향이 강했던 한반도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 열도는 근현대 이전까지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강했고,[4] 각 지방을 그곳의 유력 가문들이 지배했다.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구성되는 한반도와 달리, 일본 열도에선 가문마다 각 지역을 차지하여 세금도 걷고 사병도 보유했다. 이 후 전쟁이 빈번해지자 사무라이들에게 있어 자신을 홍보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특히 전국시대에 이르자 피아식별의 중요성이 커지며 가몬의 사용빈도는 급격히 늘었다.에도 시대에 이르면 전쟁이 줄어들면서 가몬은 의장의 성격만 남는다. 특히 사족이 아닌 상민이나 기생, 가수 등이 홍보를 위해 가몬을 만들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지나면서 가몬은 봉건적인 잔재로 지목받았으나, 상업적인 의미에선 오히려 사용이 더 늘어났으며 현재까지도 회사나 가게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전문 업자에게 의뢰해서 가몬을 만들어서 로고로 사용하는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4. 여러 가몬
국화문장 일본 황실 가몬 | 고삐(재갈, 열십자)문장 시마즈 가몬 |
접시꽃문장 도쿠가와 가몬 | 떨어진 구요[6] 호소카와 가몬 |
타케다 마름모 타케다 가몬 | 아시카가 두 개 줄 아시카가 가몬 |
조릿대와 용담 미나모토 가몬 | 호랑나비 타이라 가몬 |
일본 황실의 가몬은 현재 일본 여권에서 볼 수 있다.[7] |
천리교의 교몬 | 금광교의 교몬 |
일본 천리교에서 사용하는 교몬은 원래 천리교의 창시자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의 시가인 나카야마(中山) 집안의 가몬이었다. 창교주 시가의 가몬을 교단의 상징으로 활용했고, 지금은 사실상 천리교의 상징이 되었다. 작은 집안의 가몬이 종교적 상징이 된 흔치 않은 경우이다. 이 가몬은 매화를 소재로 삼았다.
야마구치구미 | 스미요시카이 |
이나가와카이 | 토우세이카이 |
야쿠자 조직들도 거창한 가몬 하나씩 만들어서 조직의 상징으로 삼았다.
5. 한국의 가장(家章)과 종문에의 영향
한국에도 가몬과 비슷하게 각 종친회를 상징하는 문양인 종문(宗紋)이 있지만 일본의 가몬을 참고하여 20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근본 있는 전통이라고 보기는 힘들다.[11] 이어령의 "축소 지향의 일본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전통적인 유교국이었던 한국에서는 일본 이상으로 가계를 존중하는 문화였었는데도 가문(家紋)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자기 기억에 있는 바로 윗대의 선조만 제사 지내지만, 한국에서는 몇 대 전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도 한국이 만든 것은 문장(紋章)이 아니라 몇 십 대 전 선조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족보(族譜)였다.…
가계를 관념적 시스템으로 나타낸 것이 족보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유형학 분류표처럼 도식화된 족보는 호적처럼 등록되고 보존되어 서가에 꽂을 수 있는 서책이 된다. 관념적 문자 존중의 문화적 산물이다. 선비 문화란 모두 그런 것이다.
그것에 비해 문장은 가계의 역사성과 그 집단을 감각적인 표상의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도형성이다. 문장은 족보처럼 서가에 보존되는 서적의 문자가 아니라 깃발처럼 많은 사람 눈에 보이는 전시적 상징물이다.
족보 문화에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본관을 묻고 이름의 항렬자를 물어 그 사람의 가계와 혈통을 계보적으로 측정할 수 있으나, 가문 문화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시간적이 아니라 공간적이다. 일본인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을 양자로 들여오기도 하고, 또 한집안이라도 성을 바꾸는 일이 많다. 형제라도 제각기 성이 다른 예도 있다. 일본 여자는 시집가면 남편의 성을 따르나, 자기 집 문장만은 바꾸지 않는다.
#에서 재인용
가계를 관념적 시스템으로 나타낸 것이 족보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유형학 분류표처럼 도식화된 족보는 호적처럼 등록되고 보존되어 서가에 꽂을 수 있는 서책이 된다. 관념적 문자 존중의 문화적 산물이다. 선비 문화란 모두 그런 것이다.
그것에 비해 문장은 가계의 역사성과 그 집단을 감각적인 표상의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도형성이다. 문장은 족보처럼 서가에 보존되는 서적의 문자가 아니라 깃발처럼 많은 사람 눈에 보이는 전시적 상징물이다.
족보 문화에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본관을 묻고 이름의 항렬자를 물어 그 사람의 가계와 혈통을 계보적으로 측정할 수 있으나, 가문 문화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시간적이 아니라 공간적이다. 일본인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을 양자로 들여오기도 하고, 또 한집안이라도 성을 바꾸는 일이 많다. 형제라도 제각기 성이 다른 예도 있다. 일본 여자는 시집가면 남편의 성을 따르나, 자기 집 문장만은 바꾸지 않는다.
#에서 재인용
다만 집안을 상징하는 문양 자체는 존재했다. 집안을 상징하는 문장을 새긴 도장인 가인(家印)을 사용하였고 떡살이나 다식틀에도 각 집안마다 고유한 문양이 정해져 있었다. 떡살 문양을 정하거나 바꿀 때에는 문중의 허락이 필요했을 만큼 가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떡살 자체에 택호와 제작 날짜를 새겨 대대로 물려줬고, 절대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떡이나 다식만 봐도 어느 집안에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집권제가 강력하게 작동했던 시대였던 만큼 사사로이 가문의 문양을 드러내며 세를 과시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에 손님들이 모이는 잔칫상에 떡을 올리는 식으로 은근히 가세를 자랑했던 것이다.[12]
현대의 종문들은 이런 전통 문양을 참고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일본 가몬을 모방했다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정확히는 집안의 문양을 드러내는 행위를 따라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서양의 엠블렘과 일본의 가몬을 아울러 참고했다고 볼 수 있다. 가몬과 흡사해 보이는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사용된 문양이기 때문이다.
해주 최씨 종문처럼 서양식 엠블렘을 참고하여 방패가 들어간 문양도 있다.
한국은 조선 후기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을 만든 것이 종문을 첫 도입한 사례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여러 부문에서 앞서 있던 일본 제국을 참고하였고, 일본 황실의 국화문장을 따라하여 전주 이씨의 상징 자두꽃(오얏꽃)을 도안으로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일본 복식을 입을 때 붙일 가몬을 만들기도 했으며 특정인이 의뢰하여 만든 가몬들이 매일신보에서 1916년 9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연재되기도 했다.# 회사문장을 의뢰한 경우도 있었는데, 당대에는 가몬을 쓸모있는 수입문화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1] 표준 외래어 표기가 아닌 통용 표기로는 '카몬'이라고도 쓴다.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가문'이기 때문에, '집안'이란 뜻으로 쓰이는 가문(家門)과 구별하고자 일본식 독음을 쓴다. 한자는 '가문(家門)의 문장(紋章)'의 준말이다. 여담으로 일본 한자음으로도 둘의 발음이 같고, 일반적인 의미의 '가문'을 동국정운식으로 쓰면 '가몬'이 된다.[2] Stone Bridge Press "Family Crests of Japan" p.36.[3] 영국 왕실에서 어떤 건 붙일 수 있고 하는 둥의 글을 영국 왕실 인원들 문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웨일스 공 윌리엄이나 엘리자베스 2세 등에서.[4] 근대시기에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유명하다.[5] 보통 'ㄱ'자 모양을 '가네'로, 'ㅅ'자 모양을 '야마'로 부른다.[6] 통상적인 구요보다 8요가 해에서 좀 더 떨어져 있다. 비슷한 다른 구요 계통 문장과 구분하기 위한 건데, 자세한 이유는 호소카와 타다오키 문서에 있다.[7] 진짜 황실에서 쓰는 가몬과는 생김새가 미묘하게 다른데, 황실에서 쓰는 것은 꽃잎 16장짜리 국화가 2개 겹쳐져 있는 디자인인 반면 일본 여권에 새겨진 것은 국화가 한 겹만 그려져 있다.[8] 五七の桐. 오동나무 3그루에 핀 꽃이 5-7-5송이란 뜻이다.[9] 아시카가 다카우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 식으로 고시치노키리 가몬을 덴노에게서 하사받아 사용했다. 에도 막부의 시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쇼군에서 물러나 오고쇼가 된 이후부터 개인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0] 대표적인 사례로 원래 도요토미의 가신 출신이었던 토사 야마우치가는 초대 번주인 카즈토요가 히데요시에게서 받은 가몬을 기반으로 디자인한 오동나무 가몬을 자신들의 가몬으로 사용했다.[11] 종문이라는 명칭부터가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이다.[12] 지금도 하나의 중국을 강력하게 지향하고 지방자치를 통제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지방정부의 자체적인 휘장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