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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생한 주요 지진 | |||
발생 국가: 일본 | |||
발생 시각 (UTC+9) | 규모 | 진원 | 최대 진도 |
2024년 11월 17일 21시 16분 | Mj 6.0 | 아마미오섬 북동쪽 앞바다 | 3 |
쓰나미 여부 쓰나미 예보 해제 예상 최고높이: 약간의 해수면 변동 실측 최고높이: -m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발생연월일 | 명칭 | 규모 | 최대진도 | 쓰나미 |
1872년 3월 14일 | ■하마다 지진 | M7.1 | |||
1891년 10월 28일 | ■노비 지진 | M8.0 | 격렬 | ||
1894년 10월 22일 | ■쇼나이 지진 | M7.0 | 열진 | ||
1896년 6월 15일 | ■메이지 산리쿠 지진 | M8.2 | 강진 | 최대 38.2m | |
1896년 8월 31일 | ■리쿠 지진 | M7.2 | |||
1923년 9월 1일 | ■다이쇼 간토 지진 (관동 대지진) | M8.1 | 6 | 최대 12m | |
1925년 5월 23일 | ■기타타지마 지진 | M6.8 | 6 | ||
1927년 3월 7일 | ■기타탄고 지진 | M7.3 | 6 | 최대 1.5m | |
1930년 11월 26일 | ■기타이즈 지진 | M7.3 | 6 | ||
1933년 3월 3일 | ■쇼와 산리쿠 지진 | M8.1 | 5 | 최대 28.5m | |
1943년 9월 10일 | ■돗토리 지진 | M7.2 | 6 | ||
1944년 12월 7일 | ■쇼와 도난카이 지진 | M7.9 | 6 | 최대 9m | |
1945년 1월 13일 | ■미카와 지진 | M6.8 | 5 | ||
1946년 12월 21일 | ■쇼와 난카이 지진 | M8.0 | 5 | 최대 6.57m | |
1948년 6월 28일 | ■후쿠이 지진 | M7.1 | 6 | ||
1960년 5월 23일 | ■칠레 지진의 쓰나미 | M9.5 | 최대 6.1m(일본) | ||
1961년 8월 19일 | 기타미노 지진 | M7.0 | 4 | ||
1962년 4월 30일 | 미야기현 북부 지진 | M6.5 | 4 | ||
1963년 3월 27일 | 에치젠곶 해역 지진 | M6.9 | 5 | ||
1964년 6월 16일 | 니가타 지진 | M7.5 | 5 | 최대 6m | |
1966년 4월 5일 | 마츠시로 군발지진 | M5.4 | 5 | ||
1968년 2월 21일 | 에비노 지진 | M6.1 | 6 | ||
1968년 4월 1일 | 1968년 휴가나다 지진 | M7.5 | 5 | 최대 3m | |
1968년 5월 16일 | 1968년 도카치 해역 지진 | M7.9 | 5 | 최대 2.7m | |
1972년 12월 4일 | 1972년 12월 4일 하치조섬 동쪽 해역 지진 | M7.2 | 6 | 최대 50cm | |
1973년 6월 17일 | 1973년 6월 17일 네무로반도 해역 지진 | M7.4 | 5 | 최대 2.8m | |
1974년 5월 9일 | 1974년 이즈반도 해역 지진 | M6.9 | 5 | 12cm | |
1978년 1월 14일 | 1978년 이즈오시마 해역 지진 | M7.0 | 5 | 최대 70cm | |
1978년 6월 12일 | 1978년 미야기현 해역 지진 | M7.4 | 5 | 최대 37cm | |
1982년 3월 21일 | 쇼와 57년(1982년) 우라카와 해역 지진 | M7.1 | 6 | 최대 80cm | |
1983년 5월 26일 | ■쇼와 58년(1983년) 동해 중부 지진 | M7.7 | 5 | 최대 14m | |
1984년 9월 19일 | 쇼와 59년(1984년) 나가노현 서부 지진 | M6.8 | 4 | ||
1993년 1월 15일 | 헤이세이 5년(1993년) 구시로 해역 지진 | M7.5 | 6 | ||
1993년 7월 12일 | ■헤이세이 5년(1993년) 홋카이도 남서쪽 해역 지진 | M7.8 | 5 | 최대 16.8m | |
1994년 10월 4일 | 헤이세이 6년(1994년) 홋카이도 동쪽 해역 지진 | M8.2 | 6 | 최대 1.73m | |
1994년 12월 28일 | 헤이세이 6년(1994년) 산리쿠 먼바다 지진 | M7.6 | 6 | 최대 55cm | |
1995년 1월 17일 | ■헤이세이 7년(1995년) 효고현 남부 지진 (고베 대지진) | M7.3 | 7 | ||
2000년 10월 6일 | 헤이세이 12년(2000년) 돗토리현 서부 지진 | M7.3 | 6+ | ||
2001년 3월 24일 | 헤이세이 13년(2001년) 게이요 지진 | M6.7 | 6- | ||
2003년 9월 26일 | 헤이세이 15년(2003년) 도가치 해역 지진 | M8.0 | 6- | 최대 2.55m | |
2004년 10월 23일 | 헤이세이 16년(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 M6.8 | 7 | ||
2007년 3월 25일 | 헤이세이 19년(2007년) 노토반도 지진 | M6.9 | 6+ | 최대 20cm | |
2007년 7월 16일 | 헤이세이 19년(2007년) 니가타현 주에쓰 해역 지진 | M6.8 | 6+ | 최대 1m | |
2008년 6월 14일 | 헤이세이 20년(2008년) 이와테·미야기 내륙 지진 | M7.2 | 6+ | ||
2011년 3월 11일 | ■헤이세이 23년(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동일본 대지진) | M9.1 | 7 | 최대 40.1m | |
2016년 4월 16일 | ■헤이세이 28년(2016년) 구마모토 지진 | M7.3 | 7 | ||
2018년 9월 6일 | 헤이세이 30년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 지진 | M6.7 | 7 | ||
2024년 1월 1일 | ■레이와 6년 노토반도 지진 | M7.6 | 7 | 최대 5.9m | |
일본 주요 지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본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기록한 지진 또는 큰 피해가 발생하여 일본 기상청에서 명명한 지진이다. 지진의 명칭은 일본 기상청 기준이다.## ■ 사망자 100명 이상 / ■ 1000명 이상 / ■ 5000명 이상 / ■ 10000명 이상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발생연월일 | 명칭 | 지진 명칭 | 지진 규모 | |
1923년 9월 1일 | 간토 대진재 | 간토 지진 | M 7.9 | ||
1995년 1월 17일 | 한신·아와지 대진재 | 헤이세이 7년(1995년) 효고현 남부 지진 | M 7.3 | ||
2011년 3월 11일 | 동일본 대진재 | 헤이세이 23년(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 M 9.0 | ||
일본에서 진재(震災)는 지진과 그로인해 유발된 쓰나미, 화재, 폭발 등으로 발생한 피해를 말한다. 지진의 명칭은 일본 기상청에서 정하지만, 진재의 명칭은 일본 정부에서 정한다. |
헤이세이 7년 효고현 남부 지진 平成7年兵庫県南部地震 | |||
발생 (GMT+9) |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51.8초 [dday(1995-01-17)]일, [age(1995-01-17)]주년 | ||
진앙 | 일본 효고현 아와지 섬 북쪽 해역 (현 아와지시) | ||
진원 깊이 | 16km | ||
규모 | Mw 6.9 / Mj 7.3[1] | ||
최대 진도 | 7[2][3] 효고현 고베시, 아시야시, 니시노미야시, 다카라즈카시, 아와지시[4] | ||
MMI 진도 XI# ~ XII# | |||
쓰나미 여부 | 미발령[5] | ||
여진 | 최대 여진 : M 6.3, 진도 6약 진도 1 이상 최소 300회 | ||
사상자 | 사망자 6,434명 | ||
실종자 3명 | |||
부상자 43,792명 | |||
재산 피해 | 약 10조 엔(1995년 환율) | ||
각 도도부현의 최대진도 목록 | |||
7 | 효고현 | ||
5 | 시가현, 교토부 | ||
4 | 후쿠이현, 기후현, 미에현, 오사카부, 나라현, 와카야마현, 돗토리현, 오카야마현, 히로시마시, 도쿠시마현, 카가와현, 고치현 | ||
3 |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나가노현, 아이치현, 시마네현, 에히메현, 야마구치현, 오이타현 | ||
2 | 가나가와현, 니가타시, 야마나시, 시즈오카현, 사가현,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 ||
1 | 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사이타마, 치바현, 도쿄도, 후쿠오카시, 나가사키시, 가고시마현 |
[clearfix]
1. 개요
당시 NHK에 방영되었던 진도 정보 |
아사히 방송에 방영되었던 1월 17일 고베 및 주변 지역의 지진 피해 상황.[6][7] |
고화질 녹화본[8] |
1995년 1월 17일 일본 긴키 지방 일대에서 일어난 대지진.
일본 기상청에서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헤이세이 7년 효고현 남부 지진(平成7年兵庫県南部地震)>이다. 이는 지진현상 그 자체를 일컫는 명칭이며, 이 지진에 따른 재난(피해 등)에 대해 언론에서는 "한신-아와지 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라는 표현을 쓴다. 대한민국에는 고베 대지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9]
미국 지질조사국 기준 MMI 진도 XI, 국제지진센터(ISC) 보고서 기준 MMI 진도 XII라는 파멸적인 진동을 가한 지진이었다.
2. 피해
어느 개인이 지진 이후 캠코더로 직접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 |
한국 KBS의 당시 특집 다큐멘터리 |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10]와 교토[11]까지도 피해가 번졌기 때문에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라고도 하며 일본 지진 사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두 번째로 강력했던 규모 7.3, 진도 7[12]의 대지진이자 사망자 6,300여 명, 총 피해액 1,970억 달러[13]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입힌 지진 중 하나다. 이 지진으로 인해 잘 나가던 항구 고베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부채를 안고 가는 도시로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까지 고베는 홍콩과 함께 동아시아 해운의 양대 허브항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시설 포화와 이용료 상승의 와중에 대지진까지 터지면서 고베항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허브항의 지위를 한국의 부산항에 넘겨주고 말았다. 부산항이 세계 3위 물동량의 항구로 성장한 것도 이 지진 직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진 이후 늑장 대응 문제가 불거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본은 애초에 환태평양 조산대로 인해 지진이 빈번한 나라라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멕시코같은 개발도상국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지진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위아래로 흔들리는 직하형 지진[14] 특성상 진앙지가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웠다는 점이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날 밤 몇 차례의 미진이 관측되기는 했지만 예측하지는 못했는데 진앙지가 고베 남서쪽에 있는 아와지섬의 활성 단층이었고 아와지 섬의 단층과 고베의 단층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아와지 섬에서 일어난 지진이 단층을 타고 고베로 전달되어 대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거기다 고베는 400년 동안 지진이 없었던 곳이었다.[15]
내진설계 기준의 강화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한신고속도로 고베선 고가가 옆으로 쓰러진 이유는 내진기준이 강화되기 전의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한신고속도로의 고베 구간은 1969년 8월 1일에 완공되었는데 이때의 내진설계 기준은 고베 대지진과 같은 큰 규모의 지진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 때문에 고가도로를 지탱하는 기둥의 철근이 지면에서 1.5m 높이까지만 올라와 있었고 지진 때 이 철근이 끝나는 부분이 부러지듯이 꺾여서 무너졌다.
1981년 6월 1일부터 시행된 '신내진기준'이 적용되어 지어진 고베 건물들은 지진당시 70% 이상이 경미 혹은 무피해로 끝났다. 그에 반해, 재해를 입은 목조가옥의 98%는 구 내진기준으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 1월, 지진직후 붕괴된 구청사 사진과 수리후 구청사 사진 |
'신내진기준' 적용 유무로 가장 대비되는 건물이 고베시청사 건물의 피해인데 1957년에 지어진 고베시청 구청사는 당시 지진으로 6층 부분이 전체가 붕괴되어 내려앉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구청사 바로 옆 부지에 1989년 준공되어 1981년 '신내진기준'을 적용받은 30층 고층빌딩인 신청사[16]는 구조피해없이 멀쩡했다. 이후 구청사는 붕괴되어 내려 앉은 6층과 그 위층인 7,8층을 걷어내고 내진보강작업과 재정비후 1996년부터 5층건물로 계속 사용되다가 청사재건축을 위해 2020년 철거되었다.
당시 간사이 지방은 재일 한국-조선인만 35만 명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 수가 많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고베에는 8만 7천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 피해자도 많아 유학생, 재일동포 등이 100여 명 이상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당해 한국 입장에서도 큰 사건 중 하나였고 언론에서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였다.
당시 방송 보도를 보려면 KBS 및 MBC 방송분을 참고할 것. MBC의 경우 해당 보도에는 안 나오지만 당시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였던 정동영이 고베 현지로 급파되어 소식을 전했고, 당시 도쿄 특파원이 훗날 MBC 사장이 되는 김재철이었다. KBS 측에선 유균[17] 도쿄특파원, 박영환 기자 등이 현지 소식을 전했다.
2.1. 전통주택과 신축주택
사진 출처: 박문재, 「목조건축은 지진에 가장 안전한 건축물」
당시 사망자의 80%인 5,000여 명이 전통 목조주택에 깔려 사망했으며[18], 여기에 지진 발생 후 정전 복구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명피해가 더욱 늘어났는데 화재로 인해 사망한 시체가 너무 많아 한 보따리에 60여 명의 유골이 수습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지은 노후 재래식 목조주택과 달리 새로 지은 미국식 목조주택이나 복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 등은 무사한 등 피해 양상이 대조적이었다. 안국진이 펴낸 <일본 목조주택>의 139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1990년대 <목수 부족, 고베 지진 이후 목조주택 불신>
1995년에 발생한 한신 고베 대지진 직후, 재래목조주택의 붕괴로 인명 피해가 많았다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지진에 약했던 목조주택, 강한, 프리패브, 투바이포 주택」으로 보도되었다. 또한 일부 프리패브나 2x4주택메이커회사는 미디어, 광고전단, 책의 출판을 통해 주택메이커의 PR과 아울러 목수의 직감에 의지하여 건립되고 있는 재래목조주택의 시공을 비난했다. 이로 인해 재래목조주택의 불신이 확대되었으며, 재래목조주택 대부분을 건립하고 있는 공무점의 수주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 고베 대지진 직후, 재래목조주택의 붕괴로 인명 피해가 많았다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지진에 약했던 목조주택, 강한, 프리패브, 투바이포 주택」으로 보도되었다. 또한 일부 프리패브나 2x4주택메이커회사는 미디어, 광고전단, 책의 출판을 통해 주택메이커의 PR과 아울러 목수의 직감에 의지하여 건립되고 있는 재래목조주택의 시공을 비난했다. 이로 인해 재래목조주택의 불신이 확대되었으며, 재래목조주택 대부분을 건립하고 있는 공무점의 수주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지적한다. 이를 크게 나누면 첫째 측부의 보강자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19], 둘째 그 연결 부위를 보강해 주는 연결철물이 부족하다는 점, 셋째 하중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지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되지 못한 점, 넷째 그런데도 지붕에 흙과 기와를 올려 하중이 높다는 점, 다섯째 지붕의 흙이나 벽체의 흙벽미장이 목재 뼈대에 스며들어 목재의 부식을 유도한다는 점 등이다. 흙벽구조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튀어 다치는 것은 덤이다.
당시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경우 철근과 콘크리트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일체형 구조였기 때문에 건물이 분해되거나 붕괴되어 사람이 압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이는 부재간 연결철물의 사용이 많았던 미국식 목조주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못이나 철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장부에 홈을 파서 짜맞춤 방식으로 구성된 전통가옥의 경우 큰 지진에 못이나 철물없이 연결된 부재가 분리되어 통째로 무너지거나 압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같은 전통 방식이더라도 일본 건축기준법이 개정된 1981~1982년 이후 지어진 주택은 피해가 적고 이전에 지어진 주택은 피해가 많았다. 개정된 건축기준법의 내진 기준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법이 개정 혹은 시행될 때에는 시행 이후부터 효력을 가지므로 법 시행 전에 지어진 건축물들, 특히 수백 년이 넘은 에도 시대 건물들까지는 규제가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내진설계나 건축 기준이 더욱 강화되었고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안전성을 확인하면서 설계가 이루어졌으며 목재간 연결부위 철물 사용빈도가 극도로 높아지고#1#2 지붕에 기와시공을 위한 흙미장이 폐기되었으며 방수지를 이용한 건식 시공이 대세를 이루었다. 게다가 전통 주택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기와와 지붕 위의 흙미장의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점이 유력하게 지적되면서 최소한 고베 지역만은 지붕에 기와를 얹는 일이 극도로 줄어들었다.
3. 지진 발생 후
육상자위대 인원과 장비가 대거 투입돼 구조 및 복구를 지원하고 전투식량도 이재민들에게 불출했다. 해상자위대 또한 호위함들을 보내 고베항에 입항시켜 차출된 승조원들이 육자대를 지원하고 호위함의 조수기와 취사 시설, 보일러, 목욕 시설을 활용한 구조대 및 이재민에 대한 지원을 했다. 함내 목욕 시설은 위생 문제 해결 외에 전투식량을 데우는 것에도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세계 구호 단체들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는 공식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하였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일본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위로전을 보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해당 재난을 추모하는 뜻에서 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인 1월 18일 수요일에 '수요집회'를 중단했다.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 아즈마 신이치로가 1995년 초등학교 졸업문집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때문에 지진의 초동 대응이 늦어진 것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20]
나카무라 에이치 일본 참의원 의원은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관동대학살마냥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고 망언해 물의를 빚었으며 이로 인해 민단과 한국특파원 회견에까지 나가 사죄를 표해야 했다. (KBS, MBC) 이후 2016년 구마모토 지진 직후에도 관동대학살 당시처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21]
고베 대지진 직후 닛케이 지수는 급락했는데 여기에 연동된 닛케이 225 지수 선물 매수포지션에 옵션 양매도를 취한 닉 리슨도 이 대지진으로 인해 망하고 230년 역사를 지닌 영국의 베어링 은행을 파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지진이 엔화 가치를 급등시켰는데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엔화 매입과 재건작업을 위한 엔화수요 급증 등이 원인으로써 미국 달러에 대해 20% 급등, 즉 80엔~70엔대로 진입하였으며 이후 일본 정부가 개입하여 서서히 장기적으로 엔화 약세로 진입하였다. 문제는, 플라자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엔고가 유지되어 1995년까지 슈퍼 엔고상태였던 아시아 무역시장에 고베 대지진이 터지자, 일본은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에게 엔저 전환을 위한 외환시장 개입 허용 요청을 하고 마침 금리인상기였던 미국이 이를 들어주면서, 이미 이전부터 자국 대출금리보다 낮은 저금리 엔화,달러화 채권을 엔고만 믿고 잔뜩 투자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10년만에 끝난 엔고에서 엔저 전환으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 폭탄을 얻어맞고, 금융시장이 개방되어있던 태국은 그 혼란을 노린 조지 소로스등 환투기 세력들이 달러 페그 고정환율제로 묶여있던 바트화를 공격해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하고, 태국 정부는 결국 IMF행을 선택하게 된다.
당연히 태국의 붕괴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단기외채 위기로 이어졌고 월가는 아시아에서 도망쳐야한다는 레포트를 계속 내고 있었다. 문제는 똑같이 장기 엔고를 낙관하고 있었으며, 태국과는 달리 금융시장이 폐쇄되어 있어 해외 헤지펀드들의 환치기공격을 받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던 한국 또한 알고보니 약달러,엔고시절 미국,일본의 저금리를 믿고 종금사들이 달러,엔화 단기 차입후 원화로 환전해 국내 기업에 대출하는 돈놀이를 하고 있었고, 이 종금사들이 고금리 전환과 엔저전환으로 모두 무너지면서 어마어마한 경상수지 적자가 들이닥쳤고, 한보부터 시작해 기아자동차까지 줄줄이 무너지면서 위기가 현실화되었으며, 당시 한국의 고정환율제를 조정하기 어려울 만큼 미국와 외교마찰이 심각했던[22] 상황에서 일본도 지원을 거절해 일본 자금까지 빠져나가면서 한국도 결국 1997년 외환 위기가 현실화 되고 만다. 결국 고베 대지진은 닛케이 폭락으로 인한 베어링 은행 파산은 물론이고, 2년뒤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전체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트리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 지진으로 고베항의 기반시설이 무너지면서 환적하물들이 대거 이탈하여 부산항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23]
이 지진 이후 소니가 비상충전기능이 있는 라디오인 ICF-B200[24](2016년 기준 ICF-B09의 전신격)을 1995년에 발매했다는 후문이 있다.
4. 현재
고베 대지진 당시의 모습을 남겨 놓은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 파크[25] |
고베에 위치한 인간과 방재미래센터[26][27] |
당시 지진의 규모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28] |
고베 대지진 이후 재산을 잃은 주민들은 몇 년 동안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피해 보상금을 완전히 받지 못한 주민들도 있다.
지진에서 살아남기를 집필한 작가와 만화를 그린 문정후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실제로 해당 책에도 이 지진 당시 촬영한 사진이 있다.
5. 기타
- 이후에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함께 버블 붕괴로 골골거리던 일본을 확실하게 끝장내 버린 지진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5년까지 일본은 꽤나 안정적이었고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결정타를 입었다. 지진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 외딴 섬도 아니고 동아시아 해운의 양대 허브항 중 한곳인 고베항 근처였고 대도시 한복판이었으니, 일본 정부에게 이걸 복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당시 기준 약 10조엔 가량의 손실이 일어났다. 여기에 2개월 후 옴진리교가 일본의 정부기관을 마비시키기 위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며 더 충격이 컸다.
- 당시 고베를 연고지로 삼았던 일본프로야구단 오릭스 블루웨이브(現 오릭스 버팔로즈)는 이 해의 대지진으로 인해 상처 입은 고베 시민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팀워크를 튼튼하게 다짐과 동시에 힘내라 고베(がんばろうKOB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1995년 시즌을 맞이했고 그 결과는 이 해 연고이전 이래 첫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하고[29]에 이어 이듬해엔 리그 연패에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이뤄냈다.
- 1995년 12월에 시작돼 매년 12월에 열리는 전구를 이용하는 조명 건축물 축제인 고베 루미나리에는 이 지진으로 피해를 겪은 고베시에 부흥의 등을 켜자는 의미의 축제다.
- 1996년 경에 관련 봄버맨 OVA가 나왔다.
- 이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효고현 아시야시 출신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31] 이 참사에 충격을 받아 소설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집필했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던 초기 작풍이 사회적 문제에 중점을 둔 작풍으로 변한 데도 이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 1923년의 관동 대지진과 1995년의 고베 대지진 둘 다 겪은 할머니가 있다.
- 규모가 차이가 있기는 해도 비슷한 직하형 지진이 지진에 대한 방비가 전혀 없는 곳에서 일어났을 때 어떤 헬게이트가 열리는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해 본 사람들이 안다고, 당시 일본인들이 상당히 안타깝게 봤다고 한다.
- M 7.3, 최대진도 7의 지진은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는 일본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는 격진이었기 때문에 이 지진을 능가하는 지진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그러나 16년 뒤인 2011년에 이 지진을 완벽히 압도하는 M 9.1, 최대진도 7의 도호쿠 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했다. 지진 피해의 성격은 고베 때와는 다른데 고베 대지진은 지진 자체가 직접 도시를 강타해서 피해가 생겼다면 도호쿠 대지진은 1차 천재지변인 지진동보다는 그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2차 천재지변인 쓰나미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이 쓰나미로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겨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의 초대형 재해가 되고 말았다.
- 2016년에는 비슷한 규모의 구마모토 대지진이 규슈 지역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 지진과 도호쿠 대지진을 당한 후 대비를 더욱 철저하게 했는지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 간사이 지방에 위치한 여러 게임 회사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코나미의 명작 메탈기어 솔리드는 원래 3DO 플랫폼에서 '메탈기어 3'라는 이름으로 출시될 예정이었다.[32] 하지만 이를 준비하다가 이 지진으로 인해 코나미 본사가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결국 발매일을 늦췄다고 했다.
- 고베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교토에 위치한 닌텐도는 울트라 64의 발매를 한참 미루고 말았고[33] 그 과정에서 울트라 64로 발매 예정이었던 여러 게임들의 발매 여부에 변동이 생기거나 내용이 수정되기도 했다.
- 캡콤의 경우 스트리트 파이터 3의 그래픽을 원래 EX와 같이 3D로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지진으로 인한 3D 데이터 유실 때문에 2D 게임으로 다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소로스[34]의 퀀텀펀드가 엔저에 배팅했다가 멕시코 도산 위기와 고베 대지진 때문에 미국이 저금리 정책으로 선회하였고 재해복구를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돈이 쏠리면서 손해를 봤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다르다. 조지 소로스는 엔저 배팅이 틀어질 것에 대비하여 일본 기업들에게 녹아웃 옵션이라는 환헤징 파생상품을 매도해뒀기 때문. 달러당 95엔 이하로 엔-달러 환율이 내려가면 옵션을 매입한 일본 기업들의 권리는 모조리 소멸되고 환차익은 전부 퀀텀펀드가 가져가는 구조여서 소로스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그를 가리켜 '요카이(妖怪) 소로스'라는 증오스러운 별명으로 불렀다고.
- 지진으로 인해 일본 경마 전반기 그랑프리인 G1 다카라즈카 기념이 한신 경마장의 지진 피해로 인해 정상 개최가 어려워지자 교토경마장에서 개최됐다. 거기서 인기투표 1위인 라이스 샤워는 사실상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됐다.
- 큐티하니 THE LIVE에서 사오토메 미키 역과 특명전대 고버스터즈에서 에스케이프를 연기한 효고현 고베시 출신 배우인 미사키 아야메가 이 사건을 겪었다. 그녀는 7살때인 1995년 1월 당시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집이 대파를 당하는 재해를 입어서 약 1년동안이나 피난처에서 생활을 하였다. 1년간 지옥같은 피난생활을 했던 경험으로 인해서 조심성이 강한 성격이 되었고 이 때문에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 이후 대피소나 가설주택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이재민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발언을 하는 한편 계속되는 여진 때마다 지진에 대한 공포감과 무서움을 각종 예능방송에서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
버블 붕괴(1990년) 이전에 비해 극도로 음침해진 90년대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설명할 때 옴진리교 사건과 함께 빠지지 않는 사건.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자유롭지 않다. 한국으로 치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급의 트라우마였다고 보면 된다.-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드라마 화려한 일족은 고베를 거점으로 한 기업가의 이야기로 당연히 고베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상당수 당시 건축물이 손상당한 까닭에 중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했다고 한다.
- 아즈망가 대왕의 오사카는 이 지진의 피해자라는 추측이 있다.
- 투하트의 호시나 토모코의 과거와도 관련이 있다.
- 알바 뛰는 마왕님!의 스즈키 리카는 이 지진을 겪었다. 중소기업 공장이 모여 있는 피해가 큰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도쿄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 고향이 고베인 것만 알면 그것밖에 화제가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고베 대지진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기에 그게 귀찮아서 사투리를 표준어로 교정했다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같은 반 아이 둘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태연한 얼굴로 "지진 어땠어?"라고 묻는 놈들에겐 짜증이 난다고 한다. 반면 유사 에미는 본인이 고베 사람인 걸 알고도 지진에 관해 묻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좋다고. 이 내용은 2011년 2월 10일 발매된 1권에서 나온 것인데 공교롭게도 한 달 뒤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나 버렸다...[35]
- 기시 유스케의 데뷔작인 13번째 인격 ISOLA의 시간대가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다. 13인격의 여고생인 치히로도 그 사건의 피해자.
- 그러나 죄인은 용과 춤춘다의 작가인 아사이 라보도 당시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끔찍한 피해를 겪었다고 하며 작가 본인의 어둡디 어두운 작품관이 이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하다.
- 반딧불이의 묘에 등장했던 니테코 연못도 이 지진으로 훼손되어 현재 모습은 지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 게임과 관련해서 KOF 96은 미완성 부분이 많으며 데이터상에만 있는 필살기들이 상당히 많다. 이를 두고 고베 대지진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루머로 밝혀졌다.
-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지고 웃음을 잃게 되어 웃음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푸콘 가족을 제작하였다.[36]
-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환야의 초반부에도 이 사건이 나온다.
- 히라사와 스스무의 음악 'サイレン *Siren*'은 이 사건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들어보기
- 22년 후의 고백에 나오는 형사의 여동생과 남자친구가 고베 대지진의 생존자다. 여동생은 간호사였는데 지진이 발생하자 무서워서 식탁 아래[37]에서 나오지 못했고 선배 간호사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사상자들의 구조에 나서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 EZ2DJ의 수록곡인 Quake in Kyoto도 고베 대지진을 테마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술했다시피 이 지진이 교토까지 영향을 끼쳐서 이런 제목을 지었다는 추측이 있다.
- 우자키 양은 놀고 싶어!의 작가인 타케는 고베 대지진의 생존자라고 한다. 당시 잔해 더미 밑에 깔려 있었다가 구호단체에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를 느껴 일본 적십자사와 콜라보하기도 했다.
-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작가 타니가와 나가루도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신으로, 일본 쪽 문학비평에서는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폐쇄공간과 하루히의 심리묘사가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도호쿠 대지진에 비해서 고베 대지진은 상대적으로 효고현 내부의 재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는데 특히 오사카가 지진 당일 오후 바로 시가지 기능이 복구된 것을 두고 분노한 효고현민이 많았다고. 작중 스즈미야 하루히는 군중 속의 고독감과 허무함을 느끼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이상현상을 찾는 묘사가 많은데 하루히가 효고현민을 대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존재한다.
- 고베신문도 당시 산노미야 본사가 지진으로 크게 피해를 입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할 뻔했으나 교토신문의 지원으로 휴간 없이 고베 지역의 피해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후지 테레비에서 제작한 드라마《고베신문의 7일간》은 이 신문사의 임직원들이 보고 겪은 것을 재현한 것이다.
- 지팡구에도 외전격으로 잠시 나오며 해자대 호위함이 인원을 보내 구조와 복구를 도울 뿐 아니라 함의 조수기와 보일러를 이용하여 육상자위대와 이재민들의 취사 및 목욕 지원 등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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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8e96> 1960. 2. 29. | M 5.8 | 1960년 아가디르 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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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6. 29. | M 7.3 | 1975년 속초 해역 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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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8. 16. | M 8.0 | 1976년 필리핀 모로 만 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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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2. 7. | M 6.8 | 아르메니아 대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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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7. 16. | M 7.8 |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 | ||||
1992. 4. 13. | M 5.8 | 1992년 루르몬트 지진 | ||||
1993. 7. 12. | M 7.8 | 1993년 홋카이도 해역 지진 | ||||
1994. 4. 22. | M 5.3 | 1994년 울산 해역 지진 | ||||
1994. 7. 26. | M 5.9 | 1994년 홍도 해역 지진 | ||||
1994. 10. 4. | M 8.2 | 1994년 홋카이도 동방 해역 지진 | ||||
1995. 1. 17. | M 7.3 | 효고현 남부 지진 | ||||
1995. 7. 24. | M 5.3 | 1995년 백령도 해역 지진 | ||||
1996. 1. 24. | M 4.8 | 1996년 동해 해역 지진 | ||||
1996. 12. 13. | M 5.6 | 1996년 영월 지진 | ||||
1997. 3. 27. | M 6.6 | 1997년 가고시마현 사쓰마 지방 지진 | ||||
1997. 5. 13. | M 6.4 | |||||
1997. 6. 26. | M 5.0 | 1997년 경주 지진 | ||||
1999. 1. 25. | M 6.2 | 1999년 콜롬비아 지진 | ||||
1999. 8. 17. | M 7.6 |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 ||||
1999. 9. 21. | M 7.3 | 921 대지진 | ||||
2000. 6. 17. ~21. | M 6.5 | 아이슬란드 지진 | ||||
2000. 6. 6. ~9. 28. | ~ M 6.5 | 이즈 제도 군발지진(2000년 7월)A | ||||
2000. 10. 6. | M 7.3 | 2000년 돗토리 지진 | ||||
A : 해당 군발지진의 시작일은 위의 아이슬란드 지진보다 먼저이지만, 가장 큰 지진인 이 문서에 집중적으로 서술된 규모 6.5의 지진은 2000년 7월 1일에 발생함을 고려하여 2000년 7월 1일 지진을 본진으로 분류하여 위의 문서인 아이슬란드 지진 뒤에 기록했다. |
[1] 속보 당시 M 7.2였으나 사후해석으로 상향 조정되었다.[2] 지진 발생 당시 진도 6으로 관측했으며 사후해석에서 7로 격상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당시에는 최대진도 5와 6의 강약 세부 등급이 없었으며 해당 세부 등급이 신설된 것은 고베 지진 이듬해인 1996년의 일이다.[3] 계측진도 6.6[4] 구 츠나군 호쿠단정, 이치노미야정, 츠나정[5] 실제로는 쓰나미 주의보급인 34cm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6] 영상 원출처가 아사히방송인데 2020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 25주기를 맞아 테레비 아사히 공식 뉴스채널에 아사히 방송이 영상을 제공했다.[7] 동영상의 썸네일이기도 한 고가도로가 무너진 모습은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할 때까지 일본의 대지진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이 지진의 임팩트는 매우 강렬했다.[8] 하이비전 방송용으로 제작되었으며 당시 현장을 기록한 유일한 HD 자료로 당시 피해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냈다.[9] 오히려 일본에서는 고베 대지진이라고 하면 잘 못알아듣고 한신-아와지 지진이라고 하면 알아듣는다.[10] 오사카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베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최대진도 4를 기록했다.[11] 이쪽은 오사카보다 더 강한 최대진도 5를 기록했다.[12] 1949년에 진도 7이 새로 설정된 후 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격진이다.[13] 1995년 기준. 2024년 환율 적용 시 3,960억 달러로 동일본 대지진 다음으로 가장 피해액이 높은 자연재해다.# 물론 이는 당시 일본 GDP(5.546조 달러)의 3.6%에 달하는 거액이다.[14] 판과 판끼리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활성단층을 따라 일어나는 지진. 일본의 경우 판이 위치한 곳은 도심과 먼 바다이며(단층은 내륙) 진원지가 지표면으로부터 20km 미만의 얕은 곳에 위치한다.[15] 아무리 지진이 잦은 일본일지라도 지역별로 지진 빈도가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도쿄에 사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두번 꼴로 경미한 지진을 느끼면서 살지만 오사카에 사는 사람은 일년에 한 번 겪을까 말까이다. 당장 수도직하지진 문서를 보면 100년 전후로 규모 7과 8짜리가 번갈아가며 간토를 뒤흔들지만 오사카는 2018년의 규모 5.5~6.1의 지진이 400여년 만에 발생한 최대 규모 지진이라고 한다. 이는 도쿄와 오사카의 판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 두 도시는 위치한 판이 다르다.(도쿄는 태평양판, 필리핀판, 유라시아판, 오호츠크판이 위치하고 있고 오사카는 아무르판, 필리핀판이 위치해 있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전국이 지진 다발지대이자 지진 위험지대지만 지역마다 그 위험성이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진이 일어난 고베는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지진에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발생 시간이 오전 5시 46분, 즉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대라서 피해가 더더욱 커지는 것에 한 몫 했다.[16] 사진 속 구청사 뒤에 있는 고층건물이 고베시청 신청사건물이다.[17] 1973년 중앙일보에 입사 후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1985년부터 KBS로 옮겨 도쿄특파원 외에 보도국 외신부 차장, 정치부 차장, 해설주간, <일요진단> MC, 보도국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부터 3년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원장을 역임했다.(중앙일보 기사)[18] 하필 새벽에 지진이 일어나서 잠을 자다가 그대로 깔려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진 이후 고베에 지어진 인간과 방재 미래센터에서도 이 사례를 인용해서 참상을 설명했다.[19] 같은 목조주택의 팀버프레임에 브레이스가 존재하고 경량목 구조의 합판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20] 어느 정도였냐면 마치 무라야마 총리에게 복수를 하려는 듯한 수준의 글이었다.[21] 악플이라고 보면 된다. 범인도 사회 부적응층이었고 우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세대는 21세기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22] 원인은 김일성 사망 후 지속적으로 생겨난 북한 핵문제 압박 때문이다. 여기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연이어 터진 로버트 김 간첩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갈등이 크게 악화되었다.[23] 다만 이후 중국 항구들의 물동량 취급이 급성장하면서 부산항의 물동량 순위는 4~5위로 내려왔다.[24] FM/TV 76.0 ~ 90.0MHz/1 ~ 3CH(90 ~ 108MHz), MW 530 ~ 1602kHz 다이얼 방식 튜닝[25] 神戸港震災メモリアルパーク[26] 人と防災未来センター, 정식명칭은 "한신 • 아와지 대지진 기념 인간과 방재미래센터(阪神・淡路大震災記念 人と防災未来センター)"이다.[27] 당시 피해 상황을 보려면 위의 장소보다는 이곳이 좀 볼 만하다. 근처에 나다역, 이와야역, 한신 카스가노미치역이 있지만 거리는 조금 된다.[28] 지진 이후 폐허가 된 고베 시내를 재현한 것이 있으며 지진 당시 상황과 복구 과정 등을 20여 분의 다큐멘터리로 상영하고 있다. 다큐의 경우 자막은 자국어(일본어)지만 한국어 음성을 지원한다. 요청하면 음성가이드 기기를 따로 갖다 준다.[29] 전신이었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1984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래 11년 만이자 오릭스 매각 이후 첫 우승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시리즈에선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퇴하며 우승에 실패했다.[30] 병행하는 JR 고베선보다 한 분기 가까이 늦게 전구간이 복구되었다. 당연히 그동안 JR 서일본은 반사이익을 보게 되었다.[31] 다만 태어난 곳은 교토이지만 본인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아시야시에서 자랐다고 주로 이야기한다.[32] 코지마 히데오는 폴리스너츠 이식에 이어서 메탈기어 시리즈도 3DO로 이식하려고 했고 프로모션 영상까지 만들어 둔 상태였다.[33] 이 과정에서 닌텐도는 세가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에게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무려 2년이나 선점당해 의도치 않은 공백기를 가지고 말았다.[34] 정확히는 그와 그의 휘하에 있던 스탠리 드러켄밀러였다.[35] 도호쿠 대지진과 관련해 해당 소설의 작가가 후기에서 해당 소재를 다루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지진이라는 것이 주요하게 언급되는 내용 중 하나였으나 도호쿠 대지진이 워낙 큰 사건이었던 데다 너무 최근의 사건이었던지라...[36] 이후 16년 뒤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웃음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그 다음 해에 스마일 프리큐어!가 만들어지면서 되풀이되었다.[37] 실제 지진 대피법 중의 하나로 책상 아래로 들어가서 낙하물을 방어한다.