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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21:47:57

야마구치구미

야마구치구미
山口組 | やまぐちぐみ | 산구조
파일:야마구치구미.svg
<colbgcolor=#000><colcolor=#fff> 결성 <colbgcolor=#ffffff,#1f2023>1915년
조장 츠카사 시노부[1] (제6대)
본부 효고현 고베시 나다구 시노하라혼마치 4-3-1
조직원 약 7100명[2]
우호 조직 이나가와카이
소아이카이
마츠바카이
교세이카이
아이즈코테츠카이 등
적대 조직 고베야마구치구미
키즈나카이
이케다구미
타쿠미구미

1. 개요2. 역사
2.1. 초대 야마구치 하루키치 시대2.2. 2대 야마구치 노보루 시대2.3. 3대 다오카 카즈오 시대2.4. 4대 타케나카 마사히사 시대2.5.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시대2.6. 6대 츠카사 시노부 시대
3. 주요 인물4. 일화5. 대중매체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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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최대 규모의 지정폭력단.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의 하나. 가고시마현, 야마가타현, 히로시마현, 오키나와현을 제외한 43개의 도도부현에 계열조직을 두고 있다. 본부는 효고현 고베시에 위치하였다. 본거지가 고베인 관계로 과거 고베 대지진 당시 조직원을 동원해 재난 구호 활동을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전후 등장한 야쿠자의 교과서 격인 조직으로 오늘날 야쿠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축해놓았으며 규모나 수입이 가장 큰 조직이다. 일본 전체의 야쿠자 조직을 통틀어봐도 2위와 3위 규모의 조직을 합쳐야 야마구치구미만큼의 조직원 수가 나올 정도가 된다. 일본 전국 3분의 2 가량의 현에 산하조직들이 위치해있는지라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자금 규모로는 세계 범죄조직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한 해 수익 추정 66억 달러(한화 약 8.5조)포춘지 기사. 다만 중남미는 군 특수부대으로 회유해 집어삼키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 전투력은 세계의 손꼽히는 범죄조직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다. 이는 중남미에 비해 일본의 국가 안정성이 월등히 높기에 그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어서[3] 그렇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기본적으로 이윤 창출이 목적인 범죄조직 입장에서는 무분별한 폭력과 정부와의 마찰로 기껏 벌어놓은 돈을 소모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범죄조직은 어차피 공권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혀봤자 이길 수도 없는 데다가, 계속 손해만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야쿠자 같은 범죄 신디케이트는 마약 카르텔형 범죄조직과 다르게 한 국가의 시스템에 기생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 데에만 집중하고, 필요시에만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폭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야쿠자들이 원하는 것도 일본 정복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과 권력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야마구치구미의 수령은 6대인 츠카사 시노부(司忍)이다.[4]

21세기 들어 야쿠자 전반의 인원 부족, 수입 감소로 인한 산하 조직의 상납금 감소, 정부의 압박 등으로 촉발된 갈등이 커져 2015년 8월에 산하 13개 조직이 파벌 중 하나인 야마켄구미(山健組)를 이끌던 이노우에 구니오(井上邦雄)를 중심으로 '고베야마구치구미'로 분열되면서 조직원수가 1만 4천여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항쟁 중이다. 한국어에서 '항쟁'은 6월 항쟁에서 볼 수 있듯 지배자나 외세에 대해 벌이는 피지배자, 민중의 저항을 가리키는 단어인 반면, 일본어에서는 야쿠자 조직끼리 대규모 충돌을 약간 거창하게 '항쟁'이라고 한다.

2021년경 기준으로 조직원은 약 8,500 명으로 정규 조직원 약 4,000명, 비정규 조직원 약 4,500명으로 과거에 비해 많이 감소하였다.

사실 이정도로 사이즈가 큰 조직은 카이(会)라고 불리지만 이들은 여전히 구미(組, ぐみ)로 불리고 있다.[5]

2. 역사

2.1. 초대 야마구치 하루키치 시대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산구조[6])는 1915년 고베의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구미쵸(두목)인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가 50명의 조직원들을 모아 오오시마구미 산하 조직으로 결성하였다. 이후 인부파견업체로 시작해서 공연 흥행 사업도 하면서 조직의 기틀을 다져갔다.

2.2. 2대 야마구치 노보루 시대

1925년 2대 두목에 오른 초대의 아들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는 1932년 말에 발발한 타이쇼 운수(大正運輸) 쟁의 같은 노사분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조직원들이 다투던 노조원들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만하게 노사쟁의를 해결하여[7] 야마구치구미에 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 고베중앙도매시장 개설 당시 이권 문제로 상위 조직이던 오오시마구미와 대립해 격한 항쟁을 치른 후 독점권을 손에 쥐고 1932년 독립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두목이었던 야마구치 노보루가 요시모토 흥업 사건과 관련된 항쟁 중 칼에 찔려 1942년 사망하고 결국 야마구치구미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목 부재라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된다.

2.3. 3대 다오카 카즈오 시대

사실상 두목 부재로 인해 서서히 말라죽어가던 야마구치구미를 다시 부흥으로 이끄는데는 3대 두목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의 역할이 컸다. 전후 고전적인 바쿠토 체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야쿠자 체제를 구축한 야마구치구미는 미군정하의 단 5년 사이에 오사카 지역 대부분을 차지할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이 성장을 이룩해낸것이 바로 1946년 3대 두목에 취임한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였다.

다오카 카즈오는 1913년 시코쿠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이후 14살의 나이에 코베 가와사키 조선소에 입사하였으나 몸이 불편한 동료를 괴롭히던 현장주임을 두들겨 패고 2년 만에 퇴사한다. 그뒤 백수생활을 하던 다오카는 고등소학교 동창이자 제2대 구미쵸인 야마구치 노보루의 동생이던 히데오가 있던 야마구치구미에 입단한 이후 조직의 핵심 전투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커다란 덩치로 싸움에서 상대의 눈을 찌르는 수법으로 이름을 날려 조직에서는 다오카에게 곰이라는 별명을 지어 붙여줄 정도로 야마구치구미내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오카는 극장 경비를 서던 중 자신의 오야붕을 욕하는 극장 주인의 태도에 열받아 극장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위에서 언급된 타이쇼 운수 쟁의때도 보복금지의 방침을 어기고 단신으로 일본도로 노조 본부를 습격하는 등 여러 번의 사고를 쳤지만 그때마다 관대한 처분을 받았는데 어쩌면 야마구치 노보루가 다오카에게서 야쿠자로서의 잠재력을 보고 그를 높이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6년에 반대파 단원을 찔러 죽인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전쟁 기간 중 절반을 옥중에서 보냈는데, 덕분에 징병과 당시 야마구치 구미가 겪던 여러 거친 항쟁들을 피할 수 있었다. 1943년 석방된 시점에서는 당시 두목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사망한데다가 제국 경찰의 엄격한 단속으로 규모가 크게 줄어있던 야마구치 구미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 잔인한 명성으로 33명 규모의 작은 조직의 구미쵸가 된 다오카 카즈오는 이전의 야쿠자들과는 다르게 기존 사업에 기업체제를 적용해 세력확장을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말 코베 지역에서 가장 큰 바쿠토계 조직인 혼다카이와 전략동맹을 맺는다. 혼다카이는 한 때 야마구치구미와 함께 칸사이를 양분했던 조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마찬가지로 오오시마구미로부터 독립한 조직이기도 하며, 당시만 해도 본거지인 코베에서는 야마구치구미보다도 규모가 컸었다. 특히 혼다카이는 오오시마구미에서 1940년 독립한 이래 고베 창고업과 항만하역업 등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보니 이 문제로 야마구치구미와 끊임없이 경쟁했고 제2차히로시마 항쟁 당시 야마무라구미를 지원하며 대리전쟁을 치르기도했다. 이후 제1차 정상작전 당시 전략 해산 하였다가 대일본평화회로 재건 이후 폭대법에 의해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되었었으나 1997년 해산을 기점으로 지정해제되었다.

혼다카이와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음을 계기로 야마구치구미는 한신 지역에 영향력을 넓힌 이래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있던 한국계 구렌타이 메이유카이 또한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로써 사실상 전후 얼마 안 가 오사카지역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다오카는 기존의 항만하역, 창고업과 마약판매[8] 경마 경륜 야구도박 도박장개설 등의 바쿠토 사업을 넘어 조직의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한다. 흥행업인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예능단을 조직해 전국 일주를 돌리며 노하우를 쌓아 코베예능사를 발족. 당대 최고 인기의 소속 연예인들을 무기로 메이져 방송국에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당시까지도 야쿠자의 흥행사업이란 것은 자릿세를 받고 공연의 개최를 중개하거나 연예인의 출연료를 삥땅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다오카는 연예기획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주먹구구식의 '야쿠자성'을 배제하고 전속 연예인을 파격적인 대우로 고용하고 공연전체를 기획, 관리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연예기획사를 출범시켜 성공시켰다. 특히 일본 최고의 엔카가수로 평가받는 미소라 히바리와 인연을 맺게된것도 이런 이력이 있었기때문이다. 당시까지만해도 실력은 좋았지만 예능단 가수에 머물러있던 미소라 히바리는 고베에서의 공연 이후 다오카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다오카가 미소라 히바리의 초기 성공에 여러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것으로도 유명하다. 미소라 히바리 말고도 오노 미츠루, 츠루타 코지, 에노모토 켄이치등과 인연을 맺어 이들과 다오카가 사이좋게 포옹하고 있는 사진이 여럿 존재한다.

또한 노무자 중개업을 바탕으로 화물 회사에 대한 재정적 관여를 통해[9] 60년대 중반에는 코베 부두 하역량 전체의 80%를 지배할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이 시기 한 해 동안 야마구치구미가 화물사업과 관련해서 벌어들인 액수만해도 약 60억엔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항구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과거 고베는 아시아지역의 핵심 물류창구 역할을 맡고있었기때문에 엄청난 양의 물류량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 항구도시의 화물 가운데 절반이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

60년대부터는 야마구치구미가 세력 확장 속도를 올린다. 소위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이라 불리는 세력 확장을 시도, 이때 메이유카이와의 항쟁 후 2차단체로는 승격됐지만 오사카에서 제대로 된 세력권을 확보하지 못한 재일교포 야쿠자인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에게 타지역 진출을 허용하였고 이에 한록춘의 잇신카이 등이 합세하여 활약해 야마구치구미는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이때의 일화들이 워낙 많다보니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영화가 히로시마 진출을 두고 히로시마 토착 조직인 교세이카이와 싸운 일화를 다룬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 호쿠리쿠 진출 일화를 그린 호쿠리쿠 대리전쟁 등등이 있다. 이런 야마구치구미의 팽창은 여러 조직간의 수많은 항쟁을 일으켰고, 규슈로 진출한 하카타 사건때는 조직원 300명을 일시에 동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1965년에는 심지어 히로시마 교세이카이의 주도로 두목 다오카 카즈오의 집에 다이너마이트가 투척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야마구치구미가 이렇게 일본 전국으로 진출할 때, 성공적으로 그 지역에 정착한 경우도 있지만 지역 조직의 저항으로 크게 힘을 못쓰거나 적은 영향력만 끼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큐슈,히로시마,오키나와 등등이 야마구치구미가 제대로 진출 못한 곳이다. 큐슈는 토착 조직들이 워낙 흉폭하고 무투파로 이름 높아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키나와 역시 1978년 진출하려다가 오키나와의 조직들이 한데 모여 쿄큐류카이를 결성해 강한 저항을 반복했다보니 결국 경찰이 양측을 모두 체포,제재하여 진출을 포기하였다. 또한 히로시마의 경우처럼 한때 싸웠지만 나중에 사카즈키고토를 통해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는 있다.

1965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산하 424개 구미, 9,450명의 인수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야마구치구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조직의 연간 매상이 100억엔이 넘었으며 도박, 고리대금업, 스포츠 및 흥행업에 이르기까지 약 5,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며 이중 5억엔가량을 경찰에 상납하는 등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힘이 어느정도 감소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1984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 한 간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벌이는 말단 꼬붕들의 평균 연수입이 330만엔정도이고, 클럽지배인급이면 약 1,000만엔, 중간급 두목이면 연간 3,000만엔정도를, 대부급이면 1억엔정도를 챙겼다고 한다.

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다. 리즈 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3대 구미쵸 타오카 카즈오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운수대신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고노 이치로는 아들이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내가관방장관, 손자가 고노 다로 현 국무대신이다. 즉 전형적인 정치인 가문이었다.

야마구치구미가 전성기를 달린 60년대는 특히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극우조직의 득세가 심각했고, 야마구치구미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런 협력의 중심에는 1960년대 초 회원 15만명규모의 극우조직 '전애회의'에[10]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다나카 세이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있었다. 다오카 자신은 코다마 요시오와 어느정도 협력은 하고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코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다나카 세이겐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친우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야마구치구미가 위기를 맞게된다. 19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다오카 암살시도 사건부터였다. 일본 관서 지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마구치구미였지만 여전히 그에 반하는 조직 또한 존재했다. 1975년 3대 야마구치구미 산하의 사사키구미와의 싸움에서 오야붕을 잃은 마츠다구미 산하 대일본정의단 소속 조직원 나루미 키요시가 대범하게도 야마구치구미의 영역 한복판인 교토에서 권총으로 다오카 카즈오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시도에서 다오카 카즈오는 목을 스치는 총상을 입으며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 충격으로 몇달간 두문불출하게 되면서 조직내에서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게 된다. 다오카는 "나를 노리다니..대단한 놈인데.. 하지만 본인이 살고 싶어했기 때문에 실패한거야. 죽음을 각오하고 좀 더 가까이 와서 쐈어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벨아미 나이트클럽의 마담과 종업원들을 요정으로 초대해 폐를 끼쳤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벨아미에 폭력단 관계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약속했다고 한다. 벨아미 나이트클럽은 이후에도 번창했지만 80년대 중반 마담이 사망하고 폐업했다고 한다.

여하간 이렇게 발발한 <오사카 전쟁>에서 두목이 총격을 당하는 유례없는 사건이 발생하자, 와카가시라였던 야마모토 켄이치는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고 마츠다구미와 대일본정의단에 무자비한 보복을 엄명했다. 야마구치구미의 무차별 공격으로 7명의 조직원이 연달아 사살 당한 마츠다구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루미 기요시를 포박해서 야마구치구미에 넘겨주게된다.[11]

여담으로 암살을 시도한 '나루미 기요시'는 얼마안가 코베 근교 롯코산에서 검은 테이프에 둘둘 말려 10일 정도 부패된 시체로 발견된다. 기요시의 시신은 손, 발톱이 거의 다 뽑혀 있었고 양손 지문이 사라져 있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연일 지속되던 더운 날씨에 얼굴이 부패 백골화 되어 알아보기조차도 힘들었다. 그래서 적외선 조사로 기요시 등에 있는 흐릿한 선녀 문신을 찾아내고, 또한 소년원 시절 성기에 박아넣었다는 2개의 진주도 확인함으로써 시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비디오 테이프가 전달됐는데 나루미가 무차별 고문 당하는 영상이었고, 그걸 본 다오카 카즈오는 "좋아"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마츠다구미를 궤멸시킨 야마구치구미는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 항쟁 종결을 선언했다. 마츠다구미도 오사카부경에 항쟁 종결을 알리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후 마츠다구미는 조직원들이 대거 이탈하여 결국 해산하게 된다.[12]

한편 이 시기에는 너무 커진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된데다가, 야마구치구미 내부에서 장년층과 청년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의 정책에 반대하는 하부 구미의 두목들이 23명이나 경찰에 잡혀가는 등 안팎으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관 1,100여명이 동원된 이른바 '80일 전투'라고 불리는 전후 사상 최대규모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단 두 달 만에 야마구치구미 간부 518명과 조직원 2,000명이 구속되었다. 오사카 전쟁을 지휘한 대가로 심지어 병보석 중이던 다오카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마저 구속된다.

결국 계속 발생하는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타오카 카즈오는 60명이 넘는 신문기자들을 자신의 호화자택에 부른다. 그 자리에서 타오카 카즈오는 야마구치구미가 대중과 경찰에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굴욕적인 기자회견을 가지게 된다. 이 기자회견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완전한 은거에 들어가는데, 은거하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98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다오카 사후 야마구치구미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의 준비 끝에 커다란 영결식을 거행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경고의 의미로 전국적으로 구성원 900여명을 구속하며 대대적인 진압을 시도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오카의 영결식에 200개 조직 1,300여명의 야쿠자 조직원이 모인다. 이 영결식은 대담하게도 코베에서 가장 명성높은 변호사들 사무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졌으며 코다마 요시오를 위시한 극우 조직의 추종자들과 정치인, 타바타 요시오나 타카쿠라 켄을 포함한 일본 연예계의 스타들도 대거 참석했다.

다오카는 죽기 전 잔인한 성격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앞서의 기자회견 이후 투옥되어 있었던 켄이치는 공식적인 취임이 어려워서 상주(상주喪主)는 다오카의 아내였던 다오카 후미코가 담당하였다. 이 장면은 남성 일색의 야쿠자 세계에서 여성인 후미코가 상주라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후미코가 상주를 맡은 게 야마모토 켄이치의 출소 전까지의 임시직이긴 했지지만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기까지 여자 구미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2,000여명이 넘는 유례없는 대규모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에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건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후 1982년 야마모토 켄이치가 출소하게 됨에 따라 다오카의 자리는 야마모토에게 넘어가지만, 얼마안가 7개월만에 야마모토는 간경변증으로 사망해버려 야마구치구미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과는 달리 곳곳의 수많은 조직들을 '사카즈키고토'로 산하 조직으로 흡수해가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내부 결속력이 약했다. 때문에 약한 결속력을 다져오던 다오카 카즈오라는 주도적 인물이 사라지자 세력 확장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2.4. 4대 타케나카 마사히사 시대

타오카 카즈오가 사망할 당시 야마구치구미는 산하에 구성원이 약 13,000여 명, 공식 가입조직 580여 개로, 일본 전체 1도1도43개 현 가운데 36개를 자기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타오카와 야마모토 사후 8명의 거대 조직의 두목들이 타오카의 부인 후미코와 함께 임시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직에는 타오카의 뒤를 잇는 구미쵸가 필요했고 최종적으로는 2명의 후보가 남게된다.

후보 중 한 사람은 조직의 2인자였던 야마모토 켄이치의 라이벌로서 야마구치구미의 큐슈진출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야마모토 히로시였고, 또 한 사람은 타오카 및 야마모토 켄이치와 가까운 위치에서 공격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면서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던 타케나카 마사히사였다. 당시 평가로는 야마모토 히로시는 직접 현장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는데 익숙한 인텔리 야쿠자인 반면 타케나카 마사히사는 직접 공갈, 폭행을 저지르는것도 서슴치않는 전형적인 야쿠자였다고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타오카의 후임은 104명의 하위조직의 두목들의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으며, 투표 결과 57대 19로 후미코의 지지를 받던 타케나카 마사히사로 선출되었다. 이때문에 당시에는 후미코와 타케나카가 불륜같은 모종의 관계가 아니냐라는 안좋은 소문도 떠돌았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측못했던 사태가 터진다. 경합에서 탈락한 야마모토 히로시가 타케나카의 부하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고위급 부두목 18명을 데리고 새롭게 '이치와카이'를 결성한 것이다. 이때 이치와카이가 데려간 조직원만해도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의 절반인 6,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이치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야마구치구미는 썩어도 준치라고 돌아오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사면령과 함께 퇴직수당을 제공하는 파격안을 제시함으로써 이치와카이의 조직원수를 3,000명 수준까지 줄이는데에 성공한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이치와카이는 1985년 1월 26일 두목 타케나카와 부두목(와카가시라) 나카야마를 습격해 살해했으며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유혈참극이 벌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타케나카 사후 이 두 조직 사이에서만 단 1년만에 약 200회 이상의 무장총격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대립에서 야마구치구미는 압도적인 인원임에도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는데 이는 이치와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부터 이탈하면서 무기의 대부분을 가지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를 이기기 위해 무기의 보급이 절실하여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무기보급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기보급 시도는 결국 야마구치구미 스스로 항쟁에 오히려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든다. 1985년 9월 호놀룰루에서 미국 마약단속국(DEA)이 타케나카의 동생이자 조직내 실권자인 타케나카 마사시와 조직의 재정담당자인 오다 히데오미를 체포한 것이다. 체포 당시 이들은 하와이의 마피아로부터 로켓 발사기 3문, 기관총 5정, 권총 100정을 구입하고 외국인 암살자 1명을 고용하려 했으며 동시에 당시 기준 133억엔이나 되는 24kg의 암페타민헤로인 5.5kg을 판매하려 했다고 한다.

이렇게되면서 결국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와 끝없는 대립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자중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밀수를 직접 주도했던 타케나가구미는 조직 내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게된다.

당시 사건의 상세한 과정은 이렇다. 밀수를 주도했던 다케나가 마사시는 원래 프로레슬러 히로 사사키에게 공연료 4억엔인 마이클 잭슨의 일본 공연을 의뢰하면서 보증금으로 5천만엔을 관련 부동산업자에게 건냈다. 이런 대규모 공연은 예능사를 운영하는 야쿠자 조직들이 돈을 빼먹기 매우 좋은 기회다보니, 야쿠자 조직들이 이런식으로 유명해외가수 공연을 주도하곤 했다.

사사키는 하와이에 건너가 마이클 잭슨 공연 기본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3일 후 당시 이치와카이 조직과의 항쟁으로 무기가 절실했던 타케나카에게, 호놀룰루에 가면 미국 마피아로부터 미육군 권총과 기관총을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준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타케나카는 무기 구입의 보증금으로 4억엔을 송금하고나서, 조직의 자금책이던 '오다'와 홍콩 삼합회의 '미전성'과 함께 호놀룰루 마피아 결성 25주년 파티에 참석해서 무기 거래를 하기위해 호놀룰루로 날아간다. 그런데 거기서 세명 모두 대기하고 있던 미연방 마약단속국에 바로 검거된다. 이 체포작전이 이렇게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던데에는 사실 사사키는 미연방 마약단속국 소속무간도?신세계?이었으며 마이클 잭슨 공연과 마피아, 무기 거래는 모두 꾸며낸 가공의 이야기로 미 연방정부의 함정수사였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야마구치구미가 이러한 사건도 일어나고 항쟁도 장기화되면서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지만, 상대조직인 이치와카이는 그보다 더 심한 타격을 받고있었다. 그 결과 이치와카이와 함께 야마구치구미를 적대했던 홋카이도의 세이유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 돌아서게된다. 게다가 이치와카이 산하 조직의 구미쵸들이 대거 은퇴하며 조직을 해산 해 버리는 등 조직 약화가 계속된다. 결국 이치와카이에서는 이나가와 세이죠와 아이즈코테츠카이의 타카야마 토쿠타로(강외수)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야마모토 히로시는 야마구치구미로 부터 목숨을 보전받는 조건으로 아이즈코테츠카이 타카야마(강외수) 회장을 통해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사죄와 항쟁종결의 뜻을 전하였다. 이에따라 이치와카이는 지금까지 적대해온 야마구치구미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항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야마켄 구미의 2대 조장 와타나베 요시노리가 5대 야마구치구미의 오야붕으로 추대된다.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마츠다구미와 야마구치구미간에 벌어진 오사카 전쟁에서 활약한 무투파로, 야마이치 항쟁[13]에선 이나가와카이를 움직여 중재를 성사시켜 조직내 영향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 화해 결정에 타케나카구미는 불복한다.[14] 그리고 야마구치구미를 탈퇴해 기존 이치와카이에 대한 보복을 지속하였다. 그러자 야마모토 히로시와 이치와카이를 보호하기로 약속한 5대 야마구치구미는 타케나가구미를 일방적으로 공격해 또다시 야마타케 항쟁에 다시 돌입하게 된다. 결국 야마모토 히로시가 병사하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이 싸움이 끝나게 된다.

타오카 사후 야마이치 항쟁과 야마타케 항쟁은 조직 내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투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야마구치구미와 이치와카이는 500억엔 정도를 날렸으며 항쟁의 여파로 민간인 희생자가 여럿 발생한다. 이 때문에 일본 사회안에서 사회안전에 대한 우려가 다시 일어나 폭대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일본내 조직폭력배들의 경마, 경륜 등의 공공시설 입장이 금지되고, 마츠리(지역축제)에 노점 개설이 불허되는 등 이후 야쿠자들의 활동에 큰 지장이 생기기 시작한다.

2.5.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시대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기존의 타오카처럼 1명이 정점에서 카리스마로 조직을 통괄하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조직의 쇄신을 도모하였다. 내부적으로는 블록제를 도입, 야마구치구미가 활동하는 세력범위를 5개 블록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산하조직들의 상위 두목을 지정하고 이들에게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이러한 체제혁신은 후계문제로 고생을 한 야마구치구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의 분열사태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이렇게 쇄신을 거듭하던 5대 야마구치구미는 1997년 타쿠미 마사루 암살사건을 겪으면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르게된다. 타쿠미 마사루는 5대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이자 조직의 주요 자금책으로서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던 인물이었다. 당시 교토에서는 야마구치구미 산하의 나카노카이와 아이즈코테츠카이가 부동산 문제가 발단이 되어 나카노카이의 카이쵸인 나카노 타로가 총격을 받는 등 격렬한 내부항쟁이 발생했었는데, 타쿠미 마사루는 조직의 중역으로서, 경찰의 개입을 막기위해 나카노카이의 제대로된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두 조직을 화해시켰다. 그 결과 나카노카이에서는 강압적으로 화해를 성사시킨 타쿠미 마사루에대한 불만이 치솟았고, 결국 신 코베 오리엔탈 호텔(현 ANA 크라운프라자 호텔 코베)에서 나카노카이의 히트맨의 공격을 받게된것이다.

당시 현장에는 타쿠미 마사루를 포함해 키시모토, 노가미 등 3명의 최고간부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타쿠미 마사루는 현장에서 7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게된다. 당시 타쿠미와 동석했던 키시모토와 노가미는 무사하였으나[15] 근처 테이블에 있던 치과의사가 유탄에 중상을 입고 엿새 후 사망했다.

조직의 핵심 간부 그 중에서도 조직의 자금줄을 관리하던 인물이 죽은 충격적인 사건에 분노한 야마구치구미는 사건의 당사자인 나카노카이와 절연하고 대규모 공격을 진행한다. 특히 오야붕을 잃은 타쿠미구미가 중심이되어 나카노카이의 간부 대부분이 습격당해 죽어버리고, 그 결과 주요 간부들을 잃은 나카노카이는 명맥만 유지하다가 2005년 해산하게 된다.

이렇듯 조직에 내흥이 계속되자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2004년 갑작스럽게 집행부에 모든 전권을 위임한채 은거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2005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그 과정에서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타쿠미 사후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던 와카가시라 직책에 츠카사 시노부(본명 시노다 켄이치)를 임명했고 얼마안가 츠카사에게 구미쵸 자리마저 승계한다.

츠카사 시노부는 초대 고도카이 카이쵸였다. 본래 고도카이의 전신인 히로타구미는 구미쵸인 히로타 타케시와 야마모토 켄이치가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타오카 사후 4대 구미쵸로 야마모토 켄이치를 지지했지만 야마모토 켄이치의 갑작스런 병사후 구미쵸 승계를 두고 타케나카 마사히사와 야마모토 히로시가 대립했을 당시 야마모토 히로시의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츠카사가 히로타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히로타구미는 이치와카이 진영은 물론 4대야마구치 진영에도 참가하지 않아 권력다툼에서 피해갈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히로타 타케시는 히로타 구미를 해산시키는 형태로 히로타구미를 츠카사에게 계승해준다. 츠카사는 해산된 히로타구미를 그대로 수습하고 계승하여 고도카이를 만들어 4대 야마구치구미의 직계로 승격했다.

다만 이 갑작스런 은퇴와 승계에는 츠카사에 의한 쿠데타 설도 제기된다. 와타나베는 구미쵸로 있는 동안 유난히 돈에 집착해 지방이권사업의 경우 조직산하의 지방조직이 아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업자에 수주를 주고, 부인이 운영하던 고급부띠크에 신상품 입점시 부하들에게 전화로 알리는 등 실질적인 강매를 해 조직내 불만이 중첩되고 있었다. 그리고 츠카사가 타쿠미 암살사건 배경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나카노카이는 5대 야마구치구미 직계가 되기 전까지 2대 야마켄구미 2차단체였고 2대 야마켄구미 구미쵸는 와타나베 요시노리였으므로 와타나베가 야마켄구미 샤테이카시라보좌 출신인 나카노 타로(나카노카이 카이쵸)를 이용해 조직운영의 실권을 쥐고있던 타쿠미의 암살을 부추기고 이후 파문 정도로 마무리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건의 전모를 알아챈 고도카이를 비롯한 집행부의 강요로 나카노는 절연 당해 버림 받고 5대 와타나베 두목도 은퇴에 몰렸다는 추정도 거론되었다.

이후 은퇴상태로 요양하던 와타나베 두목은 2012년 고베시 주오구의 자택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1세.

2.6. 6대 츠카사 시노부 시대

계승식 영상

계승식 축하 연회 영상

6대째에 들어서면서 야마구치구미의 블록 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5대 때와는 달리 조직의 힘을 고도카이에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1차 단체인 야마구치구미 본가를 중심으로 일본 전국을 7개 블록으로 나눈다. 칸토-홋카이도, 츄부, 북 오사카, 남오사카, 한신, 츄고쿠-시코쿠, 규슈 / 2016년 기준 칸사이, 칸토, 도카이, 츄고쿠-시코쿠, 츄부, 규슈 블록으로 재구성해 6개 블록이 되었다. 그리고 각 블록의 장은 나고야의 고도카이를 중심으로 한 조직 집행부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 블록장들은 현재 부두목 보좌 직을 동시에 역임 중 이다.

야마구치구미가 분열 직전 츠카사 시노부(시노다 켄이치)의 생일 잔치때 화기애애한 모습의 영상.#, 일본 전국의 주요 두목들이 다 모였다.#[16] 이때에 지금은 원수가 되어 버린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두목 이노우에 구니오도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있다.#

혁신 이후 야마구치구미는 다시금 내홍을 겪기 시작한다. 2008년 고토구미 처분 문제에 연루되어 7개 조직의 구미쵸들이 절연 처분을 받는 등 고도카이를 중심으로 한 집행부에 반항하던 조직들이 숙청된다. 이 사태 이후 고도카이에 눌려 더욱 더 세가 약화되가던 칸사이계 조직들이 2015년부터 야마켄구미, 타쿠미구미를 중심으로 뭉쳐 고도카이와의 갈등을 드러냈다.

1997년 타쿠미 마사루의 죽음 이후 고도카이는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금융 관련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특히 한국의 IMF 금융위기 당시 나고야계 재일교포 자금이 한국 사채시장에 엄청나게 진출하던 때와 시기상 겹친다. 그러면서 조직의 규모가 야마켄구미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6대 구미쵸로 츠카사 시노부가 취임한 후 고도카이가 야마구치구미 안에서 중핵 조직이 되며 조직 내 중요 요직을 싹쓸이한다. 또한 야마켄구미 산하에서 알짜 수익 사업인 연예 흥행사업을 관리하던 쿄쿠신렌고카이를 독립 직계로 승격시킨다. 이렇게 되자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사업들이 붕괴되어버린 관서계 조직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조직 분열에 관한 KBS 보도 영상

2015년 8월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이러한 갈등은 9월에는 본격적으로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13개 조직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탈한 조직들에 신조직 하나가 합류해 총 14개 조직이 연합해 '고베야마구치구미'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고베야마구치구미가 공식적으로 세워지자 야마구치구미 본가는 이 사태를 주도한 야마켄구미와 타쿠미구미 및 이에 동조한 세력들을 바로 절연-파문하였다. 이제 고베야마구치구미의 규모는 준구성원을 포함해 조직원수가 6,1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 비슷한 사례였던 야마-이치 항쟁 때 큰 규모의 폭력과 사상자가 났던 만큼 일본 사회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분열 이후 반년동안 이들이 관련된 사건만 20개 도도부현에서 50건 가까이 발생한다. 서로의 조직 사무실에 총을 쏘가나, 차량으로 적대 사무소 건물을 돌진하는 폭력 사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코베야마구치구미를 지정폭력단으로 지정하고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를 대립항쟁중폭력단으로 지정,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분열 이후 2015년 10월, 6대 야마구치구미 3차 단체 카케노구미 조직이 이적 문제로 사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달에는 6대 야마구치구미 산하 쿠라모토구미 카와치 토시유키 구미쵸가 자살했는데 이에 대해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6대 야마구치구미 산하 아이오우카이 히시다 타츠유키 구미쵸가 맞아 죽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 외에는 특별한 사상자 없이 두 조직 다 암묵적인 휴전체제에 돌입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고베야마구치구미는 6대 야마구치구미와 비교해서 그 사업 내용이 전통적인 깡패 사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자금 동원력에서 6대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절대적 열세라서 항쟁이 장기화에 접어들수록 불리했다.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성 초기부터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박정호[17]의 나미카와카이와 결연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2016년 3월 29일에 있던 고베야마구치구미의 관동 회합이 박정호가 소유한 도쿄 다이토구에 있는 나미카와카이 관동 본부 빌딩에서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미카와카이는 분열사태에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일각에선 야마구치구미 내 한국계 야쿠자와 부락민 출신 야쿠자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대두되지만 6대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 모두 주요 직책에 한국계가 포진해 있으므로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는 고도카이를 위시로 한 나고야계 조직들에 주요 사업을 상실한 기존의 파벌들이 돈벌이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으로 추정했다. 특히 야마켄구미는 쿄쿠신렌고카이로로부터는 연예 흥행사업을 되찾고, 타쿠미구미는 오하라구미로부터 금융사업을 되찾기 위해, 서로 손잡고 고베야마구치구미를 결성을 주도했다고 보는 추정이 더욱 유력하다. 역시 깡패는 돈이 의리

2016년 5월 하순 6대 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츠카사는 5대 이나가와카이 카이쵸 신병규의 자택을 방문해 코고베야마구치구미와의 화해 중재를 의뢰했다. 코베야마구치구미는 화해의 대가로 츠카사를 총재로 승격시키고, 형무소에 수감 중인 타카야마 키요시 와카가시라를 은퇴시키며, 7대 구미쵸 자리를 공석으로 하는 대신 코베야마구치구미 이노우에 회장이 7대의 와카가시라로 취임하는 것을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경시청이 특별감시를 하는 동안, 두 조직은 이렇게 화해를 향해 물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31일, 고베야마구치구미 산하 이케다구미[18]의 와카가시라 타카키 타다시가 6대 야마구치구미 고도카이 산하 타카야마구미의 구미원[19]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베야마구치구미는 보복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즉각적으로 산하 조직에 날렸지만, 급속히 진행되던 화해 분위기는 없던 일이 되게 생겼다.

그리고 2016년 7월 27일 밤, 중립을 지키던 나미카와카이 산하 무라카미잇가와 6대 야마구치구미 직계 이즈구미[20] 산하 하라타구미의 조직원들끼리 후쿠오카 하카타의 번화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이즈구미는 나미카와카이에 화해의 뜻을 전달했지만 나미카와카이는 화해의 대가로 하라타구미 마츠모토 카츠히로 구미쵸의 한쪽 팔을 요구하며 이즈구미의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후쿠오카 하카타서는 화해의 가능성은 없고 항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경계에 들어간다.

2016년 9월 5일, 일본 효고현 신고베역에서 모습을 들어낸 시노다 겐이치에게 싸인을 요구하는 고베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과 충돌했으나, 사건 당시 주변에 경찰들이 쫙 깔려있었기에 충돌없이 현장에서 빠져나왔다.SBS 뉴스

일련의 항쟁이 2016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감소했으나, 2017년 4월 30일 야마켄구미의 부조장이었단 오다 요시노리[21]를 대표로 고베야마구치구미의 일부 조직원들이 독립하여,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결성한다. 본래 임협 단체 야마구치구미라는 명칭이었으나 임협 야마구치구미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임협 야마구치구미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고베야마구치구미 상층부가 분열 당시의 목적인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개혁정신'을 잃었다고 비난했다. 내부 이권 싸움으로 갈라진 거라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습지만, 일단 고베야마구치구미는 야마구치구미의 개혁을 내세우면서 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야마구치구미는 개혁안을 제시하는데, 자기들 조직은 기존의 조직들과는 달리 대표만 존재할뿐 사카즈키 식 관계로 묶이지 않은 평등한 조직을 내세운다고 밝혔다.

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주로 고베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보수적이고 나이가 많은 상층부와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과격파에 속하는 젊은 층간의 갈등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부적으로 젊은 층의 조직개혁안이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상층부가 아래에 요구하는 과도한 회비 압박 등이 불만이 쌓인 주요 요인이라고 한다. 애초에 고베야마구치구미의 등장 자체가 총본부와 나고야계 조직 간 이권 다툼, 즉 조직 내 회비와 관련된 문제에 원인이 있었는데, 이게 고베야마구치구미내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같은 해인 2017년 9월 오다 요시노리를 노린 총격사건이 발생했으나 보디가드만 사망하고 요시노리는 살아남는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고베야마구치구미의 중핵 조직인 야마켄구미로 추정된다. 총격사건의 대상인 오다 요시노리는 야마켄구미의 주요 간부였고, 임협 야마구치구미 결성 당시 직설적으로 야마켄구미를 비난하였다.

임협 야마구치구미의 결성으로 결국 2017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야마구치구미, 고베야마구치구미, 임협 야마구치구미라는 총 3개의 단체로 분열되었다.

2017년, 6대 야마구치구미가 분열의 원인으로서 기존에는 조직마다 월 65만 엔씩 걷던 상납금을 10만 엔으로 줄이고, 새롭게 사무실을 개업하는 조직에게는 지원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6대 야마구치구미에서 고베야마구치구미로 탈퇴가 가속화되어 2018년에 와서는 두 조직 간 상호균형이 맞춰지게 되었다. 분열 사건의 원인이 된 시노다 켄이치의 조직이 있는 츄부 지방은 90% 가량의 조직이 야마구치구미에 잔류하였지만, 이에 반발한 관서지역은 절반가량의 조직이 고베야마구치구미로 이적했다.

2019년 10월 18일 수감 중이던 조직의 no.2 다카야마 키요시가 출소하였다. 이로써 야마구치구미가 조직을 재정비를 하고 앞으로 행보를 보일지 각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기사

같은 해 11월에 야마구치구미 조직원이 고베 야마구치구미 간부를 M16 소총으로 30발을 사격해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2020년 1월에는 임협 야마구치구미가 조직명을 갑자기 '키즈나카이'라 바꾸고 야마구치란 이름을 버려 주목을 받았다. 일본 현지에서는 임협 야마구치구미가 상대적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야마구치구미라는 이름을 걸고 독립했지만,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와 달리 이렇다 할 세력을 끌어모으지 못하면서 양 세력 사이에서 생존이 어려워졌다 보니 아예 야마구치 삼국지 구도에서 빠져 독자생존을 모색하려 한다는 평을 받게됐다.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이끌고 있는 오다 요시노리는, 야심차게 고베야마구치구미에서 독립했음에도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는데 폭력조직의 수장으로서 불필요하게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만 반복한다는 평을 받는다. 입협 야마구치구미 소속원은 약 400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곳에 속한 2차 단체만 해도 30곳은 넘다 보니 실질적으로 각 2차 단체는 많아봐야 20~30명 규모의 소규모 조직들이라 수익구조가 매우 취약한 것도 약점. 실질적으로 폭대법 이후 큰 돈을 굴릴 자본이 없는 소규모 조직들부터 대부분이 말라죽었다는 걸 고려해보면 임협 야마구치구미의 상황은 상당히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는 모두 쿠도카이에 이어 두번째로 '특정 위험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조직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졌고 6대째나 고베 측이나 모두 손발이 묶여 항쟁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가 됐다. 거기다 2020년 당시 코로나 19가 일본에 퍼지자 양측은 사실상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으나 2020년 5월 30일 고베야마구치구미에 소속된 이케다구미의 오카야마 사무실이 습격당해 간부와 조직원 한 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 날 이케다구미에서는 2016년 야마구치구미 쪽 조직원에 습격당해 사망한 간부의 추모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사건 당시 CCTV가 공개됐는데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활극이었다.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고베야마구치구미가 계속 공격을 해도 고베 측은 별다른 보복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며 조직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전망이 있다. 고베 측의 중핵 조직인 야마켄구미도 위태로운 낌새가 보이고 현재 전쟁은 6대째 야마구치구미의 우세 속에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일본 언론의 평가이다.

2020년 8월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중핵조직인 야마켄구미가 분열하여 탈퇴하자는 조장파와 고베 잔류파로 나뉘어져서 분열했다. 현 조장인 나카타 히로시가 고베 야마구치의 두목인 이노우에 구니오와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젔으며 고도카이 조직원 습격 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탈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직계 부하두목(직상) 50명 가운데 20명이 나카타 히로시를 따라 고베를 탈퇴했으나 나머지 30명은 고베 야마구치에 잔류하는등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고 있으며 일본 언론은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해산도 전망하고 있다. 또 5월에 습격 당한 이케다구미도 고베 야마구치를 탈퇴해서 독자조직이 됐다.

또 키즈나카이도 해산 움직임이 있었으나 부하들이 두목 오다에게 해산반대를 주장해 해산하진 않았다고 한다. 여러모로 6대째 야마구치구미에 유리한 상황이다.

2021년 7월경 2020 도쿄 올림픽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해 항쟁은 소강상태가 됐다. 다만 독자조직을 선택한 독립파 5대째 야마켄구미의 니시카와 요시오 부두목이 6월 6일 코로나19로 사망했고, 이를 틈타 고도카이쪽에서 야마켄구미의 분열을 노리고 각종 교란정보를 뿌리는 모략전을 감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각 간부들이 지병과 생활고, 경제난으로 항쟁을 할 여유가 없다고 한다. 올림픽 자숙이 끝나면 항쟁이 재개될 것이라는 일본 야쿠자 전문가들의 전망이 나오고 있다.

2021년 고베-야마구치구미의 중핵 조직인 야마켄구미가 분열과 자중지란을 거듭하던 와중에 고베측에서 탈퇴해 독립을 선언했으나 9월 16일 결국 6대째로 복귀를 결정했다. 이리하여 고베측은 중핵조직[22]이 이탈을 넘어서 6대 야마구치구미로 복귀함에 따라 전세가 크게 불리해졌으며 점점 6대째의 승리로 전쟁은 귀결되가고 있는 모양새이다.

고베야마구치구미 두목 이노우에 구니오의 집에 발포한 사건으로 6대째 두목 시노다 켄이치의 집이 가택수사 받았는데, 시노다 켄이치가 직접 집 밖으로 나와 화제가 되었다.영상

한편 야마구치구미 고도카이 소속 조직원들의 고베측에 대한 공격이 계속 되고 있는데, 실행범만 처벌하고 윗선은 처벌하지 않는 것이 감지되고 있다. 미조구치 아츠시 기자는 이런 이유가 고도카이의 다카야마 기요시가 아베 신조자민당과 관련이 있는 경찰, 검찰 간부들과 밀접하게 연계됐었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2022년 9월 8일, 고베야마구치구미-이케다구미-키즈나카이가 대등한 관계의 동맹을 맺음으로서 다시 연계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고베 측은 키즈나카이의 오다 요시노리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대신 보디가드를 죽였는데, 이번에 그의 5주기 공양 때 고베 측 간부들이 대거 조문에 나서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구원은 잊고 6대째 야마구치구미랑 싸우는 데 힘을 합치려는 모양새이다.# 특히 산하 주요 간부들이 그간 많이 이탈하여 위기에 빠진 고베측은 이번 연대로 그나마 무너져가는 모습을 수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9월 21일 고베야마구치구미의 마지막 남은 중심축이었던 이리에 타다시 타쿠미구미 두목이 고베야마구치구미를 이탈하면서 고베 측의 어려움과 난맥상이 또 다시 노출됐다.# 10월 26일에는 6대째 야마구치구미 측에서 이케다구미의 두목 이케다 다카시를 이발소에서 습격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곰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려 교란하고 서바이벌 나이프로 공격 했으나 이케다 두목의 보디가드가 막았다고 한다. 고베 측의 주요 중핵조직인 야마켄이 분열하여 힘을 잃자, 반 6대째 파벌 중 자금원이 가장 크다고 평가되는 이케다구미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 같다.#,#

2022년 12월 21일, 고베야마구치구미에서 이탈한 교유카이(侠友会) 회장 테라오카 오사무 전 부두목이 6대측의 다카야마 기요시 부두목을 만나 사죄하고 조직 해산과 은퇴를 결정했다. 중재는 이나가와카이 회장 우치보리 카즈야가 맡았으며, 해산된 교유카이 조직원들은 6대측으로 복귀한다고 한다. 이로서 고베측은 점점 해체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2023년 4월 22일 오전 11시 10분경 고베시 나가타구의 라면 가게 '용의 수염'를 운영하던 6대 야마구치 구미 고도카이 산하 미나토 흥업의 조장인 요지마 마나부가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6대 야마구치와 항쟁 중인 고베 야마구치 구미 혹은 키즈나카이측의 소행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장기화된 항쟁으로 경찰에게 단단히 찍혔고 점차 강화되어 가는 폭련단 배제 법률때문에 구성원 수만 따지면 약 3500명 정도로 조직원 수가 대폭 감소했다.[23] 그래도 고베 야마구치에 비하면 상황이 좋으편으로 고베측은 구성원 수 약 140명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이러한 점때문인지 양측의 충돌도 별로 없고 사실상 전쟁이 끝난 분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24년 3월 21일 효고현 공안위원회는 6대 야마구치 구미와 고베 야마구치 구미의 특정 항쟁 폭력단 지정을 3개월 연장했으며, 이게 17번째 연장이다. 이는 6대측의 승리가 확실하지만 언제 폭력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안측의 판단으로 여겨진다.

3. 주요 인물

4. 일화

타오카 카즈오가 두목이던 시절에 연예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며 토에이에서는 타오카 카즈오와 야마구치구미를 소재로 하여 <야마구치 3대(山口組三代目, 1973)>, <삼대계승(三代目襲名, 1974)>, <제패(制覇, 1982)> 등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야마구치 3대>와 <3대 계승>에서는 타카쿠라 켄이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고, <제패>에서는 미후네 토시로가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다. 1989년에 제작된 TBS 테레비 드라마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28]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 하였다.

타오카 카즈오는 <삼대계승> 촬영 당시 직접 촬영 현장을 방문하여 타카쿠라 켄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타오카 카즈오와 타카쿠라 켄은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도 이미 친분이 있었는데, 타카쿠라 켄의 결혼식에도 타오카 카즈오가 초대되어 참석했을 정도였다. 타카쿠라 켄은 야쿠자 영화로 톱스타가 되기 전에 미소라 히바리의 상대역으로 유명했는데,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이 타오카 카즈오였기 때문에 서로 안면이 있었고, 친분이 있었다.

<야마구치 3대>와 <삼대계승>은 당시 기자들이나 비평가들에게는 야쿠자를 미화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은 작품이다. 타오카 카즈오가 시나리오, 감독 선정 등 이 영화의 제작에 깊게 관여했다. 영화 상영 이후 토에이의 자체적인 관객 조사 만족도에서는 관객의 92%가 타오카 카즈오의 휴먼 드라마에 감동했다는 충공깽스러운 데이터가 나왔다. 결국 의리없는 전쟁에 웃도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상당히 크게 성공했다. 그런데 <삼대계승> 이후 더 이상의 속편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야쿠자 미화로 계속 욕을 먹는것에 토에이가 부담을 느꼈으며, 또한 속편이 계속 진행될수록 타오카 카즈오와 깊이 연관되어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데, 남동생 가토 테츠야 덕분에 야쿠자 연루설로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속편 제작을 허락치 않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연예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 중 하나가 1953년에 일어난 배우겸 가수 츠루타 코지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에게 습격, 폭행을 당한 일명 <츠루타 코지 습격 사건>이다. 최무룡김희갑임화수에게 구타당한 사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는 바람에 외려 광고효과(?)가 되어서 이 때까지만 해도 지방의 듣보잡 조직이던 야마구치구미는 당당한 전국구 스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건의 내용은 1953년 1월 6일 저녁 츠루타 코지가 동료배우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는 약 10명 정도가 있었다. 이 때 야마구치구미의 야마모토 켄이치 주도하에 4명이 츠루타 코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스키 병, 벽돌 등으로 후려치고 도주한다. 츠루타 코지는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머리와 손에 11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사건 발생 동기는 이러하다. 몇 달 전 1952년 가을 타오카 카즈오가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에게 미소라 히바리와 츠루타 코지의 조인트 공연을 제안하지만 거절 당한다. 이에 타오카 카즈오는 앙심을 품게된다. 그리고 야마모토 켄이치가 나서서 츠루타 코지 매니저의 태도와 언행이 오만불손하다며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자신포함 네명의 조직원과 츠루타 코지를 습격한 것이라고.

이 사건으로 습격한 조직원 4명은 기소되었고, 타오카 카즈오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는 사건 발생 2년 후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나중에 타오카 카즈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의 태도에 빡치긴 했지만 나는 습격을 지시하지 않았고 조직원들이 마음대로 저지른 짓이다."라고 적었지만 경찰 반응은 "개소리 집어쳐!"

한편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습격을 당한 츠루타 코지는 타오카 카즈오에게 사과와 해명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서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화해 했는데, 츠루타 코지가 대인배스럽게 용서를 해줬기 때문에 이후 타오카 카즈오는 츠루타 코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고 한다.

1992년 배우이자 감독이였던 이타미 주조가 <민보의 여자>라는 영화를 찍는다. 내용은 갈취 피해를 당하는 호텔을 도와 형사+여변호사가 야쿠자에 대항한다는 작품. 이에 야마구치구미 산하 고토구미 소속 조직원이 이타미 주조를 칼로 습격한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폭대법이 시행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이 사건은 크게 사회문제화 되었다. 시민사회에서 야쿠자에 대항해 싸우자는 움직임이 커진다. 이타미 주조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등 반 야쿠자 풍조가 더 강해져 야쿠자의 자충수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쿠자들은 이타미 주조를 끝없이 괴롭힌다. 그러다가 결국 이타미 주조 감독은 석연찮은 자살을 한다. 당시 이타미 주조는 불륜을 벌이고있단 의혹이나 SM 클럽 다닌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의혹에 대해 부정한데다 신작 계획이 잡혀 있어서 자살할 상태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많다. 이 사건을 통해 사회적으로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해진다. 이후 고토구미는 각종 사건에 휘말리다가 2008년 연예인들과 골프회동을 한게 주간지에 폭로되었고, 그것으로 트집을 잡혀 절연 제명되어 해산되었다. 물론 고토구미와 고도카이간의 내부 권력 다툼이 원인이 되어 트집 잡힌 후 해산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5. 대중매체

6. 여담



[1] 본명은 시노다 켄이치.[2] 23년 말 일본 경시청 집계 결과로 구성원 수 3500명, 준구성원 수 3800명.#[3] 당장 야마구치구미 뿐 아니라 다른 하위 야쿠자들조차도 돌격소총이나 기관단총은 물론 수류탄 같은 폭발물이나 심지어는 중화기까지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조직간의 항쟁이나 민간사업자 압박용으로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것은 군대가 마약 카르텔에게 패배할 정도로 행정력이 약한 중남미와 달리 일본 정부의 국토 장악력과 행정력은 매우 막강하기 때문이다. 간혹 진짜로 저 무기들을 사용해 상대 조직을 공격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 경우 예외없이 잡혀서 처벌받는다. 일본 본토에서 멕시코 카르텔처럼 굴었다간 조직 전체가 갈려버릴 수 있다.[4] 1942년 생으로 본명은 시노다 켄이치(篠田 建市).[5] 이들보다 사이즈가 작은 이나가와카이도 카이로 불린다.[6] 야쿠자 조직 명칭에 자주 붙는 '~구미(組)'는 합법적인 회사, 그중에서도 곤고구미나 오오바야시구미 같은 건설회사로 위장하려 붙였던 것이 기원이다. 따라서 한국어로는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번역어가 없으며 간혹 어감상 '~파'로 의역한다.[7] 살해당한 조직원들은 야마구치 노보루의 지시에 따라 비무장 상태였으며 야마구치구미는 이들이 살해당한후에 보복도 하지 않고 조정에 전념하였다.[8] 특히 한국산 히로뽕에 재미를 많이 본 것으로 전해진다.[9]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신의 입김이 닿는 소수의 인력사무소를 제외한 경쟁 인력사무소들을 폭력과 협박으로 처리해서 인력시장에 독과점을 형성하는것이다. 이렇게되면 화물회사 입장에서는 회사를 운영하기위해 비싼 상납금을 내라고해도 거절할 수 없게된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에는 인력을 볼모로 지배된 화물회사들은 온갖 밀수사업에까지 동원되었고, 다시 인력과 밀수범죄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인질로 야마구치 구미에 더욱 꾸준히 협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10] 당시 전애회의를 이끌던 타케이 케이죠는 내각총리대신이던 사토 에이사쿠의 친위대장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11] 이때 야마켄의 조직원으로 항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훗날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두목이 되는 이노우에 구니오이다. 징역 17년의 장기징역형을 받았고, 출소 후 그 댓가로 5대 야마구치구미의 주요 간부가 되었다.[12] 나중에 나루미 기요시의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 "돈을 쏜 사나이"의 소재가 되었다.[13] 위에서 계속 서술되고있던 1984년~89년까지의 야마구치구미와 이치와카이의 항쟁. 이 항쟁으로 인해, 29명이 사망하고 70명은 부상을 당했다. [14] 상술햇듯이 타케나카 구미는 이치와카이의 공격으로 두목과 부두목을 모두 살해당한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항복선언을 했다곤해도 이치와카이의 두목인 야마모토 히로시를 살려준다는 집행부의 결정을 받아들이는건 어려웠던 것이다.[15] 조직의 브레인이자 큰어른으러 인망이 높았던 키시모토 사이조는 계파를 막론하고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나카노카이에서 타쿠미를 암살할때 키시모토는 해치지 말라고 따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16] 해당 영상에서 볼 수 있는 야쿠자 오야붕은 다음과 같다. 이토 요시마사 - 7대 마츠바카이 두목, 키나우미 요시오 - 2대 토우아카이 두목, 와타나베 노조미 - 3대 쿄우토우카이 두목, 키라 히로후미 - 2대 신와카이 두목, 시오시마 마사노리 - 6대 소우아이카이 두목, 바바 미츠구 - 6대 아이즈코테츠카이 두목, 모리타 후미야스 - 4대 아사노구미 두목, 요시무라 미츠오 - 9대 사카우메구미 두목, 신병규(기요타 지로) - 이나가와카이 5대 두목, 김인순(나카오카 토라오) - 3대 후쿠하쿠카이 두목, 김교환(스에히로 마코토) - 7대 고우다잇가 두목, 이시이 켄지 - 5대 교세이카이 두목대행.[17] 고베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이노우에 쿠니오와 나미카와카이 카이쵸 나미카와 마사히로(박정호)는 쿄다이 사카즈키를 나눈 의형제 관계였다.[18] 이케다구미의 구미쵸 이케다 타카시(김효지)는 코베야마구치구미의 샤테이카시라로 이케다구미는 코베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발언권이 센 조직이다.[19] 야마모토 히데유키(32)가 경찰에 출두 자수했으나 사용 총기가 다른 점 등 정식 기소하기에 증거가 부족한 상태이다.[20]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하는 조직으로 구미쵸 아오야마 치히로는 6대 야마구치구미 서열 5위의 샤테이카시라를 맡고 있다.[21] 본명 김정기. 젊었을 때는 재일교포 관련 정치조직도 결성했지만 곧바로 야쿠자가 되었다. 현 고베야마구치구미의 두목인 이노우에 구니오와는 감옥에서 만나 거의 친자관계에 가까울 정도로 친밀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결성하면서 사실상 갈라진 관계가 되었다.[22] 심지어 이노우에 구니오의 출신 조직도 야마켄이었다. 야마켄의 현재 두목인 나카타 코지는 그의 부하였는데 그를 배신하고 야마구치구미로 붙어버렸다.[23] 준 구성원까지 합치면 약 7100명 정도다.일본 경시청 자료 참고[24] 이 방법이 일본에서 잘통하는 이유는 일본의 집이나 건물이 목재나 가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트럭으로 한반 받기만 해도 그 건물은 재기불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25] 그가 조직생활 말년에 줄을 잘못 서서 크게 고생하고 늘 목숨이 노려진 삶을 살았음에도 이정도로 오래 산건 타고난 몸이 튼튼한것. 평안하게 살았다면 100세도 넘겼을것이다.[26] 집안이 야쿠자 답지 않게 대가족이다. 실제로 일본 야쿠자들중에는 가족과 지인이 피해를 볼까봐 아예 가족 만들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지인들과 연을 끊은 사람들이 많다.[27] 3대 두목의 아내인 다오카 후미코의 바로 왼편에 앉는다던지 와카가시라인 다카야마 키요시도 두목과 같은 상에서 식사하지 않는데 6대 두목 츠카사 시노부와 같이 식탁을 사용했으며 건배사를 하는 등. 그의 조직내 입지를 보여주는 영상이 다수 존재한다.[28] 미소라 히바리의 후견인이 타오카 카즈오였고, 거기다가 미소라 히바리의 남동생 가토 테츠야도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소라 히바리의 야쿠자 연관설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29] 참고로 작중 하나비시카이는 관동 최대 야쿠자 조직 산노카이가 내부반란 항쟁 이후에 혼란스러워져버린 틈을 타 산노카이 마저 흡수해 관동까지 진출을 성공하여 모티브가 된 현실의 야마구치구미처럼 일본의 전국을 재패하는 야쿠자 조직이 되었으나, 이후 내부반란을 시작으로 오오토모의 폭주로 인해 조직이 현실의 야마구치구미처럼 예전에 비하자면 많이 와해된 상태로 되어 버린다. 어떻게 보면 야마구치구미를 포함한 현실의 야쿠자 조직들의 현황도를 잘 묘사한 셈.[30] 다만 이게 야쿠자들이나 범죄조직들이 노리는 것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역주민들에게 호감을 얻어 민심을 장악해 자신들의 범죄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가는 것이 이러한 행위의 주된 목표이다. 야쿠자 이상으로 악명 높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조차도 민심에 신경 쓰는 마당이다.[31] 원문 どっちがヤクザかわからん.[32] 원래 관서 쪽 사람들의 기질이 일본에서도 센 편이기도 하지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의 경찰들은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전쟁 여파로 끊임없이 폭력조직들과 싸워야만 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 조직들 중에서도 기질이 매우 센 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런 차이가 한때 경찰 활동 홍보 포스터에서도 나타나서 화제가 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